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작성자이덕대|작성시간25.12.25|조회수95 목록 댓글 6

달력

 
  인간이 정한 한 해가 저문다. 소망으로 시작한 날들이 허망의 시간으로 쌓이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한다. 해 끝자락에 서면 무엇을 위해 뛰고 달렸는지 하는 스산한 마음과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날들을 보내야지 하는 바람의 시간을 갖게 된다.
 예년과 달리 따뜻한 겨울이라고 하나 귀갓길을 서두르는 도시인들은 잔뜩 웅크린 채 바쁜 걸음을 옮긴다. 성탄을 축하하는 트리가 교회 앞마당에서 어둠을 밝힌다. 차가운 날씨에 마음은 움츠러들지만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부족했던 일, 서운했던 일을 반추한다. 시간의 발자국이 남긴 세모의 쓸쓸함을 녹이고 싶은 탓이다.

 새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되니 해마다 그러했던 것처럼 예전에 근무했던 회사 후배가 달력을 챙겨 보내왔다. 올해는 달력 도착이 조금 늦었다. 택배로 보내기 위해 포장하는 단계에서 잘못이 발견되어 다시 제작하느라 늦게 보내게 되어 미안하다는 전화가 왔었다. 조금 늦는 게 대수랴. 퇴직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달력을 보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왠지 새해 달력을 보면 숙연해짐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감회에 젖는다. 느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시간을 알뜰히 나누어 쓸 수 있도록 만든 달력이란 참 묘한 물건이다. 해와 달, 별과 하늘 그리고 땅이 바뀌어갈 길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달력이 주는 느낌은 특별하기도 하고 마법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내온 달력이 넉넉한 것을 보니 곁에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나누라는 생각까지 보내온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지고 풍성해진다.
 예전에는 달력이 귀했다. 작은 산골 마을에 연말이 되어도 달력 한 장 오지 않는 집도 많았다. 대부분 집들은 지역 국회의원이 자신의 홍보용으로 나누어 주는 한 장짜리 달력을 안방 근처 잘 보이는 벽면에 붙여놓고 식구 전체가 사용했다.
 우체부 아저씨가 자전거의 커다란 가죽 가방에 그림 좋은 달력을 싣고 와 받을 집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건넬 때면 은근히 부러웠다. 그럴듯한 기업에 취직해있는 이가 있거나 관에라도 출입이 잦은 사람들은 진귀한 산수화나 세계 명소가 그려진 달력을 얻어다 방방이 걸기도 했는데 이러한 집들은 마을에 많지 않았다.

 달력을 많이 가진 집은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하고 여분의 달력은 벽지로 쓰거나 문종이로 활용하기도 했다. 옛 시절 달력은 그 집의 사회적 수준이나 권력이며 재력을 보여주는 지표 구실도 하였다. 유명한 산수화나 고풍스러운 가구 그림이 있는 달력은 인기가 좋았다. 물 때며 음력이 표시되고 메모할 여백이 충분한 달력은 훌륭한 생활 도구 역할도 했다.
 
  달력이 만들어지고 사용된 것은 왕조나 국가가 태동된 것과 궤를 같이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문지리를 살펴 나라살림을 부강케 하는 일이 나라 일의 근본일진대 일력에 맞추어 생업을 장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먼 옛날에는 달력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국력이었다. 역사적 기록을 고찰해 보면 조선조 초기만 하더라도 우리 선조들도 중국의 책력을 얻어다 사용했다. 중국의 책력조차도 왕이나 일부 권력집단만 볼 수 있었으며 일반 백성은 그저 해의 길이나 달의 바뀜에 의지하여 살았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7, 13981222일 조에 의하면 명나라 태조의 부음과 연호를 알리는 예부의 자문(咨文)과 대통력(大統曆) 1부를 사신 진강(陳綱)과 진예(陳禮) 등이 함께 보내와 이를 의주 만호(義州萬戶) 이귀철(李龜鐵)이 받아 조정에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세종 3, 1421220일 조에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조사(正朝使) 조비형(曺備衡)과 조치(曹致) 등이 돌아왔는데, 황제가 대통력(大統曆) 1백 권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조 12, 1466410일 조에는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정조사 통사 박지가 영수한 중국 대통력의 건수가 상이함을 국문케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왕이 의금부에 전지(傳旨) 하기를
 "정조사 통사(正朝使通事) 박지(朴枝)가 중국 조정의 대통력(大統曆) 11()을 영수(領受) 하였는데, 예부(禮部)의 영수 기록에는, 대통력 1백 건과 칠정력(七政曆) 한 건으로 되었으니, 그것을 국문하라.“
 고 되어있다. 당시는 달력이 곧 권력이었다.
 
  조선에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의 일이다. 세종 25, 144376일 조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만든 내편의 역법으로 대통력을 추산하게 했다고 되어 있으며, 1445330일 실록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순지(李純之)의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발문에서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天文)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하게 된 지가 오래인지라, 선덕(宣德) 계축년(1433)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儀象)과 구루(晷漏)의 기계며,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의 책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시었다. ~중략~ 역법에는 대명력(大明曆수시력(授時曆회회력(回回曆)과 통궤(通軌통경(通徑) 여러 책에 본받아 모두 비교하여 교정하고, 또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編)을 편찬하였는데, 그래도 오히려 미진해서 또 신에게 명하시어, 천문·역법·의상·구루에 관한 글이 여러 전기(傳記)에 섞여 나온 것들을 찾아내어서, 중복된 것은 깎고 긴요한 것을 취하여 부문을 나누어 한데 모아서 1질 되게 만들어서 열람하기에 편하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 책에 의하여 이치를 연구하여 보면 생각보다 얻음이 많을 것이며, 더욱이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힘쓰시는 정사가 극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책력이 곧 국력인 시절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나 과학과 문명이 발달하고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이제는 모든 이가 자신만의 일력과 달력을 가지고 산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새해 달력을 받자마자 집안의 대소사 일정을 기록하고 절기에 따라 주요 농사 계획은 물론 인근 재래시장 장날까지 표시하였다.
 달력을 보면서 올해는 추석이 일찍 들었다 느니 그 해 동지는 애동지니 노동지니 해가면서 달력을 통한 지식도 함께 나누었다.
 옛 문헌을 뒤적이며 달력 하나가 없어진 것에 왕까지 나서서 국문케 했다는 기록을 보면서 책력의 위력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하기야 달력을 모사하여 서로 나누고 특정 세력이 특정 일을 정해 변란이라도 획책하면 큰일이라는 염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변했다. 종이 달력이 점점 사라지 듯 지금은 종이로 만든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 한다.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면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사뿐만이 아니라 삶에 소용되는 어떤 정보도 쉽게 찾을 수 있고 필요 시마다 얻을 수 있다. 한 해의 삶을 달력에 의지하여 씨앗을 뿌리고 가축을 기르던 사람들보다 시간이란 괴물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의 노예가 많아진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종이문화가 퇴색되면서 달력도 그 필요성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한 듯하다. 책도 마찬가지다. 종이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요즘 젊은이들은 종이책보다 온라인상에서 자기만의 디지털 서가를 만들고 e북을 사서 읽고 보관한다. 굳이 종이에 인쇄된 책이 필요 없으니 고급스러운 양장본을 사서 장서로 진열하고 멋을 부리는 사람은 몇몇 가진이나 서재를 꾸미고 싶은 호사가에 불과하다. 종이 인쇄 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다.

 해가 바뀌면 벽에 걸어두고 마음에 새길 글귀나 그림을 보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채찍질하던 풍습도 사라져 간다. 미래가 어떻게 변해갈지 예측조차 불가능하다. 아날로그 문화에 익숙한 세대에게 01이 만들어낸 세상은 혼란스럽고 어렵다. 정을 나누고 싶은 사람에게 새해 달력을 보내며 안부를 묻거나 새해 첫날 달력의 여백에 나름의 계획과 소망을 적던 설렘도 없어졌다.
 한 해의 삶을 달력에 의지하여 씨앗을 뿌리고 가축을 기르던 사람들보다 초 단위로 쪼개어진 시간 괴물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의 노예가 많아진 탓도 없진 않을 것이다.
 삶이 팍팍해지면서 살림에 쪼들리는 작은 회사들은 물론 대기업들조차도 종이 달력 배포를 줄이는 추세다. 예전에 보았던 산수화나 모델이 등장하는 달력은 더 이상 보기가 어렵다.
 상대적으로 홍보나 고객 관리 차원에서 달력을 만들어 나누는 농협이나 은행 등도 발행부수가 제한되어 선착순으로 나누어 준다고 문자가 온다. 지구환경보존 차원에서 본다면 불필요한 달력 없애기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해가 바뀌는 이 시기에 새해 달력을 올려놓고 한 해 계획과 소망을 정리해 보는 것은 힘든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일이란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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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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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6 new 관심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작성자최수현 | 작성시간 25.12.26 new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2026년 丙午年 계획하시는 모든 일 이루어지길 기원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6 new 감사합니다
    님께서도 적토마처럼 활기찬 병오년이 되시길~~~
  • 작성자오영록 | 작성시간 25.12.26 new 감사합니다. 이선생님..// 다음 모임에 초빙하겠습니다.ㅋㅋ
  • 답댓글 작성자이덕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26 new 글쎄 제가 가도 되는 자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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