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앉은 자세에서는 각도가 달라서 그가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래서 그녀도 방심한 채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준태가 누워서 보는 각도에서 여자의 스커트가 들여다보이기 시작했을 때 여기까지 보고 있던 준태는 어느 순간 눈을 돌렸다
틈만 나면 이렇게 훔쳐보는 게 준태의 오래된 악취미였다.
서울에 있을 때 자취방을 이사한 그 건물에서도 그랬다. 준태는 좁은 방에서 틀어박혀만 살다가 구치소에 잠시 갇혀 있은 이후로는 더욱 좁은 데서 생활하기를 꺼리는 폐쇄공포증 경향이 생겨서 틈만 나면 사방이 내려다보이는 옥상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다.
학기말 고사가 시작되어 거의 일 학기가 끝나갈 무렵 특별히 만나 어울릴 사람도 없고, 어디 놀러갈 데도 마땅치 않아 그저 집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그 집은 건물주가 화초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인지 옥상에도 화단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 옥상에 들어가면 문 왼켠은 못질한 막대기를 세워놓고 나일론줄을 매서 빨래를 너는 장소가 있고 오른켠에는 벽돌을 허리 높이로 쌓고 상당한 양의 흙을 채워서 만든 화단과 장독대가 있었다.
이 옥상화단에는 회양목과 싸리나무 등 정원수 몇그루가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준태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끔 이 화단 옆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며 나뭇가지 틈새로 옆 건물이나 단층집 마당들을 휘휘 내려다보곤 했다.
그날도 아랫층 쪽에 눈을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불이 켜졌다.
옆건물 3층의 마루 옆에 있는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으로 한 여성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준태가 머리를 깊이 들이밀려고 하자 회양목의 잔가지들이 얼굴을 할퀴어 따가왔다.
그리고 보통 방과는 좀 다르게 어두운 붉은색 알전구 불빛이 새어나왔고 그녀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와 머리에 질끈 동여맨 수건으로 보아 거기가 욕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노트 크기 만한 좁다란 창문으로 여자의 몸이 부분적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옥상 화단에서 얼기설기 나뭇가지가 울타리를 이루어 옆 건물 창문에서 새어나온 욕실의 붉은 조명은 마치 커튼을 투과한 오후의 햇빛처럼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럴 때는 황학동에서 파는 싸구려 쌍안경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고 아쉬웠다.
여자의 얼굴 쪽은 창문 위의 벽으로 가려져 어깨 아래 쪽의 몸만 보였고 준태 쪽은 어두워서 이쪽의 모습을 들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준태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바라보았다.
샤워 물줄기가 점점히 흩뿌려지기 시작하더니 팔과 허리를 움직여 온몸에 비누질을 하면서 다시 샤워를 한다.
준태는 그녀가 온몸의 물기를 닦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반신은 여전히 땀방울처럼 물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왠지 준태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땀도 그녀의 목욕과 같은 리듬을 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때 옥상 문이 열리며 슬리퍼 끄는 소리가 다가왔다. 이층 옆칸에 사는 부인 같았다. 어둠 속에서 장독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이쪽으로 오다 말고 장독대 언저리에서 머뭇거렸다. 준태는 화단 쪽을 향해 서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화단 테두리에 얹은 팔꿈치에 체중을 실은 채 재빨리 옷매무새를 추스렸다.
누구 있어요, 거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예 저 이층 학생이예요.
예상대로 그녀는 아래층 옆 칸에 사는 젊은 부인이었다. 츄리닝 바람에 슬리퍼를 신고서 큰 플라스틱 바구니를 옆에 끼고 있었다.
장독대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걷어 탁탁, 털어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다행히 해질녘의 어스름한 주홍빛과 화단의 나무들이 준태의 모습을 가려주었길래 망정이지 대낮 같았으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옷매무새를 고치며 흘깃 내려다본 옆건물에서는 이쪽의 사태와 무관하게 욕실의 불이 꺼졌고 목욕하던 여자는 마루를 지나 낮시간 내내 커튼이 쳐져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형광등이 켜진 방에는 한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새로 자췻방을 옮긴 건물 옥상에서 이렇게 훔쳐보던 장면이 떠올라 더 이상 태평하게 엿보기에 탐닉하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서 남의 여자나 훔쳐보고 있다는 일종의 자조섞인 우울한 기분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텐트 천장을 바라보며 옆 텐트 여자로부터 촉발된 서울에서 겪은 짧은 기억을 더듬던 준태가 주위를 둘러보니 고추장 찌개를 끓이던 여자는 이미 등산용 버너 앞에서 보이지 않았다. 옆 텐트 속에서 그녀와 동행인 듯한 사내의 목소리만 두런두런 들려왔다.
"누워만 있지 말고 밖에도 좀 나갔다 오자구."
돌아보니 종수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텐트 문을 들치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것봐! 석유도 아직 안 사다 놨네."
준태는 베고 누웠던 팔베개를 펴고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짐을 메고 와서 그런지 너무 오래 누워 있다 일어나서 그런지 어깨쭉지가 욱신거렸다.
잡화상에 석유를 사러갔을 때 주인 남자는 어디서 본 듯한 사내였다. 누군가 생각해보니 아까 해변에서 인공호흡 등의 응급처치를 해서 가까스로 살려낸 여자를 둘러싸고 서있던 무리 중에서 맨 앞에 있던 사내였다.
그 뒷일이 궁금해서 준태는 석유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대요?"
"그 사람 인생 끝났습니다. 신발 한 짝 찾다가, 에-이 …… "
가게 주인은 석유를 병에 담아주면서 넋두리하듯 말했다. 그 대답을 들으니 준태도 기분이 음산해졌다. 석유를 들고 걸어오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탄광이 있는지 석탄 먼지 같은 게 쌓여 눈에 들어오는 것은 회색빛 모래사장뿐이었다. 그래 동해안에 하고많은 해수욕장을 놔두고 하필 이런 폐광 같은 데를 오게 됐나 후회막심이었다.
이리저리 거닐다가 우연히 수상안전요원들이 기거하는 본부의 막사 근처를 지나치면서 보니 아직도 음산한 분위기만 깔려 있었다. 가게에서 텐트를 향해 반쯤 걸어왔을 때 누가 뒤에서 준태를 불렀다.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멈춰서서 자세히 보니 잠시 몸담았던 써클 모임에서 만나 몇 번 어울렸던 성진이라는 고교 후배였다. 그때 아는 선배가 써클 후배들을 이끌고 이쪽 해수욕장으로 온다는 말이 생각났다.
"어, 그래 너 D선배와 같이 온 모양이구나. 선배는 어딨어?"
"선배는 저쪽에 있고 난 친구랑 있어요."
"그래? 그런데 너 혹시 아까 그 사고 봤어?"
"그 익사한 사람 말예요? 듣고 보니 참 어이없던데요. 신발 한짝 때문에."
"그래……, 하긴. 지금 있는 데가 어디야?"
"우리 텐트는 이쪽이에요."
"나도 그쪽인데."
준태는 잠시 성진의 텐트에 들러 같이 온 친구와 수인사를 했다. 일행에 서있는 여자를 보니 아까 백사장 초입에서 스쳤던 여자였다. 그는 기억했다. 익사사고 현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깔깔거리며 장난을 치던 야한 수영복의 주인공이었지, 참. 저 여자.
"멋진 여학생이 있던데 남자도 아는 친구야?"
"말도 말아요. 친구자식이 끼워 달라고 사정해서 같이 오게 된 여자앤데…."
"근데 왜?"
"자식들 저희끼리만 놀고 자꾸 따돌리는데 사람 미치겠더라구요. 기분 같아서는 주먹을 한방씩 안겨주고 쫓아 버리고 싶지만 여자한테 그럴 수도 없고."
준태는 이렇게 말하는 성진에게서 비슷한 입장에 놓인 사람들끼리 갖게 되는 친근감을 느끼면서 오랜만에 마음을 터놓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D선배를 만나서도 건성 인사만 하고는 성진과 계속 얘기를 나누었다. 말끝에 준태는 성진더러 우리가 산 쪽으로 자리를 한번 옮기려는데 같이 안 가겠냐고 물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가게 되면 설악산 기슭의 오색약수터 쪽으로 장소를 옮기게 될 거라는 말을 덧붙여 두었다. 그러자 종수도 말했다.
"그래 산이 낫지. 기왕 떠나온 휴가인데 나머지 며칠만이라도 가서 산 중턱에 텐트 치고 한 이틀 푹 쉬다가 서울 가자구. 왜 그런지 이 해수욕장에서는 놀 기분이 영 나질 않아. 썰렁하기만 하고 말야."
성진이만 데리고 가려 했으나 그의 일행이라는 여자애가 성진 친구의 팔을 톡 치며 말했다.
"어머, 나도 설악산에 가 보고 싶어."
몇 마디 이야기하는 사이 그 친구라는 애도 같이 가니 어쩌니 얘기가 나왔고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얼떨결에 준태네하고 같이 합류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거긴 좋습니까?"
성진의 친구가 물었고 준태는 그 친구라는 사내에게 건성 대답했다.
"뭐 별거는 없지만 계곡에 있어 보면 이 우중충한 해수욕장보다야 낫겠지요."
오후 늦게 성진 친구와 그 파트너 여자, 그리고 준태와 종수를 포함한 일행 다섯은 바닷가를 떠났다.
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산등성이로 기울기 시작했고 일행은 야영할 만한 곳을 찾아 개울가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걷다 보니 일행이 된 여자가 청바지 차림으로 앞서 걷고 있었다.
준태는 그녀를 지나쳐 앞서 걸으려고 서둘렀다. 하지만 힘들게 들고 가는 짐가방을 외면하지 못했다. 여성들은 어딜 가면 옷을 가방 하나 가득 담아가지고 다닌다더니 이 트렁크도 그 중의 하나인가.
"짐을 줘 봐요, 내가 들게요. 양쪽 균형이 맞아야 편하니까."
"고마와요."
가방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거기 약학과에 B라는 친구 알아요?"
"글쎄요, 우린 계열별이라서요. 선배들은 잘 몰라요."
몇마디 얘기를 하는 사이 꽤 많은 거리를 올라갔고 준태는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했다. 가방과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쉬는 사이 그 여자는 어디서 꺼냈는지 오징어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늘게 잘라서 준태한테 손바닥을 펴게 해서 몇 개 건네주었다. 그때 그녀의 매니큐어 칠한 손톱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갑자기 여자는 머리칼이 준태의 이마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속삭였다.
"아까 해변에서 우릴 한참 지켜보고 서 있었죠?"
그리고 잠시 준태를 가까이서 빤히 살피듯 바라보았다. 약간 도발적인 그녀의 태도에 준태는 잠시 우물쭈물했고 뭐라고 변명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고개를 돌려 총총히 앞서 걸어갔다. 그녀가 몇 걸음 간격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뒤늦게 향수 냄새가 코 앞에 확 끼쳤다.
그 여자가 걸음을 서둘러 같이 온 남자친구를 거의 다 따라가서 나란히 같이 걷게 되었을 때 사내의 말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저 자식 누구야?"
"몰라, 성진씨 선배래나."
"모르는 사람하고 그렇게 오래 얘기하구 그래? 그 사람 좀 이상하두만."
"왜?"
"괜히 친절한 척하며 남의 여자에게 접근해 보려는 수작은 내 다 알지."
"자긴 왜 그렇게 사람을 나쁘게만 생각해?"
준태는 걸음을 늦춰 되도록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걸었다.
같이 일행이 된 성진 친구의 애인, 그 여자가 문제였다. 조금 전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손가락의 감촉과 그녀 특유의 체취가 준태의 감각을 웅성거리게 했던 듯했다. 한층 더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준태의 존재를 이미 아까부터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여자와 갑작스럽게 나눈 몇마디 대화를 곱씹어 보며 아까 그녀가 수영복에 선글라스를 끼고 물장난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언제 또 그를 봤을까 생각해 보았다. 혹시 아까 그가 누워서 텐트 아래로 그녀의 쪼그려 앉은 모습을 엿볼 때도 눈치채고 있던 걸 아닐까.
준태가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추스리는 사이 일행은 산 중턱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멈춰 짐을 풀고 텐트 칠 만한 곳을 찾기로 했다. 지지대를 땅에 박고 나서 막상 줄을 매려니까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더 올라가 보았댔자 해가 완전히 기울어 어두워져 버리면 이만한 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다고들 했다. 계곡 물가에 조그만 빈터가 있어 나뭇가지와 야전삽 등으로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흙을 조금씩 파고 돋우고 평탄화작업을 하는데 성진이 말했다.
"여긴 개울가라서 비가 오면 물이 금세 불을 텐데."
계곡에는 다른 사람들 몇이 더 텐트를 치고 있어서 그 말에 유심히 귀기울여 듣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 두 남녀도 텐트를 가지고 왔는데 일행을 나누어 배정하다 보니 그쪽 인원수는 둘인데 비해 텐트가 커 보이고 준태 쪽은 셋인데 비해 작은 텐트였다. 그래서 텐트를 바꿔서 쳐보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이 텐트 설마 비 새는 건 아니겠지?"
"모르겠어요, 빌려온 거라. 괜찮겠죠 뭐, 오늘까지 잘 썼는데."
"비 맞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물살에 휩쓸리면 큰일 나. 저 위에다 치라구. 암벽 쪽으로 말이야."
"뭘 걱정이야, 다들 여기다 치는데 어때!"
맑은 날씨가 연속되고 있으니 별일이야 있겠나 하는 생각들이었다. 물통 갖다가 텐트에 물을 쏟아부어보기 전에는 비 새는 여부를 더이상 확인해 볼 길도 없었다. 일행은 설령 비가 온다 해도 그때는 새지 않는 텐트 쪽으로 모여 비를 피하면 된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기왕 땅을 골라 놓았으니 그냥 여기다 치고 하나만 저 위에 쳐라."
다른 한 텐트는 시냇가에서 조금 올라가 암벽 아래 나즈막한 언덕 위 좀 평평한 곳을 택해서 설치하게 되었다. 성진과 준태는 종수 쪽 텐트를 대강 틀만 잡아놓고 그들 남녀가 텐트 치는 일을 도왔다.
텐트 두개를 제대로 설치하고 앉으니 늦은 저녁이었다.
"맥주라도 좀 사올까요."
성진이 물었다.
"한잔 해야죠. 카드나 치면서 말예요."
일행에 여자가 한 사람 들어오니까 좌중의 분위기에 생기가 돌았다.
준태는 비좁은 텐트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카드를 치는 동안 술기운과 함께 피로가 몰려와 모여있는 일행에서 빠져나와 일찌감치 그가 누울 텐트로 돌아가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는 게 어딨어요? 시작했으면 같이 밤을 새야죠. 좀 더 하다 가요."
그녀는 장난기어린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야유하듯 말을 던졌다. 그 바람에 준태도 한 시간 정도 더 카드를 치게 되었다. 그녀 쪽을 바라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아까 나눈 몇 마디 말이 생각나 점차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서 카드 패가 읽어지지가 않았다. 게임에서 계속 밀리기만 하다가 결국에는 모두 털리고 나왔다. 그제서야 텐트로 가서 누웠다. 누워서 들으니 떠드는 남자들 목소리에 섞여 간간히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이 불편해서 그런지 준태는 얼른 잠들지를 못했다. 준태는 바닷물 위에 반듯이 누운 채 나뭇잎처럼 떠있는 한 여자의 모습을 환영으로 본 듯했다. 옆에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감은 한 남자가 초록 이끼 색깔의 파문이 이는 바닷 물결 속에서 긴 다리를 천천히 굽혔다 폈다 하며 모자비헤엄으로 물을 헤치며 유유히 나아가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유난히 수염이 덥수룩했다. 그가 샌달을 잡는 순간 한모금의 물을 마셨고 시야는 칸을 나눈 듯 수면 위로 해변가와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두모금 마시자 편안해지는 듯 몸이 축 늘어져 물속에 잠기면서 어지러워진다. 태어나기 전 양수 속에 노닐 듯이...그는 물 속에 몸을 맡기고...
준태는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흰 거품을 몰고 오는 파도를 피해서 도망갔다가 다시 앞으로 달려가고 하며 그녀가 놀고 있었다. 물을 한 움쿰 떠서 몸에 끼얹을 때 빛나는 긴 머리칼은 젖은 채로 펼쳐져 등과 어깨를 싱싱하게 덮고 있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뿔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머리칼이었다. 꽉 끼는 수영복 속의 울룩불룩한 자국은 기묘한 생동감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준태는 이런 영상들을 더듬으며 잠들었던 듯했다.
얼마 후 준태는 아랫배에 팽만감을 느끼고 눈을 떴다. 판쵸이 위에 담요 한장을 깔긴 했지만 땅바닥의 냉기를 막기 어려워 추웠다. 주위가 모두 고요해진 걸 보면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들고 모두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개구리 울음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주위의 어느 텐트에선가 아직도 들릴 듯 말 듯 남녀가 소리 죽여 몸을 스척이는 기미가 느껴졌다. 물가로 걸어나와 허리춤을 클르고 선 준태는 주위의 커플들이 뒤엉켜 자는 수상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서 몸이 경직되는 바람에 좀처럼 소변을 볼 수가 없었다.
준태는 왜 그 시간에 나뭇가지의 V자 모양으로 된 홈을 붙잡고 구토하는 자세로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나.
두런거리는 속삭임. 귀 여자의 가는 음성, 멀리서 카세트를 튼 음악소리, 몸이 스척이는 소리 등이 청각신경을 자극하여 도파민이라는 전달물질의 작용으로 대뇌피질까지 분위기가 전달되자 반응에 관한 신호는 척추를 타고 내려 제3,4 요신경근 주변에 명령을 내려 남성해면체에 혈액을 가득 채웠다. 이때 준태의 간장은 시간당 10mg 정도의 보통 분해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아까 마신 180ml 3잔의 5%맥주가 미처 해독되지 않았다. 그의 600ml 용량의 방광은 점막이 늘어나 고르게 계란형으로 팽창되면서 세뇨관의 재흡수 등의 대책을 써서 소변양을 줄여 수면시간을 늘여보려고 해 보았지만 계속되는 수분량 증가를 감당할 수 없어 견디다 못해 잠을 깨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잔여 혈중알코올이 혈관을 확장시킨 상태라서 준태의 전립선마저 부어 있어 꽉찬 해면체의 경직과 부푼 혈관의 압력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요로가 협착되어 그 결과 배설에 곤란을 느끼고 여기 이렇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병원에서 사용하는 소화관,방광 등의 내용액의 배출을 유도 또는 측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고무 또는 금속제의 가는 관인 카데터 따위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어떻게 이 곤란한 국면을 헤쳐나갈 수가 있었는가.
그는 아까 말한 V형 나뭇가지를 잡은 손에 무게중심을 의지하여 앞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받쳐주고 심호흡을 하면서 되도록이면 수상한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도록 애씀으로서 신속히 중요부 경직의 이완을 유도하려고 애썼다. 무념무상 상태에서 조금씩 졸졸, 약수터에 박힌 플라스틱 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샘물처럼 근육 사이를 밀고 새어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는 테크니컬한 조절에 의해 8초간 유지되었다가는 끊어지고 다시 힘을 빼서 이어졌다가는 끊어졌다. 허리를 굽히자 비뇨기의 각도는 앞을 향하게 되고 점차 배뇨가 이어지는 시간이 길어져 어느덧 일을 마친 준태. 이제 아랫배가 조금 편해지자 허리를 펴며 휴우- 긴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한번 배설이 어려워서야 원.
다시 잠을 청해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잠결에 등허리가 섬뜩했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지 시끄럽게 들려왔다. 비다! 비가 와서 개울물이 불어 내려오는 것이다! 정신이 들면서 다급해져 벌떡 일어났다.
텐트 지퍼를 열고 머리를 내밀어 보니 캄캄한 밤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얼굴에 떨어지며 동시에 물살이 밀려 내려오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준태는 우선 종수만 깨우고 유리 등잔에 불을 당겼다. 성진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짐을 챙겼다.
바닥에 깔았던 판쵸이도 모두 젖었다. 알고 보니 그 텐트는 방수가 형편없는 불량품 텐트였던 것이다.
세 사람은 후다닥 움직이며 짐을 대충 배낭에 집어넣었다. 종수와 준태가 텐트를 접는 동안 성진이는 자기 친구와 동행한 여자가 자는 텐트로 갔다.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준태로 봐서는 한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고 일행에 여자가 있으니까 그가 직접 가기 곤란해서 성진을 보냈던 것이다. 그들 커플도 자리를 대강 정리하고 준태 일행을 맞아들이려면 약간 시간이 걸릴 거라고만 알고 있었다. 당연히 곧 들어오라고 하겠거니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지금 안 되겠대요."
돌아온 성진이 말했다. 거절한다는 것은 전연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뭐? 왜 안된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준태가 되물었지만 성진은 여기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텐트를 접고 나니 빗소리가 더 커져서 중얼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빗줄기가 우산 사이로 세차게 몸에 와 부딪혔다.
"야, 뭐해! 빨리 내려가야지."
종수가 말하며 손짓으로 서두르라는 신호를 했다.
"어딜?"
준태가 물었다.
"그럼 이렇게 비 맞고 서 있을 거야?"
종수가 돌아서며 볼멘 소리로 외쳤다.
텐트 가장자리에서 자다가 등허리에 물세례를 맞고 선잠을 깬 탓에 준태는 넋이 빠져 있었다. 랜턴을 모아보았다. 사람이 셋인데 손전등 한 개와 랜턴 하나 뿐이었다.
성진이가 짐을 들고 일어서니 준태도 엉겁결에 따라나섰다.
"뭐라고 그래?"
"그냥 내버려 둬!"
종수가 소리치며 두어 발자국 앞서 나갔고 준태와 성진이 뒤따라갈 때 성진이 준태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휴, 저걸……"
준태는 텐트를 뒤집어엎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그 느낌이 한순간 쾌감처럼 온몸에 번져왔다.
그들 일행은 바윗틈을 하나씩 헤치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바위의 윗부분을 밟고 지나 다음 바위로 건너뛰기도 했다. 몽유병 환자가 꿈결을 헤매듯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앞사람을 따라 걷는 사이에 차차 잠이 완전히 깼다.
거의 기슭까지 다 와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요 아래 내려가서 어디 여인숙이나 여관을 찾아봐야지."
어떤 때는 몇 발작 나아가기도 어려웠다. 앞사람이 갈 때 플래쉬에 비친 발을 잘 보고 땅 모양을 기억해 두었다가 따라가야 하는데 어림짐작이 틀려져 준태는 자꾸 발이 물기 머금은 돌부리에 채이고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준태는 걸으며 왜 이렇게 내려와야 하나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들 남녀가 텐트 문을 안 열어주겠다고 버틴 건 좀 심했다. 자기 텐트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런 식으로 나오다니.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이상한 인간들을 만나게 되는구먼. 준태는 특히 그 성진의 친구라는 그 사내 생각을 하면 속이 거북했다.
바윗길을 걷다가 흙길로 들어서서 내려가는 길 쪽으로 여인숙이 보였다. 그 안에는 그들처럼 개울가에 텐트를 쳤다가 갑자기 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한참 자다가 이게 웬 날벼락인가 하고 피신해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피난민 수용소를 연상시켰다.
사람이 많아 방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마루에서 잘 지 하산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 광경을 보고 아예 산아래 민가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인숙 마루에 앉으니 비로소 젖은 옷이 피부에 맞닿아 축축한 게 불쾌했다.
등산하다 가장 괴로울 때는 아마 산에서 비 맞은 채로 새벽 선선한 공기를 견뎌내야 할 때일 것이다. 설악산의 새벽은 추웠다. 종수는 마침 안 젖은 옷가지가 몇 있어서 갈아입었지만 준태는 마땅히 갈아입을 옷도 없었다.
사태가 수습되길 기다리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잘 사람은 자고 내려갈 사람은 내려가 정리가 되었고 사위는 고요해졌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단잠을 설친 피로가 무겁게 몰려왔다.
비 올 때 약속대로 옆 텐트로 피해 들어가지 못하고 잠이 덜 깬 얼떨떨한 정신으로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밤길을 더듬어 내려와야 했다는 게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오른다.
빗소리가 점차 잦아들어 거의 정적과 같이 느껴졌을 때 준태는 오슬오슬 한기를 느꼈다. 춥기도 하려니와 무료해져서 몸의 끈적끈적한 느낌으로부터 다소나마 헤어나고 싶어서 가스버너를 켰다.
남아있는 몇 개 성냥개비 중 두 개는 젖어서 긋기가 무섭게 습기 먹은 성냥 확이 뭉개졌고 세 개째에 간신히 불이 붙었다. 불을 켜니까 축축했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춥고 시간 보내기가 힘들어서 여인숙 마당에 앉아 아무거라도 끓여 먹기로 하고 짐보따리를 뒤져 코펠을 꺼냈다. 밥 찌꺼기와 마른반찬이 배낭 속에 있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이제 마당에는 몇 사람 남지 않았다. 준태는 타오르는 휴대용 가스버너의 파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쬐면서 모처럼 따뜻한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게 되나 보다 하고 잠시 기대해 보았으나 냄비를 데우는 도중에 가스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데우다 만 미지근한 국물에 불은 밥알을 몇 숟갈 떠서 먹었다. 불꺼진 버너 앞에서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세 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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