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 제20회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비는 한때 조조와 밀월관계를 보내며 조조의 지척에 기거하면서 일단의 세월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 시기였다. 한 번은 전공을 세운 일로 인해 조조의 손에 이끌려 어전으로 나아가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직계 선조가 바로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이라는 사실을 밝혀다. 유비를 만난 헌제(獻帝)는 즉시 「종족세보(宗族世譜)」를 가져오게 해서 검토해 보았다. 그러자 눈앞의 유비는 다름 아닌 자신의 숙부 뻘이 되는 사람이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황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편전으로 청한 뒤, 숙질 간의 예를 다했다" 그리고는 이로부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유비를 두고 유황숙(劉皇叔)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로써 작가 나관중은 물론이요 후대의 개편자인 모종강은 이 호칭을 유효 적절하게 써먹으면서 유비를 한실의 정통으로 삼은 「존유폄조(尊劉貶曹)」의 작품 주제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모종강본 《삼국지연의》만을 예로 든다 하더라도 회목(回目)에다 직접 「유황숙」이란 단어를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제11회의 「유황숙이 북해에서 공융을 구하다」, 제24회의 「황숙이 패주하여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다」, 제31회의 「유황숙이 말을 달려 단계를 건너다」, 제54회의 「유황숙이 동방화촉을 밝혀 아름다운 짝을 만나다」 등등이 그러한 예이다. 근래 어떤 사람은 논문에서조차 버젓이 "역사상의 유비는 비록 「황숙」으로 호칭되었지만…… "이라는 글을 썼지만, 기실 유비를 「황숙」이라고 호칭한 경우는 사서뿐만 아니라, 조기의 필기소설(筆記小說) 속에서조차도 확인할 길이 없는 문제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위(漢魏)시기의 사실을 고찰해볼지라도 역시 사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작품상의 사상주제 설정을 위한 필요성에 의해 임의로 창조한 호칭에 불과함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삼국지·선주전(先主傳)》에 의하면 유비가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라는 점만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칭 타칭을 불문하고 「황숙」으로 호칭될 리는 만무했을 거라는 게 필자의 견해이다. 황제의 방손(傍孫)이나 지손(支孫)들이 천하에 까맣게 널려있는 판이었으니, 황제보다 연장자가 되는 사람은 비일비재했을 게 분명하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황제보다 항렬이 높은 경우 역시 모르긴 해도 그 숫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어떤 특별히 존귀한 인물이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어찌 유비만이 홀로 「당연히 황제의 자리를 계승해야 할 분」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항렬이 황제보다 한 대 앞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황숙」이라고 부르고, 황제보다 두 대가 앞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황야(皇爺)」라고 부른다면, 세상에는 「황숙」과 「황야」가 넘쳐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황제의 할아비와 아제비가 도처에 우글우글하다면, 지극히 높고도 우뚝한, 그래서 너무나도 숭고한 황제의 위엄에 어찌 손상이 있을 수 없겠는가? 그래서 청대(淸代)의 고가상(顧家相)은 《오여독서전수필(五餘讀書廛隨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소열(昭烈-유비)이 한나라의 종실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 실지로는 당시의 실정을 완벽하게 묘사한 게 아니다."
게다가 유비가 한 나라의 종실이기 때문에 「정통」이라는 관점은 주희(朱熹)가 주장한 「혈통론(血統論)」의 답습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당시였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유비가 조씨, 손씨와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툴 때, 툭하면 혈통론이란 「법보(法寶)」를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봉건시대의 종법제도 관점에서 평가한다 할지라도, 오직 혈통을 위주로 천하통치의 정통이 계승되었다고 강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의 예로써 판단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두 나라는 주 나라의 그늘아래 존속하면서도 결코 하조(夏朝)나 상조(商朝)의 정통문제를 들고나와 주조(周朝)의 정통론을 배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를 꿰뚫고 있었을 《연의》의 작가는 「촉한 정통관」을 세우는 과정에서 유비가 「한실 종친」일뿐만 아니라, 상당히 유력한 「종친의 직계 자손」이란 권위를 차용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이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는, 유비가 어진 덕망으로 민초를 사랑하는 모습이라든가, 부하 장상(將相)들에 이르기까지 슬기롭고 의로운 인물이 되도록 묘사했던 것이다.
특히 나관중은 「황숙」이라는 이 아름다운 호칭을 유비에게 부여함으로써 수많은 독자들에게 「촉한 정통관」의 합리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 이유는 유비를 「황숙」으로 삼은 줄거리가 비록 허구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독자들이 이러한 허구를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사실은 작가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작가가 임으로 창조하거나 두찬(杜撰)한 내용을, 앞서 거론한 논문의 오류와 같이, 역사적인 사실로는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다.
「황숙」이라는 미칭(美稱)이야말로, 나관중이 유비의 얼굴에 「덧칠해 준 황금 가루」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문학 형상으로서의 유비는 얼마나 화려한 「광채」를 발하게 되었던가? 이렇게 외면을 덧칠한 것이 보기 좋다면 매우 보기 좋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이 결코 역사상 본래의 「면목」이라고는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출처 : 정원기 삼국지 연구소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한림 작성시간 10.02.04 그러고 보면 삼국지 초기에 등장하는 그 많은 유씨 성을 가진 태수들은 어떻게 하라구요..............이제 이해가 되네요......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이 세워졌는데 그 중 촉한에서 한나라를 황제 성 씨인 유씨가 황제가 되니까........유비를 올려서 명분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한나라는 살아 있었다.............라구요..........한나라의 맥은 한나라 황제의 종씨인 유비 공을 통해 명맥이 끊기지 않고 유지 되었다.........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