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雪夜)
눈오는 밤
혜즙(惠楫, 1791~1858)
희미한 호롱불 아래 불경을 읽노라니
넓은 빈 뜰에 밤눈이 오는 줄도 몰랐다
깊은 산 숲속에는 아무 소리 없지만
고드름은 수시로 돌난간에 떨어진다.
一穗寒燈讀佛經(일수한등독불경)
不知夜雪洪空庭(부지야설홍공정)
深山衆木都無籟(심산중목도무뢰)
時有檐氷墯石牀(시유첨빙타석상)
눈 오는 겨울밤, 희미한 등불 아래서 불경을 읽는 스님은 이따금 고드름 떨어지
는 소리만 듣고 있다. 이뿐이다. 그러나 《장자》를 읽은 사람은 이 시가 그저 눈
오는 절간의 겨울밤을 읊은 시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장자》의 <제물론>
에 보면 “큰 나무 구멍에서는 세상 모든 소리가 난다. 사람의 소리는 세 구멍짜
리 피리 소리요, 땅의 소리는 많은 구멍에서 나는 소리다.... 사람의 소리는 듣지
만 땅의 소리는 듣지 못하구나” “이른바 ‘내가 아는 것’이 과연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는가?”라는 구정이 나온다. 법호(法號)가 철선(鐵船)인 이
스님이 자신은 아직 큰 도를 깨우치지 못하고 한갓 고드름 소리만 듣고 있으며,
불경을 열심히 파고들었지만 아직 멀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소개]
혜즙(慧楫)
법명을 慧楫(혜즙)스님이라 하고 법호를 철선강사(鐵船講師)라 기록되어있다. 성씨는 김씨로서 전남 영암 출신이다.
5살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14세 되던해인 순조4년(1804) 해남 두륜산 대흥사로 출가하여 성일(性一)스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다.
스님은 이후 각처를 돌아다니며 20여년 간 학인들을 교육하고 지관을 닦았다.
스님은 조선 철종 9년(1858) 대둔사 상원암에서 저술과 교육으로 일관한 67세의 생애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