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작품♡]이용악,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작성자황득 김한규|작성시간23.01.30|조회수587 목록 댓글 0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이용악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는 섣달그믐

밤이

얄궃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부두로 왔다.

 

 

걸어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 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텁다.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고 못할 우라지오

 

(시집 『낡은 집』, 1938)

 

 

[어휘풀이]

-우라지오 : 러시아의 ‘브라디보스톡’

-아롱범 : 표범. 여기서는 냉혹한 현실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온 화자 자신을 비유

-자옥자옥 : 자국자국

-고수머리 : 곱슬머리

-마우재 : 러시아인

-살뜰히 : 매우 알뜰하게

-귀성스럽다 : 제법 구수한 맛이 있다.

-호젓 : 호젓하게, 외롭고 쓸쓸하게

 

 

[작품해설]

이용악은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등지로

떠돌며 살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비극적 현실을 시로 형상화해 내는 데 탁월한 능

력을 보여 준 시인이다. 그는 잃어버린 모국어와 민족적 정서를 되찾아 자신의 시어

로 육화(肉化))시키고, 이 정서를 튼튼한 서사구조와 검세한 서정성 속에 융화시킴으

로써 강렬한 주제 의식과 감미로운 정서를 고루 갖춘 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시는 먼 이국땅을 떠돌며 생활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간절

한 그리움을 다양한 비유로 노래한 작품으로, 이용악 특유의 북방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전 8연의 이 시는 내용상 5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단락은 1연으로, 고향에 대한 그

리움을 ‘불타는 소원’으로 변용하여 보여 준다. 시적 화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공간적

배경은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이며, 시간적 배경은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그믐’이요,

그가 이 곳으로 오게 된 원인은 ‘밤이 / 얄궂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 술을 마시

어’로 나타나 있다 이국을 유랑하며 생활해 오던 어느 겨울날,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화자는 ‘불타는 소원’으로 하여 마침내 ‘우라지오 부

두’를 찾아오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는 7연에서 제시된 것처럼

‘얼음이 두터운 바다’로 인하여 배 한 척 드나들지 못하는 상황으로, 그것은 화자가 쉽

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음을 보여 주며,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은 계절적 배경을 넘어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2단락은 2연으로, 화자가 자신이 지나온 인생 역정에 대한 회고를 보여 준다. ‘걸어

온 길가’로 비유된 그의 인생길은 비록 ‘찔레 한 송이’같은 작은 위안이나 행복조차 없

었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현실과 맞

서 싸워 온 ‘아롱범’ 같은 삶이었기에, 오해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어깨에 쌓여도 하

얀 눈아 무겁지 않’을 정도의 자부심까지 느끼고 있다.

 

3단락은 3~5연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부분이다. 유년 시절, 어머니는 자주 우라

지오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화자는 밤이 깊은 줄도 모르

고 더욱 어머니를 졸랐으며, 그 때마다 어머니는 구수한 말솜씨로 화자를 우라지오에 데려

주곤 하였다. 4단락은 6연으로, 그같이 아름답고 행복했던 유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화자는 지금까지 지난날의 추억을 ‘살뜰히 담’고 생활

해 왔기 때문에, 그의 추억은 늘 ‘귀성스러웠’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마음의 은줄에 작

은 날개를 털’게까지 하고 있다.

 

5단락은 7, 8연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재 상황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바다는

화자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지만, 두꺼운 얼음으로 인하여 도저히 배를

움직일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화자는 하늘을 나는 ‘멧비둘기’가 되어 고

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헛된 꿈임을 깨

닫고는 더욱 깊은 어둠과 그리움 속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여기서 ‘등대’와 ‘나’는 ‘서로 속

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겨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등대’

는 먼 바다로 나간 우라지오 항구의 배들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요,

‘고향’같은 존재이기는 하지만, 우라지오가 타향인 화자로서는 그것에서 위안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외로움을 더욱 증폭시켜줄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고향을 찾아 우라지오

항구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그와 반대로 ‘등대’는 우라지오 항구를 떠난 배들을 제 안으로

돌아오게 한다. 즉 화자에게 우라지오는 하루속히 벗어나고 싶은 부정적 대상일 뿐이기에,

‘등대’가 불을 밝힐수록 화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해지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꿈과 동경의 대상이 아닌, 고통과 슬픔의 공간이요, 나아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는 배경일 뿐인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이제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이’는 ‘밤’을 맞이해 아름다운 추억 속으로 끝없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꿈은 결코 실

현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는 결국 ‘가도오도 못하’는 한계상황 속에서 더욱 고통스러워 한

다. 화자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이 그의 의지에서 나온 것도 아니요, 실수나 우연의 결

과로 빚어진 것도 아닌,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것이기에, 이 시는 일반적인 고

향 노래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이 시는 일제에 의해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우리 민

족의 한과 슬픔ㅇ르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작가소개]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6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여 등단

1939년 일본 상지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락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때 월북

1971년 사망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현대시인전집)(1937), 『이용악시전집』(1988),

『북쪽은 고향』(1989),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89)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