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작품♡]김춘수, 나목(裸木)과 시(詩)

작성자황득 김한규|작성시간23.12.14|조회수307 목록 댓글 0

                              나목(裸木)과 시(詩)

 

                                                                                 김춘수

 

 

겨울 하늘은 어떤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깊이에로 사라져 가고

있는 듯 없는 듯 무한(無限)은

무성(茂盛)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무과관(無花果)나무를 나체(裸體)로 서게 하였는데

그 예민(銳敏)한 가지 끝에

닿을 듯 닿을 듯 하는 것이

시(詩)일까

언어(言語)는 말을 잃고

잠자는 순간(瞬間)

무한(無限)은 미소(微笑)하며 오는데

무성(茂盛)하던 잎과 열매는 역사(歷史)의 사건(事件)으로 떨어져 가고,

그 예민(銳敏)한가지 끝에

명멸(明滅)하는 그것이

시(詩)일까.

 

(시집 『부ㄱ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1959)

 

 

[작품해설]

이 시는 ‘무의미(無意味) 시’ 이전의 시론(詩論)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김춘수 시의 변화 과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김춘수는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으로 시가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물의 정확성과 치밀성, 진실성을 추구한다. 그 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릴케의 영향에서 벗어나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적인 성격의 문장을 시의 형식으로 옮기는 이른바 ‘의미의 시’로 변모한다. 그는 우리나라 시사에서는 보기 드문 인식론적 · 철학적 시인으로, 대상의 본질에 대한 추구를 관념이 아닌 이미지로 포착해 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시는 시인의 언어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통찰과 불투명한 세계를 언어로 포착하려고 하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무성하던 잎과 열매’ · ‘무화과나무’ · ‘언어’ · ‘역사의 사건’ 등은 실재적인 것 · 공리적인 것 ·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것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것들이 ‘사라져 가고’, ‘떨어지고’, ‘나체로 서고’, ‘말을 잃고’ 함으로써 ‘시’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시론에서 “완전을 꿈꾸고 영원을 꿈꾸고, 불완전과 역사를 무시해 버린다.”라고 말한바 있는데, 그렇다면 이 시에서 사라지고, 떨어지고, 잃어버린 것들이 바로 불완전하고 역사적인 것들인 셈이다. 그러므로 완전과 영원을 꿈꾸는 그가 그솟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화과나무는 ‘무성하던 잎과 열매를 떨어뜨리고’ ‘나체로 서’ 있어야 하며, ‘언어는 말을 잃’어야 하는 것이다. 그 순간 ‘닿을 듯 닿을 듯’ ‘명멸하는’ 것이 영원의 모습이며, 그것이 시인이 꿈꾸는 완전한 언어, 바로 시(詩)인 것이다. 그렇가면 완전하고 영원한 것은 ‘어떤 불가사의의 깊이’ · ‘무한’ · ‘시’인 반면, 불온전하고 역사적인 것은 ‘무성하던 잎과 열매’ · ‘역사의 사건’ · ‘언어’이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모든 실재(實在)를 언어로 제시해 보려는 철학적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동일한 시구의 반복이 특징이다. ‘사라져 가고’와 ‘떨어져 가고’에서의 ‘-가고’의 반복을 비롯하여 ‘무성하던잎과 열매’ · ‘그 예민한 가지 끝에’ · ‘무한’ · ‘시일까’ 등의 반복이 나타나 있다. 또한 이 시는 1~7행의 전반부와 8~14행의 후반부가 대응하고 있는데, 특히 전반부에서의 ‘무한과 시’의 관계는 후반부의 그것과 일치한다. 즉 나목(裸木)이 된 무화과나무의 ‘예민한 가지’를 통해 언어가 무한에 이른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한’이란 절대이자 사물의 실재로,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바로 이 ‘무한’으로 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모든 인생론적 문제는 이 사물의 실재를 파악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 사용된 반복법은 이러한 생각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무한’을 ‘있는 듯 없는 듯’으로, ‘시’를 ‘닿을 듯 닿을 듯’으로 표현한 것 역시 ‘시’가 미지(未知)의 대상인 ‘무한’을 포착하여 그려내는 예민한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작가소개]

김춘수(金春洙)

 

1922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중퇴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시화전』에 시 「애가」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제7회 아세아자유문학상 수상

대한민국문학상 및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경북대학교 교수 및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구름과 장미』(1948), 『늪』(1950), 『기(旗)』(1951), 『인인(隣人)』(1953), 『제1집』(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打令調)·기타』(1969), 『처용(處容)』(1974), 『김춘수시선』(1976), 『남천(南天)』(1948),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꽃을 위한 서시』(1987), 『너를 향하여 나는』(1988), 『라틴 점묘』(1988), 『처용단장』(1991), 『돌의 볼에 볼을 대고』(1992),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1993), 『서서 잠자는 숲』(1993), 『김춘수시선집』(1993),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가을 속의 천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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