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정희성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84)-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의지적, 달관적, 현실 비판적, 자전적, 대조적
◆ 표현 : 산문적 어조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담담하게 표현함.
자신의 의지를 담담하게 드러내는 달관적 어조
전통 시가 문학의 '낙구'를 계승한 흔적이 나타남(어쩌랴).
평이한 시어와 일상적인 말투를 사용하여 시상을 전개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법관, 돈 → 부모님의 기대이자 세속적 가치를 지닌 것들
* 시, 선생 → 화자가 추구하는 가치
* 먼 길 → 시인과 선생의 길
* 궁티 → 궁한 모양이나 태도, 가난한 처지
*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 화자의 아내마저 부모님과 동일한
생각을 가짐.
* 우리들의 시대는 ~ 살도록 가만 두지 않는다 → 없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
* 세상 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 세속적 가치를 좇아 살아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 그것 → 없는 사람들이 맘 편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
* 하늘 → 삶의 자세와 가치관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대상, 위안과 희망의 대상
* 평생에 ~ 죽기보다 어렵구나 → 양심을 지키며 선하게 살아가기 힘든 현실에 대한
탄식과 비판
* 어쩌랴 → 체념의 어조가 아니라 의지가 담긴 어조임.
* 바람 → 현실적인 유혹이나 시련
* 마음 단단히 먹고 / 한 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양심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다짐
◆ 화자 : 부모님의 세속적 기대에 어긋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삶에 대한 당당함을 안고 살고자 하는 사람
◆ 주제 : 자신의 가치관과 일상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의지
[시상의 흐름(짜임)]
◆ 1 ~ 6행 : 부모님의 뜻과는 달리 시인과 선생의 삶을 살아온 '나'
◆ 7 ~ 13행 : 없는 사람이 맘 편하게 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노여움
◆ 14 ~ 19행 : 가치관을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다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인 자신의 삶의 과정을 소재로 하여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이다. 가난한 성장 과정을 거친 나에게 부모님은 권력이나 명예, 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국어 교사가 되어 가난한 시인으로 살아간다. 실상 내가 원하는 것은 권력이나 명예, 부 같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족하며 선하게 사는 것인데, 세속화된 가치과니 팽배한 사회에서는 가난하지만 의롭고 선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화자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현실의 삶에 대한 화자의 노여움은 단지 자신의 삶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시대'를 향해 있다. 그것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유혹이 닥쳐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화자의 다짐과 의지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로,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매서운 꾸짖음으로 확장되어 울리는 것이다.
[작가소개]
정희성 : 시인, 교사
출생 : 1945. 2. 21. 경상남도 창원
학력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데뷔 :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변신'
수상 : 2001년 제16회 만해 문학상
1997년 제2회 시와 시학상
경력 : 2006.01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숭문고등학교 교사
작품 : 도서, 오디오북
1945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대전·이리·여수 등지에서 성장했다. 1964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 1970년 군제대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면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했다. 2002년 현재 숭문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 및 대기고등학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군복무시절이던 1970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데뷔 초기에는 질박한 시어로 표현된 《바늘귀를 꿰면서》(1970), 《백씨(白氏)의 뼈 1》(1972), 《불망기(不忘記)》(1974), 《얼은 강을 건너며》(1974) 등의 작품을 비롯해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와 향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1974년에 간행된 첫시집 《답청(踏靑)》에 실린 작품들은 이러한 경향을 띤 초기 시로 사회비판적인 성향보다는 고전적 상상력에 기초한 전아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유두(流頭)》 《전설바다》 《해가사(海歌詞)》 등은 신화적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절제된 시어로 형상화한 작품으로서, 작가의 시적 자기인식의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억압적인 사회 현실에 맞선 시인의 시대적 사명감으로 《새벽이 오기까지는》(1978), 《쇠를 치면서》(1978), 《이곳에 살기 위하여》(1978) 등의 사회성이 강한 시를 통해 인간의 삶을 열정적으로 노래했다. 초기의 시에서 보여준 절제와 균형미보다는 사회적 신념과 용기가 담긴 희망의 메시지를 위해 현실지향적인 의지를 작품화하게 되었다. 이 무렵의 시세계는 현실세계와 밀착되어 시적 보편성과 진실성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1978년에 발표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구체적 삶의 현장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참여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 시적 형식의 자유로움과 감성의 역동성을 확보함으로써 197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사적 성과로 평가된다.
이후 두번째 시집이 나온 지 13년 만인 1991년 세번째 시집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를 펴냈으며, 2001년에는 표제시 《시를 찾아서》와 《술꾼》 《첫고백》 《세상이 달라졌다》 등을 비롯해 43편의 신작시가 실려 있는 네번째 시집 《시를 찾아서》를 펴냈다. 오랫동안 말을 아끼며 시의 본령을 찾아나선 작가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절제된 시어로 잔잔하게 형상화된 이 시집을 통해 더욱 원숙해진 시세계를 엿볼 수 있다.
1960년대에 참여시를 개척한 김수영(金洙暎)·신동엽(申東曄)의 뒤를 이어 민중의 일상적 삶에 내재된 건강성과 생명력을 구체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견고한 사실주의의 시적 성취를 이룩한 1970년대의 대표적인 참여시인이다.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 시학사상을 수상했다. 저서에 시집 《답청》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등이 있으며, 번역서 《몽유왕국을 위한 음악》과 김태형과 공저인 이론서 《한국시의 이해와 감상》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희성 [鄭喜成]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