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감자, 땅이 빚어낸 작은 기적
秀景 김철경
어제가 하지였다. 하지가 지나면 감자가 맛있어진다고 한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하지 무렵 캐낸 감자를 특별하게 여겼다. 겨우내 메말랐던 땅이 처음으로 내어놓는 넉넉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사계절 내내 감자를 먹을 수 있지만, 하지감자만이 지닌 풋풋한 향과 단맛은 따로 있다. 하지감자.
아내가 햇감자를 한 박스 주문했다. 흙이 아직 마르지 않은 감자를 씻어 쪄 보았다. 김이 오르는 감자를 반으로 갈랐을 때, 노르스름한 속살에서 풋풋한 여름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버터도 소금도 필요 없었다. 한입 베어 물자 담백한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가난했던 시절, 감자는 간식이고 주식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가마솥에 감자를 삶아 놓으셨다. 배가 고프면 감자를 먹었다. 감자는 밥상 한구석의 반찬이 아니라 식구들의 허기를 달래 주는 주식이었다. 감자에 설탕을 넣고 숟가락으로 으깨 먹으면 정말 꿀맛이었다.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 소박한 감자가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수많은 생명을 살린 식물이라는 사실을.
감자는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으로 전해졌지만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다. 땅속에서 자라는 식물이라 꺼림칙하게 여겼고, 심지어 악마의 작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유럽은 오랜 전쟁과 흉작으로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밀과 보리는 기후 변화에 취약했다. 반면 감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았다.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열량을 생산하려면 밀보다 훨씬 적은 땅이 필요했다. 역사학자들은 감자의 보급이 유럽 인구 증가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1700년대 이후 유럽 인구가 급격히 증가한 배경에는 감자의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다. 감자는 가난한 농민들의 식탁을 지켜 주었고 산업혁명기의 노동자들에게 에너지를 공급했다. 어쩌면 증기기관보다 먼저 유럽을 움직인 것은 감자였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위대한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은 감자 한 알도 역사의 방향을 바꾼다.
감자가 좋은 이유는 단순히 배를 채워 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감자의 약 75~80%는 수분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녹말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비타민 C, 비타민 B군, 칼륨, 인(P), 마그네슘 같은 중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다. 특히 하지 무렵의 햇감자, 하지감자는 저장 감자보다 비타민 C 함량이 높다.
감자 두세 개만 먹어도 하루 필요량의 상당 부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 칼륨은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돕는다. 혈압 조절에 도움이 된다. 인(P)은 세포막의 인지질 구성 성분이며 ATP의 핵심 원소이다. ATP는 생명체의 에너지 화폐다. 세포가 움직이고 성장하며 생각하는 모든 과정에는 인이 필요하다. 감자 속 탄수화물은 단순히 살을 찌우는 물질이 아니다. 태양빛이 광합성을 통해 녹말로 저장된 결과물이다. 우리는 감자를 먹으며 사실상 태양 에너지를 먹고 있는 셈이다. 생화학적으로 보면 감자는 땅속에 저장된 태양이다. 그래서 감자를 씹다 보면 묘한 포만감과 안정감이 찾아온다. 그것은 단순한 배부름이 아니라 생명의 연료를 공급받는 감각이다. 감자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조용히 품고 있다. 마치 평범한 부모의 사랑처럼.
나는 감자를 좋아한다. 감자는 소박한 서민과 같이 겸손하기 때문이다. 사과처럼 화려하지 않고, 포도처럼 달콤하지도 않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이 오면 사람들은 감자를 찾는다. 감자는 언제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람들의 허기를 책임져 왔다.
생각해 보면 인생도 그렇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작은 존재들이다.
하지의 햇감자를 먹으며 나는 땅을 생각한다. 태양을 생각한다. 그리고 묵묵히 씨를 뿌리는 농부를 생각한다. 감자 한 알은 작은 우주다. 그 속에는 흙의 인내가 들어 있고, 태양의 열정이 들어 있으며, 비와 바람의 시간이 들어 있다. 또한 굶주림을 견뎌 온 인류의 허기진 슬픈 역사도 함께 들어 있다.
올해도 하지가 지나갔다. 삶은 감자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을 바라본다. 그 김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면서, 인간을 살려 온 땅의 따뜻한 숨결이며, 어머니의 사랑이 스민 소박한 호흡이다.
나는 조용히 감자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리는 것은 거대한 힘이 아니라, 어쩌면 이렇게 소박한 한 알의 감자인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