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차(忍冬茶)
정지용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삶긴 물이 내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문장』 22호, 1941.1)
[어휘풀이]
-삶긴 : 삶기다. 물에 넣어 끓이다.
-덩그럭 불 : 잉그럭 불, 장작의 다 타지 않은 덩어리에 붙은 불
-잠착(潛着)하다 : 어떤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골돌히 쓰다.
-책력 : 달력
[작품해설]
이 시는 동양 고전에 심취하며 1940년대 일제 암흑기를 살아가는 정지용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인동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노주인인’ 작중 인물은 바로 시인 자신이며, 그가 마시는 ‘인동차’는 겨울로 표상된 일제 치하를 견디게 하는 인내와 기다림의 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특히 2연과 3연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에 대한 시적 자아의 인식을 보여 준다. 즉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꺼진 줄 알았는데 ‘도로 피어 붉고’ 그늘져 있는 마당 한구석에 묻어 둔 ‘무가 순 돋아 파릇한’ 모습에는, 시인의 의지와 소망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은 비록 ‘삼동이 하이얀’ 시절로 세월 가는 것마저도 다 잊어버리고 싶은 험난한 세상이지만, 시적 자아는 ‘흙냄새가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 소리에 잠착하’듯이 굳은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이 겨울 같은 모진 현실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작가소개]
정지용(鄭芝溶)
1903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8년 휘문고보 재학 중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 발간
1929년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33년 『카톨릭청년』 편집 고문, 문학 친목 단체 ‘구인회’ 결성
1939년 『문장』지 추천 위원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추천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1950년 납북,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