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 장산개척단과 장산목장
장산마을은 1963년 6.25전쟁 상이용사 10여 명이 설립한 장산개척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원호청으로부터 정착 대부금을 받은 개척단은 산정(山頂)을 개간한 뒤 고랭지 채소를 가꾸며 생활의 터전을 일구었다. 하지만 최초 정착한 장산 550m 고지의 생활 여건이 너무 열악해 개척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고, 이후 퇴역 장병 40여 세대 120여 명으로 개척단이 재구성되었다. 이때가 장산 모정원 이정희 여사가 단장으로 활약한 시점이라 추측된다. 이어 부산시가 퇴역 장병들에게 토지를 불하하면서 450m 고지 근처에 거주자가 늘어나게 되었다.
개간 초창기에는 무와 배추를 재배하였으며 한때 장산 무가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장산 무의 경쟁력이 상실되자 1972년 ‘장산목장’을 시작으로 젖소 사육으로 전환하게 되었다(해운대구지에서는 젖소 사육이 1975년에 시작된 것으로 나와 있다). 장산개척단이 낙농업을 하게 된 것은 미국 복지재단에서 홀스타인 젖소를 기증한 덕분인데, 외래종 젖소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자 신문과 방송에 나올 정도로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장산마을은 군부대 내에 위치해 있어 항상 출입 통제를 받아왔다. 교통 편이 없어 해운대를 왕래하려면 비포장도로를 걸어서 가야 했고, 우유회사에서 하루 2회 운행하는 우유 수집 차량을 이용하기도 했다. 1985년에 전기가 개설돼 생활의 불편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점점 가구 수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1985~1987년에 발생한 우유 파동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젖소 사육 농가 일부가 이곳을 떠나기도 했다.
그래도 90년대 초까지 장산마을에는 총 39세대 125명이 거주했고 젖소도 320두나 되었다. 그 후 장산개척단이 조성했던 목장은 해운대신시가지가 조성 개발됨에 따라 사라졌다. 비록 목장의 젖소들은 사라졌지만 축사를 비롯한 낙농업 흔적은 아직도 장산마을 주변에 남아 장산개척단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또 장산마을 주민들이 70년대 새마을사업 일환으로 마을 입구부터 구남정을 거쳐 폭포사까지 땀으로 조성한 3.5km의 마을 길은 지금도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처음 장산마을은 행정구역상 동래구 해운대출장소 좌동에 속했다. 1980년 해운대출장소가 해운대구로 승격되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됨에 따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좌동 장산마을’이 되었다.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장산으로
현재 20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닭이나 오리 백숙 등의 음식을 판매하며 생활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이라 평소에도 낡은 집과 시설물로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는데 올여름 태풍에 건물 지붕이 다 날아가는 피해가 발생했다. 산중이라 멧돼지 등 야생동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도 주민들이 대책을 호소하고 있다. 장산마을 장산녹차농원의 경우 과거 정부에서 녹차밭을 장려해 넓은 면적에 힘들게 녹차밭을 조성했는데 이후 정부 지원은 없고 녹차 판로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장산마을은 해운대의 살아 있는 현대사이다. 개발제한구역과 군사보호구역에 가로막혀 자생력을 잃어가고 있고, 불법 음식점 영업으로 구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장산마을의 특산물인 장산 무를 해운대구 특화상품으로 지정하여 육성하거나 녹차밭을 활성화시켜 자연친화적인 마을로 거듭나게 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해운대구청과 장산마을이 함께 힘을 합쳐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건강한 장산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해운대구청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장산구립공원 지정도 장산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면서 장산마을의 생존을 함께 고민하는 데서 출발해야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