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은사님의 이별 준비 /이종영
봄의 길목으로 들어선다는 입춘인 지난 2월 첫째 일요일이었다. 모처럼 영화 《보디가드(BODYGUARD)》를 원작으로 한, "I Will Always Love You" 등 불멸의 OST를 남긴 뮤지컬 관람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밤 10시가 지난 늦은 시각인데 손전화가 울렸다. 뜻밖에도 태백에 계시는 은사님이셨다. "아니, 선생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가끔 안부를 드리긴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늦은 시각에 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보니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무슨 일은. 갑자기 자네 생각이 나서 목소리라도 들을까 하고 전화했지!" "별일 없으신 거죠?" "별일은……."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요즘 들어 자주 기억력이 떨어지고 몸에 이상을 느껴 검진을 받은 결과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당신께서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서 문득 내 모습을 떠올리셨다는 말씀에, 선생님이 계신 태백이 유난히 더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네 삶은 곳곳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깃들어 있다. 미약한 육체는 늘 크고 작은 무게의 아픔과 기쁨을 동반하며 살아간다. 가끔은 그 무게에 아파하기도 하고, 스스로 이겨내려 발버둥 치기도 한다. 개선된 식생활과 높은 의료 수준으로 평균 수명이 늘어나 백 세 인생을 살아가는 현실이지만,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길은 피할 수 없다. 선생님께서는 인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오신 분이다. 겹겹이 쌓인 가난으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던 어려운 시절,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뜻을 심어주신 가르침은 내 안에 강한 자아를 키우게 했다. 정확한 발병 원인도, 치료법조차 규명되지 않은 치매는 기억력 감퇴를 주증상으로 하는 완치가 어려운 병이다. 선생님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도 모르게 증상이 진행될 것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하다. 그래서 이 안타까운 이별을 미리 준비하시는 것만 같아 가슴이 저려왔다.
며칠 전 뉴스에서 외국 유명 제약사들의 치매 치료 신약 개발 발표를 보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마지막 임상시험 단계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치매 질환 치료의 길이 한동안 멀어지게 되었다는 불안한 소식이었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예고하며 찾아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예약된 손님이나 마찬가지다.' '치매는 환자 본인의 인격을 황폐화하는 것은 물론, 가족 모두의 삶의 질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어느 전문의의 말처럼 치매는 계속 진행되는 질환이기에 몸의 균형 감각까지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순간순간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은 가족 모두에게 안타까움만 안겨주지만, 주어진 현실을 거부할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남은 생애가 이육사 시인의 시 <황혼>의 한 구절처럼 흘러가기를 바란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 것에게 /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이 시처럼 푸르른 오월의 아늑함같이, 늙어가는 것에 추함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으며 아픔 없는 편안한 삶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님의 치매 질환을 3년째 겪어내고 있기에, 나는 선생님의 마음을 누구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지금보다 더는 증세가 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은사님의 남은 여생이 편안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어찌할 수 없는 아픈 마음 하나를 글에 담아본다.
* 좋은 만남 2017년 5월 호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