[이회창의 삶과 세상 이야기] 25번째: 아내의 눈물과 어떤 뇌물
평생 검사로, 변호사로 사신 아버님께서 늘 강조하는 말씀이 있었다.
법관의 가족들은 청렴해야 한다. 사건 관계자나 그 가족으로부터는 금품은 물론 어떤 호의도 받아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매사 공평무사하고 엄격한 처신을 당부하셨다. 그러기에 엄격한 처신이 요구되는 법
관의 가족들은 절로 사회활동 범위가 제한되기도 한다. 주변사람이 호의를 표시해도 혹시 하는 생각에
선뜻 그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법관의 가족들의 심정일 것이다.
첫아이 정연이가 막 태어나던 해였다. 당시는 고등학교 입시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지 유출사건이 터졌다. 다행히 금세 용의자가 잡히고 구속되었다.
그 용의자는 시험지를 인쇄한 인쇄소 인쇄공이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재판받
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일이 끝나 집으로 가니 전병 과자가 눈에 띄는 게 아니겠는가.
별 뜻 없이 “웬 전병 과자야?” 하며 출출하던 차에 한 개를 집어먹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주 어렵게 입을 떼었다.
“저…… 저…… 인쇄공…… 왜 있잖아요. 재판중인 그 시험지 유출사건의 용의자……. 그 부인이 사온
건데요.”
나는 순간 발끈했다.
법관의 아내이자 법관의 딸인 아내는 그런 점에서 철두철미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평소 재판에 관련된
사람의 것이면 달걀 한 줄도 받지 않던 아내가 아니던가.
“아니, 그럼 뇌물을 받았다는 거요?”
나는 당장 돌려주라고 화를 냈다.
그러자 아내는 낮에 그 부인이 찾아왔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 추운 엄동설한에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시장에서 파는 전병과자를 봉지에 싸들고 우리집으로 찾
아왔어요. 이렇게 가파른 언덕을 아이를 업고 찾아온 부인을 어떻게 매정하게 내쫓아요? 한숨이라도
돌리라고 들어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툇마루에 올라서자마자 그 부인이 울음을 터뜨리는
거예요. 추위에 가장이 구속되고 갓난아이들과 노부모, 동생들과 그 많은 식구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말예요. 부인이 눈물을 펑펑 쏟으니까 등에 업혀 있던 갓난아이도 덩달아 우는데 보니까
얼마나 밖에서 추위에 떨었던지 아이의 볼이 빨갛게 텄더라구요. 나도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고, 그래
서 그 부인이 사온 전병 과자 봉지를 풀어놓고 손에 쥐어주면서 위로하다 보니 그만……”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한 심정이 되었다.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야기는 재판을 통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도
듣지 않는다는 내 원칙이 순간 허물어진 것이다. 그날 밤 곰곰이 혼자 생각에 잠겼다. 원칙이 허물어졌
다는 속상함보다 아내의 뜨거운 눈물의 의미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법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대면서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법관의 직무이던가. 법관은 세상에 측
은지심을 가지고 사건의 전말과 동시에 그 내면의 정황을 눈여겨봐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실제 재판에서 다뤄지는 일들 중에는 돈 많은 사람들의 돈 다툼도 있지만 소시민들의 애환이 담긴 재
판들이 더 많은 법이다. 복잡 미묘한 세상사가 개입된 재판정에서 법관은 어떤 눈을 가져야 할까?
공평하고 엄중한 법의 잣대를 지녀야 한다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세상사의 어려움을 꿰
뚫어보는 깊은 이해의 눈도 가져야 함을 느끼게 되었다. 법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한을 심어주지 않기 위해, 자유롭게 하기 위해,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날 나는 오래오래 기도를 했던 것 같다.
[출처] [이회창의 삶과 세상 이야기] 25번째: 아내의 눈물과 어떤 뇌물|작성자 이회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