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그 아름다운 해안선을 낀 고장
해운대구는 동래구와 더불어 그 일부가 조선시대에 동래군에 속했던 곳으로 부산지방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고장에 든다. 해운대구의 한복판에 높이가 634미터인 장산이 솟아 있는데 이 이름으로 미루어보아 '삼국사기'나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삼한시대의 장산국이 있었던 곳이 장산기슭을 중심으로 한 해운대구의 땅이었던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동래군의 남촌이라 불렸고 1942년에 부산 수영출장소밑에 들어가 부산시에 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6년에 세워진 해운대구 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됐다가 1980년 4월1일에 현재의 해운대구가 되었다. 우2동과 수영구와의 경계에서부터 기장군에 이르기까지 푸른바다를 낀 해안선을 자랑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해운대를 가리켜 "동래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의 절벽이 바다속에 빠져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와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와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따위로 덮혀있어 싱싱하고 푸르기가 사철 한결같다. 이른 봄이면 동백 꽃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발꿈에 채이고 밝히는 것이 서너치나되며, 남쪽으로는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보인다" 고 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해운대는 오늘의 동백섬 동쪽 벼랑을 가르킨다. 해운대는 태종대, 몰운대, 신선대, 오륜대, 의상대, 겸효대, 강선대와 함께 부산에서 경치가 좋은 대 여덟에 들었다. 한편 해운대라는 이름은 신라의 유명한 학자이며 문인인 해운 최치원이 이곳에 유람와 스스로 자신의 자를 빌어 지은 것으로 그가 썼다고 전해지는 해운대라는 글씨 새김이 이곳의 벼랑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부산 서민들은 잘 찾지않았던 해운대 해수욕장
해운대 해수욕장은 1920년까지만 해도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모래가 춘천 가에까지 쌓인 '구남들'이라 불리우는 갯가였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끝난뒤부터 해수욕장과 휴양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6.25전쟁 기간부터 육십년대초반까지 이 해수욕자의 모래밭은 두 조각으로 나뉘어 그 한쪽인 동북쪽 모래밭에는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유엔군과 그 군속과 가족만이 드나드는 해수욕장이 그곳이였다. 그 무렵에는 해수욕장이 썩 붐비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 서양 사람과 함께 벌거벗고 어울리는 일이 마음에 내키는 일이 아니어서 부산사람들은 철조망이 주는 위화감을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육십년대 중반에 들어 그 철조망이 걷히는가 했더니 어느새 그 북동쪽 끄트머리에 그때로서는 귀에 익숙치 않은 관광호텔이라는 것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관광호텔에 돈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자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은 제풀에 주눅이 들어 감히 동쪽모래밭으로 접근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탈의장에 가서 비싼 돈 줄 것없이 같이 간 사람끼리 서로 가려주며 옷을 갈아입고, 멱을 감고, 배가 고프면 싸 가지고 간 김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가져간 수박을 쪼개서 먹는 서민들이 해수욕장의 서쪽 끝 동백섬 뿌리께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거기도 그들이 오래 즐길 곳이 못되었다. 1974년 조선비치호텔이 동쪽을 바라보고 지어진 탓에 호텔에 든 사람들이 그 둘레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창 아래로 환히 내려다볼 수가 있었다. 한편으로 보통사람들을 위한 시설도 많이 갖춰지긴했지만 그래도 제풀에 밀려난 부산의 서민들은 광안리 해수욕장과 송정해수욕장 그리고 나쁜 교통사정을 참으며 일광,서생 같은 데로 해수욕을 하러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