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 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 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내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울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가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 고양이 울어울어
종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채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 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시집 『낡은 집』, 1938)
[어휘풀이]
-은 동곳 : 은으로 만든 동곳. 동곳은 상투를 맨 후에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다는 장식임. 재력에 따라 금.은.동으로 만들었음.
-산호 관자(珊瑚貫子) ; 산호로 만든 관자. 관자는 망건의 당줄에 꿰는 작은 구슬
이 관자의 재료와 새긴 문양으로 신분을 표시하였음.
-무곡 : 장사하려고 많은 곡식을 사들임.
-콩실이 : 콩 시루, 시리(실기)는 시루의 함경도 사투리, 시루는 떡이나 쌀을 찌는
그릇.
-동글소 : 황소
-싸리말 : 싸리비. 함경도에선 아이들이 이것을 말 삼아 타고 놂.
-짓두광주리 : 바느질고리의 함경도 방언
-저릎등 : 겨릅등의 함경도 방언. 긴 삼대를 태워 불을 밝히는 장치.
-갓주지 : 갓을 쓴, 절의 주지승(住持僧), 옛날에는 아이들을 달래거나 울음을 그치게
할 때, 이 갓주지 이야기를 했다고 함.
-글거리 : 그루터기, 풀이나 나무를 베고 남은 밑둥
-뒤울 : 집 뒤의 울타리.
[작품해설]
1930년 후반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시 삼재(詩三才)로 손꼽혔던 이용악은, 일제의
압제를 피라여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땅을 버리고 생존을 위하여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떠나야만 했던 숱한 유이민들의 비극적 정서를 형상화한 민족주의 시인이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시집 『낡은 집』의 표제시로, 일제의 탄압을 피해 어디론가 떠나
버린 ‘털보네’ 집의 퇴락해 가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당시의 처절했던 유
랑민들의 슬픔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털보네’ 일곱 식솔이 사라진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해 나 있는 발자국을 발견하고 동네 노인들은 그들이 아마 무서운 오랑캐 땅이나 러시
아로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털보네’가 떠난 후, ‘거미줄’만 늘어나는 그 집은 이제 더
이상 퇴락(頹落)할 여지조차 없는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이 되어 ‘꽃 피는 철이 와
도 / 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대대손손에 물려줄’ 물건 하나 가지지 못한 전형적 조선
빈농(貧農)인 ‘털보네’가 야반도주(夜半逃走)를 한 것은 아마도 일제의 심한 감시의 눈길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은 개화기
이래 일제가 파행적으로 행한 허구적인 근대화 과정에서 손바닥만한 농토마저 ‘찻길’로 빼
앗긴 탓이요, 그나마 힘들게 소출(所出)한 ‘콩’마저도 ‘늙은 둥글소’에 의해 ‘항구’로 운반
되어 일제에 수탈당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가장 명징(明澄)하게 보여 주는 공간 지표인 ‘항구’를 쉴 새 없
이 드나든 탓으로 일찍 노쇠해 버린 ‘둥글소’와 꺼질 듯 위태롭게 ‘시름시름 타들어 가는
저릎등’과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은 ‘낡은 집’과 조화를 이루어 일제 치하 무기력한 백
성들의 곤궁한 삶을 표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차 ‘털보네’가 겪어야 할 암담한 미래를
예견하게 해 준다. 또한 9년 전, 시적 자아의 ‘싸리말 동무’인 ‘털보의 셋째 아들’의 출생
에 대해, ‘팔아먹을 수 있는 송아지’보다도 못한 것이라 하는 ‘마을 아낙네’들이 ‘무심코’
주고받는 ‘차가운 이야기’ 속에서 당시 농민들의 비극적 삶은 절정을 이룬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6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락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1937), 『이용악시전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윈-윈 박영선 작성시간 23.01.28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 동곳도 산호 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
답댓글 작성자황득 김한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1.30 박영선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 -
작성자소화 이병화 작성시간 25.12.11 함경도 사투리가 자주 등장하네요. 시에 사투리가 들어가면 더 정답게 다가와요. 오랜만에 다시 마주하는 <낡은 집> 또 새로운 느낌으로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