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작품♡]서정주, 무등을 보며

작성자황득 김한규|작성시간23.09.25|조회수766 목록 댓글 0

                              무등을 보며

 

                                                                          서정주

 

 

가나이야 한낱 남루(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山)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午後)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현대공론』 8호, 1954.8)

 

 

[어휘풀이]

-무등 : 무등산, 광주광역시 북구와 화순군 이서면, 담양군 남면과의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187m

-남루 : 헌 누더기

-갈매빛 : 짙은 초록빛

-지란 : 영지와 난초

-농울쳐 :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어

-쑥구렁 : 쑥이 자라는 험하고 깊은 구렁. 무덤

-청태 : 푸른 이끼.

 

 

[작품해설]

이 시는 초기시의 특징이던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끝나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나아간 미당 시의 제2기 대표작이다. 미당은 6.25 직후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시인은 전쟁으로인한 상처와 가난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무등산의 높은 기개와 의젓한 자태를 인간 삶이 배워야 할 하나의 모형으로 생각하여 이 시를 창작하였다고 한다.

미당에 의하면, 가난은 ‘한낱 남루헤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름 무등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가릴 수 없다. 이것은 그의 생활 철학의 반영으로, 가난이란 그야말로 누더기 옷과 같이 우리를 간혹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고 불편하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순수성은 결코 덮어 가릴 수 없다. 다시 말해, 무등산이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서 아름다움을 구현하여 보여 주듯, 인간도 순수한 알몸 그 자체로 자신의 참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푸른 산이 제 품에 영지와 난초로 대표된 기품있는 꽃을 키우듯, 우리들도 비록 가난한 생활이라 하더라도 자시만큼은 지란처럼 고결하게 키워야 한다는 의연한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도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때가 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일손을 잠시 놓고 따뜻한 눈길을 서로 주고 받는 사랑과 신뢰로써 가난을 참고 견디라고 화자는 자상하게 충고한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이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고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그들 부부가 가난 속에서도 진정 행복했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들은 그들 부부가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덤가에 이끼가 자욱하게 덮여 그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할 것임을 믿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늠름하게 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무등산의 지혜를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뜨거운 육성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등산’의 ‘무둥’(無等)은 등급이 없는 평등을 이르는 불교 용어인 바, 이 작품을 통해 시인이 제시하고 싶었던 인간 삶의 궁극적 지표도 결국은 ‘무등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

시 전문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 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55년 자유문학상 수상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2000년 사망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호반』(1953), 『서정주시선』(1956), 『신라초』 (1961), 『동천』(1969), 『서정주문학전집』(1972), 『국화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 (1975), 『떠돌이의 시』(1976), 『학이 울고간 날들의 시』(1982), 『미당서정주시선집』 (1983), 『안 잊히는 일들』(1983), 『노래』(1984), 『시와 시인의 말』(1986), 『이런 나

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연꽃 만나고 가는 사람아』(1989), 『피

는 꽃』(1991),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민들레꽃』(1994), 『미당시전집』(1994), 『견우의 노래』(1997),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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