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시문학』 2호, 1930.6)
♣작품해설
이 시는 영랑이 실험적으로 즐겨 쓴 4행시의 확대 형식으로 같은 내용의 4행시 두 편이 이어져 있는 작품이다. 그의 첫 시집 『영랑시집』(1935)에 수록된 5편의 시 중 절반이 넘는 28편이 4행시인데, 그가 이처럼 4행시를 즐겨 쓰게 된 동기는 알려진 바 없지만, 아마도 한시(漢詩)의 기·승·전·결의 구성이나 4구체 향가 형식에서 그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한다. 4행시의 짧은 시 형식에 완결된 시상을 담는다는 덧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그의 시가 갖는 주제 의식과 전통 율조에 가까운 리듬 감각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시도와 노력은 이해될 만하다.
이 시는 밝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유성음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부드러운 해조(諧調)로 만들고 있으며, ‘살포시’·‘보드레한’과 같은 아름다운 우리말 구사와 ‘새악시’·‘부끄럼’ 같은 한 음절을 가감(加減)하는 언어 조탁을 통하여 영랑의 탁월한 시작 능력과 그만의 감미로운 서정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내 마음 고운 봄길 위에」가 원제목인 이 시의 짜임새와 내용은 상당히 단순하다. 두 연의 1,2행은 모두 ‘-같이’로 마지막 행은 ‘-고 싶다’라는 형식으로 시적 화자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그의 소망은 지극히 소박한 것으로, 다만 ‘하늘을 우러르고(바라보고)싶’을 뿐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나,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은 이미지로 현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안식과 평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가 노래하는 대상은 ‘하늘’ 그 자체가 아니라 ‘하늘’을 우러르고 싶은 ‘내 마음’이다. 따라서 ‘하늘’을 우러르고 싶은 내 마음이 비유된 ‘햇발’·‘샘물’·‘물결’은 바로 시인이 처해 있는 지상의 현실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작가소개]
김영랑(金永郞)
본명 : 김윤식(金允植)
1903년 전라남도 강진 출생
1915년 강진보통학교 졸업
1917년 휘문의숙 입학
1919년 3.1운동 직후 6개월간 옥고
1920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 입학
1922년 아오야마학원 영문과 진학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49년 공부처 출판국장
1950년 사망
시집 :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영랑시선』(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