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사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이 있다. 지리산 초입에 자리잡은 남사예담촌은 안동하회마을과 더불어 경상도의 대표적인 전통한옥마을이다. 경남하면 산청남사 마을이라고 할 정도로 옛날부터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이 마을은 양반마을로도 유명하고 전통 한옥 마을로도 유명하다. 전통가옥이 하루가 다르게 사라져가는 요즘 평범하게 살아 가면서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일부러 찾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지리산 초입의 이 작은 마을이 유난히 정감 있고 고풍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해묵은 담장 너머 엿볼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의 정서와 삶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농촌전통 테마마을로 지정된 "남사 예담촌"은 고즈넉한 담장 너머 우리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어 표면적으로는 옛 담 마을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내면적으로는 담장 너머 그 옛날 선비들의 기상과 예절을 닮아가자는 뜻이 있다. 한옥은 수천 년의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그 시대 삶의 양식을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한 민족의 문화가 전통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를 딛고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그 변화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어야 할 것이다. 농촌 전통테마 마을 남사 예담촌은 변화하는 현재속에서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나가는 배움의 휴식 터로 자리 잡을 것이다.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청계를 가운데 두고 남사는 진주에, 상사는 단성에 속하였는데 그때 두 마을의 명칭이 같은 사월리였다고 합니다. 1906년에 와서 진주의 사월면이 산청군으로 편입되면서 남사도 단성군 사월면으로 산청에 속하게 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단성군이 단성면으로 격하되어 산청군에 통합될 때 두 마을은 단성면에 속한 남사마을과 상사마을로 분리되었습니다. 남사마을에서는 수많은 선비들이 태어나 서당에서 공부하여 많은 수가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은 빛내던 학문의 고장으로, 공자가 탄생하였던 니구산과 사수를 이곳 지명에 비유할 만큼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는 마을로 유명합니다. 그 이름의 변용은 사양정사, 니사재, 이동서당 등의 서재 명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왕봉에서 일백여리를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가 니구산인데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입니다. 마을은 당산이 숫룡의 머리이고 니구산이 암룡의 머리가 되어 서로머리와 꼬리를 무는 형상인 쌍룡교구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반달모양의 마을 터를 배 모양으로 생각하여 마을의 중심부에는 그 무엇도 채우지도 않고 우물도 파는 것도 금하여 왔다고 합니다 ◈ 경호강 거울같이 맑고 깨끗한 호수의 강이란 뜻의 경호강은 강폭이 넓고 큰 바위가 없으며, 굽이 굽이에는 모래톱과 잔돌들이 퇴적되어 있어 유속은 빠르지만 소용돌이 치는 급류가 거의 없어 신종 수상 레저인 래프팅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으로 각광받고 있는 곳입니다. 경호강 래프팅은 기초체력훈련(PT체조), 수상 적응교육, 위기 대처교육 등의 수중 레크리에이션을 하면서 팀웍과 개인간의 조화 능력을 함양시키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일백여리를 흘러와서 우뚝 멈춘 수려한 봉우리 니구산에서, 그 모습이 아름답고 그 아래를 휘감아 흐르는 사수(泗水,남사천,淸溪)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넓은 들과 울창한 숲이 주위를 둘러친 천혜적 자연 승지(勝地)로 쌍룡교구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산청 남사마을은 그 모습과 기상을 닮아가자는 의미에서 예담촌이라 칭하였습니다. ◈ 예담촌이란?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옛 담의 신비로움과 전통과 예를 중요시하는 이 마을의 단정한 마음가짐을 담아가자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 최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높고 튼튼한 대문이 버티고 있는 인상적인 고가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최씨 고가입니다. 최씨 고가는 현재 세대주인 최재기 씨의 부친이 1920년에 지었습니다, 부농이었던 주인의 상황을 말해주듯 이 고가는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화려한 모양새를 강조하였습니다. 때문에 한옥 특유의 안정적이고 소박한 멋은 없지만 곳곳에 자리한 실용적인 구조로 선조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고가로 명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뒷간 최씨 고가의 뒷간은 여느 변소와는 달리 2층으로 되어있어 계단을 올라가서야 일을 볼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에 있었던 '임원경제지'라는 농업생활 백과사전에서 위생적이고도 효과적인 인분 활용을 위해 올려 만들도록 권장한 것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 합니다. 2층 변기에서 일을 보고 1층에 자리한 흙이 담긴 상자에 담겨지면 그 위에 땔감의 재를 덮어 냄새를 줄이고 발효를 촉진시킵니다. 또한 뒷간 남 쪽으로 홈을 내어 소피 본 후 자연스레 흘러나와 고이도록 둥글게 구덩이를 파 놓아 인분이 가장 좋은 비료였던 옛날, 그 시절의 알뜰하고도 기막힌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 이씨 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8호)
남사예담촌의 상징이 되어버린 X자형 회화나무 골목입구로 들어서면 이씨고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지막한 돌담 끝에 있는 대문을 지나면 그 옛날 화려했을 사랑채와 2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는 안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랑채, 익랑채, 곡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로 배치된 가운데, 왼편으로 사당이 있습니다. 집안의 부유함을 말하듯 화려하고 과장된 건축기법이 사용되었지만 그럼에도 아담한 우리네 한옥 특유의 맛이 있는 고가입니다. ◈ 곽종석선생유적-이동서당(尼東書堂) (문화재 자료 제196호)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에 설립한 서당으로 곽종석 선생은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를 통하여 우리나라 광복 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위인입니다. 서당은 강당, 서재, 사우로 되어있는데 지붕을 옆면으로 보았을 때 강당은 여덟 팔(八)자 모양이고, 서재는 사다리꼴이며, 사우는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기타 문중 서재 ○ 니사재(尼泗齋) 박씨 선조 송월당 박호원을 기리며 학문연마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 문화재 제 328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 내현재(乃見齋) 이씨 선조 이숙순의 분암으로 이씨문중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소였는데 내현재를 앞서재라고 할 정도로 마을의 대표 학문 터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삼백헌 박씨문중의 서재였던 곳입니다 ○ 망추정(望楸亭) 밀양 박씨 문중의 재실로 송월당 박호원의 모친 황씨묘소 옆 분암이었다가 여러 번 중건되어 박씨문중의 유생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 사효재(思孝齋) 1706년(숙종 32년),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효자비를 내렸으며 후손들이 사효재를 지었다. 사효재 마당의 향나무는 성주이씨 집안과 마을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하였으며 효심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향나무(수령 520년)를 심었다고 한다. ◈ 600년 감나무 하씨 고가인 분양고가 울안에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7세 때 심었다는 마을의 길흉화복을 함께한 노거수인 600여년 된 감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700년 매화나무 분양고가에 심어져 있는 나무로 고려말의 문신 원정공 하즙이 심었다는 '원정매' 인데요. 몇 백 년씩 묵은 이 마을의 매화나무는 대부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옛 선비들이 심은 것인데, 특히 그 중에서 '원정매'는 기품 있어 눈에 띄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 300년 회화나무 마을 초입, 이상택 고가로 가는 입구에 있는 나무로 서로 x자로 몸을 포개고있는 것이 인상적인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심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재가 난다고 하는데요. 회화나무의 열매는 천연염색제로 쓰이기도 한답니다. ◈ 니구산 전설 유명한 중국 태산의 한 지맥인 니산은 공자의 출생지에 있는 산으로 공자의 어머니는 이 산에서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는데 공자의 머리 또한 니구산의 꼭대기처럼 가운데가 움푹 패여 있어 이름을 '구(丘)'라 하였다고 합니다. 남사예담촌의 니구산은 학문을 숭상하는 마음과 공자의 출생지와 비슷한 풍수적 모양을 한 것을 본 딴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북바위 고려말의 문신으로 조선조 초 진주지방으로 낙남(落南)한 우곡(隅谷) 정온(鄭溫)이 지었다고 하는 월아산기(月牙山記)에는 "니구산에 돌 떨어지니 오래된 밀양박씨는 모래위에 죽지 아니하고 푸른 잎이 돋아나며, 북바위에서 소리나니 늙은 성주이씨는 달 가운데서 스스로 피어나는 붉은 꽃이라" 라는 구절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즉, 니구산에서 돌이 떨어지면 밀양박씨 문중에서 벼슬이 나고 북바위에서 소리가 나면 성주이씨 문중에서 벼슬을 해왔다고 하는군요. 최근에 지리산으로 뻗는 관광도로를 만들어 마을 앞길이 확장되고 포장되는 공사에 당국에서 북바위를 제거키로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 특히 성주이씨의 반대에 부딪혀서 북바위의 대좌(臺座)만 제거하여 도로를 내고 북바위 자체는 해를 입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용소 청계가 북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곳의 바위 밑에 물이 깊어 푸르게 보이는 곳인데 옛날에 용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무당이 굿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용소의 절벽 아래로는 큰 굴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 곽종석선생유적-이동서당(尼東書堂) (문화재 자료 제196호)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기 위해 유림과 제자들이 1920년에 설립한 서당으로 곽종석 선생은 조국의 독립운동과 파리장서를 통하여 우리나라 광복 운동의 기반을 구축하는 업적을 이룬 위인입니다. 서당은 강당, 서재, 사우로 되어있는데 지붕을 옆면으로 보았을 때 강당은 여덟 팔(八)자 모양이고, 서재는 사다리꼴이며, 사우는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용소(龍沼) 청계(경호강)가 북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곳의 바위(용바위) 밑에 물이 깊어 푸르게 보이는 곳인데 옛날에 용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무당이 굿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용소의 절벽 아래로는 큰 굴이 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길에 하룻밤 묵었던 곳 임진왜란 당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이때 영의정 류성용과 판중추부사 정탁 등의 진언으로 사형의 위기를 넘기어 1597년 4월 1일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왕의 명은 ‘백의종군’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계급 없는 군인으로 강등된 이순신은 같은 해 4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일 초계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이때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의 행로가 나와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6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산청의 단성면 사월리 박효원 종의 집에서 유숙했다. 종의 집 헛간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잠을 설치면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날이 새자 길을 재촉하여 6월 2일 늦은 아침에 단계천(현재 산청 단계마을) 가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후 삼가를 거쳐 권율 장군의 진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46일 간 머물다가 칠천량 해전의 참패 소식을 듣고 나서 권율 장군의 말에 따라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 7월 19일에 단계천변을 지나 지금의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 니사재(尼泗齋) 박씨 선조 송월당 박호원을 기리며 학문연마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현재, 문화재 제 328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습니다. 












▲ 사효재(思孝齋) 1706년(숙종 32년), 아버지를 해치려는 화적의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영모당 이윤현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효자비를 내렸으며 후손들이 사효재를 지었다. 사효재 마당의 향나무는 성주이씨 집안과 마을에서 제례를 올릴 때 향으로 사용하였으며 효심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이 향나무(수령 520년)를 심었다고 한다.

이제(李濟, 경무공,星州李氏) 이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시호는 경무(景武)입니다. 1352년(공민왕 1) 좌대언(左代言)이 되었고, 그 해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l등에 책록, 태조 이성계의 셋째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결혼하였습니다. 1392년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정몽주(鄭夢周)를 죽이고 조선의 건국을 도와 개국공신 1등으로 홍안군(興安君)에 봉해졌으며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가 되었으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 이방원에게 살해되고 부인인 경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세종 때 신원(伸寃)되어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습니다. 태조 이성계에게서 받은 개국공신교서는 1999년 6월 19일 보물 제129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수량은 1축이며, 유일하게 전해지고 있는 개국공신교서로 조선시대 최초의 공신 교서 형식을 알 수 있어 역사적·사료적 가치가 큰 보물입니다. 







▲ 300년 회화나무 마을 초입, 李氏古家(이상택 고가)로 가는 입구에 있는 나무로 서로 x자로 몸을 포개고있는 것이 인상적인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심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재가 난다고 하는데요. 회화나무의 열매는 천연염색제로 쓰이기도 한답니다. 

▲ 이씨고가 내부 
▲ 이씨고가 내부 






▲ 예담촌 관광 안내소 





▲ 최씨고가 입구 


















▲ 600년 된 감나무 세종대왕 때 유명한 황희정승 다음으로 영의정을 지낸 하연 대감이 심은 감나무입니다.보통 일반적으로 감나무는 400년도 채 못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감나무는 600살이나 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온 이유는 일단 여기 이곳의 땅이 기름진 땅이 아닌 자갈밭입니다. 결코 편안하고 풍족한 안락한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위 사진에 볼 수 있듯이 나무에 큰 구멍이 나있습니다. 질병과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었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시련을 견뎌냈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서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지금도 이 감나무에서 감이 열린답니다

▲ 사수의 북쪽에 있는 정사라는 뜻의 ‘사양정사’ 남사예담촌에서 가장 큰 집이며 정사는 몸과 마음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이고, 여기에 사양(泗陽)이라는 이름이 앞에 붙어 ‘사양정사’는 사수의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정사(몸과 마음을 닦는 집)라는 뜻입니다. 




























▲ 초포정사(草浦精舍) : 단성면 남사리 니구산 아래 초포 마을에 초포정사(草浦精舍)가 있다. 평생 이곳에서 학문 정진에 힘을 쏟았던 단성 선비 월포(月浦) 이우빈을 학덕을 기리는 곳이다. 초포정사 기문(記文)에 “니구산 동쪽 사수 북쪽에 우뚝 솟은 정자가 있으니 곧 월포 선생 이공이 숨어서 공부하던 곳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이미 신동이란 칭찬이 있었으니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복응하고 성명(性命)의 근원을 탐구하여 일찍부터 생의 목표를 정하였다.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공부하여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 생전에 이루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벼슬에 뜻을 두고 경서에 더욱 전념하였으니 견해가 날로 밝고 명쾌했다.”며 “만년에 고향 니구산 아래 그 선조 매월당의 옛 집터에 집을 지어 월포농사(月浦農舍)라 편액하고 성경(誠敬) 두자를 손수 써서 벽에 걸어놓고 수양과 반성을 했으며 좌우에 책들을 두고 동정(動靜)에 따라 성찰하기를 한 순간도 늦추지 않았다”라고 적혀 있다.월포 이우빈이란 선비가 어떤 인물인지를 짐작케 하는 글이다. 그는 1792년 진주 남사리(현재는 단성면 남사리)에서 태어났다. 효자 매월당 하생(賀生)의 후손으로 고조 영모당 윤현(胤玄)은 효자로 정려를 받았으며, 증조는 선(瑄), 조부는 담용, 부친은 경렬(敬烈)로 모두 덕망이 있었다. 매월당 등 효자가 많이 배출된 집안에서 태어난 월포는 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고, 14세 때는 부친이 질병에 걸렸는데 지성으로 간호하여 그 대변을 맛보아서 병의 차도를 살폈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예법에 따라 3년동안 묘소를 지키며 지극 정성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소학(小學)을 읽을 때는 독려하지 않아도 능히 힘써 공부 하였으며 10세 때 족조(族祖)인 남고 이지용에게 글을 배웠는데, 남고는 장차 크게 될 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남고 이지용은 같은 마을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장령을 지낸 선비로 정조때 명재상 번암 채제공의 제자이기도 했다. 부친 상을 마치고 유언에 따라 과거 공부를 하여 20세 때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그 다음해에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을 했다. 성균관에 있을때 스승인 남고의 벗인 한치응이 공을 보고 “이 사람은 장중하여 함부로 할 수 없다”라고 자질을 칭찬했다. 문장과 필법에도 뛰어나 명성이 자자했으며, 35세 때는 남명 선생의 배향 문제로 소(疏)를 가지고 서울로 갔을 때, 대신들이 모두 성균관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공이 성균관의 법도가 해이하고 남명 선생의 배향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보고 홀연히 고향인 남사로 내려와 학문에 열중했다. 공은 남사 니구산 아래에 집을 지어 ‘월포농사(月浦農舍)’라고 편액을 건 다음 성경(誠敬) 두 걸자를 걸어놓고 좌우에 서적을 갖추어 고요한 가운데 학문을 깊이 탐구하여 잠시도 늦추지 아니하였다. 공은 결연히 경(敬)을 마음속에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학문의 근본을 삼았다. 비록 곤궁한 때를 만나 능히 그 쌓은 덕을 베풀지 못했으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언행은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수가 없었다.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 과정은 엄숙하게 가르치고 자상하게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으니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데는 먼저 모름지기 뜻을 세워야 한다. 뜻이 서지 아니하면 만사가 성취됨이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또 “후학자들은 모두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어서 배운다고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을 하니, 이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인과 더불어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성이다. 학자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는 곧 열심히 노력하면 누구든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말로 후학자들을 격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33년에 병사 안광찬이 공의 학행을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답이 없었다. 1842년에 종질 상범이 일찍 세상을 떠나니, 공이 종가에 거처하면서 어린 재종손과 조모를 보살피면서 종중의 일을 맡아 보았다. 공은 “종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조상을 존대하는 것이다. 사람이면서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근본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종가 보호에 몸소 앞장섰다. 1853년에 단성현감 이휘부가 고을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향음주례를 행하면서 공에게 절차를 정하게 하고 또 향약을 손질하여서 경내에 반포하여 규약이 되게 하였다. 185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4세이다. 임종에 자제들에게 학문의 도를 말하면서 이르기를 “나는 친상을 당하여서는 가난하여 모든 것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이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 내가 죽거든 상을 후하게 치르지 말라”라고 하였다. 월포의 묘소는 지리산 가는 길목인 단성면 길리의 길가에 있었다. 한말 학자 후산(后山) 허유(許愈)의 묘갈이 눈에 들어왔다. “호호라! 공은 영남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니 당시의 덕망있는 선비들은 모두 순후한 바탕으로 떳떳한 행실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와서는 단지 읽고 기억하며 교묘한 글재주에 명을 붙여 능사로 삼았다. 이에 공은 결연히 경에 거하면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으로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니 비록 곤궁한 때를 만나 능히 그 쌓은 덕을 베풀지 못했으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언행은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수 없다.” 후산은 월포의 아름다운 언행이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후세에 본보기가 되기에 충분한 산청의 선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예법 ○ 혼례의 의미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는 일은 양(陽·+)과 음(陰·-) 이 만나는 것이므로 그 의식의 시간도 양인 낮과 음인 밤이 만나는 날이 저무는 시간에 거행했기 때문에 날 저물 혼(昏)자를 써서 혼례(昏禮)라 했습니다. 또한,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을 혼인(婚姻)이라 하는데 혼(婚)은 남자가 장가든다는 뜻이고, 인(姻)은 여자가 시집간다는 뜻이므로 혼인은 남자가 장가들고 여자가 시집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남자가 장가든다는 뜻만 있어 남존여비(男尊女卑)사회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혼이란 말을 쓰지 말고 혼인이라 말해야 바르다 할 수 있습니다. ○ 혼례의 정신 삼서정신(三誓精神) 서부모(誓父母)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조상과 부모에게 서약하고 천지신명께 서약하며 끝으로 배우자에게 서약하는 것을 말한다. 평등정신(平等精神) 혼인이란 남자와 여자가 몸을 합하는 데에 참뜻이 있다. 혼인하기 전에는 신분(身分)이나 나이에 차별이 있더라도 부부가 되면 평등한 것이므로 부부는 서로 존대말을 쓰고 절하는 것이다.
○ 절에 대한 예절
인사하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의 인품을 읽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쁠 때나 슬플 때 먼저 절을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정중한 인사예절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절은 우리 고유의 인사법입니다. 절의 회수 : 남자는 1번, 여자는 2번의 절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의식행사와 죽은 사람에게는 이것의 배로 절합니다. 절의 생략 : 절을 할 수 없는 장소에서는 경례로 대신하나 절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기면 다시 절을 합니다. 맞절과 답배 : 맞절을 할 때는 아랫사람이 하석(下席)에서 먼저 시작해 늦게 일어나고, 웃어른이 상석(上席)에서 아랫사람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본 후, 늦게 시작해 아랫사람보다 먼저 일어납니다. 남자의 절 남자의 큰절 · 계수배(稽首拜) 1.바른 자세로 서서 공수한다. 2.공수한 손을 가슴높이로 올리고 왼발을 뒤로 조금 빼준다. 3.손끝을 모아 바닥에 짚으면서 왼쪽 무릎부터 차례로 나란히 꿇는다. 앉을 때는 왼발이 아래가 되게 발등을 포개고 뒤꿈치를 벌려서 엉덩이를 내려 깊이 앉아 팔꿈치를 바닥에 붙이면서 이마를 양 손등에 대고 절하면 된다. 4.머리를 들고 팔꿈치를 바닥에서 떼는데 엉덩이가 들리지 않도록 한다. 5.일어설 때는 오른쪽 무릎을 먼저 세우고 공수한 손을 바닥에서 떼어 오른쪽 무릎 위에 얹는다. 오른쪽 무릎에 힘을 주면서 일어나서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을 가지런히 모은다. 남자의 평절 · 돈수배 (頓首拜) 큰절과 같은 방식으로 하되 이마가 손등에 닿자마자 곧바로 일어나도록 한다. 여자의 절
여자의 큰절 · 숙배(肅拜) 1.두 손을 어깨높이로 수평이 되게 들어 바른 자세로 선다. 2.왼쪽 무릎부터 가지런히 꿇은 후, 엉덩이를 바닥에 닿게 하고 오른발이 아래로 포개어지게 하여 앉는다. 3.조용히 허리를 45도쯤 구부려 3~4초쯤 머물러있다가 일어나는데 오른 무릎부터 먼저 세워 일어나도록 한다. 4.일어선 후 다시 앉아 두 팔을 내리고 손은 앞으로 내려 놓는다. 여자의 평절 · 평배(平拜) 1.공수한 손을 풀어 양 옆으로 자연스럽게 내린 후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음 허리를 20도 정도 구부리며 두 손은 다소 곳이 바닥에 둔다. 2.두 무릎을 꿇어 앉은 다음 허리를 20도 정도 구부리고 손끝을 모아 밖을 향하게 하여 바닥에 둔다. 3.일어나 공수하고 다시 앉는다. ◈ 호칭과 지칭에 대한 예절 예절의 실제는 마음속에 있고, 그 예절의 마음을 상대편에게 인식시키는 첫 번째 방법이 말일 것입니다. 말은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되도록이면 표준어를 쓰며 고운말과 쉽고 바른 우리말을 사용하여 온화한 표정과 적당한 목소리와 속도,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합니다. 또한 웃어른과 아랫사람들에서 높임과 낮춤말을 적절히 써야 올바른 언어예절을 갖춘다 할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칭호 저·제 : 웃어른이나 여러 사람에게 말할 때. 나 : 같은 또래나 아랫사람에게 말할 때. 우리·저희 : 자기쪽을 남에게 말할 때 부모에 대한 칭호 가친·자친(家親·慈親) : 자기의 부모를 남에게 말할 때의 한문식 지칭 춘부장·자당님(椿府丈·慈堂) : 남에게 그의 부모를 한문식으로 말할 때. 부친·모친(父親·母親) : 남에게 다른 사람의 부모를 말할 때. 현고·현비(顯考·顯) : 축문이나 지방에 죽은 부모를 쓸 때. 부주·자주(父主·慈主) : 편지에 부모를 쓸 때의 한문식 부부간의 칭호 사랑(客室) : 시댁의 어른이나 동서에게 자기의 남편을 말할 때. 제댁(宅) : 자기집이나 처가의 웃대 어른에게 자기의 아내를 말할 때. 서방 : 친정의 어른에게 자기의 남편을 말할 때. 안사람·집사람·아내 : 남에게 자기의 아내를 말할 때. 주인·바깥양반·남편 : 남에게 자기의 남편을 말할 때. 주인어른·바깥어른·부군(夫君) : 남에게 그 남편을 말할 때. 안어른·부인·영부인(令夫人) : 남에게 그 아내를 말할 때. 시댁가족에 대한 칭호 아주버님 : 남편의 형을 부르거나 가족간에 말할 때 / 시숙(媤叔) : 남편의 형을 남에게 말할 때. 형님 : 남편의 형수나 누님을 부를 때. 도련님 : 남편의 장가 안간 동생을 부를 때 / 서방님 : 장가간 시동생을 부를 때. 동서·자네 : 시동생의 아내를 부를 때. 서방님 : 시누이의 남편을 부를 때. 시누이 : 남편의 자매를 남에게 말할 때. 처가가족에 대한 칭호 빙장·빙모 : 아내의 부모를 남에게 말할 때. 처남댁 : 처남댁을 부를 때. 처형 : 처형을 부를 때 / 처제: 처제를 부를 때. 처남·자네 : 손아래 처남을 부를 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