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난 초생달이 시리다.
(『여성』 1939. 4)
[어휘풀이]
-초생달 : 초승달의 잘못
[작품해설]
김기림은 1930년대 중반 이후 모더니즘 시론(특히 주지주의)의 수립과 시 창작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의 도입 등으로 시인으로서보다는 비평가로서의 업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김기림의 시는 어떤 사상적 깊이보다는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감각적 이미지만이 뚜렷하게 부각되는데, 이것은 모더니즘, 특히 이미지즘 계열시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한 때 T.S.엘리어트에 경도됨으로써 「기상도」 등에서 자주나타나던 생경한 외래어나 경박함이 사라진 대신, 견고하고 선명한 이미지 제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비교적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월 바다의 푸른색과 흰나비, 그리고 새파란 초생달 색채의 대비가 특히 두드러지는 이 시는, 간결한 이미지가 ‘-다’로 끝나는 어조 속에서 그 냉정함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결 사나운 바다에 나비를 대비시킨 김기림의 상상력은 신선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S.스펜더의 「바다의 풍경」 3연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바다’는 삼월에도 꽃이 피어나지 않는 무생명의 공간으로 문명의 무생명성 내지 불모성(不毛性)을 상징한다. 그 곳을 ‘청무우 밭’으로 오해해서 내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흰나비’는 현실의 모진 세파(世波)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낭만주의적 존재로 어쩌면 김기림의 청년 시절 모습일지도 모른다.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바다’는 근대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모험과 시련, 또는 문명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이 시에는 1936년 29세의 나이에 기자와 시인이라는 명성을 버리고 이러한 바다를 건너가 일본에서 일개 외국 문학도가 된 김기림의 낭만적 기질이 투영되어 있다. 시인은 역사 혹은 운명과 같은 거대한 힘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는 표현으로 형상화한다. 이는 힘없이 날개만 파닥 거리던 당시 식민지 지식인의 초라한 모습의 시적 상징이라고 할 것이다.
[작가소개]
김기림(金起林)
본명 : 김인손(金仁孫)
1908년 함경북도 학성 출생
1921년 보성고보 중퇴 후 도일, 릿쿄(立敎) 중학 편입
1926년 니혼(日本)대학 문학예술과 입학
1930년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
1931년 『신동아』에 「고대(苦待)」, 「날개만 돋치면」을 발표하여 등단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 창립
1935년 장시 「기상도(氣象圖)」 발표
1936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大) 영문학과 입학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직 활동 주도
1950년 6.25 때 납북
시집 :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1946), 「새 노래」(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