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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자유잡담〃

오다 노부나가, 다케다 신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팔을 나란히 한 전국 시대의 다이묘,우에스기 겐신

작성자화룡검사|작성시간18.06.12|조회수826 목록 댓글 2

우에스기 겐신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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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杉謙信 うえすぎ けんしん[1]
1530년 2월 18일 ~ 1578년 4월 19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Japanese_Crest_Uesugi_Sasa.svg.png
우에스기 가문의 조릿대와 참새 문장.



1. 개요[편집]

에치고의 용(越後の龍).[2]

일본 전국시대전국 3영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다케다 신겐과 라이벌 관계겐신을 거꾸로 하면 신겐로 유명하며 스스로 비사문천

2. 상세[편집]

우에스기 겐신의 본래 이름은 '나가오 가게토라(長尾景虎)'였다.

겐신의 아버지인 나가오 다메카게는 본래 간토칸레이[3]

다메카게가 환갑정도 되어서 겐신을 얻었는데, 이미 20세가 넘은 장남 하루카게가 있었기 때문에 겐신은 날 때부터 '그런 놈은 잉여인간

형인 하루카게와는 거의 부모자식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났는데, 하루카게가 멍청하고 용기가 없던 반면에 겐신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므로 이를 지지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하루카게가 에치고의 지배권을 우에스기 집안에 돌려주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므로, 다메카게를 따라서 우에스기 집안을 몰아냈던 가신들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절에 있던 겐신을 끌고 와서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우두머리로 삼았다. 물론 하루카게도 순순히 물려주려 하진 않았지만, 대패하고 은거하는 형태로 겐신에게 당주 자리를 넘겨준다.[4]

간토에서 당시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던 후호조씨[5]공성전

이 때 겐신은 가마쿠라에서 노리마사의 양자가 되어 우에스기 성과 간토 간레이[6][7]

다케다 신겐과는 라이벌인데,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천과 지

서로 존중하는 듯 보이면서도 겐신 측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면이 있고 이익 앞에 의리를 버리는 신겐을 평생 경멸했으며, 신겐 측에서는 숙적인 겐신이 간토 간레이라는 자신보다 격이 단연 높은 직책에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그를 평생 간레이 가문인 우에스기 성씨로 부르지 않고 격이 낮은 본래의 나가오 성으로 낮춰 불렀다고. 대부분의 사극에선 이 부분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둘의 라이벌 관계는 다케다 신겐이 시나노의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자 영토가 맞닿게 되면서 직접적 가상 적국이 되어버린 데다가, 패배한 무라카미가 '의'를 중시한다는 겐신에게 다케다 토벌을 의뢰하고 정의 덕후였던 겐신은 별로 얻을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응해 시나노를 침공한 것에서 시작됐다.

파일:external/muye24ki.com/ga3.jpg<img class='wiki-image' width='100%' src='//cdn.namuwikiusercontent.com/s/93276c01cc7c602af1780bc250e4268e2bcdefb47e527fa0c2dbf333c9903fe4d2df356ab5a2acc8d3d894aeec364f4aac91c3a80b806d5ef5a2b39bcdb66596471302e0367f7fc9680d31831dee6255?e=1529403735&k=GlkAUMoiTC3vTd_d49vLLw' alt='파일:external/muye24ki.com/ga3.jpg'>
(카와나카지마 병풍도. 부채로 막고 있는 게 신겐, 신겐을 내리치고 있는 겐신. 겐신이 신겐의 본진에 돌입하여 그를 내리치자 신겐이 부채로 막았다는 이 장면은 이 전투를 다룬 매체에서는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유명한 장면이지만, 당시부터 에도 초기까지는 이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있었다고 단언하기는커녕 실제 사건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정도?)

특히 신겐이 시나노를 제패하고 에치고로 북상할 길이 열리며, 신겐에게 쫓긴 몇몇 북시나노의 호족들이 의롭다는 평가가 많던 겐신을 의지해 도망치자 두 세력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북시나노의 '카와나카지마'라는 요충지를 두고 총 5번의 싸움을 벌였는데, 사실 두 용장의 대결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거의 양측이 지리하게 대치하기만 하다가 끝나곤 했다. 그러나 4차 전투만은 길이길이 회자될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단 전투의 경과를 기술한 기록은 군기들 밖에 없어서 신뢰도가 떨어지며, 전투의 자세한 경과에 대한 서술은 상상에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

상세 사항은 카와나카지마 전투

이후에도 관동의 호조, 다케다 집안과는 계속 적대 관계였지만, 오다 가의 판로 압박으로 다케다 집안이 소금 등의 생필품이 들어오지 않아 어려울 때는 소금을 '팔아먹기도' 하는 등, 원수지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장군을 쫓아내자 관동 평화에만 주력하던 우에스기 겐신도 결국 노부나가의 토벌을 결심하는데, 이 때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오다가 제일의 맹장인 시바타 카츠이에와 하시바 히데요시(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니와 나가히데타키가와 카즈마스[8]

이 전투는 본래 수비할 예정이었던 나나오 성에 마침 역병이 돌아 예상보다 일찍 함락되자 히데요시는 독단으로 퇴각, 가츠이에는 홀로 싸우다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하고 퇴각하는데, 이 때 마침 불어난 물살로 인해 빠져 죽거나 혹은 우에스기 군에 참살되어 '전국 시대 가장 사망자가 많은 전투'로 기록되었다.

워낙에 눈이 많이 오는 에치고인지라 '오다 가문이 이 정도면 상경은 순조로울 것이다'라며 일단 귀환하여 이듬해 봄에 본격적인 출진을 계획하였으나, 뒷간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9]

전략·전술뿐 아니라 본인의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전해지는 몇 안 되는 무장으로, 남들이 수급 5개 정도 가져올 때 겐신은 10개 이상을 가져왔다고 하며, 혈혈단신으로 상경하여 쇼군을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겐신이 상경해 있을 때는 당시 전횡을 부리던 미요시 나가요시마츠나가 히사히데[10]

비사문천의 열렬한 신봉자로 싸우기 전에는 항상 병사들까지 비사문천에게 기원을 올렸다하며, 덤으로 제자인 나오에 카네츠구의 투구 문양으로 유명한 愛는 애염명왕가출해 버려서 가신들이 따라와 싹싹 빌어서 귀환시키거나 적인 신겐이 신겐에게 배신당한 가문들의 무역 봉쇄로 인해 소금을 구할 수 없게 되어 곤란을 겪자 일생일대의 라이벌인 신겐을 돕기 위해 소금을 보내주는 등,[11]

코에이사의 게임의 영향인지 전투는 잘 하는데 정치는 별로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거성인 카스가 산성의 축적 재산량이 다케다 집안의 두 배 이상이라 알려져 있다. 인신매매와 약탈을 중심으로 한 전략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12]

코에이뿐만 아니라 코나미의 천과 지(이 게임은 주인공이 우에스기 겐신인 전국 시대 시뮬레이션), 게임아츠의 천하포무, 시스템소프트의 천하통일, 반프레스토의 전국몽환 등 내로라 하는 전국 시대 시뮬레이션 걸작들에서도 다 정치력은 별로인 것으로 나온다.

후계자인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군사 우사미 사다미츠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은 자형 나가오 마사카게의 아들이고(즉 외조카), 또 다른 자식인 우에스기 카게토라는 본래 호조 우지야스반음양설도 있다.

우에스기 겐신이 고안한 진법인 '차현'(구루마가카리)는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한데, 아마도 본진을 중심으로 여러 기마부대가 원 형태로 움직이며 적을 연속으로 타격하는 전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수레바퀴를 좋아하는 것인지 '구루마가사'라는 투구도 발명하였는데, 이는 투구의 머리 부분이 회전하게 되어 총탄 같은 것을 맞더라도 직격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3.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편집]

파일:external/tomenoroom.cocolog-nifty.com/dsc00231c.jpg
널리 알려진 수염난 초상화는 에도시대에 그려진 것이고, 위 그림은 전국시대에 그려진 우에스기 겐신 만년의 초상화.

우에스기 겐신이 여성이었다는 근거는

  • 그 시대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너무 밝고 붉은색의 옷을 즐겨 입었다.

  • 한달에 한 번 정도 격통을 호소하며 전투 중에도 진을 물릴 때가 있었다.

  • 어느 신사의 노래에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 용력'이라며 겐신을 찬양하는 구절이 있다.

  • 문헌에 기록된 겐신의 죽음이 현대의 부인병으로 해석되는 증상과 유사하다.

  • 로마

  • 남아있는 편지 등에서 여성적인 필체나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 겐지모노가타리


이런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말을 우스갯소리 정도로만 생각한다. 이유는 이하.

  • 붉은 색이 여성적인 색이란 관념 자체가 근대에 등장한 것이다. 예로부터 붉은 색은 다른 염료보다 얻기가 힘들어 지배 계층들 위주로 소비되었으며, 특히 동양에서는 붉은 색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것 자체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신라에서 적색 관복은 진골 이상의 관료들이 입었으며, 고려와 조선에서도 적색 관복은 고위 관료의 관복이었다. 명나라[13]

  • 붉은 색은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무사들이 오히려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인근한 다케다 가에는 '아카조나에'라고해서 붉은 색으로 장비를 떡칠한 엘리트 부대가 있었다. 이 아카조나에는 후에 사나다 노부시게가 이었고, 다케다에게 엿을 먹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그 무공에 감명을 받아서 이이 나오마사

  • 복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생리단순 숙취라고 보는 연구자도 존재한다.[14]

  • 여성적인 성격은 주변에 여성이 많았다는 점에서 유래하며 당시에는 중들도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시정도는 외우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한다. 실제로 겐신은 어머니와 누이를 몹시 따랐다고 하며 나중에는 그 누이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기도 했다.

  • 당시에는 여성 다이묘들도 소수나마 존재했기에 겐신이 여성이라도 굳이 숨길 이유가 없다.[15]

  •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은 라틴어일 텐데, 일본어와 달리 그쪽 계통 언어는 남성/여성형이 그야말로 글자 한두 개 차이다. 단순한 필사 과정의 오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 단순 오자로 의심되는 여성형(백부->백모) 이외에 겐신이 여성임을 암시하는 기록은 일본 국내외 어디에도 없다.


결국에는 추측성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에스기 겐신 여성설 일본 위키 번역

4. 생애불범[편집]

겐신하면 유명한 것은 바로 생애불범인데 불교에 심취한 겐신은 스스로에게 그것을 다짐했다고한다. 한자로 쓰면 生涯不犯. 즉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러나 당시의 의미는 달라서 즉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

다만 중도 문화를 고려해 봤을 때 생애불범은 문맥적으로 어디까지나 ‘여자랑 안 잔다’는 뜻이기 때문에[16]

훗날의 군기물에서는 코즈케국 히라이성주 치바 우누메의 딸인 ‘이세히메(伊勢姫)’ 이세희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켄신에게 항복할 뜻을 품은 우누메가 딸을 켄신에게 바쳤고, 켄신은 이세히메와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어 혼인할 뜻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신인 카키자키 카게이에[17]나오에 카게츠나의 딸[18]

5. 겐신의 능력[편집]

전쟁 잘하는 다케다 신겐의 라이벌로 여겨지는 만큼 겐신도 뛰어난 무략을 자랑했다. 신겐과는 애증의 관계였다고 추정되는데 그 신겐이 사적인 자리에서 일본 제일의 장수로 꼽은 것이 이 겐신이고 이것은 자료까지 남아있다. 또 오다 노부나가측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오다의 병사들 사이에서 '일본 최강은 다케다가 아니면 우에스기'라고 여겨졌다고 한다.

그 밖에도 겐신의 부대가 온다는 말에 부대가 철퇴를 결정할 정도였다고 하며 신겐도 야전에서 겐신과 싸우는 것은 피했다. 이 겐신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공성전인데 실은 공성전에서도 나쁘지 않은 전적을 기록했다. 단순히 승률이라는 면에서는 전국 최강의 장수의 반열에 오를 만한 인물.

또 내정면에서도 훌륭해서 새로운 무역 루트를 개척하거나 했고 또 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그의 사후에 성을 뒤적여보자 금덩어리들이 나왔다는 것으로도 알려지며 시와 노래에도 매우 능해서 전쟁터 한복판에서 노래를 지은 적도 있다고 한다.

6. 겐신의 건강[편집]

겐신은 보통 검소한 생활을 하였으나 전투에 나가기 전에는 잘 먹어두었기 때문에 부하들은 그의 식단을 보고 전투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짐작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그런 것과는 달리 애주가[19]

그 이외에도 전장에서 왼쪽 다리에 상처를 입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나중에 장년에 들어서는 종종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외에 키가 장대한 6척 거구라느니, 체구가 작은 인물이니 여러 설이 있었는데 실제 그가 입던 갑옷으로 추측하면 150cm 대 후반이라고 한다. 키는 당시로서는 평균.[20]

7. 겐신과 신겐의 관계[편집]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호적수라고 여겨지며 이를 증명하는 것이 포위로 인하여 소금(당시에는 내륙 지방에서 소금을 얻을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신겐에게는 치명적이었다)을 얻지 못하게 된 신겐에게 이것을 비겁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겐신이 소금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21][22]

한 편으로 당시의 자료에는 이러한 일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서술된 자료가 없다는 점을 들어서 후세의 창작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아버지를 쫓아내고 다이묘가 된 신겐을 겐신은 몹시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도 한다. 일부의 자료에 의하면 신겐의 죽음을 전해듣고 호적수의 상실에 생각지 못하게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신빙성은 낮기 때문에 겐신과 신겐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하였을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신겐 신격화로 일관하는 《갑양군감》에서조차도, 주변의 호조 우지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쟁쟁한 명군주들조차도 신겐에게 영토를 빼앗겼지만 그런 신겐이 오로지 겐신의 영토만은 빼앗지 못했다며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정도. 그...그래도 공격하긴 했거든?! 신겐이 겐신보다 더 낫거든?!이라는 초라한 구절이 붙어있다 또한 겐신은 라이벌인 신겐이 죽더라도 그 후계자인 다케다 카츠요리

8. 어록[편집]

極楽も 地獄も先は 有明の 月の心に 懸かる雲なし.
이 앞길 극락이든 지옥이든 새벽달과 같은 내 마음에는 구름 한 점 없나니. - 지세이
四十九年 一睡の夢 一期の栄華 一盃の酒.
사십구 년은 한 잠의 꿈과 같고, 일생의 빛나는 화려함은 한 잔의 지세이


운은 하늘에 있고 갑옷은 가슴에 있으며 공훈은 발에 있다
어떤 때라도 적을 내 손에 넣고 전투를 해야하며
죽을 힘을 다해 싸우는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
운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때가 되면 저절로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틀린 것이다.
무사라면 내가 가야할 길은 이것 외에는 없다고, 스스로 운을 만들어야 한다.[23]


9. 평가[편집]

이미 무장으로서는 뛰어난 평가를 생전부터 얻고 있었고 동시에 매우 의롭다는 평가를 얻고 있었다. 형과 상쟁을 한 기록도 있으나 동시에 장군 가의 요청을 듣고 출병을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경계한 미요시 일족 등은 겐신의 앞에 금은보화를 쌓아두었으나 겐신은 이것을 마다했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신들의 반대에 겐신도 결국에는 출병의 뜻을 꺾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의에 따라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우에스기 노리마사[24]

당시에도 많은 장수들이 대의명분에 집착했으나 겐신은 유독 그런 성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겐신은 누군가와 한 약속을 먼저 깬 적은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분을 중시하는 꼴통이나 말만 정의로운 위선자가 아니라 그것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관철했다는 점은 겐신의 인물됨을 파악할 때 몹시 중요한 사항이다.

숙적 겸 웬수 중에 하나인 호조 우지야스타케다 카츠요리

또한 겐신은 정의감이 투철하면서 인품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급성장한 전국 다이묘 가문이 대개 그랬지만 겐신은 평생 가신의 모반에 시달렸는데, 라이벌들의 선동이나 배후공작이 주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극형이 당연한 반란죄조차도 대부분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것이 특징. 키타죠 타카히로 같은 가신은 다케다 신겐의 선동으로 한번, 호조 우지야스의 선동으로 한번, 합쳐서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 용서받고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으로 충실하게 섬겼다. 혼죠 시게나가 같은 가신은 반란을 일으켜 다른 유력 가신이 목숨을 잃는 정도의 혈전을 벌여 놓고도 잠깐의 근신처분 정도로 관대하게 용서받은 적이 있다. 게다가 이 둘은 영향력을 잃기는커녕 이후로도 중신으로 대접받으며 지냈다. 이런 관대한 행실이 정의로운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이런 탓에 실제 사료와 비교하면 겐신의 업적이 다소 과대평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25]우에스기 카게카츠

10. 대중문화에서의 우에스기 겐신[편집]

10.1. 개별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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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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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림 | 작성시간 18.06.14 아무튼 대단한 사람 맞네요
  • 작성자화룡검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6.16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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