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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송동의 역사

작성자예성탁|작성시간11.03.21|조회수1,146 목록 댓글 0

재송동의 역사


옛부터 이 마을에는 노송이 많다고 유명했는데 재송동이라는 동리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재송동은 면적 4.38㎢, 인구 5만 4천여명의 동으로 동쪽으로 장산(634m)이 있으며, 북쪽은 반여동, 남쪽은 우동, 서쪽으로는 수영강과 접해 있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재송포가 있어 이 곳 마을을 재송리라 하였다.
영조 때에는 이 마을은 동래군 동면에 속했었고 이조 말에는 읍내면에 속해 있었다. 본래 동래군 동면의 지역으로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동상면의 뒷골을 병합하여 재송동이라고 하여 동래군 남면에 편입되었다.1942년 다시 부산부에 편입, 1946년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1957년에는 동래구에 편입, 다시 1987년 해운대구에 편입되었다. 정책이주 지역으로 근래에는 아파트건립이 많아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노송이 많다고 유명했는데 동래부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는 노송수가 만주나 있는 울창한 송수림이었다. 따라서 재송동이라는 동리명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어느 때 노송이 벌재되었는지 오늘날 이 같은 노송은 볼 수가 없다.
재송동은 원래 장산 서쪽 넓은 기슭 끝에 자리잡고 있는 산촌으로서 농경지로는 장산서쪽 기슭밑에서 북동으로 가로 흘러내리고 있는 수영강을 따라 좁은 강변평지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재송동은 지리적으로 풍요한 농촌을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예로부터 농경에만 의존할 수 없었고 장산서쪽 기슭의 넓은 송림을 이용하면서 반농반림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므로 재송촌락은 오랫동안 인근 도성가였던 동래, 수영에 비하여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뒤떨어져 있었다.
재송이란 동리명이 상징되고 장산 고분아래 그 서쪽 기슭에 울창한 넓은 송림을 등지고 앞으로는 수영강이 멀리 해운대바다로 흘러내려 아름다운 산수에 쌓인 산자수명한 산촌으로 주민들의 인심은 순박하였다.
그런데 재송촌락의 북쪽에는 삼계곡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뒷골(후속), 서당골, 안골이라고 하였고 이 삼곡을 통칭하여 뒷골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이 재송 뒷골에 지금으로부터 약 400백년전인 임진왜란 당시에 동리이름에 송자가 들어 있으면 피난처가 된다고 하여 이 곳 재송 뒷골에 피난을 와서 현재까지 400년간 15대로 면면히 이어 온 드문 고가가 아직도 약 10가구가 살고 있다.
이 가문중 은진송씨 삼성공파 문중이 재송동에서는 가장 오래된 고문중이라 하겠다. 그런데 재송뒷골 송씨는 옛날부터 뒷골 주민의 약 구할을 차지하고 오래 집거하였기 때문에 뒷골 촌락을 송촌이라고도 불렀고 또 송씨들 조상들은 대대로 뒷골에서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 서당있던 자리를 서당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송씨문중에서는 서당골 옛터에 1982년 7월 아담한 재실을 건립하였는데 이 재실은 뒷편에 그들의 선영지였던 장산 서북쪽 기슭 송림이 옛 모습 그대로 울창하게 남아 있고 그 정원에는 서당골 옛물이 그대로 흘러내리고 있어 재송동 400년의 인맥과 산수맥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라 하겠다. 그래서 이 재실을 이름지어 재송재라고 하였다 한다.
현재  서당골에는 송씨 문중에서 옛 서당을 기리기 위해 송문 삼성학습원(宋門 三省學習院)이라 하여 독서실, 도서실, 고시숙(考試熟)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해운대경찰서가 있는 지역이 뒷골이고 삼익아파트자리가 안골이었다.

 

 


재송당사
우동 성불사에서 재송동까지 장산 기슭에는 임도가 건설되어져 많은 사람들이 등산과 산책을 겸하고 있다.  수영만이 한눈에 내려보이고 평탄한 길따라 마련된 체육공원과 약수터로 가족단위로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성불사에서 가다보면 재송동쪽 임도 끝자락, 체육공원 옆에 조그만 사당이 있다. 

이 사당에 내려오는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득히 먼 옛날 장산 기슭의 장자벌에 고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고선옥이란 처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청명한 날 갑자기 우뢰와 함께 무지개가 장자벌에 펼쳐지면서 하늘에서 한 선인이 내려왔다 선인이 목이 말라 분향기가 나는 어느 집으로 가 물을 청하였는데 정성스럽게 냉수를 내미는 처녀가 바로 고선옥이었다.
처녀 고선옥의 고운 자태에 첫눈에 반한 선인은 마을사람들의 축복 속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 사이에는 열 명의 아들과 열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이들이 장성하여 김, 문, 박, 신, 안, 이, 유, 정, 차, 천, 최, 허씨 등으로 창성(昌盛)하여 20개 마을의 씨족장이 되었으며 선인은 대족장이 되어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나 결혼 60주년이 되자 선인은 하늘의 부름을 받게되고 부인과 자식을 남겨둔 채 승천하고 말았다. 부인은 그때부터 자녀를 낳던 제왕반 바위 아래 호롱불을 켜고 외가리 사원에서 불공을 드리며 부부암 위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부인의 꿈속에 선인이 나타나 “나를 찾을 생각은 말고 나의 형체나마 보고십거든 장산 정상으로 오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부인은 잠에서 깨어나자 마자 장산을 오르다 정상을 불과 몇 발자국 앞에 두고 그만 미끄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자녀들은 바위를 다듬어 상여를 만들고 정상에 큰 묘를 만들어 안장하였다 지금도 이 부근에는 제왕반 바위와 상여 바위 그리고 영감 할매 바위 및 그 묘가 있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고씨할매의 넋을 마을의 재앙과 질병을 막아 주는 수호신으로 여기고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지금도 이 마을의 후손들은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날에 동네에서 제일 깨끗하고 신망있는 부부를 제관으로 택하여 마을에 살고 있는 각 성씨를 봉송하여 동태민안과 재앙이 없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씨 할매 보살핌 덕분인지 아들이 없는 부인은 제왕반 바위아래에서 촛불을 켜고 기도후에 외가리 절에서 공을 드리면 옥동자를 낳고 영감 할매 바위에서 공을 드리면 부부 금실이 좋아 진다고 한다. 또 야외에서 식사시 첫술을 떠서 “고씨례” 하고 던진 뒤 먹으면 배탈이 없다는 전설도 아울러 전해진다.

옛 문헌에는 2000년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는 아직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므로 불공이라는 말이 있어 삭제했다. 고선옥의 어머니 역시 고씨라고 기술되어 있고 선인을 만날 때 고선옥의 나이가 16세라고 밝혀져 있지만 이 역시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참고로만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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