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작품♡]시와 해설, (박성룡, 처서기(處署記))

작성자황득 김한규|작성시간22.08.20|조회수761 목록 댓글 2

      처서기(處署記)

 

                              박성룡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렛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

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

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

 

 

어떤 것은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을,

어떤 것은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로,

어떤 것은 또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으로

들리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은 벌써 어떤 곳에서는 깊은 우물을 이루기도 하고

손이 시릴 만큼 차가운 개울물 소리를

이루기도 했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나는 아직은 깨어 있다가

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그 맑은 아침에 비로소 잠이 들겠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현대문학>(1964) -

 

해설

[개관 정리]

◆ 성격 : 영탄적, 감탄적, 감각적

◆ 표현

* 성숙과 결실의 계절로서의 가을의 이미지

* 관조적 어조로 자연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드러냄.

*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연 친화적 세계관을 드러냄.

* 처서의 깊은 밤에 느낀 '깨끗한 서늘함'을 형상화함.

* 자연시(자연친화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화자와 자연의 교감 내지는 일체화를 지향하는

서정시로, 자연시에서의 자연은 근대화로 파괴되기 이전의 자연 상태로, 단순한

향락의 대상이 아닌 삶의 근원으로서의 의미를 지님.)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처서 → 24절기의 하나로 8월 23일경, 입추와 백로 사이로 이 무렵부터 여름 더위가

가시기 시작함.

* 천지는 울리던 우렛소리

→ '생성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인고의 시간'을 뜻하는 것으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등장하는 '먹구름 속의 천둥'과 의미가 유사하다. '만물이 생성되는

인고의 시간'을 뜻함.

*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보다. → 여름이라는 인고의 시간이 끝나고 가을이 옴을

예감함.

* 고단한 꿈길 → 인고의 시간

* 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 → 맑은 기운을 대표하는 이미지

* 벌레 설레이는 소리 → 가을을 예감하는 소리

* 명주실같이 빛나는 시름 → 명주실처럼 가늘게 들리는 소리

* 재깍재깍 녹슨 가위 소리 → 어두운 사위를 잘라내는 듯한 굵은 소리

* 엷은 거미줄에라도 걸려 파닥거리는 시늉 → 단말마처럼 중간이 끊기어서 들리는 소리

* 깊은 우물, 개울물 소리 → 의미의 변용과 확산

* 저 우렛소리가 산맥을 넘고, 설레이는 벌레 소리가 / 강으로라도, 바다로라도,

다 흐르고 말면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 나는 잠이 들겠다.

→ 깨끗한 기운을 품고 있는 자연과 맑은 영혼의 교감을 나눈 후 잠이 들겠다는

것으로, 자연과 동화된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 시적 화자 : 서늘한 가을 기운의 깨끗함을 느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찾아오는

벌레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예민한 촉각의 소유자로, 자연에 대한 경외와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 주제 : 청신한 가을 기운과 맑은 영혼의 갈구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처서 가까운 밤에 느낀 가을의 예감

◆ 2연 : 가을을 예감하게 하는 벌레 울음소리

◆ 3연 : 깨끗하고 맑은 자연의 이미지

◆ 4연 : 자연과 교감을 나누는 삶에 대한 지향

◆ 5연 : 자연과의 동화와 교감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 처서의 깊은 밤에 느낀 '깨끗한 서늘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 위해 시인은 관념을 거의 내비치지 않고 철저하게 이미지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3연에 형상화되어 있는 벌레 울음소리는 '명주실, 녹슨 가위, 거미줄, 우물물, 개울물' 등의 시어를 통해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어, 가을밤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처서'를 제재로 하여 청신한 가을의 기운과 그러한 자연에 동화되어 순수한 영혼을 갈구하는 마음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24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는 조석으로 제법 신선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인데, 시인은 이를 깨끗하고 서늘한 이미지로 담담하게 형상화하였다. 3연에서 다채로운 이미지로 제시되는 가을 벌레 소리들은 이후 4연에서 맑은 물의 이미지로 바뀌어 강으로 바다로 합쳐져 흐르게 된다. 이러한 축제가 마무리되면 시적 화자는 비로소 자연과 동화되어 조용히 잠이 든다.

 

 

[작가소개]

박성룡 : 시인

출생 : 1934. 4. 20. 전라남도 해남

사망 : 2002. 7. 27.

수상 : 1989년 국제펜클럽문학상

1964년 현대문학상

경력 : 서울신문

언제나 조숙했던 늙은 소년

박성룡은 1930년 전남 해남군 화원면 마산리 389번지에서 아버지 박동준과

어머니 손고당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많은 형제가 있었으나

3명은 성장과정에서 사망하고 박성룡을 포함한 2남 4녀만 장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갔던 아버지가 8.15광복과 함께 돌아왔으나

오래지 않아 숨을 거두었는데, 그때 그에게 남긴 말이 “너무 허망하다”는

말이었다. 여섯 살에 가족이 모두 광주로 이사하였으나 4년 정도 늦은

출생신고 때문에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였다. 친구들이 모두 학교에

갔을 때도 박성룡은 혼자 남아 골목길을 지켜야 했다. 대신 한학을 했던

백부의 권유로 2년간 개명서당에 다니며 천자문과 일본어 등을 공부하였다.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봐 광주서중에 입학한

것도 이러한 연령 콤플렉스를 벗어나려는 몸부림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겪게 된 이러한 성장과정은 그가 관조적인 심성을 지니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늘 급우들보다 조숙했고 아는 것이 많은 ‘늙은 소년’이었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했던 그림

그가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커진 때는 광주서석초등학교 5학년 무렵으로

트르게네프의 「랍인일기』를 읽은 후였다. 광주서중에 진학하여서는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는데, 일요일이면 캔버스와 이젤을 짊어지고 교외에 나가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화구나 물감 살 돈이 없어 그만두게 된다. 훗날 이 스케치 체험은

시에 있어 사물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밀한 통찰력을 키워주고 감각적 이미지의

능숙한 사용을 가능하게 하였고 후일 신문사의 미술담당 전문 기자로 활동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서중 문예부원으로 활동하며 교지 「무등」에 자신의 시를

발표하며 문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만해, 미당, 지용을 비롯한 청록파 시인들의

시편들을 접하며 우리말의 참맛을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중앙대 영문과에 입학하였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0년대 광주 시단을 풍요롭게 하던 『영도』의 창간 동인

1955년, 50년대 광주 시단을 풍요롭게 했던 『영도』라는 동인지가 간행되었다.

‘영도’는 물이 얼기 시작하는 빙점(氷點)이자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깃점,

아무것도 없는 무치(無値)의 영(零)이기도 하지만 많은 가치가 시작되는

가능성의 출발점이다. 동인 대부분은 광주서중, 광주고 출신으로 아직

시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지 않은 대학 초년생들인 박성룡, 강태열, 정현웅,

윤삼하, 박이문 등이 학자금을 절약하며 참여하였다. 김현승과 박흡의 지도아래

동인지는 4호까지 출간되었으며 박성룡도 이 동인지에 「과실」, 「귀정」,

「바람 부는 날」, 「눈사람」, 「가로수」를 발표하였다. 『영도』가 나올 무렵,

광주에서는 목포를 중심으로 하여 호남일대를 장악한 동인지 『신문학』과

문학종합지 『시정신』이 있었다. 두 동인지의 화려한 지면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박성룡은 한국전쟁이라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영도』와 같은 패기

넘치는 동인지가 발행되었다는 데 큰 자부심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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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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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공 김낙범 | 작성시간 22.08.20 벌레소리가 흐르는
    처서의 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황득 김한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2.08.21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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