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복사꽃은 피고 지지 않아도

작성자이종영|작성시간26.06.15|조회수33 목록 댓글 4

복사꽃은 피고 지지 않아도 / 이종영

 

 

 우리의 삶 속에는 수많은 기다림이 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 기다림마저 아름다운지 모른다. 머무는 곳은 달라도 지나온 시간을 소중히 품고 산다면, 재회의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교단을 떠나신 뒤에도 오랜 세월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학창 시절의 은사(恩師)님을 찾아 몇 년 전 태백 철암을 방문했다. 실로 42년 만의 해후였다. 그리움의 세월에 비해 만남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은사님과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나는 유년에 떠나왔던 고향의 살붙이 같은 기억들을 더듬어보기로 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무렵, 철암광업소에 다니시던 아버님의 정년퇴직과 함께 우리 가족은 철암을 떠났다. 넓은 바다로 나간 연어도 산란기가 되면 모태의 물길로 회귀한다는데, 아무런 연고가 없다는 핑계로 이 검은 땅을 다시 찾기까지 무려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과거 1970년대, '검은 진주'를 캐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광부들이 구름처럼 몰려들며 철암은 삼척군의 작은 마을에서 태백시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백두대간의 중심인 태백산 정상에는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겨울이면 나뭇가지마다 피어나는 순백의 상고대가 환상적인 설경을 자아내지만, 태백산 자락의 철암은 구름 한 조각 떠다니는 옥빛 호수도, 바람에 서걱이는 갈대밭도 없는 척박한 땅이다. 이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봄날의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지지 않더라도, 병풍 같은 산자락 위로 손바닥만큼 내비치던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워가던 곳. 열두 살 그해 겨울, 여린 살을 에이는 눈보라를 뚫고 떠나온 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고서야 겨우 당도한 나의 고향이다. 그사이 석탄산업의 사양화로 크고 작은 광업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시로 승격될 무렵 들끓던 주민들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보존을 위해 복원해 놓은 까치발 건물의 빛바랜 실루엣만이 덩그러니 남아 흐린 날의 풍경을 지키고 있었다.

 

 대낮인데도 인적조차 끊긴 풍경 앞에 가슴이 싸해졌다. 탄광이 활황을 누릴 때만 해도 한 집 건너 주점이었고 다방이었다. 동네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호황을 누리던 터전이, 이제는 시간마저 박제되어 버린 회색 도시로 변해 있었다.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모든 것이 변해버린 풍경을 바라보려니 목이 메었다. 석탄가루의 검은 흔적은 옅어졌지만 동네의 전경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펼쳐놓은 듯 적막했다. 오롯이 나의 유년이 깃들어 있는 남동 사택을 비롯하여, 한 뼘 남짓한 월촌교 다리와 골목길마다 이제는 소식조차 알 길 없는 소꿉친구들의 숨바꼭질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지나는 바람마저 길을 잃었는지, 전봇대에 감긴 전깃줄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서민들의 아랫목을 따스하게 데워주던 연탄공장은 여전히 구공탄을 찍어내며 육중한 기계음으로 고향의 숨결을 전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번잡했던 시장 골목에는 오가는 발길이 뚝 끊겼다. 번창했던 예전의 날들을 눈물겹게 기억하려는 듯, 띄엄띄엄 문을 열어둔 가게들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촬영지였던 선탄장과 철암역 건너편 삼방동 마을의 풍경이 애잔하게 다가온다. 다행히도 낡고 벗겨진 담벼락마다 향토 작가들이 그려놓은 빛바랜 벽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 속에 그려진 고단한 광부들과 좌판 아낙들의 환한 미소에서 서글픈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정책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퇴출당해야 했던,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 나의 고향. 한 줌 햇빛조차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막장에서, 희미한 축전지 불빛 하나에 의지한 채 가족을 위해 생(生)을 걸었던 광부들이다. 자욱한 탄가루가 내려앉은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의 무사를 기도하던 장부들이다. 동료와 나누어 피우는 가치담배 한 모금에 안도하고, 마주하는 대포 한 잔에 삶의 애환을 녹여내던 그 숭고한 땀방울을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어머니의 품처럼 늘 아늑하고 따스한 것만은 아닐 터다. “일어선다. 손을 벌려 빛의 반사에 눈을 데우며 어제 달려간 당신의 집이 안락하다. 저기 검은 땅 위에 풀 돋아난다.” 벽화 귀퉁이에 적힌 글귀가 마음을 울린다. 이 소박하고도 힘 있는 문장처럼, 비록 탄가루로 얼룩진 고향 땅이지만 그 위로 화려한 꽃말은 없을지언정 영원히 시들지 않는 희망의 꽃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비록 퇴락하여 폐허처럼 변했을지라도 이곳은 나의 뿌리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태백, 너는 영원한 나의 고향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서 인간은 타향으로 가야 한다. - F. 카프카

 

* 좋은 만남 2014년 1월 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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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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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淸湖 이 철 우 | 작성시간 26.06.15 故鄕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긴 情感이 가는 좋은 글에 머무르다 갑니다.
    建安 健筆하시기를 祈願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종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감사합니다
  • 작성자오영록 | 작성시간 26.06.16 태백이 고향이신가요.. 이선생님.
  • 답댓글 작성자이종영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6 네 태백이 고향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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