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청수 목사 예화2
8 성격이 과격한 왕과 꽃병
옛날 어느 왕은 훌륭한 도자기와 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꽃병을 수북이 선물로 방았다. 모두 아주 정교한 솜씨로 만들어져서 보기에도 아름다왔다. 왕은 무척 흐믓하게 여겨 이를 보내 온 자에게 충분한 보답을 했다.
그런뒤 왕은 꽃병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산산 조각을 내 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신하가,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다. 왕이 대답하였다.
“나는 나 자신이 격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내 자신에게 타일렀다. 언젠가 그대 하인이 이 훌륭한 꽃병을 깨뜨릴 때가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때는 화가 나서 그 하인을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결과가 될 바에야, 차차리 지금 이 꽃병을 깨뜨려 버리는 편이 좋다.라고 말이야.”
-- M. 고리온,유태인 지혜에서
9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세
신앙이 깊은 젊은이가 기도하고 있었다. 그 때 뱀이 기어와 발목 언저리에에서 서성거렸다. 그 사나이는 기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나중에 제자들이 “뱀이 발목에서 기어다니는 것을 모르셨나요?”하고 물었다.
신앙심이 깊은 사나이는 대답하기를 “ 내가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화가 나에게 있을 것이다.”하고 말했다.
어느날 왕이 지나가는데 신앙심이 깊은 젊은이가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기도가 끝난뒤 왕이 말하기를 “ 너는 겸허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 이제 보니 교만하기 그지없구나.” 하고 말하자 신앙심이 두터운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 만일 내가 바깥에서 걸을 때 폐하의 모습을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떠한 벌이들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까지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규율에는‘ 기도를 올리는 자는 왕이 곁에서 묻거나, 뱀이 발꿈치를 뜯어도 기도를 멈춰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왕은 그 말을 매우 흐믓하게 여기며 그곳을 떠났다.
-- M. 고리온,유태인 지혜에서
10 성공적인 삶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적한 시골길을 가던 중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 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만나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사는 길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 “강단과 목회” 예화 중에서
<< 개의 반박 >>
어떤 이가 꿈속에서 골목길을 걷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옷은 남루하고신은 해져 마치 거지 같았다. 뒤에서 개가 짖었다. 그는 돌아서면서 큰소리로 개를 꾸짖었다. “ 이런 쓸개빠진 놈, 주둥이 닥치지 못해!”
“히히!” 개가 웃었다. “어찌 사람 말을 거역할 수 있겠소? 사람 만도 못한 짐승인 내가.” “뭣이 어째!” 그는 분노하며 부르짖었다. 사람만도 못하다는 표현이 모욕적인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개가 말하길 ” 미안하게 됐소이다. 난 워낙 사람만도 못한지라, 왜 구리와 은이 구분되는지, 왜 비단과 무명이 구분되는지, 왜 관리와 백성이 구분되는지, 왜 주인과 종이 구분되며, 게다가 또...“
그는 부끄러워 도망쳤다. “ 잠깐만 ! 더 이야기 하자구요!” 개가 뒤에서 큰소리로 불렀다. 그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부지런히 걸었다. 꿈속에서 침대로 향하여 말이다.
< 차별하는 습성이 있다는 면에서 사람은 ‘개만도 못한’ 동물일수 있다.>
-----루쉰, 파라독스 중국우화
<외눈박이 사슴>
사냥꾼의 화살을 맞아서 생긴 상처 때문에 한 눈이 멀게 된 사슴 한마리가 있었다. 이 사슴은 생각했다. “ 바닷가에 가서 풀을 뜯어 먹어야지. 못쓰게 된 눈을 바다쪽에 고정시켜 놓으면 나머지 성한 한 쪽 눈으로 숲을 잘 경계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리하여 사슴은 바닷가로 가서 풀을 뜯었다. 물론 수풀 쪽만을 경계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배 위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낚시꾼들이 사슴을 발견하고서 바닷가로 배를 몰아 오는게 아닌가! 그들은 보이지 않는 눈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 없이 사슴을 생포할 수 있었다.
< 도망치는 자는 언젠가는 붙잡힌다. >
--로버트 짐러, 파라독스 이솝우화
< 병사와 군마 >
속력과 힘이 월등해서 주인을 전쟁터에 수없이 태워다 주면서도 상처하나 입지 않게 지켜주던 명마가 있었다. 그 주인은 당연히 자기 말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말을 보살폈다. 어느 정도 였느냐하면, 말한테 포식을 할 정도의 보리와 물을 먼저 갖다 주지 않으면 그 때까지 자기도 전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매일 같이 털을 잘 손질해 주었고, 상처라도 나면 잊지 않고 정성껏 고약을 발라 주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주인은 말을 밭에다 내몰아 일을시켰다. 말은 쟁기도 끌고, 무거운 바윗덩이들도 나르고, 힘들게 마차도 끌어야 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데도 먹이는 왕겨와 밀짚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전쟁이 다시 터졌다. 그 주인은 무장을 다 갖춘 후에 자기 말에 올라탔다. 그런데 평소에 잘 먹지 못하고 일만 죽어라 하다 탈진한 말은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 마다 여기서도 절뚝거리고 저기서도 절뚝거리고 그야말로 말이 아니었다. 병사가 말을 꾸짖자 말이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전쟁터의 명마로 힘차게 달리길 바랐다면, 왜 나를 농장의 당나귀처럼 취급하셨나요?”
--로버트 짐러, 파라독스 이솝우화
< 복과 축복 >
복은 유일신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복을 주는 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자요, 시행하는 자요, 베푸시는 자이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께 축복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축복이란 말은 복을 빈다는 뜻으로 복을 비는 것은 인간 뿐이다. 즉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인간은 복을 비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하나님이 복을 비는 자로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복을 빌수 있는 곧 축복을 할 수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복을 내리시는 절대자이시다. 사람은 그리하여 서로 축복하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
------ 강단과 목회 예화
< 전진과 중단 >
아무래도 어떤 결단을 내리기는 해야 겠는데, 그게 도무지 기분에 거슬리는 일이 때로는 있다. 이런 경우에 두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다:
“ 끝장이다! 만사 휴의다! 인젠 아무 해결책도 없다.!” 하는 경우가 그 하나다. 이것은 마치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이 고국의 옛 환경으로 되돌아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태도이다.
혹은 용기를 잃지 않고 베르그송과 더불어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다: “방법은 오직 하나, 갈 수 있는 데 까지 가 보자. 내가 할 일은 모름지기 출발이며 전진이다.”
-- 쟈끄 뢰브, 묻혀 있는 보물.
< 바람직한 자녀의 性교육 >
어느날 아이가 “아기는 어디에서 와요?”하고 물을 때 그는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들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우리는 모두 동의 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에게 한 부모의 대답을 그의 눈에 비친 부모의 생활과 비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정자가 어떻게 해서 난자에 도달하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사이 좋게 지내고 서로 사랑하며 상대방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그리고 얼마나 감싸주는가를 보는 것이다.
만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행복한 혼인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에게 성교육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부모가 신중하고 다정하며 아주 바쁠 때 일지라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아이는 부모가 서로 사랑해서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을 들을 때 바로 이해한다. 그리고 몸에 대한 설명에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하여 정중함을 잃지 않는 아버지의 태도를 보고 자라는 소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여자란 단지 성의 유희 대상으로 여겨졌다가 내던져지는 존재가 아님을 배운다. 소녀 역시 올바른 상대를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과 무분별한 행동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공허한가를 쉽게알게 될 것이다.
-- H. 요르드 진크, 어떻게 대답할까요? 중에서
< 진정한 주인 의식 >
“대한 사람은 모두가 대한의 주인인데 주인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이상할 것 이외다. 그러나 오늘 대한 사회에 주인다운 주인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잘되고 못되는 것이 모두 나에게 달렸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진 자가 진정한 주인이요, 무책임하게 방관하는 자는 손님이외다. 주변을 둘러보아 진정한 주인이 적다 싶으면 빨리 나부터 참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 도산(島山) 안창호 (1878- 1938)
< 양도둑과 성자 >
남의 양을 훔친 죄로 이마에 “S.T.” 곧 “양 도둑”(Sheep Thief)이라는 두 글자의 낙인을 받은 두 형제가 있었다. 형제중 하나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외국 땅에 가서 자신을 감추어 가며 살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삶들 마다 이마의 두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 마침내 비참히 죽고 말았다.
다른 형제는 스스로 “내가 양을 훔친 사실은 딴 곳으로 달아난다 해도 잊혀지지 않을 것, 여기 남아서 내 이웃과 나 자신에게 다신 존경을 되 찾는 길을 걷겠다” 하고 다짐했다. 해가 바뀌는 동안 그는 정직하다는 평을 받기 시작했다.
수십년후 이곳을 지나치던 낯선 사람이 양도둑이었던 자의 이마에 씌어있는 글의 의미가 무엇이야고 물어 보았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나는 그 일이 뭐였는지 생각이 아나지만 그 글씨는 아마 ‘성자(Saint)’의 약자일 것입니다.”
---- 강단과 목회,1988 예화
< 진정한 관심 >
어느 젊은이가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그는 ‘문서위조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유명한 포터(Dr. Potter) 박사 였는데 그는 이 피의자의 아버지를 잘 아는 처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법조계의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포터 판사 자신도 그의 부친이 쓴 <<신용법>>(The Law of Trusts)이라는 책을 읽고 배운바 있기 때문이었다.
포터 판사는 이 젊은이에게서 옛 스승을 생각하며 질문하였다. 그는 그 판사를 알지 못했으나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판사는 “네 아버지는 법조게의 뛰어난 인물이셨는데 너는 이런 파렴치한 일을 하다니......” 하며 꾸짖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도 기억합니다만, 그 책을 쓰실 때에 제가 아빠의 도움이나 충고, 사랑을 받을려고 응석을 부리면 ‘얘야 ! 저리좀 가라, 나는 바쁘다. 이 책의원고를 끝내야 돼’ 하시면서 귀찮아 하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이 청년의 아버지는 위대한 법률가였지만 아버지로써의 자격은 결여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 29마르크,설교 예화와 그 자료들에서
< 프랭클린의 감사 >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해 여러 대표들이 모였을 때 독립의 공로자인 프랭클린은 대표들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다.
“우리가 영국과의 독립전쟁 중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고자 날마다 이 방에서 간구 하였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우리는 감격스러운 독립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기 모여 이 나라의 미래의 기초를 세우려 할 때 어찌 그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없이 어떻게 한 나라가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하여 아침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예배를 드릴 것을 제안합니다.”
미국의 헌법에는 바로 이러한 감사의 신앙이 배어 있는 것이다.
---- 강단과 목회, 예화
< 신앙의 4 시대 >
이용도 목사는 신앙에 네 시대가 있고 각 시대에는 대표가 있다고 합니다. 제 1 기는 교회가 그 주체라 교회가 교회를 의지 하는 때로 베드로가 그 대표가 됩니다. 교회의 의식과 제도와 교리에 복종하는 때입니다. 제 2 기는 자기가 주체라 자기 노력을 의지하는 때로 야곱이 대표가 됨니다. 억지로라도 죄를 버리고, 육을 멸하여, 금욕하여 도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식을 지키고 교리대로 행하여도 여전히 자기 마음과 행실은 죄의 상태를 면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 3 기는 자기 노력도 부인하고 다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때로 바울이 대표됩니다. 아무리 금욕하고 죄를 멸해도 여전히 죄인됨을 면치 못하는 지라, ‘자기가 성결하여 구원을 얻는다면 낙망할 수 밖에 없으리라. 다만 믿음으로구원(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확신하는 때입니다.
제 4 기는 사랑의 화신이 되어 자기는 사랑의 신에 삼킨바 되기를 원하는 때로 요한이 그 대표자입니다. 신앙을 가지고도 오히려 불만족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사랑이 없음을 자각함이러라. 신앙으로 용기와 담력을 얻어 죄와 싸울 수는 있고, 죄인을 책망할 수는 있으되 죄인을 긍휼히 여길수는 없음을 어찌하랴! 이에 사랑과 긍휼을 간구하며 빌게 되는지라. 이에 사랑이 들어가노니 이곳이 절정이라, 여기에서 부터 영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이용도 목사 일기에서 (1931.1.28.)
< 가장 중요한 것 >
옛날 어느 왕이 한 사람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오라고 명했는데 그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첫 친구는 가장 친한 친구이고, 둘째 친구는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친구였으며, 세째 친구는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왕이 틀림없이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자신을 오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혼자 가기가 무서워서 친구들에게 동행해 다라고 부탁했다.
첫 친구는 쌀쌀하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둘째 친구에게 가니 “왕궁 문 앞까지는 같이 가 주겠어.” 하고 조건을 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셋째 친구는 “가고 말고, 자네에게 무슨 죄가 있나. 함께 가서 왕을 만나기로 하세.”하고 말하였다.
<<탈무드>>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 첫 친구는 ‘재산’이며, 둘째 친구는 ‘친척’이다. 기껏 해야 죽음을 애도해 줄 뿐이다.그러나 그의 생전에 한 세째 친구인 ‘선행’은 죽은 뒤에도 남는 것이다.
----르스 시로, 유태인 천재 교육
< 신 앞에서의 나 >
복음서의 글 가운데서 특별히 생의 향락을 금지한 구절이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는다. 단지 긴요한 것은 하나님을 흐림이 없는 맑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일이다. 나의 경험에서 비춰 본다면, 이 지상에 잇는 물건은 내가 그것을 내것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 단지 내가 이것을 소유하고자 바랬다는 것만의 사실로 그것이 흐려져와서 전 세계가 그와 동시에 그 투명성을 잃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눈이 그 밝음을 잃는것인지 어찌되었든 나의 영혼에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피조물을 위해서 조물주를 돌아보지 않음으로 인하여 영원속에 살기와, 하나님의 나라에 살기에 두가지를 잃게 되는 것이다.
----앙드레 지이드,그대 영혼의 빈자리에
< 매스 미디어의 문제 >
신문,잡지,T V,라디오를 “미디어”라 하는데 그것들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까? 신문이 왜 그렇게 싼지 아십니까? 신문 한부를 만드는데 천 원 이상이 듭니다. 그런데 왜 200원만 주면 살 수 있을까요? 광고가 많기 때문에 싸게 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욕심을 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필요로 하든 안하든 구매욕을 충동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라도 광고를 냅니다. 성경 말씀은 탐심이 곧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미디어는 탐심을 일으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상이 걸린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상을 거부하고 제사드리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주장하면서도 하루에 4 - 5시간씩 TV를 보면서 아무러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란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계 역사상 우상 숭배치고 재미 없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재미가 없다면 누가 유혹에 빠지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진리를 알고 싶다면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실제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각 문제에 대한 성경의 법을 연구하고 기도하며 실행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입니다.
---- 대천덕 , 우리와 하나님, p.345-6
< 시간에 대하여 >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가 인생은 �고 불안정하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다음과 같은 시간들도 한번 계산해 봄 직하다. : 자는 시간 , 쓸데없이 보낸시간, 밥먹는 시간, TV를 시청한 시간, 예배드린 시간, 봉사한 시간 등. 내 인생은 어느 시간에 치우쳐 있는가? 어느 시간을 줄여서 효율적인 시간으로 사용할 것인가? 시간에 대하여 언제나 기억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1.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 마지막이 왔을 때 그 이상의 시간을 손에 넣을 자는 아무도 없다.
2. 인생의 길이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주어진 생명에 대해 오늘, 현재, 지금 최선을 다하라.
3. 배워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배워야 한다. 시간은 우리를 언제까지 배움의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4. 해야할 일은 선중히 선택하라.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은 없으므로 정말로 중요한 일과 꼭 해야만 할 일을 해야할 것이다.
5. 일을 중단 상태로 남겨 두거나 내일로 미루지 말라. 영원히 끝마치지 못하거나 하지 못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6. 남과 싸웠다든가, 사이가 틀린 채로 하루를 마치지 말라. 영원히 화해하지 못한 채로 이 세상을 떠나야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수입 농산물을 먹지 맙시다. >
수입 농산물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옛부터 신토불이(身土不二)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땅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최근에 농약으로 문제된 것들을 알아봅시다.
‼ 고사리 고추등 �채류 22개와 곶감 대추등 건과류
-- 수입되는 농산물은 선적하면서 병충해 방제용 농약 메틸 브로마이드
(MD)로 소독된 뒤 유통 : 소화 장애등 인체유해(동아 92.9.27)
‼ 농약 밀가루 유통
-- 농약 성분인 치오파테이트 메틸이 함유된 밀가루를 제과업체에 불법
유통 시켜 빵과 과자 등의 원료로 사용 ( 동아 92. 10.20.)
‼ 농약 콩나물 대량시판
-- 해로운 농약을 사용해 콩나물을 속성 재배해서 시중에 판매
: 검출된 농약 톱신엠은 콩나물의 부패를 막고, 성장을 촉진시켜
색깔을 좋게 하지만 인체에 대량 흡수될 경우 동공(눈동자) 축소,
의식 혼탁, 전신 경련등의 증세 초래 (한국 92.1.10.)
‼ 김양식장에 염산 살포
-- 갯병 예방과 품질 향상을 위해 많은 양의 염산 사용
: 해양 오염 및 생태계 파괴, 잔류땐 인체에 유해 (한겨레 92.1.21.)
< 무화과는 왜 수박보다 작은가? >
옛날 학식이 높고 제자를 많이 둔 선생이 한 사람있 었다. 어느 날 과수원을 산보하다가 무화과 나무 밑에 앉아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자신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밭에서 자라고 있는 수박을 발견했다.
한아름이나 되는 수박은 저렇게 가늘고 연약한 덩굴에 달리는데 억세고 질긴 무화과 나무에는 저런 조그만 열매 밖에 열리지 않다니... 수박과 무화과를 번갈아 보던 선생의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 생각에는 조물주가 마땅히 수박을 무화과 나눔에 열리게 했어야 하는 건데... 그래야 조화가 되는 건데.”
몸을 일으킨 그는 손으로 무화과 나무를 몇번 흔들어 보았다. “ 네 가지가 얼마나 튼튼하냐. 너에겐 수박만한 열매가 달려야 잘 어울릴것 같은데, 조물주가 꺼꾸로 배치해 놓았군. 만물 중에는 걸맞지 않는 것이 많기도 하지!”
말을 마친 선생은 무화과 나무 아래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 때 몸을 바로 잡기가 무섭게 무화과 한개가 선생의 코 끝을 내리쳤다. 선생의 코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선생이 입을 열었다.
“알만하구나. 천하의 만물은 다 제각기 쓸모가 있고, 그 도리가 있는 법이야. 절대 꺼꾸로 되거나 뒤범벅이 될 수 없는 법이지. 내 말대로 이 큰 수박이 무화과 나무에 달렸다면 내 얼굴은 엉망이 됐을거야. 어쩌면 목숨까지 잃었을 지도 몰라. 다행히 열매가 작아서 상처가 심하지 않군. 이제 알만해. 조물주가 제 자리에 맞추어 놓은 세상 만물을 우리가 함부로 뜯어 고칠수는 없는거야.”
< 자연의 이치중에 인간이 얕잡아 볼 것은 하나도 없다. >
--- 마오둔, 파라독스 이솝우화
< 웨슬레가 강조한 것 >
우리는 단지 힘이 닿는 한 또한 하나님께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자들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그 말씀을 붙들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저희가 주로 강조한 것은 네가지 였습니다. 첫째, 정통(orthodoxy) 또는 합법적인 견해라는 것이 아무리 좋아도 종교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는 것 그것도 종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을 받을 경우에만 그렇다는 소극적인 것, 무엇이든 해가 없는 것으로만 종교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그렇다고 단순히 외적인 것, 선행, 자선, 구제, 자비를 베푸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마음과 다를 뿐 아니라 그 마음에도 미치지도 못하며, 하나님의 형상은 새겨져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으로 이루는 내적인 의(義)등 이었고 둘째로, 하늘 아래서 이와 같은 종교가 될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 혹은 (사도들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이며 세째로, 이러한 신앙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그 분만 믿으면 누구든 애쓰지 않아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원을 통해 완전히 그의 은혜로 자유롭게 되며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하늘나라를 그리워하게 되며, 거룩하고 행복한 생활 속에서 죄와 공포는 사라지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빈센트 페로넷 주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그는 웨슬레의 친구이자 조언가였다.) --- 존 웨슬리, 존 웨슬리총서 10권 서간집, 1748년
< 하나님의 지혜 >
어느날 카프만 부인이 테이블위에 놓여있는 몇개의 고치 속에서 나비들이 되어 나오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고치의 구멍은 좁고 나비의 덩치는 커서 나비가 나오는 데 여간 힘이 들지 않습니다. 저 구멍이 조금만 넓으면 쉽게 나올텐데 하고 부인은 가위를 가져와서 나머지 고치 구멍을 보다 널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비는 쉽게 구멍을 빠져나왔습니다. 부인은 깊은 명상을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좀더 넓게 만드시지 못하셨을까? 내가 창조했다면, 더 쉽게 만들었을텐데 신의 지혜가 나보다 못하단 말인가?’
나비들은 고치에서 나온 후에 차츰 몸을 움직이더니 얼마후 날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그 때부터 일어났습니다. 좁은 구멍에서 고생고생하며 나온 나비는 벌써 푸드덕푸드덕 날고 있는 데 비하여 자신이 넓혀준 구멍에서 나온 나비들은 돕무지 날지를 못합니다. 안타갑게도 몇번 날개를 파르르 떨다가 포기를 하고 맙니다.
이상히 여긴 부인은 그날 부터 열심히 그 문제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즉 고치 안에 잇을 때 나비의 모든 영양분은 어께에 쌓여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어께에 있던 영양분은 좁은 구멍으로 나올 때 어깨의 에너지가 점점 몸으로 특히 날개쪽으로 골고루 퍼져서 드디어 날개에 힘이 생기는데 자기가 넓혀서 나온 나비의 영양분은 어깨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깡패 모양으로 어깨만 힘이 있어 으쓱거렸지만 정작 날아야 할 날개쪽에는 전혀 힘이 가질 않아서 날 지 못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카프만 부인은 “아, 역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 분 만이 가장 지혜로우시다.”라고 감탄했습니다.
--- 민들레,국제복음선교회보에서..
1 . 늦게 응답 받는 기도
고아원의 창시자 조지 뮐러는 수많은 고아들의 수요품(需要品)을 주 안에서 형제 된 여러분들로 부터 도움 받았다. 어떤 스코틀랜드인은 여러 해 동안이나 이 고아원을 위해 많은 돈을 보내어 도왔다.
그에게는 한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믿지 않아 그의 간절한 소원은 그 아들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이나 뮐러씨와 함께 합심 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회심(回心)을 보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후 부터 오랜 동안 소식이 끊기게 되었는데 하루는 이미 장성해진 죽은이의 그 아들이 뮐러씨의 고아원을 찾아왔다. 뮐러씨에게 말하기를 "제 아버지의 문서를 찾아 보니까, 아버지는 많은 금액으로 이 고아원을 도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 혼자 생각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가 만일 그 고아원을 찾아가 아버지처럼 돕는다면 좋아하시겠지?"라고 생각하자. "나도 그렇다면 돕기로 하자.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 돕고자 하는데 돈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 소녀를 위해 봉사까지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였다.
그의 이러한 호의를 뮐러 고아원에서는 감사히 받기로 되어 그는 고아원에서 곧 일하게 되었고, 그러는 동안에 그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던 주를 믿게 되었다.
그가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때, 고아원 직원들은 말하기를"우리는 조금도 이상히 생각하지 않아요. 이미 38년 동안이나 뮐러씨가 쉬지 않고 당신의 회심을 위해 기도를 계속 했으니까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뮐러씨의 기도는 38년 만에야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낙심 말고 기도할 것이다.
2 .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 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1-80)
부흥의 열쇠인 기도
3 . 가장 적극적인 생활은 가장 많은 기도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께서도 특별히 많은 사역을 하시던 그 때에 더 많은 기도
를 하셨다.
찰스 웨슬리는 매일 두 시간씩 기도했고, 죤 웨슬리는 새벽 네시에 일어나서 기도했다. 죤 풀리처도 때때로 철야기도를 했다. 루터도 하루에 세시간씩 기도를 했다.저드슨은 말하였다.
"나는 하루에 열두 번씩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졸지 않고 계시며 항상 그의 귀를 기울여 우리의 간구를 듣고 계신다."즉 언제든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고 밝히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심령의 부흥을 일으키려면 더욱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기도가 되지 않고 힘들어질 때 일수록 더욱 애써 기도하라,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자물쇠다.
(눅18:1)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던 의인의 별칭을 받은 야고보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만을 하나님에게 받은 자의 의무로 생각하고 늘 성전에 들어가 무릎을 끓고 탄원한 결과 그의 무릎은 약대의 무릎처럼 굳어졌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 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 지어다. (대상 16:11)"
4 . 불량자를 둔 아비의 기도
워 감독의 어렸을 때 일이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어떤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그 일을 하는데 그의 친구가 와서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이 일이 중단 되었다. 그날 밤에 워의 아버지는"프랭크야,아까 시킨 일을 다 했니?"
라고 물었다. 워는 서슴지 않고
"네"
라고 거짓으로 대답을 했다. 아버지는 벌써 거짓말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음에 워는 심히 마음이 불안하여 하룻 밤을 무겁게 보냈다. 또한 그의 아버지는 자식의 거짓말에 가슴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어린 워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제 한 잠도 잘 수 없었다."
"왜 주무시지 못했어요?"
라고 워는 다시 물었다.
"나는 밤새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 했단다."
라고 아버지가 대답 했다. 이 말은 어린 아들의 마음을 화살처럼 찔렀다. 워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와 하나님께 사유함을 빌었다.
워는 후에 감독이 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그 때 아버지의 기도가 얼마나 감사 한지 모른다."하는 것이 였다.
5 . 교역자의 위험
교역자를 삼켜 버리는 두 종류의 마귀가 있는데 하나는 기도를 적게 하도록 만드는 마귀요,다른 하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마귀다.
이 두 마귀 중에서 기도를 안하게 하는 마귀 보다도 기도를 적게 하도록 하는 마귀가 더욱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드리는 듯 마시는 듯 하는 기도로서 양심의 자위물(自慰物)로 삼기가 쉬운데 이러한 자위야말로 무엇 보다도 유해(有害)한 치명적인 허위의 생활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6 . 교회 부흥은 기도로
지난 10년간 미국 교회에서는 12개의 큰 교회 중 8개가 한국 교회였고, 1991년도에 와서는 20여개의 큰 교회는 모두가 한국 교회 였습니다.
같은 성경책, 같은 돈, 같은 목적인데, 한국 교회는 선장하고, 미국 교회는 황폐되었습니다. 1980년 미국 목사의 기도 신간은 하루에 8분 이었고, 한국은 30분 이었습니다. 다른점은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목회로 교회를 일으키려고 하기전에 정말 무릎을 끓고 주님앞에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 합니다.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기도했고, 사도행전 1장 14절에 더불어 몸과 마음과 뜻을 합쳐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더하게 하셨다고 했다.
7 . 손 흔들며 기도
선교사가 필리핀 신도들이 기도할 때에 손을 내 저으면서 하고 있음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여 그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초대 선교사가 초대를 받아 식사 기도를 할 때, 음식의 파리를 몰아 내느라고 손을 내 저으면서 기도 하는 것을 본받아 기도는 손을 내 저으면서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그같이 하는 것이라고
8 . 박종순 목사님의 이야기다.
한번은 서울 시내 아주 번화가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교회의 게시판이 길거리에 있음을 보았다. 얼마나 오래전에 만들어 놓았는지 나무가 썩어 가지고 바실바실 떨어졌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에게 말했다.
"여보 시요, 이것 돈이 들면 몇푼이나 든다고 사람 많이 다니는 길인데, 요즘에 칼라 스텐네스 이쟎느냐고 그것으로 예쁘장하게 통을 짜고 10mm나 15mm의 유리를 끼고 그 안에 등을 달고 거기에다가 설교 제목도 넣고 광고도 붙이면 많은 사람들이 볼텐데 이게 뭐요?"했더니, 내 얘기를 들어 보라고 하면서 하는 말씀이, "그 게시판이 하도 낡고 험하고 해서 자기도 새로 했으면 했었는데, 어느 집사님이 500만원 헌금 했습니다. 게시판 바꾸라
고, 그래서 너무 기뻐서 견적을 내 보니까 500만원이면 잘할 수 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뜯어 내려고 할려다가 그 나무 게시판을 30년전에 어느 권사님이 권사 취임을 하면서 기념으로 했는 것인데, 그래서 맘에 걸려서 전화 한통 드리고 게시판을 뜯어야 하겠다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권사님, 권사님이 30년전에 게시판을 기념으로 하셨다지요.' 권사님 말씀이 '그렇지요, 내래 했지요.' '어느 집사님이 500만원을 헌금을 해서 새로 할려고 하는데 새로 하면 좋겠지요?' 했더니 이 권사님 말씀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됩니다.'라는 것입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게시판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데, 목사님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하는 것이다.
"제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방법이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고 하니 대답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로 시작 하라고'하니 "아니 무슨 기도요?"
"오늘 부터 이렇게 기도 하십시오. 아버지여 그 권사님 눈에 흙이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성도는 고귀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9 . 주기철 목사의 헌당식 기도
주기철 목사의 헌당식 기도
① 이 예배당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집 되게
② 만민의 기도하는 집 되게
③ 수의 다소를 막론 예수 닮아 가는 알곡 되게
머리에서 핀을 뽑아
10 .
모 청년이 20세가 넘도록 두통이 계속되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공부도 아무일도 할 수가 없이 투병하는 것 뿐이다.어느 병원에서도 병인을 못 찾고 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얘기하고 '주야로 기도하나 낫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였다.목사님은 '밤낮 기도 했다니 금식기도 했느냐 묻고 3일간 만이라도 금식기도 해보라.' 하여 그 청년은 금식기도 했더니 음성 같이 들리는 말이 머리에서 핀을 뽑으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얘기하여 비로소 핀을 발견하게 되어 뽑아 내니 깨끗이 나았다.
11 . 루터의 기도
[나의 시선이 주님을 떠나지 않게]
루터가 한번은 식탁에서 빵을 먹고 있었는데, 개가 상아래서 빵을 처다보고 있다. 처다보는 개의 시선이 빵있는 쪽 빵에 오르내리는 대로 흐트러짐이 없이 따라 보는 것을 루터는 유심히 보고는 의자에서 내려서 무릎을 끓고 기도 했다. "주여 이 개가 빵에 생각과 시선이 집중됨 같이 나의 마음과 시선이 주님의 말씀과 주님을 앙망하는데 집중되게 하여 주옵소서."
12 . 간병에 실파와 양배추
서울 충신교회 모 여집사는 좋은 위치에 고급 APT에 사는 30대 초반의 여인으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는 진실한 독신자이다. 그러나 간이 나빠져서 간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었는데 한번엔 새벽기도 하는 중 환상을 보았는데 모처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음식을 먹는데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양배추에 실파를 먹으면 간이 좋아진다고 하면서 실파를 열심히 먹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여집사는 거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 하여 양배추와 실파를 열심히 먹었는데 6개월 만에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는데 전에 없던 불순물이 빠져 나가더니 불러있던 배가 홀쭉하게 되고 간병에서 완치되었다.
어느날 T.V.를 보는 중 미국서 간암 치료에 양배추와 쪽파가 간암에 치료된다고 하는 연구 발표를 듣고 여집사는 더욱 확신하였다.
13 . 너무 작은 하나님
우리는 보통 어른들의 기도 가운데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하는 말을 너무 자주 듣곤 합니다.또한 당신이 지식으로 아는 하나님은 적어도 무한하신 하나님 일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알고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치 못하거늘>(왕상8:27)하는 고백을 듣기에 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은 시원챦은 분으로 끌어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약하며 유한하며 그리고 그의 약속을 지키시지 않은 분으로 생각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의 크기는 얼마만합니까?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 무한하신 분이십니까?
오늘 주눅이 들어 있는 당신의 현실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너무 왜소하지는 않으십니까?그런 사람들에 있어서 작은 문제에도 쉽게 낙담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슨 일이 이루어 지면 모두 자기 힘인줄 착각하는 것도 더 큰 문제입니다. 자기의 울음소리에 태양이 떠올랐다고 믿는 숫탉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십니다. 당신이 그분께 가져가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는 결코 없습니다. 물론 그분께 보여드리기에 너무나 보잘것 없는 문제도 없구
요.....
14 . 하나님의 교육과정
{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욥기서입니다. 그러나 욥은 업청난 불행, 계속하여 날아드는 비보에 넋을 잃게 됩니다. 소유물은 물론이요 사랑하는 자식들과 심지어 자신의 몸까지 완전히 상처 투성이가 됩니다.
그는 급기야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야곱은 어떻습니까? 물론 욥과는 그 상황이 다르지만은 야곱 역시 굴곡많은 생애를 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한마디로 가파르게 살아간 사람입니다.
이점에서 두사람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고난은 그 양태가 퍽이나 다릅니다. 욥은 실로 무모한 고난, 까닭 모를 시련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댓가를 늙어서야 거둬들이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교활한 속임수로 생을 꾸려 나간 그는, 계속 속임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므로 말년을 장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양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이유인 즉은 둘이 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시련을 통해서 더 높은 경지에 .. 더 성숙한 신앙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의 고백 중에 {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 ( 욥 23:10 ) 하는 말씀은 참으로 주옥과도 같습니다.야곱 역시 말년에 대 애굽 왕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나의연세가 얼마 못되니.. ( 창 47:9 ). } 놀라운 경지의 신앙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에게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교육과정이 만들어 낸 작품입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시간표를 오려낼 수 있습니까? 오늘도 당신은 그 하나님의 교육 과정 중의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15 . 기준을 낮추지 마십시요
교회 안에는 지나치게 완고하여 중,고등부 학생들의 사사건건을 못미더워하고 간섭하려는 어른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또 지나치게 방임해 두려는 타입의 어른들도 있습니다.
"다 그렇고 그렇지, 애들 믿음이 별거 있나요?"
"학생들의 믿음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것 같고,
그런거예요"며칠전 모 장로님은 한술 더 뜨기를 "나도 어려서는 교회 놀러다녔어요. 그러다가 그럭저럭 믿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오늘까지 흘러왔거든요"라고 하시더라니. .....속지 맙시다. 그것보다 위험한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언제 하나님이 그의 기준을 어떤 연령층에는 낮추어 주셨던가
요?언제 하나님이 그의 요구를 어떤 사람들에게는 면제해 주셨던가요?학생시절 적당히 예수 믿다가 나중에 바로된 사람이 혹 있다면, 그러다가 영원히 떠나가버린 사람은 그 얼마던가요? 길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 보십시오. 왕년에 교회 안나가본 사람 몇이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남녀노소에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제한되겠습니까? 어린아이라고 눈깔사탕들고 천국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지금 순수한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나중은 더 더욱 기대할수 없습니다. 언젠가 잘믿게 되리라고 무책임한 말을 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내일은 단지 오늘의 연장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일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내일은내시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16 . 독수리의 본능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새끼를 업는것 같이..(신 32:11)}
독수리의 새끼들은 그 강한 날개를 부여받고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고공을 치솟아 오르며 그 예리한 부리를 사용하는 능력이 있
는 것은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절벽위 바윗턱에 독수리의 보금자리가 있습니다.거기에서 새끼독수리들은 어미 독수리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날인가부터 어미독수리는 보금자리를 뒤흔들고 그의 부리로 어린새끼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뜨립니다.
어설픈 날개짓과 비명소리가 뒤엉켜 떨어져가던 새끼들은 어느 사인지 포근한 어미의 날개위에 자신들이 얹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밀어올리고 또다시 떨어뜨립니다. 이 훈련이 되풀이되면 새끼독수리들은 드디어<한마리의 독수리>가 되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독수리의 본능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 위에 올려 놓고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듭니다. 우리의 꿈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우리의 자신감을 꺽기도 하십니다. "꺽고 또 꺽고..." 이것이 하나님의 훈련방법입니다. 드디어는 목을 숙이고 "하나님 당신 뿐입니다"라고 고백 할때까지 이
일이 계속됩니다. 그리고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도록 만드십니다.
바로의 궁을 뛰쳐나온 혈기왕성한 모세보다는 지팡이를 짚고 바로 앞에 나가던 모세가 더욱 강하듯이 말입니다.....
17 . 양치기 할 그때에
목동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는 재미있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단순히 왕이 될 사람이니까 왕이 됐겠지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정말 왕이 되기에 적합치 않은 --적어도 사람이 보기에는--사람이었습니다.우선 시골 구석에서 양이나 돌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건장한 형님들을 일곱이나 둔 빈약한 막내였습니다.
가정에서 막내는 사랑은 받으나 그렇게 기대를 거는 존재는 아니지않습니까?그렇듯이 하나님의 큰 그릇이 때때로 그늘에 그냥 묻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나님이 들어 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인정받은 때문입니다.
(행13:22)다윗이 무엇을 할때 하나님이 그를 유심히 보셨을까요?양치기를 할때였습니다. 어릴때 였습니다.
이점이 중요한 것입니다.나중에 크면, 언젠가 훗날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는 아직 부모님을 모신 자녀로 있는 지금, 교회에서는 중고등부의 한 회원으로 있는 지금, 학교에서는 아직도 배움중에 있는 지금......
지금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기억합시다. 다윗은 왕이 되기전 먼저 충실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더 큰 자리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급하지 맙시다.
나무 하러갈 사람이 도끼를 갈고 있는 시간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8 . 하나님의 짝사랑
구약성경 중 호세아서에는 이런 안타까운 Love Story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은 남편을 배신하고 창녀의 소굴로 도망쳐 버리고, 편 호세아는 보리를 싸들고 찾아가서 팔려간 고멜을 돈을 주고 사오는 겁니다.
그녀의 배은망덕한 사랑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계속되는 배신은 하나님을 짝사랑의 애닮은 연인으로 전락시킨 것입니다.그 이후-- 하나님은 짝사랑의 아픔을 앓고 계십니다.
헌데 당신도 하나님을 짝사랑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어느날인가 복잡한 통근시간에 시내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저만치 한 여학생이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들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나는 꼭 그 여학생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손을 뻗쳐 가방을 받기에는 애매한 거리였습니다. 그저 그 학생이 한번만 돌이켜본다면 나는 그를 부를텐데, 조금만 더 닥아선다면 그 가방을 받아줄텐데--그녀는 끝내 더 먼위치로 움직이고 있
었습니다.
당신이 눈뜨는 아침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때까지 돌보시는 그의 사랑을 아십니까? 당신의 먼 장래까지 보장하시는 그의 관심을 아시나요? 그런데 당신은 어쩌면 주님께 시선한번 안돌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 한장 안 보고, 하루 중 기도 한 번 안하고, 그나마 주일 예배엔 늦게 나오고, 오후 집회엔 관심도 없고...... 이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슬프다! 당신은 그 분을 짝사랑하게 만들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요. 그의 도움의 손길이 끝내 근처에 머물고 있음을 아십시요...
19 . 그날은 올것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10여년 전의 어느날--.
나는 잔뜩 겁먹은 시골 닭처럼 하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배고픔과 수면부족, 그리고 1초의 여유도 없이 조여드는 훈련일과에 쫓기며.... 내가 무사히 이 훈련을 마칠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주일날 이었습니다. 요일을 셈해 볼 틈도 없이 지나버린 1 개월여 --몇 명이 발을 맞춰 뛰어 간 곳은 교회로 사용되는 계뱝관 강당이었습니다. 들어서기도 전에 낯익은 찬송 소리가 내 가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날 군목님은 <그 날은 올것입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는 강합니다.
십자가의 정병은 담대합니다. 주님의 힘을 입어 훈련에 임하십시요! 영광의 졸업날 또 전역의 날은 곧 올것입니다>라는 요지였습니다. 그 날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소망과 투지로 거뜬히 훈련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 신자는 이세상 훈련장에서 <그 날이 올것>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날>에 다시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행 1:11). 그날이 오면 신실하게 그리고 꼿꼿하게 믿음의 순결을 지킨이들, 성실한 봉사로 주의 일을 감당한 이들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주어질 것입니다.
형제여! 도적같이 임하되 분명히 임할 그날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라나다--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20 . 누구의 제자
도대체가 죄로 물든 우리네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개미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읍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정체는 무엇 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의 역사가 흘러 오는동안 아니 그 이전부터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어떤 자신이 똑똑한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신은 이미 없어졌다"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시53:1) 입니다. 만일 여의도에서 백만명이 모여서 금년의 겨울을 없애기로 하자고 결정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금년의 겨울은 오지 않을까요? 납엽이 지면 어김없이 눈발은 날리고 엄동설한은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들의 생각과 결정과는 상관없는 저너머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대가 변하고 아무리 "신이 없다"고 외쳐대도 바로 지금 이곳에 계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그를 찾아오는 자들에게 보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돌보시며 그를 위한 모든 수고에 보답하십니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꾸짖고 벌주시는 분으로만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바다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안으시길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나의 조그만 믿음은 이 두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이 귀절을 외워두면 어떨까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21 . 하나님을 기쁘시게함.
최근에 한 가슴 아픈 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생후 18개월된 조카의 젖떼는 작업(?) 을 지켜본 것입니다.
따뜻한 엄마품에 안겨 포동포동하게 사리 올랐던 모습이 한 삼일동안에 수척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밤중에도 잠을 깨면 사정없이 울어대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엄마의 괴로와 하는 것이 더 애처로왔습니다.
아픈 젖을 동여매고 아이의 더듬는 손길을 피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참된 어머니의 사랑을 볼수 있었습니다.
만일 아이가 한 없이 엄마의 젖을 먹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이제는 제법 밥상머리에 다가 앉는 어른스러운(?) 조카의 모습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성장해 가라!>고 명령합니다.
이미 에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여하한 일도 초월하여 주안에서 성장해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첫째로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히 12-1~2). 당신의 신앙의 촛점이 만일 예수님 외에 다른 곳에 있다면 너무도 불안한 것입니다. 엇그제 한 친구가 상의를 해왔습니다. 교회 대학부의 한 선배와 같이 자취를 하고 있는데, 그가 가짜 학생임을 최근에 알았다는 예기였습니다. 너무도 실망하고 괴로와서 병이 날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외에도 많은 믿었던 사람들이 자신을 실망시켜 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철저히 우리가 주님만 볼 것을 원하십니다.
물어봅시다. 우리 교회 중,고등부 회원인 당신은 누구의 제자입니까?결코, 담당 교사나 목사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당신은 누구의 얼굴을 봅니까?
목사님의 얼굴이 아닙니다. 그 뒤에 계신 예수님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교 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즉 영원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주님을 의지할 것일까? 끝까지 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몸위로 칼을 치켜든 순간까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주의 홍수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 하는 사람 노아의 약한 배를 보호 하시고 항로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선한 사업을 하던 뮬러는 마지막 돈을 다 쓸때야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간증했습니다.
우리 약속합시다.
당신의 남은 일생동안 주님만 의지하겠습니까?
어떤 어려움 중에도 주님의 손을 의지하겠습니까?
엄마의 품이 포근하다고 거기에만 있을 수 없듯이, 유치원이
재미있다고 늘 거기에서 재수만 하고 있을수 없듯이, 이제 당신은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더욱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22 . 링컨의 믿음
"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친구들에게 점잖게 대하고 주일날엔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들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단지 예수님을 내 대리인으로, 죽으신 내 개인의 구주로 맞아들일때 구원의 문을 열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위대한 인물이며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삶의 마지막 몇달을 남겨놓고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음을 아는 사람들은 드뭅니다. "나는 어머님의 기도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나는 그것을 언제나 따라했습니다. 어린시절 나는 성경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남북전쟁후 그의 임종 직전에 그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Do you love jesus?" 답하기를 "내가 대통령 직을 위해 고향 스프링 휠드를 떠날때 나는 사람들에게 날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게티스버그에서 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읍니다. 이제 나는 진실로 말할 수 있습니다." " I do love Jesus! "형제여! 부모님의 믿음이나 자신의 착한 태도나 교회에 등록되었음을 의지 하지 마십시오.
링컨같이 당신의 믿음을 주 예수께 둘 때에야 영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3 . 영원한 상급
좀 우스운 예기 같지만 우리가 나중에 천국에 가보면 알몸에 팬티만 하나 걸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한편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은 강도일 것 입니다. 임종 전에 그가 입은 옷, 그대로일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생전에 예수님을 위해 한일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 "당신이 낙원에 이를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요" 라는 한마디로 낙원에 초대를 받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구원 보다도 구원 그 이후입니다. 이미 예수를 알았고 그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제는 그가 주실 상급을 위한 수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런 과정에 서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찍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만큼 일할 기회와 시간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아무 한일도 없는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가르켜 건축으로 비유하면서 거기에는 나무나 짚이나 풀로 집을 짓는 자와 금은보석으로 짓는자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주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건강과 재물과 모든 것들은 금은 보석으로 남을 것이며, 단지 육신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의 재미와 만족을 위하여 투자된 것들은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단지 잿더미를 남길 뿐입니다. 그것의 가치가 시험받기 위해 불로 태움이 있겠고 거기에 남은바 되는 것이 상급의 조건
이 될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는 당신과 나의 최고의 구호는 이것입니다. "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
24 . 신앙의고백보다더한 그어떤 것
예루살렘이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때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갖가지 분분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실로 위대한 고백을 수제자 베드로는 할수 있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제껏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실로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큰 놀라움을 가지시며 베드로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그날 이후 2000여년의 기독교의 역사를 흘러 내려오면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믿음의 고백위에서만 가장 순수한 신앙의 탑이 이루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고등 학생의 연령에서 아니 그보다도 더 일찌기 주님을 바로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출발선에서 출발한 후 수많은 나날을 그냥 허송세월하는 이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새 생명의 씨앗이 우리의 영혼 한복판에 뿌리워진 그날 이후 우리는 너무도 어처구니 없이도 유혹의 사탄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그런 우리의 안타까움을 위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베드로가 주님을 연거퍼 세차례씩 부인하고 난 그 뒤의 일입니다. 부활 후 잠시 이 세상에 계시던 주님께서 베드로를 지목하여 이렇게 물으셨던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씩이나 주님은 다짐하셨던 것입니다. 세번씩이나 부인함과 세번씩이나 다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 미음의 고백 그것보다 더 차원 높은 것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만이 수고의 어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킬수 있으며 순교의 자리에 까지 이끌어 갈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이 고백 뒤에 베드로의 모습을 압니까? 그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그를 통하여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해요"
이 가슴 뜨거운 고백을 당신도 할수 있나요? ........
25 . 스트롱 맨
스트롱 맨(Strong Man)이라고 제목이 붙혀진 그림이 있었습니다.한 사나이가 아파트 이층 난간 위로 피아노를 들어 올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물론 당신도 어떤 한 사람이 피아노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해 본적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아노의 무게를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볼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는 가느다란, 그러나 강력한 두선에 매여 있었고 선의 끝은 옥상 위의 크레인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나이가 피아노를 들어 올린 비결은 위에 매여져 있는 끈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슈퍼맨이 아니었읍니다.
오늘날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씨름왕 이만기 같은 사람일까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세개씩 따낸 어느 삼관왕 일까요? 혹은 당신 주위에도 있음직한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기자신 밖에 없다" 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일등을 도맡아 놓고 하는 어떤 친구 같은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이 땅위에서의 진정한 강자는 하나님이 편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명장 다윗왕 같은 이도 (나의 힘이되신 여호와여 ! 내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오늘 우리의 싸움은 주먹과 권세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더 하나님 편에 가까이 서서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어때요. 당신은 스트롱 맨 입니까...........
26 . 천국에 있을 준비를 하세요
어느 폭퐁우가 몰아치는 밤이었읍니다.
한 늙은 부부가 길가 여관의 현관문을 밀고 들어섰습니다. 그들은 쉴방을 찾고 있었습니다.
마침 카운터에 있던 종업원은 그 읍내에 3개의 여관이 있으나 때마침 모두 초만원 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여관도 빈방이 없읍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기꺼이 쉬신다면 제방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노부부는 망설였으나 그 종업원의 간청으로 그방에서 쉬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여관을 나서며 노신사는 이런 말을 남겼읍니다. "당신같이 친절한 사람은 처음이요 당신은 이 미국에서 제일 친절한 여관 종업원이요. 아마도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건축하게 될것이요."종업원은 그 노신사의 (농담)에 웃음으로 답하였습니다. 그후 어느날 그 종업원은 뉴욕방문을 요청하는 왕복 비행기표가 들어 있는 편지를 받게 되었읍니다. 노신사로 부터 보내온 것이었읍니다.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때 노신사는
그를 거대한 새 빌딩 앞으로 데리고 갔읍니다.
"저것은 당신이 경영하도록 내가 지은 호텔이요"
그말은 농담이 아니었읍니다. 노신사는 당시 거대한 갑부였던 W. w 아스토이었고 그 청년은 아스토리아 호텔의 첫번째 경영자가 된 G.C 뿔트이였읍니다.
하늘나라에는 사람이 경영하기 위한 "많은 맨션"이 있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각자 자기 몫의 집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집들은 영광과 고귀를 드러낼 갖가지 크기와 모양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27 .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범죄한 사람은 하나님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후 수풀속에 숨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내셨읍다. 요나는 배 밑창에 들어가 숨었으나, 하나님은 그를 지중해 한가운데서 이끌어 내셨읍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읍니다. 그가 생각한 다섯 장소는 하나님의 눈을 가리울 수 없었읍니다. 하늘, 음부, 바다, 끝, 흑암, 밤..(시 139편)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임재" 라고 표현합니다. 이 임재하심은 어뗘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와 평안을 줍니다. 그러나, 어떤이들에게는 두려움과 괴로움을 남겨줍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또습니까 ? 전자는 순종하는 사람, 후자는 불순종 하는 사람을 말하고 있읍니다.
특히 요나서를 살펴보면 요나 외의 모두가 하나님께 복종했음을 알수있읍니다. 폭풍, 제비뽑기, 선원들, 물고기, 니느웨백성, 심지어는 동풍, 박, 벌래.......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였읍니다. 오직 한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열심이 순종보다 쉽다는 것을 아십니까 ?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요. 혹 당신은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행동으로는 그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까 ?
어차피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의 기쁨의 원인이 되도록 하십시요........
28 . 미지근한 물
여름철에는 누구나 물을 마실때 차가운 냉수를 마시기를 원합니다.
겨울에는 따스한 숭늉이나 보리차를 마시기를 원합니다. 미지근한 물은 전혀 인가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온도 지수에서 예수님은 미지근한 상태가 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뜨거웁든지, 아니면 차가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뜨거운 경우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열심으로 응답하는 것이고 차거운 경우는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지근함은
전혀 무관심, 혹은 만성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 중에서도 냉정하게 거절하는 사람보다 "아 교회 나가는것 좋지요--"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이 훨씬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뜨거운자에게 보상하시며, 차거운 자에게 손을 뻗치시지만, 미지근한 자는 거절하십니다.
당신의 영적 온도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읍니까 ?당신은 찬양으로 마음이 열리고, 말씀을 들을때 감동을 받습니까 ?당신은 기도할 마음이 있고, 전도할 마음이 있읍니까 ?만일 당신이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책망을 찾아
읽는다면 새로운 각성의 기회가 될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
근하여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
여 내치리라!}29 . 어미는 혹 잊을지라도
9남매가 한꺼번에 자라다보니 내가 아직 어릴때 이미 윗 형제들은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읍니다. 집을 떠나 있는 자식들의 편지는 그저 가뭄에 콩나듯 오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음은 집에 있는 아이들보다 떠나 있는 자식들 곁에 늘 가있는듯 하였읍니다. 간혹 어머님은 "오늘은 허리가 유난히 아프구나"하곤 하셨는데 그날은 십중팔구 우리 형제들중 누군가의 태어난 날이었읍니다. 자고로 모성애는 실로 변질할 수 없는 본능에 가까운것인듯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3,700여년 전의 사람인 이사야의 말은 참으로 적절한 것 같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배에서 태어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이 말에 무슨 반론의 여지가 있겠읍니까 ? 그 무슨 사랑이 모성애에 견줄 수 있갰읍니까? 그러기에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선지자는 계속 말을 잇고 있읍니
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심은 모성애 그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우리네 어머님이 혹 우리를 잊어도 하나님은 늘 기억하고 계십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버렸는가봐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요"........ 이런 얘기들은 진실로 뭘 모르고 하는 얘기들입니다......
30 . 다급해진 하나님
교회에 몇번 나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만한 사람이 있읍니다.{아브라함} 이 그 사람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일생중 가장 그 { 믿음 }으로 빛나는 것은 바로 창세기 22장에 나타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부분입니다.
부부가 다같이 늙어 자식 낳기를 이미 포기해 버린 뒤에 얻은 외아들, -상상이 됩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입니다. 이 아이를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주문이었읍니다.
우리는 대충 아브라함이니까 그럴 수 있을거야.... 하고 일축해 버리지만 아브라함도 우리네 가족의 아빠와 똑같은 아버지였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 쓰라림과 고민의 밤이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오늘날은 보통 자식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영영 사별이나 이별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믿음 좋은(?) 부모들이 이 부분에서는 주저앉아 버립니다.
"내 아들을 어떻게 목사를 시키겠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잘아는 친구가 {제발 목사를 무당으로 만들지 마십시요} 라는 글을 쓴적이 있읍니다. 요지는, 모든 사람이 무당을 보면 뭔가 두려워하지만 존경을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직을 겉으로는 존경하지만 자식을 그 자리에 넣기는 마다한다는 것이었읍니다. 물론 지나친 표현일 수는 있지만 신학생들의 신학교에 입학한 동기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정도 끄덕여지는 얘기입니다. 자식을 성직에 바치기는 고사하고, 자식이 스스로 신학교에 가려고 해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오늘의 신자들은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보기에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됩니다.아무하고 상의도 하지않고 이른 아침 부터 여장을 꾸려 모리아 산을 향하는 아브라함의 뒷모습이 눈물 겹습니다. 그의 믿음의 순종은 지체함을 몰랐읍니다. 드디어 칼을 높이 쳐듭니다.
사정없이 제물이 될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찍으려는 순간, 하나님은 급히 아브라함을 불렀읍니다. 적어도 이때 만큼은 하나님의 다급한 순간이었읍니다.
신속한 순종은 하나님의 다급한 응답을 받아냅니다. 지체된 순종은 불종과도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 오늘 어떤 부분에서 미루어진 것이 있으며 신속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
이..............
31 . 함께하시는 주님
전도자 요한 웨슬레의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즉 '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이 시간이 최선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어떤 상황이든 우리에게는 최선의 시간이고 최대의 행복입니다. 현재가 언제나 극적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시고 우리의 침상에 같이 누워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보다 더 중대하고 귀한 일은 없습니다.
2차 대전 때에는 많은 전쟁의 신화들이 있읍니다.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 영국군 수십만명이 후퇴를 할 때 그 부근의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는 대풍랑이 일어났읍니다. 거기서 얼마 안되는 부근 이었읍니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잔잔해서 수십만 명의 영국군이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답니다. 훗날 기록을 보면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수 1:9) }
32 . 어떻게 기도할까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요. 영혼의 호흡입니다.
신자의 삶에 있어서 기도는 너무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에 근거한다면 삶 전체가 기도라고 하는 편이 옳겠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설교나 전도하는 법을 가르치신 적은 없지만 기도하는 법은 일찍부터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하고 마감하는 습관을 꼭 가져야 합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좋읍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기도의 길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집중된 기도, 진실한 기도에 있읍니다. 궤스레 중언부언 하는 기도는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일 뿐입니다.
우선 우리의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주님의 임재 --- 바로 내곁에 계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결코 벽 저편에 있는 사람에 대한 대화가 아니거든요. 한 골방 안에 마주 앉아 주고 받는 대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난 죽어도 기도는 못해요" 라고 발을 빼는 친구가 있읍니다. 옳은 얘기 입니다. 죽으면 못하지요. 그러나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기도하는것 뿐입니다. 기도는 여가선용이 아닌주 업무로 취급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노동만큼 수고롭고 중요한 것입니다....
33 . 성경 좀 읽읍시다.
가난한 소년 링컨이 어머니로 부터 유산으로 받은 것은 낡은 성경책 한권 뿐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도요.
오늘날의 인쇄술 발달은 웬만한 사람이면 성경책 한권쯤은 다 꽂혀있는 형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시대를 초월한 베스트셀러는 역시 성경책입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팔리면서도 가장 읽히지 않는 책도 성경책입니다.
어떤 신자는 교회 나온지 10년이 되어도 성경을 하번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읍니다. 항상 성경책은 새것으로 남아 있고 책을 펴면 낯선 골목 앞에 서있는 것처럼 서먹하기만 합니다.
만일 당신의 성경책이 깨끗하다면 당신의 마음은 더럽고, 성경책이 더럽다면 마음은 깨끗할 것입니다.
당신은 매일 음식을 섭취하듯이 매일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대하여야 합니다. 단어 외울 시간도 없다고 둘러대지 마십시요. 이 습관을 위해서는 경건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읽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도움이 될것입니다.
우선 신약의 4복음서부터 시작하고 점차로 구약으로 옮겨가는 것이 좋습니다. 읽는 도중에 모두 이해 되리라고는 상상 마십시요. 그러나 당신 나름대로 색연필로 표시를 해가며 읽고, 의문점을 모아서 교회 지도자들에 문의할 수도 있읍니다. 물론 정기적인 성경공부에 참여하는 것은 당신의 성경의 이해도에 큰 유익을 줄것입니다.
성경을 읽고자 시작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달리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읍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후 각각의 성장도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될것 입니다....
34 . 이웃과의 만남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지금 하세요
오늘은 하늘이 맑고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런지 몰라요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 아니니
바로 지금 하세요
친절한 말 한마디 하고 싶거든
바로 지금 하세요
내일은 당신것 안될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곁에 있지 않아요
사랑의 말이 지금 있다면
바로 지금 하세요.
상냥한 미소 짓고 싶다면
바로 지금 하세요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꽃피고 가슴이 설레일때
당신의 미소 미소 띄우세요
바로 지금 하세요
불러야 할 노래 노래 있다면
바로 지금 하세요
당신의 태양이 서산에 저물면
노래부르기엔 너무나 늦어요
당신의 노래 노래 부르세요
바로 지금 하세요........
35 . 백부장 이야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사람이 있읍니다.그가 바로 가버나움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들의 우두머리인 백부
장입니다. 그는 로마장교의 신분인데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읍다. 자기의 종의 아파하는 것이 너무 너무 안타까와서.
그는 예수님은 종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읍니다.
그의 믿음은 {참 사랑}으로 밑받침되는 믿음이었읍니다.사랑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길입니다. 사랑이 없는 행동은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또한 사랑은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읍니다. 그렇다면 백부장 밑에는 신실한 군사들이 많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진실한 친구들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형제여 ! 아무도 변치않는 그런 사랑을 갖고 싶지 않읍니까 ? 나보다 약한, 불리한 처지의 형제와 우정을 나누고 싶지 않읍니까 ?
종의 아픔을 끌어 안고 온 백부장처럼, 다른이의 문제를 위해 주님 품에 무릎 꿇어 보지 않겠읍니까 ?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같은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0)
이 칭찬이 당신을향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
36 . 우정을 위하여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성경도 지적합니다.(잠 27:17)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흠집투성이지만 "우정" 만큼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물론, 우정의 최상급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요 5:13) 이지만, 때로 우리의 우정은 얇팍하고 자기 이기심을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실한 친구 셋만 있으면 성공한 거라는데, 한사람의 그런 친구도 못가진 자신의 초라함에 한숨이 나옵니다. 무엇보다 내가 그 누군가의 그런 친구가 되주지 못했음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친구가 없이 고민하던 한 형제를 알고 있읍니다. 학교 친구들을 보면그저 경쟁대상만 같고, 교회 친구들은 너무 거룩한 척만 하더라고.....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 친구는 소유하고 있는것 같읍니다. 서로 비밀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아니 이미 나를 위하여 내어준 친구 말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는 내친구" (눅12:4)라고도 하셨읍니다. 이 친구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우리의 학교 친구들에게 이 친구를 맺어줍시다. 우정을 위하여......
37 . 손가락 얘기
"당신의 둘째 손가락이 남을 지적할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당신을 가르키고 있음을 기억하라." 는 얘기 들어본 적이 있읍니까 ?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험담에 유난히 열심인 사람은 명심할 말입니다. (눅 7:41~ )당신의 말을 침묵보다 낫게 하십시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침묵하십시요.
그런데 이 손가락 얘기를 우리가 남을 칭찬할때 적용시켜 보면 어떻겠읍니까 ? 다른 사람을 칭찬하기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남의 칭찬을 많이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를 격려합시다.
그가 결점이 있음에도 그를 칭찬합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두둔해 줍시다.
험담하는 자리에는 결코 끼어있지 맙시다.
어느덧 당신은 "Peace Maker"로 통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과 늘 함께 있고 싶어할 것입니다.....
38 . 전염성을 가진 사람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 중에서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황태자가 유학 중에 그의 신분을 모르는 한 친구가 질문했읍니다.
"자네는 졸업후 무엇을 할건가 ?" 그때 황태자는 단호히 말했읍니다.
"나는 단지 부친의 직업을 이어받을 것이네."
그렇습니다. 그는 자부심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그것을 알 수 없었읍니다. 아주 우습게 생각해 버리고 말았읍니다.
형제여 ! 우리는 황태자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 되시는 분의 자녀입니다. 이런 긍지를 갖고 그 다웁게 삽시다.
주님을 모르는 어떤 친구가 한 주일은 형제를 따라 다니게 하고 다른 한 주일은 세상사람을 따라다니게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여생동안 누구를 따르기로 결심할까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긍지와 기쁨, 행복, 소망,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달세게에 발자욱을 남긴 한 우주 비행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신하였읍니다.
나는 형제가 전염성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즉 예수 사랑의 전염성을 갖길 바랍니다. 형제의 학교, 그리고 형제의 가정은--바로 그런 시범을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곳입니다......
39 . 소 속 감
미국의 남북 전쟁이 한창일때 한 농부가 윗도리는 북군의 군복을, 바지는 남군의 군복을 입었답니다. 상황에 따라 한 쪽편으로 가장하면 안전하리라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 남군과 북군의 격전이 벌어졌을때, 그는 가운데서 양쪽 군의 사격을 받고 죽고 말았읍니다.
그는 소속이 불분명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소속은 하늘이요 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었지만, 그의 진짜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천명하였읍니다. 우리는 하루의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삽니다. 학교친구들과 만나고 대화하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소속을 분명히 합시다. 색깔을 분명히 합시다.
나는 기독교인인가 ? 나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대충 자신을 감추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
나의 예수 믿는 모습이 분명하고 생활이 진실할진대, 그들은 우정 그너머 "존경"의 시선까지 갖는 것을 잊지 맙시다.
전도는 솔직히 말해서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생활로 하는 것입니다.
입은 속삭이지만 행위는 소리치는 것입니다
40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현대인의 생활과 감정속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세상이 헛되고 인생도 헛되고,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그 필요성을 잃어버렸다고 믿고 있읍니다. 삶이 가지는 그 가치관을 상실한체 우리는 살고 있읍니다.
우리가 지금 "인생은 허무하다."고 할 때 그것은 죽음에 대한 탄식입니다. 더 살아야 할 사람이 죽고 꼭 살아 남아 있어야 할 사람이 죽거나,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데 갑자기 죽을 때 우리는 한결같이 인생을 허무하다며 아쉬워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이 허무하다기 보다는 인간이 이 땅위에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허무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둘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경험과 사건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이것들이 마침내는 허무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서 허무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백치이거나 초인일것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전도자 솔로몬은"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니 다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구브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이것은 현대인의 마음을 잘 나타내어 주고 있읍니다. 사람들은 이런 허무를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절망과 허무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다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허무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의 존귀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허무란 순간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허무의 마음속에서 하나의 보배를 찾아내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것은 허무를 이기는 단 한가지의 방법입니다.
41 . 존재자체를 기뻐하는 사랑
영국의 시인 죤 키츠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사랑하는 여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읍니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이 종교를 위해 순교를 할수 있다는 사실을 놀랍게 느끼며 전률을 느꼈지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읍니다. 나도 이제 나의 종교를 위해 순교할수 있으니까요. 사랑은 나의 종교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을수 있읍니다."그는 이와 같이 생명을 바쳐서 사랑할 대상이 있었기에 시한부의 인생을 살면서도 많은 아름다운 노래를 남기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목숨조차도
던질수 있고, 그 사랑앞에 서면 모두가 선해지고 뭉클한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인가? 가장 연약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강하고 가장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힘이 있고, 모든 것을 초월하는 초월적인 힘을 지니고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사랑으로 인한 고통의 쓰라림을 맛보고 있는지 알수 없읍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간단히 말하지만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란 어렵읍니다.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면서도 참고 지속적으로 베풀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계가 없는 초월적인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읍니다. 이는 인간이 어떤 행위를 드려서가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읍니다.
인간의 사랑 중에 어버이의 사랑도 자녀에게 어떤 댓가를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건강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자체를 큰 기쁨으로 받아 들이기에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참된 사랑의 모습을 갖고져 할 때 사랑의 어떤 조건이나 댓가를 바람이 아닌 그가 나와 함게 하며 호흡하고 살아있으며 존재하고 있음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42 . "감사해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들이 생기게 되고 범사에 불평을 품고 원망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불평과 원망의 일들이 생기게 됩니다.감사라는 말은 원어로 { } [유카리스티아]라고 합니다. 명사적인 의미로서는 [좋은 은혜, 행복한 은혜]라는 뜻을 가지며, 동사로서는 [숙고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말은 "행복스러운 은혜를 잘 숙고하여 그 깊이를 깨닫는 일"이 감사라는 뜻 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은혜들을 돌아보며 감사의 표현을 나타낼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 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인간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고 괴테는 말하였읍니다.
그렇지만 이 감사하는 마음은 곧 시들어버리기 쉬운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변하고, 자신의 이익과 연관되어 수시로 변할수 있는 것이 인간의 감사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사회에서는 어제의 감사의 대상이었던 자가 오늘의 원망의 대상이 되어져 버리는 서글픈 현상들이 수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읍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이것은 환경과 조건에 제약받는 형태의 감사가 아닙니다. 그 모든 조건과 환경들을 초월한, 오직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드릴수 있는 감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선지 하박국의 고백속에서 (합3:17-18) 우리는 진정한 신앙으로 드리는 감사가 무엇인지를 볼수 있읍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구원자 하나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감사의 이유가 되고 있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느끼게 하고 있읍니까?
우리가 사는 곳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갖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읍니다.
43 . 꽃들을 바라보며
꽃들은 서로가 피해없는 선의의 경쟁을 한다. 그들이 가진 각자의 색깔과 향기, 조화의 경쟁을 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처럼 말이나 인상이나, 몸짓으로가 아니고, 발이나 주먹도 아니며, 뒷전에서 남을 비방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아부도 않으며 남의 용모를 헐뜯지 않으며, 자기 자랑과 선전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색깔과 향기, 그 모습 그대로에 충실할 뿐이다. 아름다움의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데 대한 관심조차도 없다. 이런 꽃들 앞에서 인간들은 주제넘는 일들을 자청해 왔다. 멀쩡한 꽃들이 경쟁을 하고 있는 양 이야기하며 꽃들의 우열 등수를 매기고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꽃들은 좋다며 꺽어갔다.
왜!그럴까? 보이는 대로 말하고 느낀대로 판단하는 인간이기에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다. 인간들은 창세로 부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 꽃들을 인간의 경쟁의 세계속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경쟁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속에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던가? 선한 경쟁이 아닌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수없다
는 흑백논리속에 이루어지는 음성적인 경쟁들, 이런 악의에 찬 경쟁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있는가? 칡덩쿨처럼 남을 감고 조임으로 경쟁하고, 기생충처럼 남의 피로 배불리는 경쟁들.......
타인의 잘됨을 기뻐할 줄아는 그리고 타인의 고통속에 아픔을 느낄수 있는 선한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믿음의 선한 경쟁, 이것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몰고 오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나에게서 특별하고도 이상스런 그런 모습을 기대하시지 않는다.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셨고 또 그모습으로 살아감을 그리고 그 분량들을 지킴을 기뻐하신다. 우리가 우리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내게 보이는 대로가 아니며, 우리의 감정대로가 아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참되신 뜻을 나의 삶의 현장속에서 이루어 나가는 삶을 가지게 될때 참된 아름다움과 향기가 날리게 됨이 아닐까?
44 . 마 음
우리 인간의 모든 기관은 사실 '마음'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할 수 있읍니다. 마음은 보고 듣고 서고 강해지고 부드러워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사색하고 반성합니다.
이렇게 여러 모양으로 변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단단한 호두 속의 알맹이와도 같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마음을 지키라고 하시면서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읍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쉽게 미혹당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견고하게 지켜야만 하는데, 그것은 마음을 비워놓지 말아야 합니다. 즉 우리들의 마음이 무방비 상태가 되면 마음은 쉽게 정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들의 생활을 주장하고 행위를 통제하며 인생의 여정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피를 공급하
는 심장에 비유되곧 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이것은 영혼과 육체를 해하는 무서운 살인마로 변하게 됩니다. 고인물은 썩어서 부패하지만 흐르는 물은 지꺼기를 흘려 버려 썩지 않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흐르는 물처럼 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씻김을 받고 그 어떤 미혹의 병이 찾아와도 호두 처럼 단단한 가운데 그 알맹이를 간직하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을 통제하도록 버려둔다면 그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려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계신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들의 마음은 지켜질수 있게 됩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45 . 하나님의 시간
신앙 이해란 시간의 이해다. 세상의 긴 시간속에서 년 수와 날짜와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계산하며 살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될 때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한 시간속에 들어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구속사적인 시간이요, 예수 안에 생명을 체험하는 거듭난 시간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찍 오시는 법도 결코 늦게 오시는 법도 없다. 정확한 때에 정확한 시간에 오신
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이다. 때를 아는 것이 지혜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믿음의 인내이다. 수 많은 세상의 사람들이 자기의 때와 자기의 시간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좌충우돌하여 허우적거림을 우리는 볼수 있다. 이러함 속에서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하나의 사실이 있다. 우리는 언젠가 내가 주님의 앞에 서든지, 아니면 내 생애에 주님이 오시든지 둘중에 반드시 하나는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이라는 시간은 영원한 시간을 준비해야 할 귀중한 기회가 되고 있음을 우리는 느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시간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천하 범사에 때가 있는데, 그 모든 목적을 이룰 때와 날 때가 있은 즉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은 즉 거둘 때가 있고 슬픔의 때가 있은 즉 기쁨의 때가 있는 것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의 진실을 나타내어 주실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그 분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그 분의 원하시는 시간으로 우리들의 삶속에 채워나가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지시와 시간대로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구하며 인간의 조급증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그 분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누구의 시간표로 살아가고 있을까?
46 . 참된 기도
넓은 숲속에 조그만 움막을 지어놓고 혼자 살던 사람이 있었읍니다. 그는 식사하기 전과 잠자기 전에 꼭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어릴 때 배운 기도만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었읍니다.하루는 기도를 할 때마다 유리병에 호두를 넣어서 기도하는 횟수를 세어보기로 하였읍니다. 날이 지나자 호두는 여러병에 가득 차게 되었읍니다. 유리병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그는 만족을 느꼈고 마음이 거만해지기 시작했읍니다.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었읍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읍니다."호두알로 가득 찬 병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호두알 하나마다 한번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망치를 가져다가 호두알 하나하나를 깨뜨려 보게" 예수님의 말씀대로 호두알을 깨뜨려 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껍질만이있었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네 기도는 이 호두처럼 다 비어있네. 자네는 기도의 횟수와 말은 많이 했지만 마음은 항상 다른 곳에가 있었네. 기도란 말로 떠드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하나님과의 대화가 기도의 참된 의미를 갖고 있네?"우리는 얼마나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고 있읍니까?
눈만 감고 말만을 되풀이 하고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요? 알맹이가 없는 빈 껍질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귐을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중심을 뜨겁게 할수 있는 기도 그것은 우리들의 삶과 동행하는 기도입니다.기도는 우리의 시작에 불과하며, 기도가 최선의 것으로 꽃피우기 위해서, 더 넓은 테두리를 우리의 뜨거운 가슴에 품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47 . 당신은 어떤 색깔입니까?
어린이 종교수업시간에 목사님이 질문을 했읍니다. "만약 착한 사람이 모두 흰색이고 나쁜 사람들은 모두 검정색 이라면 여러분은어떤 색깔일까요?"한 어린이가 대답을 했읍니다."목사님! 전 얼룩진 색깔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이 한 어린이의 대답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타인들에 대해서 또 자신에 대해 의인과 죄인의 부류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두부류는 단순한 상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우선 누가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지 우리는 구별을 할 수가 없고 또 그렇게 구별함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의 삶으로 볼때 자신이 의인이라하든 죄인이라하든 구별없이 똑같이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 정도에 있어서 조금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흔히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의 거룩한 모양으로 자신의 얼룩진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정직한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속에 살아 갈찌라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얼룩진 모습임을 하나님의 앞에서 솔직히 고백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거룩한 척, 깨끗한척 할찌라도 나는 하나님의 앞에서 별난 사람이 아닌 평범한 얼룩진 삶을 가진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아닌척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는 행위일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의 고백속에서 우리는 모두가 흰색도 검정색도 아닌 얼룩진 사람임을 깨달읍시다.
48 . 전체적으로 보시는 온전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
어느날 해가 말했읍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다." 그런데 달이 "나뭇잎은 은색이다."라며 우겼읍니다. 다시 달이 말했읍니다. "
사람들은 늘 잠만 잔다."그러자 해가 "아니야 그들은 언제나 움직인다."라며 우겼읍니다.
달이 "그러면 왜 땅이 조용하냐!"고 물었고 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가 그러더냐! 땅은 언제나 시끄러운데." 이렇게 해서 말다툼이 벌어졌읍니다.
그때 바람이 나타났읍니다. "쓸데없는 논쟁을 하고 있구나."며 그들이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웃었읍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였읍니다. "나는 하늘에 해가 떠있을 때도 불고 달이 떠 있을 때도 분다. 해가 빛을 비추는 동안에는 나뭇잎은 초록색이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달이 비추는 밤이되면 모든 것이 달라져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하며 나뭇잎은 은빛이 된다. 그름이 달빛을 가리우면 나뭇잎은 검은 색이 되기도 한다. 너희들
은 아무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할고 있는 한쪽의 관점만으로 내것이 맞다고 고집들을 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다른 하나의 진실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의 단면만을 보면서 사물과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하나의 사실은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빛이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의 육신의 오감으로 확인할수 없는 많은 것들이 궁극적인 실제를보지 못하게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분적으로 보고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시고 심령의 보이지 않는 진실을 궤뚫어 보시는 온전한 진리이셨읍니다.
49 . 하나님을 볼수는 없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볼수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은 우리가운데 나타내시려 육신을 입고 우리가운데 오셨읍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요, 하나님의 실체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래의 영광을 우리의 육체의 시각으로는 볼수가 없읍니다. 우리가 그 찬란한 영광을 볼려면 우리의 몸이 영광의 몸을 입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읍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몇가지의 인상을 남겨 주셨읍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인상입니다.
평강을 깃들게 하시며 나누어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예수!이것은 초림하실 때 천사들의 노래였읍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모든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을 심령으로 진실되이 만날 때 근심이 사라지며, 부들부들 떨다가도 힘이 생기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은 무거운 양심에 안식을 주며, 아담의 범죄로 빼앗긴 기쁨과 평강을 회복해 주시는 소망과 인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모든 자들이 고백하지 않을수 없는 사랑의 인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나그네 인생의 가장 좋은 보호자가 되신 예수님, 죄인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므로 평안을 주시며 삶의 패턴을 바꾸어 버리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평안케 하시는 예수님! 그 깨끗하고 사랑이 풍성한 광채앞에 고꾸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완고한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당신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그런 역사를 기대하지 않으시겠읍니까?
이 부활의 아침! 주님은 당신과의 만남을 원하시고 기대하시고 있읍니다.
또한 그분은 자신이 가진 참된 평강과 기쁨을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시려 하시고 계십니다.
지금! 바로 이시간이 나에게 또 당신에게 소중한 시간이 될수 있읍니다.
50 . 아름다운 꽃이 많이 있는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을 아세요?
그것은 그 꽃밭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버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쉽게 망칠수 있는 비결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저절로 망쳐집니다.
어떻게 하면 친구 간의 우정을 망쳐 버릴수 있을까요?돌아다니면서 마구 헐뜯고 비방을 하면 그 친구의 우정을 크게 배반하게 되어 우정은 금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있나요! 그 친구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버려두면 우정은 사라지게 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칠수가 있을까요?방탕하고 법을 어기고, 타락해 버리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하지 않아도 세상이 악하게 돌아가는 대로 그냥 나를 방치해두고 그냥 편하게 두면 나는 저절로 망쳐 버릴수가 있읍니다.
또한 우리들의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망쳐 버릴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서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수고할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내 영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방관해 버리면 나의 영혼을 망칠수가 있읍니다.
아무런 관심도 갖지말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말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말고 그냥 자신을 방관함으로 내버려 두십시요.
그러면 나의 인생, 나의 영혼은 철저하게 그리고 무참하게 망쳐서 멸망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 그러시고 싶은 분이 있읍니까?
절대로 방관할수 없는 삶이 바로 우리들 자신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들의 영혼 그 내적인 고결함과 고귀함을 잊어버리고 물질적인 삶의 가치속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하나님은 우리들의 영혼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고귀함이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은 이 고귀한 영혼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읍니까?지금이 바로 나의 영혼을 위해서 그 무언가를 해야할 바로 그때 입니다.
51 .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만남으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만남에는 만나고 싶은 만남이 있고, 만나고 싶지않은 만남이 있읍니다.
또한 만나서는 안될 만남이 있고, 만나고 싶지 않은데 만나야 하는 만남이 있읍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의 만남을 통하여서 인생이 내 뜻과 같지 않음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일찌기 전도자는"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고백했읍니다.
사랑하면서도 헤어져야 하고, 미워하면서도 만나야 하는 모순
속에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고 있읍니다.
'만난다.'는 말은 '맛이 난다.'는 말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만남'은 곧 '맛남'이라고 합니다. 이말은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느낄수 있고 확인할수 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속에는 불행한 만남이 너무나도 많이 있읍니다. 우리들의 불행한 만남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이루어짐을 깨닫고 기쁨으로 만나고 기쁨으로 헤어지며사랑으로 만나고 사랑으로 헤어지며 믿음으로 만나고 믿음으로 헤어지며
소망으로 만나고 소망으로 헤어지는 행복한 만남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고 삶의 보람이 되는 멋진 만남이 되도록 서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읍니다. 우리에게는 보장되어 있고 성취되어질 사랑과 행복의 영원한 만남이 현재 진행중에 있읍니다. 이 만남은 훗날 완전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고 멋진 만남이 될 것입니다.
이 만남은 똑같은 만남일찌라도 우리의 만남은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만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우리가 얼마나 고대하고 있읍니까?주님!
주님이 오시는 그날 나는 나의 가슴을 다열어 하늘이 좁은 듯 주님을 가슴에 안으렵니다.
52 . 승리의 영광을 얻을 자
진실된 변화를 가지라.
생각의 변화를
결단으로 이루어진 삶의 변화를
승리로운 영광의 역사란?
참된 변화의 역사를 이룬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이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마다
변화의 삶을 추구하며
진리의 말씀속에서
허트려짐이 없는 변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오늘의 고통스러움은 내일의 큰 영광을 이룸이니
잠시의 세상락에 유혹되지 말라.
승리의 영광은 값지나 땀과 노력의 결정
달콤한 순간의 쾌락은 매혹적인 것
순간의 선택은 내일을 결정하니
어디로 갈거나?
순간의 즐거움은
영원한 고통과 후회를 이루고
오늘의 고통스러움은
영원한 영광의 풍요로움을 이룬다.
53 . 마 음 의 우 상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상하려고 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을 믿게 된다."당신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계십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을 단순히 하늘에 계신 분으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필요한 부분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머리속에 하나님을 그려놓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힘있게들 외쳐 됩니다만 그런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자기 마음속의 우상일 뿐 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생각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려는 이러한 인간적인 시도를 우리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쉽게 실망하고 낙심하여 하나님은 없다며 돌아설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그 분은 우
리의 생각속에 만들어지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언제나 우리들과 함께 계시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초월하셔서 스스로 계시는 그런 분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부분의 속성만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고 편리한대로 알려고 합니다. 예컨데 우리는 늘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공의로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녹여서 만든 것이든지 마음에 새겨서 섬기든지 그 앞에 섬기는 것은 우상"이라고 했읍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으로 상상하지 마십시요. 하나님게서 우리들에게 나타내셔서 계시하신 것 외에 내 멋대로 상상해서 하나님을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이 상상의 부산물로 내 마음의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54 . 참 기쁨과 평안이 있어요!
두 화가가 평화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을 했읍니다.
한 그림은 거울같이 맑고 아름다운 호숫가에 비치는 석양을 그린 풍경이었는데, 나무들과 화초들과 그리고 그, 가운데 깃든 고요함, 이 모두가 감미로운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화가는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우를 그렸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덮고 억수같은 폭우가 절벽을 무너뜨릴 것 같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폭풍우 아래에 하나의 굳건한 반석이 있어 그 아래에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었습니다. 무서운 폭풍우 가운데서도 엄마새와 갸날픈 새끼새들이 이 보금자리에서 안전하고 안락하게 잠을 얻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 환란을 겪지 않은 인생이란 있을 수 없고, 또 어떤 인생도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울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우리들에게 고난이 필요로 합니다. 우리들의 삶과 그 존재자체를 흔들어 놓는 고난이 우리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들의 삶을 찾아 옵니다.
어떤 성경 연구가가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근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는 문구를 세어보았더니 놀랍게도 삼백육십다섯군데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사는 일년의 날수와도 같은지 어쩌면 이 속에 우리들의 어지러운 마음을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찾을 것만도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온실에서 자라는 화초처럼 마냥 따스하고 안전하기만을 바라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칠수 없는 진리가 있는데, 그것은 길가에 피어있는 잡초가 오히려 삶의 깊은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내가 사는 세상이 죄와 난리의 소문으로 어수선 할찌라도 하나님의 품에 의지하여 기쁘고 풍성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안에만이 참된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55 . 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가?
구약성경 시편 23편에 다윗의 시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뉘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귀절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는 구절이다.
특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에서 왜 목자가 양들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목자가 양을 시냇가로 인도하여 물을 먹일 때 양은 흐르는 물에서는 물을 마시지 않기에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목자가 양의 습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하십니까?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기에 우리들의 모든 부분들을 일일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들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가장 안전하고 풍성한 곳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기만 하면 그 분은 우리들을 최선의 곳으로, 최고의 방법으로 풍성함이 있는 곳으로 우리들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곁길로 나가 자신의 멋대로 달콤한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흐르는 시냇가에 나아간다면 목자의 양으로서가 아닌 늑대의 먹이로서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자는 잔잔한 시냇가로 이끄시기도 하지만 주위의 유혹과 위험에서도 안전하게 그 생명을 바쳐서 돌보기도 한다.
이런 귀하신 목자가 누구신가? 그 분이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아닌가?우리는 그 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만을 따라가게 될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56 . 함께부르는 기쁨의 노래
우리 모두가 함께 부르는 기쁨의 노래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사랑, 용서, 친절, 이해등의 좋은 마음을 갖고 싶어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움, 원망, 시기등의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쩌면 좋은 마음으로의 끝없는 노력의 여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나쁜마음을 잘라 버리려는 인내와 용기를 발휘합니다. 그러나 한 번 병을 닦았다고 항상 깨끗한 병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늘 새롭게
하지 않으면 계속 더러움으로 쌓이게 됩니다.
매일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바쁜 중에서도 틈을 내어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독서도 하며, 기도의 시간도 갖고, 친구들과의 무익한 대화를 피하고 서로 충고하며 진지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생활로 좋은 마음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아무도 모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보낸 시간과 삶을 뒤돌아보면 "감사합니다."라는 영혼의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부르는 기쁨의 노래는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마음을 우리들의 삶속에 키워나가고 우리들의 삶속에서 생명을 허락하시고 모든 조건들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하는 일이 우리들의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노래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셨음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심을 의심하는 것은 참새가 하늘을 날면서 하늘이 충분히 넓을까?라며 것정하는 것과 물고기가 바다를 헤엄치면서 바다가 헤엄을 치기에 충분히 넓고 깊을까?라며 의아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은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겠다고 말입니다.(롬8:32)
57 . 고난이 있기에 생명력은 더욱 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평안하고 풍족한 생활이 곧 인간의 행복"이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 토인비가 즐겨 말하던 내용입니다.
북쪽 바다에서 청어잡이를 하는 어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북해로부터의 먼 거리에서 런던까지 청어를 싱싱하게 살려서 가느냐?"였읍니다.
모든 어부들은 아무리 잘해도 배가 런던에 도착해서 보면 청어들은 거의 다 죽어있는 것인데, 꼭 한어부만은 청어들을 산 채로 런던에 가져와서 큰 재미를 보고 있었읍니다. 동료 어부들
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 어부는 고민 끝에 말하기를 "나는 청어를 넣는 통에다 메기를 한마리씩 집어 넣읍니다."라고 말했읍니다. 그러자 모든 어부들의 눈이 둥그래지
면서 "그러면 메기가 청어를 잡아먹지 않소."라고 묻자 "네, 메기가 청어를 잡아 먹지만 두 세마리밖에 못잡아 먹지요. 그러나 그 통에 있는 많은 청어들은 잡혀 먹히지 않으려 계속해서 도망쳐 다니지요.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청어들은 열심히 도망다니며 살려고 애를 쓰지요. 덕분에 청어는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이 없을 수는 없읍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많은 고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은 엄청나게 달라질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우리들의 삶에 더욱 큰 의미를 더하고, 활력과 용기를 더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으로 인해 더욱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인생의 참 진주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수 있는 주어진 기회임
을 자각해야 합니다.
바늘 없는 시계(y00003)
치들리(HOWARD J.CHIDLEY)가 친구 집에서 큰 벽시계를 구경했다.
삼대째 내려오는 가보라면서 친구는 그 시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조부께서 75년간이나 그 시계 소리를 들으시면서 주무시고 일어나셨으며,
부친께서 75년을 더 사용하셨고,
자기 자신도 어려서 그 시계를 보고 학교에 다녔다면서
정확해서 믿을 만한 시계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런데 그 벽시계에는 바늘이 빠지고 없었다.
태엽을 감아주니 똑딱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바늘이 없으니 시간을 알려주지 못했다.
금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은으로 만들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래 되었으면 어떻고 과거에 잘 맞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지금이 몇 시인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벽시계!
바늘이 없는 벽시계,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어떤 교인과 같으냐.
똑딱거리기는 하면서 시간은 못 알리는 너는,
주장만 하고 믿음을 못 보여주는 사람과 흡사하구나.
삼대가 아니라 오대를 믿어 왔어도
보여줄 수 없는 네 믿음을 어디다 쓰겠느냐?
네가 얼마나 아느냐, 좀 보여 봐라. 얼마나 거룩하냐, 어디 좀 보자.
네가 성도냐, 사탄이냐? 아니면 무엇의 둔갑이냐?
그러나 볼 수 없는 믿음은 고칠 수도 없다.
네가 보여 줄 수 없는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없어서 못 보여주는지 누가 알겠느냐?
적게 믿고 짧게 믿었으나 행함으로 보여 주는 성도 앞에서
너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2:14)
대왕의 보물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동서의 세계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큰 꿈이 있었다.
그 실현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희랍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자기가 아껴오던 보물들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를 보고 한 신하가 물었다.
“폐하는 왜 보물을 모두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시면 폐하의 보고(寶庫)가 텅 비지않습니까?”
알렉산더는 대답하기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전부 나눠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있는 보물만은 어떤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보물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희망’이다.
내게 희망이 있어 비로서 오늘의 내가 될 수도 있었다.”
알렉산더를 대왕(大王)으로 만든것은 명예욕도, 권력욕도, 물욕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희망뿐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를 대왕답게 만든것은,
그가 국민 모두에게까지 희망을 안겨준데 있었다.
그가 건설한 새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그와 그의 신하들의 희망의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개인이나, 마찬가지로 나라도 구석 구석이 희망으로 가득차 있을 때 흥한다.
훌륭한 정치가는 또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처칠이 위대한 정치가인 것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영국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준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국인으로 하여금
전쟁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만든 것도 바로 희망이었다.
아직도 미국민이 케네디를 아쉬워하는 것은,
그가 온 나라에 희망을 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당신은,
지금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감추인 보화
1971년 아폴로 15호로 달에 다녀온 제임스 어윈의 간증을 들어본다.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하얀 돌이었습니다. 영국의 과학자 패트릭 모어(Dr.Patrick More)에 의해 오래전에 ‘창세기 돌’로도 명명되어 있던 그 돌이 왜 그토록 중요했길래 우리에게 그돌은 찾아 오도록 시켰을까요? 저는 그 돌을 발견한 것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진짜 돌’을 찾으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감추인 보화 비유를 말할 때 곧잘 이 하얀 돌의 모형을 보여드리곤 합니다. 이 돌을 구하기 위해 왜 그 엄청난 비용과 시간을 들였을까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그 돌은 달의 산과 표면의 성질을 모두 알아낼 수 있는 표본이기 때문에 귀할 수 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한 돌-감추인 보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내인생에 진정한 의미를 가져다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견고한 터
오래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피하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나이많은 한 부인성도는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 노부인에게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기쁜 얼굴로 앉아 계실 수가 있습니까?”부인은 대답했다.“나는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를 그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잠겨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미어즈 성경핸드북)
굴뚝이 아니야 (국민일보 1994.6.2)
여러사람들이 모여 흡연에 대해 찬반토론을 벌였다. 열띤 토론이 벌어지면서 금연론자가 몰리는 판국이었다. 이때 참관인으로 듣고만 있던 한교인이 나서서 말을 꺼냈다. “저는 사람이 담배 피우는 동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만약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실 작정이라면 연기가 나오는 콧구멍을 밑을 향하게 붙이지 않고 머리 꼭대기에 붙이셨을 겁니다.”그리고선 집을 예로 들어 다시 설명했다. “어느 집이든 현관 정문에,게다가 구멍이 밑을 향하게 굴뚝을 설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로 구조학적으로도 사람은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고 봅니다.”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노리에 박장대소하며 <금연>으로 의견을 통일했다. 창조의 섭리에 따른 설명이라면 다소 거창하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의 성인남자의 흡연률이 73.2%로 세계 최고인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금연운동은 때 늦은 감이있다.
담배라는 단어가 성경에 있을 리는 물론없다. 사람이 만들어낸 고약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직결된 생명에 관한 언급은 수 없이 많다.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인생을 경건과 절제의 삶으로 살것도 말씀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린도전서 6:19-20)
그리스도인의 삶
몇 년 전 제가 약 3주간의 미주여행을 하면서 어느 분으로부터 들었던 감동적인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 선교를 준비하고 있는 어느 미국 공과대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미국 동부에 있는 어느 공과대 학생인데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한국에서 20여년 간 선교사로 일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한국을 언제나 동경하며 특별히 한국에성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공과대학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중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하던 중 한국 여학생을 만나 결혼을 하고 중국 선교에 대한 소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마치고는 다시 전에 다니던 공과대학으로 들아와서 남은 기간을 공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 목사로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기술자로 들어가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에게 그분에 대해 말씀을 전해준 분은 그와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고 그가 결혼한 후에는 그들과 이웃해서 살던 부부인데 그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 미국인 대학생 부부는 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고 밤에 잠을 잘 때에도 베개를 베지 않고 그냥 바닥에 누워 자고, 그리고 슈퍼마켓에 식품을 사러 가서도 꼭 낱개로 헤아려서 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장차선교하러 갈 중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쉽고 안일하게 살아가도 되는 그러한 값싼 것이 아닙니다. 부단한 자기 훈련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는 값비싼 것입니다.
(삶,그리고 성령, 임영수)
기도의 능력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그렇게도 중요한 설교하는 법은 안가르쳐 주셨으나 기도하는 법은 여러차례 가르쳐 주셨고 그리고도 부족할까봐 기도의 Sample이라고 할 ‘주기도’까지 가르쳐 주셨으며, 성경에는 교회를 가르켜 ‘말씀이 집’이라 한 곳보다 ‘기도하는 집’이라 한 데가 더 많다. 사도바울은 쉬지말고 찬송하라거나 쉬지말고 성경보라는 말은 안했으나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기독교역사는 기도의 역사’라고 말한 이도 있다. 아무리 신학박사라 해도 이론과 학문으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는 인간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받을 때는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으니,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요14:13,14),믿고 기도하면 응답받을 수 있다.
(김홍도)
깊고도 철저한 기도속에서
기도의 사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요, 참하나님이시면서도 세상에서는 이와같이 열렬하고 끊임없이 처절한 기도속에서 그의 영성을 지켰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중 하나인 성베네딕트는 로마근처 수비아코산 동굴속에서 3년을 엎드려 기도하고 영성이 무르익은 영의 사람이 되어 카시노산에 수도원을 세우고 유럽교회를 영성으로 살렸다. 성프란치스코는 아씨시 스바시오산 계곡에 있는 동굴 속에서 기도를 계속하다가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의 사랑의 물결을 느낀 후 울며 다니면서 당시 유럽의 타락한 기독교를 건졌다. 예수님이 신인이면서도 기도,또 기도속에 영성을 기르신 것처럼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도 다른것을 의뢰하지 말고 철저히 기도에 의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엄두섭)
나를 따르라 (국민일보 1994.6.3.)
67년 6월 일어난 6일간의 중동전쟁은 절대적 열세인 것처럼 보이던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거의 파죽지세로 시나이반도와 골란 고원,요르단강 주변등등 아랍쪽 지역을 점령, 세계를 놀라게 했다. 후에 군사전략가들이 그 비결을 찾아 보고는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데 모두 동감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전쟁에 임할 때 아랍군 지휘관들의 공격명령은 “가라!”였다. 누구나 목숨은 하나이고 아까운 법,남보다 앞서 나서질 리 없었다. 죽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판국이라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그래서 참패했다. 그런 아랍군에 반해 이스라엘군 지휘관들은 “나를 따르라!”고 외쳤다. 상관이 용기 있게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따르지 않을 병사가 없었던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부정부패,무사안일의 펼연적 귀결로 나타난 복지부동현상을 타개하는 방법은 “나를 따르라”이다. 솔선수범하며 나설 생각은 접어준 채 당근을 줄테니 좀 달려보라고 구슬린다면 그것은 참으로 모자란 생각이다. 따를만한 위의 모범을 보면서 바르게 행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은 영적 전쟁의 양상을 띠고 있다. 악의 영들에 대한 믿음의 싸움을 하면서 지치고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그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승리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처한 곳에서 예수를 온전히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요한복음 8:12)
네로의 미소
영화 ‘쿼바디스’에 보면 로마의 폭군 네로가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궁에 앉아 불타는 시가지와 그 속에서 허둥대는 자신의 백성들을 보면서 쾌감에 젖어 시를 읊으며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사이래 많은 폭군과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마구 휘둘러 백성들을 전쟁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영상 가득히 화염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과 함께 유유자적히 자신의 궁에 앉아 잔인한 미소를 띄우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네로의 모습은 섬�함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한다. 한 왕의 잔인성은 그의 백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안위와 만족을 추구한다. 불길을 바라보는 네로의 미소에서 섬김과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백성된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저절로 터져 나옴을 어찌할 수 없었다.
돌아오기 위한 여행
해마다 여름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떠난다. 이와 반대로 북유럽의 사람들은 겨울에 따뜻한 지중해 연안을 찾아 ‘피한 여행’을 떠난다. 서로 반대되는 풍속이긴 하지만 두 여행의 공통점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상에서 ‘떠난다’는 것과 떠난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 ‘돌아옴’은 여행의 끝인 동시에 새로운 여행을 위한 준비이다. 만약 여행을 떠났던 사람들이 여행의 즐거움에 도취되어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다면 여행의 본 목적은 상실된다. 진정 그들이 여행의 즐거움을 느끼려면 자신이 떠났던 일상생활로 돌아와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칠 어려움이나 고통때문에 여행의 행복에만 매어달린다면 결코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현재가 즐겁고 행복하다고 현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결국 현실의 주변인으로 전락해 결코 진정한 삶을 살 수 없는 까닭이다.
동맹주역들의 최후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다. 그러나 결국 정의로운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살됐다. 일본의 동조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사람은 결국 그 악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미리 쓴 일기
어린시절 방학을 하면 학교에서는 쉬는 날에 걸맞게 많은 방학숙제를 내주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보면 방학은 빠르게 지나가 버리고 정신을 차려 숙제를 하려고 하면 개학은 며칠 남지 않아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헌데 다른 숙제는 그런대로 한다지만 일기만큼은 벼락치기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늘 고민고민 하다가 대충 써서 내곤했다. 그러다 어느해 방학때는 한달치 일기를 미리 써놓는 바람에 매우 곤욕스러운 적이 있었다. 매일매일 써놓은 일기를 따라서 생활하려니까 상대적으로 현실적 여건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시킬 수는 없고(일기에는 거짓말을 쓰면 안된다고 해서)하니 억지로 일기에 써놓은대로 따라가고, 때로는 일기의 상황을 일부러 만들기도 했다. 한달 후 내 체중은 3kg이나 줄어들었다.
믿고 말고요
어느 교회에서 부활절 칸타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지막 연습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서 힘껏 불렀다. 합창 순서가 지나가고 소프라녹 독창을 할 차례였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라는 가사로 노래가 이어졌다. 독창을 맡은 여자는 음악적인 기술이 원숙했다. 호흡조절도 완벽했다. 음정도 정확하고 발음도 똑똑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되었다.그는 마지막 음절까지 아주 자신만만하게 다 불렀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지휘자에게로 모아졌다. 아마도 “잘 불렀습니다!”또는 “아주 훌륭했습니다!”라는 찬사가 지휘자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모두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지휘자는 그 자매를 향하여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듯한 모습으로 이렇게 물어보았다. “자매여! 그대는 진정 주님께서 살아계신다고 믿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자매는 선뜻 대답했다. “그럼요! 믿고 말고요!” 이와 함께 지휘자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정말로 살아계신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불러주세요. 자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을 수 있도록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을 불러주세요!”그 소리에 여자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지금도 함께 하시며 자신의 찬양을 받고 계심을 느끼는 마음으로 다시 불렀다. 듣는 사람들이 다 감격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난 후 지휘자도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했다. “자매는 정말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알고 있군요. 자매의 노래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어요!” (예수,예수의 사람들, 박상훈)
믿음의 나락-체념
코끼리를 산채로 잡는 사냥법입니다. 먼저 코끼리를 정글로부터 유인하여 미리 만들어 놓은 우리에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코끼리의 발목에 든든한 쇠사슬을 매어 놓고 한 끝은 튼튼하고 굵은 나무 기둥에 묶어 놓습니다. 그후 우리를 치우면 야생의 코끼리는 정굴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러나 발목에 묶인 쇠사슬 때문에 몇발작 걷닥는 저지를 당합니다. 처음에 코끼리는 쇠사슬로부터 놓여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있는 힘을 다 동원해 보지만 계속 실패를 하게 되고 결국엔 체념하며 비록 코끼리가 끊고 도망갈 수 있을 정도의 기둥과 줄에 묶어놔도 조금만 줄이 팽팽해지면 힘쓰기를 포기합니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대로 줄을 잡아당겨 코끼리를 훈련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체념은 소망을 포기하는 행동이며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처음의 고통이나 고난이 비록 견디기 어려울지라도 믿음과 소망을 갖고 기다리며 노력하면 결국에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팔소리)
문화적 선교사 (국민일보 1994.6.9)
여름철의 대표적인 보양식품으로 개고기를 꼽는다. 요새는 언제 어디서고 쉽게 먹을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머무는 외국인들도 즐겨 찾는다. 전세계 동물 애호가들의 비난이 그칠 새 없지만 한 민족의 문화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반론이다. 자기네 문화가 소중한 것처럼 우리의 문화도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한미국인 선교사가 고향에 편지를 했다. “···어제 눈 딱 감고 난생 처음 개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사람들 꽤나 좋아하며 저를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이내 친숙해져 전도가 쉬워졌지만 여름내내 개고기를 대접받게 생겼습니다.···”아버지의 답장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였다.
현지 문화에의 적응이야말로 해외 선교의 첫걸음이다. 한때 한국에 온 선교사중엔 그 이해나 훈련이 부족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일이 많았다. 최근 있었던 침례교 한미전도대회 평가회 때 한 목회자의 말은 그것은 역설적으로 실감케 한다. “우리교회에 오신 미국목사님은 저희가 대접하는 무엇이든 잘 드셔서 온 교우들이 얼마나 흐뭇했던지요” 그는 우리식으로 밥도 두,세공기씩 맛있게 들었고 그가 인도하는 전도집회는 대성황이었다.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도 다른 곳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서로 마음이 합해질 때 그사랑의 토대위에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 열매 맺게 된다. 선교에의 열정이나 사명감과 함께 문화나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선교사역자들에게 더욱 필요하다는 얘기이다.
변화시키는 힘
캐나다의 존 케디라는 선교사는 식인종이 사는 작은 섬으로 복음을 들고 나갔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고 언어를 습득하여 성경을 번역하고 교육을 시켰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기념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1848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에는 이곳에 그리스도인이 한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1872년에는 여기에 식인종이 한명도 없다.” 즉 그는 섬사람 모두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 것이다. 복음은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식인종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자를 그의 자녀로 삼으셔서 신분이 바뀌게 한다(요 1:12). 성경은 우리가 원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이었는데 생명의 빛을 받고 빛이 되었다고 말한다(엡 5:8). 투정과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감사하고 노래하며 밝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요,죄의식과 좌절로 누추하게 살던 사람이 자유함고 희망으로 청결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 복음이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험악하고 거친 인생을 살다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유순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바뀐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사랑하자. (달리는 QT, 박광철)
보여지는 빛
옛날 팔레스틴의 집들은 지름이 50cm도 안되는 작은 창문 하나 밖에 없었으므로 대단히 어두웠다. 당시는 등잔불을 켜는 성냥이 없을 때였으므로 한 번 불이 꺼지면 다시 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평시에는 등잔을 대위에 올려 놓았다가 외출할 때는 대위에서 내려 흙으로 만든 말위에 두어 외출했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하였다. 등잔불의 본래적 사명은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란 사람에게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숨은 제자란 있을 수 없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면 제자의 자격을 잃어버리는 것이므로 제자이면 숨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다만 교회안에서만 보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밖의 이 사회생활에 더 많이 보여져야 한다. (박조준)
보 혜 사
데이비드 시맨즈의 글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심장 절개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수술을 받기 전날 몃진 간호원이 내 병실로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는 나에게 꽉 잡아 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간호원이 참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은 당신의 심장과 분리된 상태에서 오직 기계의 도움에 의해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당신의 심장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당신의 심장 기능은 다시 정상으로 움직이고 당신은 마침내 회복실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약 6시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일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심지어는 눈을 뜨고 싶어도 뜨지 못하는 상태일지라도 당신의 의식은 완전한 가운데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들어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당신 곁에 머물겠습니다. 비록 당신이 어찌할 바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빠질지라도 당신이 내 손길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간호원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들이 나에게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내 손을 잡아 준 간호원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스니다. 그것이 내가 어려움을 경험하는 동안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도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임재해 주실 것이란 약속은 그분이 가르쳐주신 보혜사란 말 가운데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이름처럼 지금도 고난과 슬픔에 싸여있는 우리의 손을 잡고 위로와 소망을, 그리고 힘과 사랑을 주십니다.
(설교예화, 김선도)
복음의 능력
조쉬 맥도웰은 아주 똑똑한 청년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아주 불우했고, 그는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유명한 알콜 중독자였다. 그의 친구들은 늘 그의 아버지의 술주정 행각에 비웃음을 보냈다. 조쉬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심지어 아버지를 창고에 끌고 가 꽁꽁 묶어놓곤 해야 했다. 그리고는 창고근처에 차를 세워두고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집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조쉬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안으로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꼈다. 조쉬는 자연히 분노에 찬 사람이 되었다. 그는 특히 자기 아버지를 증오했다. 천천히 세월이 흘렀다. 조쉬는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참으로 거듭난 크리스챤들을 몇 명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안에서 자기의 굶주린 마음이 그토록 갈망해왔던 그 뭔가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도 너무 똑똑했다. 조쉬는 기독교 및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으로 멋지게 반박해보기로’마음먹었다. 그는 작정을 하고 그 증거들을 파헤쳐 들어갔다. 그의 생각과 마음을 두고 벌어진 이 전투는 가히 기념비적인 것이었다. 결국 조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여겨지는 그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확신과 아울러 마지못해 한다는 마음도 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959년 12월 19일 저녁 8시 30분에 자기방에서 혼자, 예수그리스도를 자신의 마음과 삶속에 모셔들였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실재성에 바탕을 둔, 아주 조용하고도 감정의 동요가 별로 없는 회심이었다. 그러나 비교적 평온한 회심으로 시작됐던 그것이 나중에 가서는 새로운 사람으로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비밀은 없다
어느 풋내기 변호사가 사무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개업 첫날이었습니다. 손님이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옳지. 이제야 손님이 오는구나. 첫 손님이니 내가 꼭 사건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한 변호사는 어떻게든 손님에게 신뢰감을 줄 양으로 걸려오지도 않은 전화수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무러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일감을 맡고 있는지 손님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손님이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있자 그는 온갖 몸짓을 다 해가며 더 큰소리로 지껄여댔습니다. 조금후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변호사는 손님을 향해 넌저시 물었습니다. “손님은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손님은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실은 전화국에서 나왔습니다. 선생님 사무실에서 신청하신 전화선을 이어드리려구요.” 전공은 아직 개통하지 않은 전화기의 선을 찾아 잇기 시작했습니다. 영원히 감추어지는 비밀은 없습니다. 착함과 악함도 언젠가는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행한 악을 감추려는 것도 헛된 일인데 인생은 어쩌자고 어리석은 일, 헛된 말만 골라 행하기를 즐겨하는지요. 그러기에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쳤는지도 모릅니다. (이슬비 장로의 젊은 이야기, 여운학)
사랑의 언어의 중요성
어린아이들이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고작 2000내지 3000개의 단어로 자신을 표현합니다. 어린아이들의 어휘력은 한계를 느낍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만을 위하여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은 악한 말부터 배웁니다. 어린아이들이 말을 처음 배울 때 어떻습니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욕부터 배우지 않습니까? 선한 말은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악한 말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하여 친구를 칭찬하는 말보다 허물을 말하고, 격려의 말보다 조롱의 말을 많이 합니다. 흉과 허물을 말하기 좋아합니다. 별명을 붙여도 꼭 이상한 이름만 붙여줍니다. 말이 많다고 ‘참새’, 키가 크다고 ‘황새’, 뚱뚱하고 둔하다고 ‘두꺼비’,눈이 크다고 ‘왕눈이’등 기분 좋은 별명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어린아이들의 언어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상대방 가슴에 상처를 주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내기분을 살리기 위하여 말 한마디도 마구 합니다. 남의 감정과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말은 상스러움을 넘어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자녀에게 저주하는 것은 예사이고, 이웃에게 악을 전파하는 것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혀는 토하여 내는 것이 악이기 때문에 독사의 독같이 무섭다고 표현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모를 때에는 육체를 따라 살게 되므로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아이들처럼 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사랑을 아십니까?, 권경흠)
새끼를 위해 죽은 암닭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그 부인은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닭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는 막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닭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닭은 죽어있었다.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닭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 먹었는데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때 목사님은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받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진정한 자랑거리입니다. (목회를 돕는 명예화집, 죠지 스코트)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르심
어떤사람이 한 선교사에게 아프리카 선교사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을때 그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내 아내와 아이들은 어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련되고 깨끗한 감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식하고 더러우며, 잔인한 사람들과 상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다 해서 그리스도를 위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싫던 좋던 선교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 선교해야 한다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갑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섬김의 삶
사람은 누구나 높은 사람, 큰 사람, 대접받는 사람, 권세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죄인된 우리를 대신해 가장 추악한 죄인만이 지는 십자가를 지셨다. 내가 지금까지 본받으려 노력해온, 그리고 현재나 앞으로도 예수께 본받고 싶은 점은 바로 이‘낮아짐’의 도(道)이다. 낮아진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높아지려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때, 예수의 “너희도 가서 남의 발을 씻기라”는 말씀은 언제나 내생활 가운데 있다. 섬기는 삶, 낮아짐의 도,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려는 제자가 배워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이리라. (임택진)
신기루 현상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끔 나타나는 신기루 현상은 열 또는 찬기운 때문에 대기 밀도의 급변으로 빛이 이상하게 꺾이어, 공중이나 땅위에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대기 현상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신기루는 그 형체를 간직한고 있는 사물의 반대편에 나타나기 때문에 신기루를 쫓아가다가는 점차 그 실체와는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옛날 사막을 여행하던 대상들에게 있어 신기루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당장의 필요에 급급한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겨를이 없이 단지 눈 앞에 보이는 신기루만을 쫓다가 점차 진짜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멀어져 결국 물도 없는 사막에서 말라죽게 되는 것이다. 위장된 진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신기루만을 쫓는 사람들의 결국은 사막의 신기루를 따른 사람과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이다.
양쪽 노를 다 젓기
한 늙은 스코트랜드 사람이 작은 배의 노를 저으며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어느날 한 손님이 그 노인의 한쪽 노에는 ‘신앙’,그리고 다른 노에는 ‘옳은 행위’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았다. 이상히 여긴 그는 이 의미를 물었는데 그 노인은 “자 보시오”하며 ‘옳은 행위’라고 써 있는 노만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배는 원을 그리고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바꿔서 ‘신앙’이라고 쓰인 노만 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서 노를 둘다 함께 젓자,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빠르게 나아갔다. “보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활방식입니다.‘믿음없는 메마른 행위’는 소용없으며 ‘행동없는 믿음’또한 죽은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옳은 행위’의 두 개의 노를 함께 젓는다면 안전과 발전과 은총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대화
어떤 목사님이 한 젊은이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냐고 물었는데 그는
“지난 5년 동안 종교를 연구해 보았으나 신통치 않아요.”하고 대답하였다.
“아,그래요? 나도 과거 15년 동안이나 종교를 연구해 보았으나 결국 포기해 버렸지요.”하고 목사님은 말했다. 청년은 너무나 의아해 되물었다.
“아니,목사님께서 그러시단 말입니까?” “네,그러다가 나는 그리스도를 대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는 나를 충족케 해 주셨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종교를 추천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의 구세주 예수님을 추천하는 것입니다.”라고 목사님은 말하는 것이었다. (미어즈 성경핸드북)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ΙΧθΥΣ)
기독교 서점이나 교회용품을 취급하는 곳에 가면 고기모양의 형상에 “ΙΧθΥΣ”라 쓴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이것은 헬라어로 “고기”라는 단어인데 여기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비밀 스런 사연이 담겨있다.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공직에서 추방됨과 시민권의 박탈,그리고 생명까지 위협하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전도와 증거로 성도들은 계속늘어났고, 따라서 그들만의 비밀스런 암호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위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풀이하면 ‘Ιηδους Χρίδτος θεος ϋίος δωτηρ’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시다’란 말을 앞글자만 따서 만든 것이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성도들이 방랑하다가 어느 곳에 이르러 고기모양이 그려진 것을 보면 그 안에 이 단어를 썼고 그것을 확인한 다른 성도는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된 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고 함께 예배하고 음식을 나눈후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비록 세상은 그들을 박해하고 버렸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됨에 감사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것이다.
열 두 사도의 최후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후 68년 네로 박해때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죽었고, 안드레는 헬라국 밧으라에서 X형으로된 형틀에서 못박혀 죽었다.
큰 야고보는 주후 44년 예루살렘에서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으며, 요한은 끊는 물에 넣어졌다가 살아나 밧모섬에 유배 당했다가 주후100년경 에베소에서 죽었고, 빌립은 부루기아에서 기둥에 매인채 맞아 죽었다. 그리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져 죽었으며, 도마는 인도에서 쇠몽둥이와 창에 찔려 죽었고, 마태는 애굽에서 칼에, 다대오는 버시아에
서 활에 맞아 죽었으며, 작은 야고보는 주후 62년 유대인들에 의해 성전에서 밀쳐진 뒤 돌과 망치에 맞아 죽었고, 시몬은 예루살렘에서 못박혀 죽었다. 이들은 단지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이 전한 사랑의 복음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
염 려
염려는 누구나 버릇처럼 하기 쉬운 것이다. 안해야지 하면서 다시 하고, 안한다고 하면 먼저 한다. 어떤사람은 염려를 안개에다 비유하고 있다. 광화문 일대를 30미터 두께로 짙게 덮을 수 있는 안개가 실은 한잔의 물이 600억개의 물방울로 바뀐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염려가 처음에는 한잔의 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내면세계를 온통 가릴 수 있는 안개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안보인다. 하나님도, 그의 약속도, 응답의 손길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많은 염려가 자주 우리를 괴롭힐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
어떤 여인이 한번은 불이 난 자기 집에서 그녀의 그림들과 가장 애지중지하는 가구들을 바쁘게 끌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수고했으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리에 자기 자녀 중 하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아이를 불타는 집 속에 두고 나온 것이다. 그 어머니가 황급히 다시 방안으로 돌진해 들어갔을 때 이미 그 방은 불이 활활타고 있었고 아이는 죽어있었다. 그때 그여인은 비통한 나머지 양손을 비틀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며 통곡하였다. 어머니는 자기가 꺼낸 모든 가구들을 저주하는 것 같았으며 차라리 그것을 꺼내지 못했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하잘것 없는 것들을 구하려다가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기심 있는 지식 부스러기와 묘한 금언 그리고 심오한 교리 등을 불 가운데서 끄집어낸다 해도 만일 사람의 영혼을 패망시킨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양심을 고소할 뿐이다. 귀한 영혼들이 사랑의 복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가 난제를 끄집어내어 수십 가지의 토론을 하면서 50주일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는 것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런 문제는 그대로 두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무한히 낫다.
유산 이야기 (국민일보 1994.5.31)
세계 인류의 존경을 받는 마하트마 간디의 유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생전에 즐겨부르던 노래책 슬리퍼 샌들 찻잔 숟가락 회중시계 안경, 이 일곱가지 뿐이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도 존경을 받는다. 유산의 많고 적음이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1천만달러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큰 돈을 모두 써버려 70세가 됐을때는 거의 무일푼의 상태였다. 말년에는 방 두개짜리 집에서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면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을 위해 기업을 도모하거나 흥청망청 썼을테지만 그는 달랐다.
우리돈으로 80억원이라는 큰돈을 유산으로 받자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위탁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30여년의 긴세월동안 곤궁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 불구자나 병자,그리고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었다.경찰과도 긴밀하게 연락해 가엾은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주었다. 그런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무려 3만명에 이르렀다.
쓸모없이 돈을 쓰는 사람이 이세상에는 너무많다. 반면에 돈을 쓸모있게 쓰는 사람은 너무나 드물다. 그러면서 누구나 많은 유산을 자손들에게 남겨주려 한다. 1백억원의 유산을 노린 충격적인 범죄로 인해 유산안 물려주기 운동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물이 적든 많든 남기든 남기지 않든 상관없이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누가복음 12:42-44).
의식 개발
몇 년 전에 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참사랑을 베풀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기에 제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되는 것이 성경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고아와 과부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지할 곳이 없고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로 나섰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해본 뒤에 저는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또 교회 여러가지 구제사업도 장애자들 위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철학을 공부해서 그런지 천성이 그래서인지, 아주 냉정합니다. 아무런 동정도 할 줄 모르고 끔직한 일을 봐도 별로 놀라지도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불쌍한 느낌도 없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어머니가 저를 보고 냉혈동물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 사람들이 겉보기에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보니까, 장애자가 제일 불쌍하고 도움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두다 보니 그 다음부터는 신문에 장애자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뜨이고 또 길을 지나다 장애자를 보면 더 관심이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장애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의식 개발입니다.
(교회발전을 위한 의식개발, 이중표 외11인)
20세기 선한 사마리아인
세상에는 수많은 모임이 있다. 대부분의 모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구성한다. 그런데 지금 소개되는 모임은 좀 특이한 모임이다. 일곱가정 정도 되는 부부모임인데 이들 부부는 수입의 십분의 일을 이 모임에 내�는다. 물론 십일조는 다 각자 교회에 하고 그외의 십일조를 또 내는 것이다. 이 돈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그 돈을 가지고 강원도 골짜기의 한 교역자를 계속 돕고 있고 또 갑작스런 재난으로 갈증을 느끼는 이들에게 시원한 냉수 역할을 해오는 것이다. 새상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 계모임을 갖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동창회, 상조회, 종친회, 계 등. 불붙는 살림살이 앞에서 맨몸 빈손으로 살아남아 엉엉 우는 사람에게 이름도 모르는 사마리아인처럼 손에 수표를 꼭 쥐어주고 가는 이들의 모임에 난 감탄을 연발한다. 이 부부들의 관심은 시시콜콜한 파마나, 신발이나, 차나, 아파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도울까에 있는 20세기 선한 사마리아인들이다. 어떤 부부는 아파트 방 한 개를 항상 비워두고 누구든지 와서 쉬어가도록 오픈하우스를 한다고 한다. 이 부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부부인 것 같다.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이 없고서야 행복이 그 가슴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는가? 행복이란 날카롭게 따지고 내 것을 꼭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감정표현이 아니라 이웃을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대할 때 확장되는 것이다. (십대를 위한 수필 2, 김원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
나는 27살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으면서 어려나라들을 다니며 전도자로서, 선교사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나는 독신으로 있는 것이 너무나 싫었고 결혼하기를 원했었다. 파리의 에펠 탑 꼭대기에 서서 파리전경을 내려다 볼 때였다. 그 광경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누군가에게 이 아름다운 정경을 말해주려고 돌아봤지만 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내가 혼자라는 것을 절감했다. 성경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 나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이 독신으로 지내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한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그때 진심으로 하나님이 내겐 그 은사를 주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나는 사역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꼭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주위에는 언제나 매력적인 후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다시 이 말씀을 보면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내 삶을 향해 주신 부르심을 위해 내가 독신으로 있기를 원하시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하고자 하는 나의 권리를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 “좋습니다. 만약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저는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했을 때 내 안에 새로운 자유함이 생겨났다. 나는 더이상 ‘물색하는’일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전심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몇 개월 후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을 계속해서 순종하고 있을 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에서 젊고 발랄한 금발의 아가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 그녀도 또한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 놓은 후였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신 것이다. (네 신을 벗으라, 로렌 커닝햄)
잘 모여야지요 (국민일보 1994.6.8)
교회 출석은 성도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의무중 하나이다. 요즘처럼 놀러다니기 좋은 계절에는 예배출석률이 떨어지고 봉사하는 이들의 자세도 다소 느슨해진다. 시대적 요인으로 교회성장이 주춤하고 있다는 분석되 있지만 계절따라 교회 출석이 기복을 보이는 것은 문제이다. 모이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 하나
*미국아이오와주의 키오쿡 제일 침례교회 교인 린퀴스트여사는 1888년부터 88년간 교회에 출석했다. 그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예배에 한번도 빠지지 않았고 담임목사 15분에게 8천번의 설교를 들었다. 기도회에는 4천번의 출석을 했으며 침상에서 드린 기도는 2만9천번. 50년동안 주일학교에서 봉사했고 그에게서 성경을 배운 많은 이들이 목사가 되었다.
우리의 삶에 교회가 없었다면 어찌되었을까. 교회의 친교,주일학교,기도회,그리스도인 가정,세상의 빛과소금은 없다. 복음,온 땅에 보낼 선교사,세상의 그리스도의 몸,교회에서의 결혼식도 없다. 청년에 대한 종교교육,가정제단,외롭고 슬픈 가정의 심방,죄인을 위한 기도,청소년들의 도덕적 훈련,그리스도인 대학,죄인을 위한 사랑도 없다.
도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상태일 것임에 틀림없다. 인생의 존재의의를 다른 무엇에서 찾기도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절대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외면하는 믿음을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로 행하라. 모이기를 싫어하는 것도 습관,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에 힘쓸 일이다.(히브리서 10:23-25)
제자의 길
하나님의 왕국은 그대의 적들 속에 있다. 따라서 이러한 시련을 감내할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적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며, 장미와 백합으로 둘러싸인 곳에 안주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그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모욕적인 행위이며 커다란 배신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과 같은 그러한 바램을 가지고 삶을 영위했더라면,이 세상에서 그 누가 그분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며 천국에 갈 수 있겠는가?
(M.루터)
지혜로운 차선 (국민일보 1994.6.10)
요즘 대개의 도시 교회들에서 특이한 현상 하나를 보게 된다. 결혼적령기를 넘어선 30대 독신 여자성도들이 눈에 띄게 많다는 것이다. 사회전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교회안에서는 매우 두드러져 보인다. 교회학교에도,성가대에도,기관·단체에되 없는 곳이 없다. 당사자와 그 부모가 상당히 고민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아예 독신을 선언하기도 한다.
미국의 한 인디언부족은 그들의 딸이 성숙해지면 옥수수밭으로 데리고 가 인생 교육을 시킨다. 지정된 밭고랑에 서서 한번 내디딘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한번 본 옥수수를 다시 보지 않고 지나가면서 제일 좋은 것을 따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옥수수를 따지 못하고 밭고랑 끝에 와버리는 것이다. 그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띄어도 다음에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날 것 같아 따지 않고 지나치다 결국은 못따고 빈 바구니가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인디언들은 그들의 딸에게 남편감을 잘 고르도록 교훈했다고 한다. 제일 좋고 이상적인 사람을 고르겠다고 하다가 혼기까지 놓친 이들의 경우가 바로 이런 예에 해당된다고 본다. 믿음안에서 자신과 함께할 만한 요소가 발견됐다면 과감히 선택할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최선의 실현이 어럽다면 현실적인 차선의 수용이 오히려 낫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차선이 무리한 최선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로마서 12:16). 아울러 교회는 결혼교실의 운영을 더욱 활발히 해 이들의 포기와 체념을 막고 결혼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진정한 변혁자
오스카 써번티스야말로 인생을 바꿔놓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살아있는 실례이다. 오스카는 어렸을 때부터 문제 속에서 자라야 했다. 자라가면서 그는 장력 범죄로 열일곱 차례나 감옥을 드나들었다. 감옥의 정신과 의사들도 오스카는 구제 불능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틀렸다. 짧은 막간의 자유를 누리던 어느 날, 오스카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노인은 오스카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스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고, 차츰 친절하고 사랑 많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그는 감옥 사역을 시작했다. 워위크 감옥 목사는 이렇게 묘사한다. “솔대드의 매달 세번째 토요일 밤은 ‘오스카의 밤’이다. 재소자들은 다 모여 오스카의 메시지를 듣고, 열렬하게 복음 성가를 부른다. 그들은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는다. 그들은 예배당의 제단 앞으로 자유롭게 걸어 나간다.” 오스카의 변화! 많은 전문가들이 몇 년을 두고 상담을 통하여 이루어보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순간의 회심을 통하여 이루어내셨다. 우리가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격분하여 날뛰는 귀신들린 광인을 유순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바꾸시는 모습을 본다. 이 광인과 오스카 써번티스를 바꾸어놓은 바로 그 능력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도 활짝 문을 열고 있다. 그분이야말로 으뜸 변혁자이시다. 당신은 그분으로 인하여 변화되었는가?
(안 믿을 수 없는 예수, 플로이드 C.맥켈빈)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
언젠가 내 친구 두사람이 부활절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우리집에 들러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게도 함께 가자고 권해서 같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던 도중에 친구 중 한 사람이 모자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자를 우리집에 놓고 왔다고 생각하여 나에게 집으로 편지를 해서 아내에게 좀 부쳐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를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나에게 특히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집을 지붕 꼭대기에서부터 아궁이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모자는 보지 못했고, 제가 발견한 것은 그분들이 남기고 간 축복 보따리뿐입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느낍니까? 당신은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까?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줍니까, 고통을 안겨줍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는 것도 대단히 유익할 것입니다. “나는 평안을 주는가, 아니면 분란을 남기는가?” “나는 용서하는가, 아니면 원한을 남기는가?” “나는 기쁨과 사랑을 주는가, 아니면 좌절과 증오를 남기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자신들의 흔적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과거 자기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남을 존중해주고 격려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때 목동이었습니다, 필립 켈러)
칼빈과 윌리암 화렐
27세 때 저술한 <기독교 강요>로 그 이름이 온 유럽에까지 알려진 존 칼빈이 어느날 이탈리아에 잠깐 들렸던 적이 있다. 갔다가 곧 오려는데 전쟁이나서 부득이 지금 스위스지방으로 돌아서 오려고 제네바에 들려 하루를 자게 되었다. 그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하던 윌리암 화렐이 그를 찾아와 함께 도울 것을 요청했다. 칼빈은 다른 계획된 일이 있는데도 여기에 있으라고 하니 허락할 리가 없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윌리암 화렐은 “나 보기에는 당신이 여기에 잠깐 들린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장차 이것은 당신이 여기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만일 당신이 그냥 간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날 저녁의 일로 그는 일생동안 제네바에 머물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뜻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다. 그러할 때에도 공손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하겠다.
파 송
“자, 이제부터 너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 사랑이 없으면 내가 너에게 일러준 모든 일들도 아무 소용없어. 이제부터 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며 평안하게 살 수 있을거야. 또한 온유하고 친절함도 배우게 될거야.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내가 너를 항상 붙들어줄께.” 나는 누군가를 또다시 찾아가려고 나의 담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떤 때는 담옆에서 마냥 기다렸고, 어떤 때는 손을 잡아주기도 했습니다.-중략- 우리가 그 옆을 지나가면 놀라운 사랑이 그들과 우리사이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그들의 눈동자 속에서 평화를 발견합니다. 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세상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글로리아 J.에반스‘담’중)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스트로맨이라는 연구원이 교회를 드나드는 청년 7천명을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 자료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 60% 이상이 선한 생활에 힘쓰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참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0% 이상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통계자료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공로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공로주의를 배격하십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도록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지혜는 무엇인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인정하시는지 아십니까? 자기가 죄인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경건생활에 힘써도 내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기까지 헌신해도 자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드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옥한흠)
하나님만이 아신다.
의사들간에 쓰는 은어중에 ‘G.O.K'라는 은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God Only Know)'라는 뜻으로 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의학적 수단과 방법을 다 쓴 후에 그결과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뜻으로 쓴다고 한다. 몇년전만해도 불치병으로 생각되던 많은 병들이 현대 의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해 점차 그 위세가 꺽이고 상당수 많은 병들은 간단한 약물치료로 완치가 가능할만큼 현대 의학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최첨단 시설에서 막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들이나, 첨단장비로 환자들을 진찰한 많은 의사들이 마지막 장벽에 부딪치면 ‘G.O.K'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의사들의 치료 대상인 사람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 베들레헴(떡집)으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매우 처참했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해 주권을 상실했고, 사회의 지도층은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의 아픔이나 고통등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더구나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할 제사장들조차 권력층과 결탁해 재물을 모으는데만 급급했다. 전 국토의 1/5만이 경작이 가능했고, 나머지는 쓸모없는 박토였으며, 그나마 경작이 가능한 땅도 잦은 가뭄과 병충해등으로 피해를 입었다. 가난과 굶주림,질병과 과중한 세금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차지해 소망은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이 유대‘베들레헴’에 오셨다. ‘베들레헴’이란 히브리어로 ‘떡집’이란 뜻이다. 육적 굶주림과 고통으로 인해 허덕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육적 굶주림’과 함께 보다 더 중요한 ‘영적 굶주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하늘나라에서 ‘베들레헴’으로 오셨던 것이다.
핵폭탄보다 무서운 위력
현대의 무기중 가장 강력하고 두려운 것으로 꼽히는 것은 단연 핵폭탄이다. 이 핵폭탄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다른 폭탄이 폭발로 인한 피해나, 파편으로 인한 상해로 그치는 데 비해 네번에 걸쳐 피해를 입는다는 점이다. 먼저 폭발로 인한 피해가 있고, 다음에는 폭발시 엄청난 고열이 발생해 주번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거나 녹여버린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핵 폭풍이 발생해 사방 수십킬로 지표면에 있는 모든 물체를 파괴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이모든 파괴가 지난 후에도 방사능 낙진이 오염되어 수십년간 그 지역은 그야말로 황폐화 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오심은 단지 병고침과 오천명을 먹이심에 그치지 않고 인류 최대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데 더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효력이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인류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 된다는 데서 핵폭탄보다 더 큰 사랑의 위력을 느낄 수 있다.
헌혈과 보혈
내가 근무하는 교무실에 내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될 연령의 딸아이를 두고 있는 선생님이 한분 계신다. 불행히도 그 딸아이가 태어난지 얼마 후부터 원인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뇌의 기능에 이상이 생겨 육체적 성장은 정상적이지만 정신연령이 미달이고 가끔씩 혼미상태에 빠지는 소위 간질증세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래도 그 선생님은 그동안 아이가 커감에 따라 정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노력해 왔는데 학교에 입학할 연령이 되었는데도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 첫딸의 치료를 위해 그 다음 아이를 낳는 것도 포기한 채 6년 동안 온 정성을 다했는데도 효과가 없으니 거의 절망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주변의 선생님들이 하도 딱해서 그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아 새로운 기대를 갖고 사시기를 권한 적도 있다. “절대로 그렇게 되어지질 않습니다. 그 아이를 포기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생각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몇 번이나 직접 나의 피를 했습니다. 때로 머리속에서 차라리 포기해야지 하는 결단을 내려보는 적도 있지만 나의 가슴이, 나의 본능이, 나의 피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듣고 나면 정말 위로할 말을 잊게 된다. “나의 피가 그것을 용압하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나의 피가 멎는 듯한 충격을 받는다.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간을 위해 자신의 피를 온통 흘려주신 예수님의 심정이 딸을 위해 수혈을 한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닐까? 회복될 줄 모르는 딸을 부여안고 눈물 흘리는 아버지처럼 속죄의 피를 흘려주셨건만 죄에서 회복될 줄 모르고 간질병 같은 증세를 나타내고 있는 요즘의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실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겨자씨,좁쌀, 홍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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