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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속의 역사

[스크랩] 사도 요한의 생애

작성자김완섭/뉴비전맨|작성시간15.08.01|조회수1,147 목록 댓글 0

사도 요한의 생애

 

 

1)요한의 이름사도 요한
요한은 사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야고보와 형제간이다. 이름의 뜻은 주님께서는 은혜로우시다’ 이다. 복음의 사가로서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 요한계시록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요한의 상징은 독수리인데,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만 기술한 반면, 그의 저서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에 관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인간의 탈을 쓰고 온 것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이단자 마르키온의 주장인 가현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하는 등 인성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요한의 복음사가로서의 저술 활동은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에 빗대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막 3:17).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다. 주 예수는 이들의 불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켰다.

 

2) 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 였다(마 10:2),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이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젓기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혔다. 뙤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청년들을 구리 빛으로 만들었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세례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다.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을 회상하였다.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받는 보완관계이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렸다.

 

3)요한의 변화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믿는다. 약1세기 전에 일부 학들이 "요한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복음서의 요한과 서신의 요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요한을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도량이 좁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서신의 기록자인 요한은 사랑의 정수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다. 우리는 요한의 강력한 정신이 거짓 교리나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준다.

 

4)요한이 보여준 사랑
우레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다(요 18:15-16).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 왔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요한은 진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 라네 어머니라"하셨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러 되돌아갔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숙이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뿐이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 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5)서로 사랑한 예수님과 요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몇몇 사도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셨던 것 같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갖는 게 기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끼리 점점 친밀해진 것은 큰 무리들로부터 더욱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이며(고전 15:6),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행 1:15),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웠다.(눅 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어졌다.(요 13:23/20:2/21:7). 요한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이름의 뜻 그대로 일생을 살았다. 분명히 요한은 제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세 제자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의 사랑받는 제자로 불리어진 유일한 사람이며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품에 앉았다(요 13:23). 초대교회의 문헌을 보면 요한을 예수의 가슴에 기댄, 사랑을 의미하는 "에피스테티오스"(The Epistethios)라고 자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사람이 되었다.

 

6)말년의 요한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한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 밧모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썼다. 밧모섬에서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추방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 순교자와 성도와 하늘의 승리를 본 요한의 마음은 기뻤다. 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썼다(계22:8)

 

트라얀(Trajan)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선교 사업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 성취되었음을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알 수 있다. 요한은 자기의 영적인 자식들이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요한은 충분한 보응을 받을 것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들에게 충고했다. 요한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과 디오드레베의 교만함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요한은 그의 영적인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증거 하기를 원했다. 요한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많은 교훈을 준다. 요한은 불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할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다. 여든 살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밧모 섬은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로마의 도미시아누스 박해 시대 유배를 가서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진 섬이다(계1:9). 이시기를 대개 94-96년 경 으로 보고 있다.사모스 섬으로 부터 남서쪽으로 45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은 34 평방 Km, 남북의 길이는 16 Km, 동서의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10 Km, 해안선의 길이는 63 Km이다. 현재 이 섬의 인구는 약 2500명이다.로마 제국 시대에 이 밧모 섬은 종교, 정치범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 였다. 계시록 저자인 요한은 도미니아누스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 와서 약18개월 동안 살다가 네르바 황제 때에 풀려나서 에베소로 갔다. 현재 이곳에는 밧모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에 사도요한 수도원이 있고, 묵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동굴, 1713년경에 세원 진 밧모 희랍 정교회 신학교가 있다. 또한 이곳에 요한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세례 터가 있다.

 

요한은 세베대의 둘째 아들로, 초기에는 형인 야고보와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더불어 어부로서 생활을 연명해 나갔다. 어느 날 게네사렛 호수에서 배를 타고 그물을 손질하다가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와 삯군들을 남겨둔 채 그를 따라 나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마4,21-42).

 

예수가 그들에게 자신이 마실 잔을 마실 수 있으며 자신이 받을 고통의 세례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묻자 그들은 자신 있게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예수는 자신의 잔을 나누어줄 수는 있지만 하늘나라의 영예로운 자리에 앉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미리 마련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요한과 야보 형제와 다를 게 없었던 다른 사도들은 이 형제의 야심을 불쾌히 여겼으며, 예수는 그들에게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라고 훈계하여 제자들이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영향으로 제자들의 마음속에 생긴 신분 상승 욕구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였다.(마태 20,27-28) 또한 두 형제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은 불친절한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불같이 화를 내며 저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벌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나는 사람을 살리려고 온 것이지, 멸하러 온 것은 아니라면서 되려 두 사람을 크게 꾸짖었다. (눅 9,54)

 

이러한 타고난 과격한 성격 때문에 예수는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아울러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네르게스(Boanerges)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지만), 요한은 야이로의 죽은 딸을 되살리는 기적, 타볼 산에서의 변모, 게쎄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같이 예수의 중요한 행적마다 수제자 베드로와 함께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요한이라고 하면요한 13:23에 근거, 예수로부터 사랑받던 제자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임종하기 직전에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던 마리아와 요한을 보고 먼저 마리아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하고,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하고 말하며,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였다. 이때부터 요한은 임종 때까지 평생 마리아를 곁에서 모시고 섬기게 된다(요한 19,26-27).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후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예수의 무덤이 비어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예수의 빈 무덤으로 달려갔으며, 뒤따라오는 베드로를 기다려서 그가 먼저 들어가게 했다. 그제야 요한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차례대로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었으며(요한 20,1-5),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한 예수를 제일 먼저 알아보았다(요한 21,7).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사도 3,1)과 사마리아(행8:14)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한 요한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2:9)전승에 의하면 44년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 곳의 일곱 교회, 즉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아 교회를 지도했다고 한다.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다가,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 받아 에페소스로 귀환하여 요한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하였다. 그때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에게 부축을 받았다고 한다.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매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 다.”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AD100년경에 90살의 나이에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사도요한의 품성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서 동료들 가운데서 뛰어났다. 그의 품성 가운데에는 조금도 비겁하거나 유약하거나 우유부단한 것이 없는 반면에 상냥한 기질과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감성으로 그리스도의 우정을 즐기는 듯했으며 구주의 신뢰와 사랑에 대한 증거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변화산에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쓰라린 고민을 목격하도록 허락받은 세 제자중의 하나이었으며,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당하실 때 당신의 모친을 그에게 맡아 주도록 부탁하셨다.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구주의 애정은 모두 열렬한 헌신의 정력으로 바꾸어졌다. 포도나무가 우뚝 선 지주에 든든히 매달려 있듯이 요한은 그리스도께 매달려 있었다. 주님을 위하여 그는 심판정의 위험에도 용감히 나아가서 십자가 주변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성급한 베드로도 앞질러 무덤으로 급히 갔었다.


구주에 대한 요한의 사랑은 단순하고 인간적인 우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값진 보혈로 말미암아 구속받았음을 깨닫고 회개한 죄인에게서 우러나온 사랑이었다. 그는 주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일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다시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그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하였다. 그의 신앙은 실질적인 품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사랑 가운데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거듭거듭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고 하였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19, 20). 그 사도의 생애는 자기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마음 가운데 타오르는 사랑은 동족, 특히 그리스도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참으로 열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수고를 하도록 하였다. 그는 능력 있는 교사였으며 열성적이고 매우 진지했으며 그의 설교는 그들로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였다.



은혜로 말미암는 새로운 피조물


요한의 생애와 품성 가운데 나타난 믿음직한 사랑과 희생적인 헌신은 그리스도교회에 말할 수 없는 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관계 없이 이러한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요한은 본성적으로 해로운 품성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곧 그는 자만스럽고 야심적이었으며 화를 잘 내고 남을 멸시하기를 잘하고 남에게 곧잘 해를 끼쳤다.


주님을 위한 깊고도 열렬한 요한의 애정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의 결과로 일어났다. 요한은 예수님과 같이 되기를 갈망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의 변화시키는 감화 아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자아는 예수님 안에 감추어졌다. 그는 살아 계신 포도나무와 밀접히 연결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면 언제나 그렇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성화다.


개개인의 품성 가운데는 뚜렷한 결점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가 예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화시키고 성결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생애에 관련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신앙으로 보다 더욱 성장한 남녀 곧 성품과 기질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산 대리자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자들이다.



품성 건설에 필요한 교훈


한번은 요한이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그들 중에 누가 가장 크게 여김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다투게 되었다. 그들의 말이 주님의 귀에까지 들리게 하려 하지 않았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알아채시고 제자들에게 겸손에 대한 교훈을 주실 기회를 마련하셨다. 그 교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모인 작은 무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말세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위하여 기록 되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하셨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한 자들은 저희 형제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크게 평가될 사람들이 그들이 보기에는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이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 함이니라”(막 9:36, 37)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얼마나 귀한 교훈이 되는가! 자기들의 행로에 곧게 놓인 생애의 의무들을 무시하며 어린 아이들에게 일지라도 자비와 친절, 호의와 사랑을 나타내기를 소홀히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소홀히 여기는 것이다. 요한은 이 교훈의 진의를 깨달았으며 그것으로 유익을 얻었다.


또 한번은 요한이 그의 형 야고보와 같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그들을 즉시 따르지 않으므로 그가 이런 일을 행할 아무 권리도 없다 하여 결국은 그를 금하였다. 요한은 진지한 마음으로 그 경우에 대해 주님께 말씀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9, 40)고 하셨다.


또다시 야고보와 요한은 그들의 어머니를 통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가장 명예스러운 지위에 앉게 하여 줍시사고 간청하였다. 구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막 10:38) 하셨다.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드리는 기도의 참된 뜻을 이해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 영광을 얻기 위하여 치루어야 할 무한한 희생을 아셨다. 그 후에 그분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 그 즐거움은 당신이 굴욕을 당하시고 고민을 하시며 당신의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구원받은 영혼들을 보시며 느끼신 즐거움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었으며 두 제자들이 나누어 주기를 간원했던 영광이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니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막 10:39)하였다.


그 침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그들이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침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막 10:39, 40)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견책받은 자만과 야심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청을 하도록 자극한 동기들을 아시고 두 제자의 자만과 야심을 이와 같이 견책 하셨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2-45).


한번은 그리스도께서 사마리아의 한 마을로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며 그 사람들에게 당신과 제자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도록 부탁하신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구주께서 그 마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루살렘으로 계속 가시려는 듯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마리아인들은 적개심을 일으키고 구주를 초대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어 그들과 유하도록 권하는 대신에 일반 여행자들에게 베풀던 예의마저 행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에라도 결코 억지로 유하시지는 않으셨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이 구주를 손님으로 맞고자 간원하였더라면 그들에게 허락되었을 크나큰 축복을 상실하였다.


우리는 하늘의 주재 되신 분께 대한 이런 무례한 대우를 이상히 생각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우리도 매우 자주 그와 비슷한 경우를 경시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과 우리의 가정을 거처로 삼으시도록 그분을 강권하는가? 그분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고 이 선물들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서 계신다. 우리는 자주 사마리아인들처럼 이 선물들이 없어도 만족하려 한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임재하심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축복하시고자 하시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주님께 보인 냉담과 시기와 무례함을 보고 놀람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유달리 분개하였다. 그들이 그토록 높이 존경하던 분을 이와 같이 대우한 것은 그 죄과가 너무 커서 즉시로 처벌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은 선지자 엘리야를 잡으려고 파송되었던 수리아의 군대장관과 그 부하들이 멸망당한 일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흥분하여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려 온 것이 아니라 구하러왔노라”(55, 56절 난외주)고 하셨다. 요한과 그의 동료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교사가 되시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결점을 보며 품성을 개선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요한은 모든 교훈을 중히 여기었으며 그의 생애가 신성한 모본과 조화를 이루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은혜 가운데서 자라나는 데 필수적인 사랑과 온유와 겸손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교훈과 그분의 사업의 적합성은 요한에게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이러한 교훈들은 그리스도의 초대 제자에게 행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형제들 각자에게도 주어진 교훈이다.



요한과 유다


요한과 유다의 품성 사이에 나타난 현저한 차이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의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요한은 성화에 대한 하나의 생생한 실례가 되었다. 반면에 유다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그의 품성은 거룩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단과 유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였으나 말과 행실로는 주님을 부인하였다.


유다는 요한과 마찬가지로 거룩한 모본을 배워서 살아갈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가졌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들었으며 그의 품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요한이 자신의 결점을 대항하여 싸우며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동안 유다는 양심을 거스리며 유혹에 굴하고 그를 사단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부정한 습관에 자신을 얽어매고 있었다.


이 두 제자들은 그리스도교계를 대표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고 있으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겸손과 온유 가운데서 행하지만 반면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음을 알려 준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진리를 통하여 성화되는 반면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거룩한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시키는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전자는 매일 자아를 버리며 죄를 극복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는 자기자신들의 정욕에 빠져서 사단의 종이 되어 가고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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