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 본 후기산업사회.잉여 쾌락의 시대 (권택영 문예출판사)
한낮의 절정은 석양을 잉태한다. 그러나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는 없다. 이미 시간이 흘러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26)
우리는 삶의 목표가 없이는 살지 못한다. 목표란 무엇인가. 결핍과 공허를 채워주는 ‘바로 그것’이다.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 무엇이다.(35)
젖과 꿀처럼 보이지만 막상 다가가서 입에 대려는 순간 딱딱한 돌로 변하는 것이 욕망의 대상이다. 실체는 돌이지만 맛있는 젖으로 보여야만 우리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욕망이라는 삶의 에너지다.(36)
아주 심한 경우 아무것도 아닌 물건을 유명인사가 쓰던 것이라는 이유로 부르는 것이 값이 될 때도 있다.
의식으로는 그 사람이 최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와 부러움이 작용하여 가장 적절한 사람을 배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45)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것의 불만>에서 마르크시즘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재산의 공유가 인간을 평등하고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 이전에는 인간에게는 숙명적인 적대감이 있고, 이 적대감은 삶의 에너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차별받을 때 평등을 원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인간이 가장 참지 못하는 것이 평등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더 나은 것을 얻으려 하고 더 많이 얻으려 하는 것이 욕망의 본질이므로 평등이란 갖지 못했을 때의 환상일 뿐이다.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이 침범하는 실천의 영역에서 주체가 부딪치게 되는 선택의 문제는 선과 악, 좋고 나쁨의 선택이 아니라 나쁨과 최악 가운데 선택하는 것이다.(51)
어린 시절 형성된 이마고는 이상형이 되어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마고는 오인에 의해 이루어진 이미지이자 되고 싶은 자신의 이미지이기에 현실에서 그런 대상을 찾을 수는 없다. 이상형이란 살기 위해. 삶의 목적을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이 환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실재계와의 만남을 지연시키는 욕망의 미끼, 오브제 아이다.(55)
이상형은 본래 상상계에서 형성된 자아 이미지다. 이것이 성인이 되어 대상에게 투사되면 연인이요, 삶의 목표가 된다. 나의 결핍을 완벽히 채워줄 것 같은 욕망의 대상처럼 보이지만 잡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연인은 잉여 쾌락이 숭고한 위치에 오른 환상의 대상이다.(56)
아무것도 아닌 것에 베일을 씌워 숭고한 무엇이 되도록 하는 것이 문명이고 승화이다.(60)
자신의 소설에서처럼 삶이란 순간순간의 강렬함이 없으면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71)
그렇다면 라캉이 말한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는 어디에 있고, 지젝이 말하는 판타지와 잉여는 어디에 있는가.(75)
운 좋은 악당이라. 다른 사랑을 얻었으니 운이 좋은 사람이고, 옛 사랑을 배반했으니 악당이다.(78)
포르노를 보면서 관객이 혐오감의 느끼는 것은 바라보는 대상이 혐오스러워서라기보다 스스로가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79)
이처럼 우리는 상상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아닌 것’에 덮어씌우고 평생을 속아서 산다. 즐겁게 속아서 산다. 진정한 즐거움은 이처럼 속아서 사는데 있다.(83)
역사는 순리대로 발전하는 거이 아니라 언제나 전복에 의해서 그 부산물로 얻어지기 때문이다.
지젝이 분화구를 실재계로 본 것처럼 실재계는 파괴의 흔적이지만 여전히 화염을 내뿜는 심연의 공간이다. 칸트의 말대로 폭발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면 장엄하게 보인다. 그러나 분화구 너무 가까이 가면 불에 타 죽고 만다. 멀리서는 아늑한 평화요, 가까이서는 분노의 화염인 분화구는 카린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이 된다.(97)
지젝은 애초부터 정신분석을 마르크시즘과 연결하려 했다. 사회주의의 이념 속에서 성장한 그에게 마르크시즘은 몸의 일부가 될 만큼 친숙했다. 공산권의 전체주의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그는 그 체제가 무너진 후 사회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이념과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마르크시즘과 연결시키면서 정신분석을 해체론적 유희보다는 계몽주의 선상에서 보려 했다.(106)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숨쉬는 연습을 반복하는 것이고, 반복을 얼마나 잘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기술이다. 반복에는 감동적인 반복이 있고 역겨운 반복이 있다.(112)
그 목표는 결코 우수리와 여분과 잉여를 남겨선 안 되며 완벽한 자아 이상을 실현하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완벽한 자아 이상의 실현이란 바로 죽음이다.(113)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쾌락이지만 이에 저항하는 것도 쾌락이다. 모든 혁명이 독재의 또 다른 형태를 띠는 이유도 혁명이나 독재의 주된 동력이 증오와 파괴적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114)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요, 성적 희열이 아니라 사도마조히즘적 폭력이기에 역사는 그토록 많은 전쟁과 파괴로 점철되어 있다.(115)
상상계적 동일시와 여성적 주이상스로 퇴행하여 파괴적 쾌락으로 치닫지 않게 하려면 개인의 선택과 판단력이 중시되어야 하고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118)
성과 사랑의 이중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는 소외되고 연약한 인물들이 사실은 삶의 신비와 진실에 더 가깝다.
인간의 비극은 태반이 성과 사랑이 겹치면서도 별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온다. 사회는 세 가지 타입의 사람들로 구성된다. 이중 구조에 노출되어 삶의 알 수 없는 신비에 그럭저럭 적응하는 사람,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서지는 사람, 이중구조를 모르고 단선적으로 밀어붙이다가 자신과 대상을 모두 파괴하는 사람이다.(119)
이러한 사랑의 가장 높은 대상이 신이다. 따라서 신을 숭배하지 못하면 연인이라도 숭배해야 한다.(120)
지젝은 최근의 책 <깨지기 쉬운 절대성>(2002)에서 후기 자본사회의 도착증적인 증상을 진단하고 사악한 반복을 우려한다.(123)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여 서술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정확한 과거가 아니라 이미 시간의 흐름에 의해 채색되고 변형된 과거이다. 아니 오히려 현재 욕망의 반영이다. 꿈을 의식하고 기억하고, 상대방을 의식하며 서술하고, 그것을 듣고 의미를 만들어내고...... 유감스럽게도 이 모든 분석 과정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요, 상징질서인 언어다.(124)
평소 동생을 질투하고 공연히 트집을 잡던 형이, 동생이 이웃집 아이에게 맞는 것을 보고 달려들어 동생을 보호하고 이웃집 아이를 때린다. 동생에 대한 적대감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이웃집 아이에게 옮아갔기 때문이다.(125)
미국 현대 작가 토니 모리슨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가 오히려 인간을 상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의 작품 <술라>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선은 도덕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악에 대한 방어로서 이루어진다. 악이 선을 낳는다.
불만과 근원적 적대감은 선과 도덕의 가르침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에게 옮아 갈 뿐이다.(126)
부러움과 증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사랑이란 승화되지 않으면 파괴적이고 이기적인 죽음 충동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127)
들뢰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사회를 아버지, 어머니, 나라는 삼각형으로 짜놓고 어머니를 금지하고 아버지라는 가부장제 자본주의를 실천하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름뿐이고 실세는 여전히 여왕(혹은 몸)이므로 들뢰즈가 불평한 말과는 달리 절대 권력이 아니다. 그의 <앙티-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 구조를 서구 제국주의의 기본 틀로 보아 비판하고 탈영토화 전략을 세우려는 정치적인 글이다.(128)
자의식은 적당한 정도로 유지될 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132)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오명>을 통해 대타자의 존재 이유를 살펴보자.
나치 간부인 세바스찬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가 비밀첩보원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녀는 남편에게 정보를 알아내어 미국 첩보원에게 전달하고 이를 알게 된 세바스찬은 당황한다. 아름다운 아내에게 매료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매일 약을 먹여 조금씩 아내를 죽이자는 어머니의 음모에 동의한다. 미국 첩보원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세바스찬의 집에 잠입한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간부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아래층을 통과해야만 했다.
히치콕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하다. 세바스찬과 첩보원은 자연스럽게 층계에서 내려와 여주인에게 아는 척하는 간부들의 인사를 받으며 집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는 세바스찬은 속으로는 애가 타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실책이 드러나고 그대로 암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타자의 위력이다. 그 순간 나치당원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권력으로 작용했기에 둘은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134,135)
라캉을 셸링, 칸트, 헤겔, 아도르노와 연결하면서 데리다, 들뢰즈, 버틀러, 스피노자, 하버마스를 비판하는 지젝은 라캉을 미국의 해체론에서 떼어내 독일 관념철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여기에 마르크스의 유산을 정신분석과 결합하는 지젝의 독창성이 있다. 그는 프로이트의 꿈의 형식과 마르크스의 상품 형식을 연결 지으며 꿈의 분석이 결과의 산물이듯이 상품의 가치도 교환의 결과물이라고 말했다.(141)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으로 땅이 흔들리고 폭풍우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장엄한 느낌에 휩싸인다. 왜 파괴의 모습에 마음이 고양되는가. 이것이 인간과 자연이 다른 점이다. 자연의 파괴적인 현상은 장엄하다. 그러나 자연의 파괴적 힘은 인간이 그것을 보며 느끼는 숭고함보다 하위에 있다.(150)
에로스의 본질은 너를 파괴해서 하나가 되고 싶은 충동이므로, 언제나 약속을 잘 지키는 연인은 더는 연인이 아니다.(152)
누군가를 미칠 듯이 사랑하는 일도, 누군가의 배반을 겪어볼 기회도 적었을 소박하고 조용하고 규칙적인 삶,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학자의 삶에서 몸의 충동과 무의식이 튀어나올 기회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평생을 빚에 시달리고 도박에서 돈을 몽땅 날리며 작품을 썼던 도스토예프스키, 간발작에 시달리고 빚에 쫓기며 작품을 썼던 도스토예프스키를 프로이트가 “죄를 지키는 간수”라고 말한 사실은 기억할 만하다.(155)
라캉이 칸트의 곁에 사드를 앉히려는 이유도 칸트의 초월적이성이 몸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는 칸트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면서도 그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사드는 기존의 법과 도덕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쾌락을 극단으로 밀고 갔다.(156)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모습과 노인이 긴 잠을 앞두고 집을 향해 걸어가는 장면은 삶이 부정성과 함께 태어난다는 진실을 보여준다. 삶은 죽음과 함께 태어난다.(169)
2003년 아카데미 각본상과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그녀에게>라는 영화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외롭고 가난한 어느 청년의 진부한 사랑 이야기를 매우 색다르게 표현한다.(176)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 구조에서 꼭지점에 있던 신이 사라지고 양 끝에 라이벌만 남아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면 흠모와 증오가 교차하고 순환이 빨라진다.(208)
기독교의 윤리는 법이 경계를 넘는 잉여 쾌락을 지닌다는 것을 알고 어느 쪽도 서운하지 않게 대해주는 것이다.(230)
지젝은 영화 <페이스 오프>를 예로 들며 정신분석의 윤리란 밝음의 이면을 인정하고 어느 한쪽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