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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역사자료〃

[스크랩] [《야사》]장비의 죽음과 묘에 얽힌 이야기

작성자량이〃瀏纏|작성시간09.11.26|조회수2,779 목록 댓글 1
맥성(麥城)에서 패주한 관우가 동오의 군대에게 사로 잡혀 죽게 된 소식이 서천(西川)에 전해지자 촉한(蜀漢)의 문무백관 및 백성들은 모두가 매우 비통해 하였다. 몇 번인가 기절했다가 간신히 정신을 유비는 전군(全軍)에 3일 동안 상복을 입도록 영을 내렸다. 한편 파서태수(巴西太守)로 부임하여 7년 동안 낭중( 中)을 지키고 있었던 장비 또한 둘째 형의 흉보를 접하자 방성대곡을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유비와 장비는 군사를 이끌고 동오를 쳐서 관우의 복수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오를 치는 일은 바로 제갈량의 '연오항위(聯吳抗魏)' 정책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갈량 역시 나서서 직언하기가 어려웠다. 비록 조자룡이 어렵게 나서서 성급하게 출병하면 안 된다고 권하였으나 이 말이 유비의 귀에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매일 같이 직접 나서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더니 결국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출정하려 하였다. 장비의 마음 역시 관우의 복수를 하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맹서하였다.
   "만약에 둘째 형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이다."

   출정의 날이 다가오자 장비는 부하인 장달(張達)과 범강(范疆)에게 3일 안에 출정할 병사들이 사용할 백색 기와 백색 갑옷을 만들어 놓도록 명하였으니 이는 상복을 갖춰 입은 병사들이 관우의 영혼을 위로하며 복수하겠다는 장비의 결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장달과 범강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란지라 며칠만 더 여유를 달라고 장비에게 청원하였다.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장비는 입에서 연기를 뿜어 대며 크게 소리쳤다.
   "당장 역적 놈들을 생포하여 토막을 낸 다음 소금을 뿌려도 시원치 않을 지경인데 너희들이 어찌 이렇게 태만할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는 곧 팔뚝을 걷어 부치고 살기등등한 태도로 장달과 범강을 채찍으로 몇 차례 후려치며 훈계하였다.
   "내 명령을 위배하는 자는 누구라도 참수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인다!"
   장달과 범강은 원래 재봉사 출신으로 전성(全城)의 재봉사를 모두 동원하여 밤새도록 작업한다 하더라도 3일 안에는 도저히 임무를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까닭에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이 죽을 바에는 먼저 손을 써서 장비를 죽인 후, 그 머리를 동오에 바치면 아마도 얼마간은 더 살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그 날 마침 장비는 관우 생각에 울적하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는 취해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달과 범강은 예리한 재봉용 가위를 한 필의 백포(白布) 속에 감추고 장비의 집으로 향했다. 호위병은 두 사람이 미심쩍은 태도로 슬그머니 문안으로 들어가려하자 곧 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요?"    
   "부하 소장(小將)인 장달과 범강이네."
   "어째서 한밤중에 장군 댁으로 들어가려 하시오?"
   장달이 손에 든 백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우리들은 이것으로 백색 기와 백색 갑옷을 만드는 일로 특별히 장군님께 보고 드릴게 있어 들어가려고 하네."
   원래 규정에 의하면, 장군의 안전을 위하여 어느 누구라도 밤에는 침소에 출입할 수 없으며 특히 어떠한 무기도 휴대할 수가 없었다. 까닭에 호위병은 장달과 범강의 몸수색을 하였으며 이어 백포를 펼치며 검사하였는데 '꽈당'하는 소리와 함께 반짝반짝하는 가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에 호위병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장달과 범강이 다급하게 둘러대었다.
   "이것은 무기가 아니라 가위인데   ."
   "가위라도 갖고 들어갈 수 없소!"
   "당신이 가위를 압수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장군님 앞에서 재봉을 시험해 보여 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우리들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군. 만약 3일 안에 백색 기와 백색 갑옷이 모두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당신 책임일세!"
   말을 마친 장달과 범강은 손을 휘두르며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 말에 넘어간 호위병은 그만 그들을 급히 세우더니 대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허락하였다.

   장달과 범강은 다시 두 개의 문을 지나 장비의 침실 휘장 앞까지 다가갔다. 이들이 숨을 죽이고 장비가 자는 모습을 바라보니 코 고는 소리와 술 냄새가 굉장하였으며 특히 고리눈을 부릅뜬 채로 자고 있는 모습에 놀라 뒤로 물러선 채 감히 손 쓸 수가 없었다.

   이 때는 7월 달이라 날씨가 무더운지라 연못과 숲 속에 있는 모기들이 요란스레 울어 대었다. 모기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문득 하나의 기지가 발동하여 침상 위에 있는 파초선(芭蕉扇)을 집어 들고 장비 얼굴 앞에 살살 부쳐 보았다. 만약 장비가 깨어나게 되면 모기를 쫓으려고 하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여러 번 부쳐 보았지만 장비는 여전히 눈을 뜬 채로 풀무질을 하며 자고 있는지라 비로소 장비는 눈을 뜬 채로 자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달이 예리한 가위를 들어 장비의 목에 들이대는 순간, 목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낀 장비가 몽롱한 가운데 모기가 문다고 여기고는 손을 들어 힘차게 내려쳤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 한 번 내려친 것이 가위 쥔 손을 정확하게 치게 되어 가위가 자신의 목에 정확하게 꽂혀 선혈이 분출될 줄이야! 장비는 크게 고함을 지르더니 곧 혼미한 가운데 목숨을 잃고 말았다.

   놀라서 혼이 몸 밖으로 나간 장달과 범강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벌벌 떨면서 가위를 뽑은 후, 장비의 목을 베어내고는 백포에 쌓아 그날 밤으로 동오를 향해 두 발을 북채로 삼아 땅을 두들겨 가며 줄행랑을 놓았다.
   가릉강(嘉陵江)까지 온 두 사람은 낭중에서 동오까지는 물길로 가더라도 빨라야 6,7일은 걸렸기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여러 날이 걸린다면 요즘 같은 복더위에 급속히 썩게 되어 아무리 장비가 인상이 특이하다지만 장비의 머리임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때 가서 손귄이 거짓 투항한 것으로 의심이라도 하게 되면 우리의 목숨 또한 보존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일로 이리저리 뇌즙을 짜낸 그들은 급기야 좋은 방법 하나를 생각해 내었으니, 장비의 머리을 기름을 가득 채운 독에다 넣고 선창(船艙)에 숨긴 다음 상인으로 변장하여 가릉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배는 강주부(江州府: 지금의 重慶市)에 이르렀는데, 이 곳은 가릉강과 장강(長江)이 합류하는 것으로 바람과 물살이 드세어 그들이 탄 작은 배는 이리저리 밀리며 더 이상 나가지 못하였다.
   이 때 갑자기 선창 안에서 우레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비는 살아서도 촉한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는데, 죽어서도 이 곳을 떠나 동오로 갈 수 없다."

   이 소리에 장달과 범강은 수상쩍게 느끼고 선창을 열어보니 죽은 장비의 머리가 기름독 밖으로 나와서 눈을 부릅뜬 채 호시탐탐하고 있는 것이었다. 크게 겁먹은 이들은 머리를 기름독 안으로 들이밀고 밀랍으로 봉한 후, 다시 나무판으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돌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와 한 숨 돌리면서 밧줄로 배를 묶어 물살에 떠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
   굽이쳐 흐르는 오강(烏江)과 도도히 흐르는 장강이 합류하는 부릉( 陵: 지금의  陵市)에는 백학양석어(白鶴梁石魚)라고 부르는 길이가 1,600미터나 되고 폭이 15미터나 되는 돌섬이 있었다. 이 돌섬은 건기(乾期)에는 명초( 礁)가 되고 우기(雨期)에는 암초(暗礁)가 되었는데, 이때는 바야흐로 장마철인지라 암초로 된 데다 파도와 바람소리가 우레와 같아 뱃길이 매우 위험하였다. 장달과 범강이 탄 배가 여기에 이르자 선창 안에서 무엇 인가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두 사람이 선창을 열어 보니 기름독은 큰 구멍이 나서 기름은 모두 바닥에 쏟아졌는데 장비의 머리는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뱃전을 들이박으며 성난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네 놈들이 나를 죽였으니 나도 배를 부수고 네놈들을 죽여 함께 물고기의   밥이 되겠다!"
   게다가 말하는 도중에 '펑'하고 소리가 나더니 배가 암초에 부딪히면서 바닥에 구멍이 뚫려 강물이 들이쳤다. 두 사람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부셔진 배를 손 볼 정신도 없이 한동안 부릉에 있었다. 바로 이때에 하나의 소식이 들려 왔으니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한 손권이 제갈근을 사절로 보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강화(講和)를 요청했다는 것으로 그 세 가지 이유는 아래와 같았다.

   첫째, 관우가 양양(襄陽)을 공격할 때, 조조가 먼저 여러 차례 동오로 사람을 보내 배후 양쪽에서 형주를 협공하자고 제안하였으니, 관우의 죽음은 조조의 죄이지 손권의 죄가 아니다.

   둘째, 여몽(呂蒙)이 관우와 불화하여 제멋대로 군사를 일으켜 대사를 그르친 것으로 관우의 죽음은 여몽의 죄이지 손권의 죄가 아니다. 게다가 관우의 혼령에 놀란 조조와 여몽은 결국 모두 병들어 죽어 버렸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연관된 사건은 종말을 고하는 것이 원래 이치이니 유비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

   셋째, 친정으로 온 손부인(孫夫人)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갈 뜻을 명백히 하였고 손권 역시 누이와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돌려보내길 원한다. 아울러 형주도 다시 돌려주고 영원히 유비와 동맹을 맺어 함께 조비(曹丕)를 멸하길 원한다.

   이 소식을 확인한 장달과 범강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오와 촉이 다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면 설령 장비의 목을 손권에게 바친다 하더라도 손권은 다시 유비에게 보낼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배마저 부셔진데다 장비는 죽어서도 저렇게 성질을 부리는데 어떻게 동오까지 갈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두 사람은 그만 장비의 머리를 강물에 던져 버리고는 배를 버린 채 잠적해 버렸다.

   장비의 머리는 물결 따라 동쪽으로 떠내려가다가 산과 강이 만나는 운안(雲安: 지금의 雲陽)에 도착하였다. 이 때 마침 강가에서는 늙은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다가 강물에 무엇인가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는 건져보니 사람의 머리인지라 다시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머리는 마냥 어부의 뱃전을 맴돌기만 하였다. 이를 괴이하게 바라보던 어부는 문득 자신의 어젯밤 꿈에 장비가 나타나 한 말이 생각났으니 꿈속에서 장비는 자기에게 읍을 하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노인장, 이제 이 몸은 곧 동오의 땅으로 도착하게 되오. 이 몸은 죽어도 원수의 땅을 보고 싶지 않으니 노인장은 나를 이곳에 묻어 주시오!"

   어부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강의 하류에서 멀지 않은 곳이 바로 백제성(白帝城)이었으며, 백제성은 바로 삼협(三峽) 입구에 위치해 있었으니 삼협만 지나면 바로 동오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급히 장비의 머리를 건져 올려 강변에 있는 비봉산(飛鳳山) 자락에 묻었으며 이웃 사람들을 모아 사당을 세워주었다.

   한편 장비의 흉보에 접한 유비는 비통함을 가누지 못한 채 장비의 몸을 낭중에 안장하고 사당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장비의 묘는 두 개가 되어 버렸다.

   운양현성(雲陽縣城) 남쪽으로 장강을 마주하고 서 있는 비봉산(飛鳳山)산 아래 울창한 측백나무 숲 속에는 웅장하고 찬란한 건물이 겹겹이 모여 있는데 이곳이 바로 장비의 사당인 장비묘(張飛廟)로 또한 장환후사(張桓侯祠)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 사당의 유리(琉璃)로 된 분벽(粉壁)에는 '강상풍청(江上風淸)'이라는 네 글자가 검은 색 바탕에 흰 색으로 써 있는데 그 격조가 매우 뛰어나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네 글자가 쓰여지게 된 내력에 대해 말한다면 또한 재미있는 고사를 지니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비는 자신의 머리를 안장해준 어부와 이웃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곳을 왕래하는 배들이 순조롭게 갈 수 있도록 언제나 30리의 순풍을 보내 주었다 한다.

   청(淸) 옹정제(雍正帝) 때의 일이다. 장붕핵(張鵬 : 1649~1725)라는 사람이 대학사(大學士: 재상)까지 출세하여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관선(官船)을 타고 고향인 사천성(四川省) 수녕부(遂寧府)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여러 날 뱃길을 몬 사공들은 매우 지쳤으나 쉬게 해주지 않았고 짐꾼들에게도 먹을 것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윽고 운양의 동라(銅 ) 나루터에 도착하여 배를 정박시켰는데 이 때에 사공들과 영접 나온 운양현의 관리들이 말하였다.

   "이곳은 본래 물살이 심해 강 언덕 양쪽에서 밧줄로 배를 끌어야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비 장군님의 사당에 참배하면 장군님이 30리의 순풍을 도와줍니다. 그러니 나리께서도   "

   그러나 장붕핵은 이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멸시하는 투로,
   "자고로 문신(文臣)은 무장(武將)에게 절을 하지 않는 법이다. 장수가 재상에게 절을 하여야지 어찌 재상이 장수에게 절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어서 갈 길이나 서둘러라!"
라고 말하였으니 그는 하도총독(河道總督)을 10년이나 지내면서 황하(黃河)의 치수(治水)에 공이 많았는지라 물의 속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기에 이런 미신 따위는 결코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부들을 시켜 배를 끌어가면서 간신히 30리를 지나 밤이 되서야 삼패계(三 溪)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 아침, 배를 움직이려고 하니 어느새 배는 동라 나루터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이에 크게 놀란 장붕핵은 다시 역풍과 역류를 무릎 쓰고 배를 끌게 하여 다시 삼패계까지 왔다. 그리고 닻을 내려 깊이 박고는 다시 굵은 닻줄로 매어두라고 명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배는 여전히 동라 나루터로 되돌아와 있는 것이었다. 셋째 날 역시 그랬다. 원래 장봉핵이 장비를 무시하며 망언을 하자 장비가 현령(顯靈)하여 밤에 역풍을 30리 보내주었기 때문에 배는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본 그의 고향 사람이 말했다.

   "나리, 나리께서 북경(北京)으로 가서 과거에 급제하여 귀향하셨을 때는 가시는 곳마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면서 관직이 각 성(省)의 순무(巡撫),총독(總督),하도총독(河道總督) 및 각 부서의 상서(尙書)를 거쳐 대학사에 이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리께서는   "

   장붕핵은 그제야 크게 뉘우치며,
   "잘 알겠소이다."
   라고 대답하고는 그 다음 날, 사공들과 짐꾼들에게 이틀을 푹 쉬게 하면서 좋은 술과 고기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목욕재계하고 관복을 입은 후, 장비 사당으로 가서 정성껏 참배하였다. 그러고는 다음 날 아침 배를 움직이니 순풍이 불어와 점심때도 못되어 삼패계에 닿았다. 이에 그는 크게 깨우치고 장비에게 감사했다.

   "장비는 비록 거친 무인이지만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애증이 분명하였으다 그리고 목민관(牧民官)으로 내직(內職)에 있을 때에도 선정(善政)을 베풀었다하니 과연 충량지사(忠良之士)요, 영웅이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에서 마련한 돈과 석재(石材)를 싣고 운양에 들려 조풍각(助風閣)을 지었으며 시 한 수를 읊었다.

   동라 옛 나루터는 촉강(蜀江) 동쪽에 있는데,
   순풍을 내려주신 선생께 깊이 감사드리네.
   나의 가벼운 배는 아무 것도 없어 부끄러웠기에,
   돌아오는 배에는 돛을 날리며 가득 돌을 싣고 왔네.

   銅 古渡蜀江東,
   多謝先生賜順風.
   愧我輕舟無一物,
   揚帆載石鎭空 .

   그 후, 장붕핵은 또 관우를 관부자(關夫子)로 불러 공부자(孔夫子)인 공자(孔子)와 함께 병칭(竝稱)토록 하자는 여론이 일자, 당연하다는 변론을 펼친 〈관부자지서(關夫子志序)〉라는 문장을 지어 유림(儒林)들의 반대에 부딪혀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아마도 장비의 신령함에 탄복한 나머지 촉한(蜀漢)의 영웅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존경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조풍각에는 '위우강정(威佑江程)'이라고 쓴 현판을 높이 걸었으며, 또 강가 석벽에는 '강상풍청(江上風淸)'이라고 큰 글씨로 새겨 놓아 오가는 배들이 모두 보면서 장비의 은덕을 기릴 수 있도록 하였다.

   실제로 지금까지도 장강의 급하고 험한 물살이 장비 사당이 있는 운양에 이르러서는 잔잔해질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언제나 큰 폭풍우가 없이 순풍만 분다고 한다.  

출처:정원기삼국지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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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림 | 작성시간 10.02.05 신기해요..삼국시대는 중국 최고의 혼란기인뎅 그 뒤를 이어서 5호 16국이라는 최고의 혼란기가 있었는데 왜 그런 혼란기에 대한 향수가 이렇듯 큰 것인지...아마도 유비가 통일 했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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