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념(情念)의 기(旗)/ 김남조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나에게 원이 있다면
뉘우침 없는 일몰(日沒)이
고요히 꽃잎인 양 쌓여 가는
그 일이란다.
황제의 항서(降書)와도 같은 무거운 비애(悲哀)가
맑게 가라앉는
하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은 없을까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서
때로 울고
때로 기도 드린다.
(시집 『정념의 기』, 1960)
[작품해설]
모윤숙, 노천명의 뒤를 이어 여류 시인 계보를 이은 대표적인 시인인 김남조의 시 정신은 ‘사랑’이다. 김남조의 사랑은 초기 시의 인간적 · 지상적(地上的) 사랑에서 후기 시에 이르면 근원적 · 초월적인 방향으로 심화되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마음속의 갈등과 번민을 극복하고 순결한 영혼과 평화로운 안식을 갈구하는 자신의 소망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그리워하는 대상은 단순한 연가(戀歌) 속에 등장하는 애정의 임이 아닌, ‘햐얀 모랫벌 같은 마음씨의 벗’과 같은 임으로 인간 존재의 ‘무거운 비애’를 초월한 분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깃발이라는 구체적 사물에 마음을 비유하여 모든 욕망과 번뇌, 갈등을 극복하며 그와 같은 임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제목 「정념의 기」에서 ‘정’은 곧 자신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념’은 신(神)에 대한 염원으로, ‘기’는 자신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