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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작성자조정환(저녁정규반)|작성시간03.09.02|조회수575 목록 댓글 0
인상주의란!

서양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미술 사조이다.
19세기 후반 주로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이며 이를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 하는데, 이들이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데 있었다.
당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의 고유의 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 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가지 색에 한정하려하였다.


인상주의 탄생 배경

인상주의 운동의 시작은 1863년 낙선자 전람회 (Salon des Refuses)에 출품한 <풀밭위의 점심>과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마네를 중심으로 한 청년화가들이 카페 게르보아(Cafe Guerbois)에서 모여 새로운 회화에 대한 토론과 연구를 통하여 인상파 활동이 탄생되었다
이때의 시기를 대체로 1868년 부터 1870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870년 프로이센 -프랑스전쟁은 이 모임을 해산시켰으나,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이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에 접한사실은 인상주의 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다
전쟁 후 파리로 돌아와 1874년 봄 나다르 사진관에서 첫 전람회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 >라는 풍경화의 제명을 따서 르루아라는 미술기자가 '인상파전람회'라고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지>에 실은 것이 '인상파' 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인상주의 전개

전 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와 접촉하였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발견과 함께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자로서의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인상주의적 접근 방식이 파리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화가들은 현대생활을 주제로 선택했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고, 더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인상주의화가라 부르기도 했다. 초기의 경멸조로 인상주의를 부르던 때보다 실로 발전한 것이다. 1915년 비평가 크리스챤 브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새로운 복음의 근원지는 파리지만 이제는 수없이 많은 빛의 사도들이 전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감으로써 검은색과 갈색일색이던 현대 미술은 황금빛과 자줏빛, 보라빛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 때부터 이 외국인 화가들이 프랑스 화가들에게서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 또 프랑스 인상주의만이 과연 현대 정신을 보여주는 유일한 예로 인정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활발해졌다.



인상주의 쇠퇴

1870년대는 인상주의가 절정에 달했으며 화가들간의 결속도 잘 되었던 시기였다. 1886년에 마지막으로 열린 제 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한 기존 인상파 화가는 드가와 피사로 뿐이었고, 르동, 고갱, 쇠라와 같은 새로운 작가들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도 순수한 광학적 감각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 마지막 전시회에 출품한 쇠라, 고갱 외에도 세잔와 반 고흐를 위시한 새로운 화가들은 이제 인상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독자적 해결책을 추구하고 있었는데 이들에게 1910년대부터 후기인상주의 화가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자연주의

프랑스를 주축으로 하여 19세기 사실주의(寫實主義)를 이어받아 세기말(世紀末)에 활발했던 문학사조.


프랑스 이외의 여러 나라에서도 소설과 연극에 강한 영향을 나타냈다. 이 사조의 창시자는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1840∼1902)이다. 졸라는 젊어서는 도리어 낭만주의적 경향이 강한 작가였는데 플로베르, 공쿠르형제 등의 관찰(觀察)을 원리로 한 사실풍(寫實風)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1864년경부터는 확실히 리얼리즘 문학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특히 공쿠르의 《제르미니 라세르퇴》라는 박복한 가정부의 일생을 그린 소설에 감명을 받고 이 작품을 '불결한 문학'이라고 비난하는 측에 대해 강력히 항변하고 변호하였다. 1860년대 프랑스 사조에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H.A.텐의 실증주의였는데 졸라는 이 사상가의 말을 빌려 자신의 문학이론을 뒷받침하려 하였다. "악덕(惡德)과 미덕(美德)은 다 같이 황산(黃酸)이나 설탕처럼 화합물(化合物)이다"라는 말은 텐 자신의 저서 《영국문학사》 서문에 쓴 유명한 말인데 졸라는 이 말을 자기 작품 《테레즈 라캥》(1867)의 제2판 서문 속에 인용하였다. 졸라는 거기에 덧불여 "두 등장인물의 살아 있는 몸뚱이에 해부의(解剖醫)가 시체를 해부하듯 분석하였다"라고 자신의 창작태도를 밝히고 있다.

그의 선배 공쿠르는 "소설은 연구다"라고 말하여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태도를 나타내었는데 졸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은 과학이다"라고 단언하였다. 과학을 존중하던 당시의 풍조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과학이라는 이유로 졸라가 이용한 것은, 당시 유명했던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서설(實驗醫學序說)》의 사상이었다. 의학은 엄밀한 실험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이 책의 문장을 그대로 문학이론으로 전용한 느낌이 있는 것이 졸라의 《실험소설론(實驗小說)》(1880)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자연주의의 기본정신은 인간의 생태를 자연현상으로 보려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태도도 자연과학자와 같아야 하는 것이 이상인 것이다. 자연현상으로 본 인간은 당연히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강력하게 지배된 것으로 그려진다. 외부로부터 그려지기 때문에 내면적으로는 빈약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졸라는 자신의 실험을 위하여 과학적 방법을 쓸 필요를 느끼고 당시 주목의 대상이었던 유전학설(遺傳學說)에 착안하였다. 그는 또 그의 작품에서 유전의 법칙을 인용하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숙명적인 유전에 의하여 발작적으로 살의(殺意)를 일으키는 대목을 그렸다.

자연주의 작가는 플로베르나 공쿠르의 사실적 방법을 배운 탓으로 자료연구에도 열심이었다. 졸라는 《선술집》을 쓰기 위하여 몇 년간이나 파리의 변두리 노동자촌을 조사하였다. 그는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대항하여 《루공마카르 총서(叢書)》라는 20권에 달하는 종합소설을 썼다. 루공, 마카르 두 집안 인간의 복잡한 운명을 삽입하여 제2제정기(帝政期)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것인데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을 이룬 작품이다. 졸라뿐만 아니라 자연주의 문학은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

발자크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승기(上昇期)를 그렸고, 졸라는 그 절정기에서 하강기를 그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졸라 쪽에 현대성이 한층 강하게 나타나는 면도 지나칠 수 없다. 철도나 해운의 발달, 농민의 도시집중, 도시노동자 생활의 비참상, 탄광쟁의(炭鑛爭議), 패전(敗戰), 기타 19세기라기보다 현세기의 생동적인 세태가 잘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졸라를 중심으로 하여 각각 경향은 달랐고 뒤에는 스승으로부터 흩어졌지만 모파상, 위스망 등이 자연주의에 공명하여 그 산하에 모였던, 당시의 젊은 작가들을 졸라의 집 주소를 따서 '그루페 드 메당(메당파)'이라고 불렀던 일이 있다.


사실주의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태도.


추상예술 ·고전주의 ·낭만주의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미술 ·문학에서 이 용어가 쓰이게 된 것은 A.콩트가 주창한 실증주의의 영향과 함께 이상주의적 계몽주의와 환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19세기 중엽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예술운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중세 유럽에서도 낭만적 ·공상적 소설과 함께 사실적이며 풍자적인 우화시(寓話詩)나 《여우 이야기》와 같은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예술유파로서 확실하게 사실주의가 나타난 것은 19세기이며, 먼저 회화부문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G.쿠르베가 당시의 아카데미즘 화풍에 반항하여, 돌 깨는 작업이나, 목욕하는 여인 등 지극히 현실적인 그림을 사생(寫生)하였으며, 특히 유명한 《오르낭의 매장(埋葬)》(1850)과 같은 작품으로 사실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제자에게 “천사를 본 일이 있는가. 그대 아버지를 보고 그려라” 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쿠르베의 친구인 샹플뢰리가 문학의 영역에서 사실주의를 주장한 것이 프랑스 문학사에서 사실주의 투쟁의 시초라고 한다.

사실주의는 특히 19세기 후반에 활발하였고 과학존중 사상과 실증주의는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다. 또 이 무렵에 유럽의 지도권을 쥐고 있던 중산계급층의 상식이나 실증정신이 이를 뒷받침한 것도 사실이다. 문학에서는 소설, 특히 사회를 잘 관찰하고 쓴 사실파 소설이 발달하였다.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등은 모두 이러한 선상에 놓고 볼 수 있으며, 《보바리 부인》 《가정교육》과 같은 소설이 사실주의의 교과서처럼 생각되던 시기였다. 다만 플로베르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어 단순한 사실주의 작가로 볼 수만은 없다.

시민사회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는 사실주의 문학의 발달도 빨라, 18세기부터 이런 유형의 작품이 많이 나왔으며, 그후 C.디킨스와 G.엘리엇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 러시아 근대문학에도 사실주의가 크게 영향을 주었는데, 고골리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특이한 러시아적 사실주의를 탄생시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를 단순히 낭만주의의 반작용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에 반항하여 고전주의의 추상성 ·보편성에 대해서, 구상성(具象性)을 강조하고, 특수한 사상(事象)에의 관심을 높였기 때문에 이미 사실주의적 특색을 그 작품 속에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색(地方色)’ 등도 낭만주의의 발상이었으며, 사실주의 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역사성(歷史性)’의 발달도 낭만주의가 탄생시켰을 뿐 아니라 그 발전을 촉진한 것도 낭만주의이다.

19세기 소설의 대부분이 ‘역사적’이며 연대기적(年代記的) 의미를 지니고 발달한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유럽의 사실주의는 문학적으로는 E.졸라 등의 자연주의 유파(流派)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주의의 너무도 편향된 작풍을 자연주의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자, 사실파나 자연주의의 원리가 되어 있던 과학만능주의의 지나친 처사에 대해 반작용이 일어났다. ‘사실(寫實)’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문제에서 전세기(前世紀)에 대해 대립하고 있으며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문학에서도 상당히 변화하고 있다. 19세기에는 항상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조되었으며 물상(物象)을 그릴 때에도 ‘누가 보고 있는가’, 즉 시점(視點)이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에는 소설뿐만 아니라 르포르타주까지도 그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시점이나 의식(意識)이 중요시된다. 물론 20세기에 와서도 《티보가(家)의 사람들》과 같이 19세기적인 사실적 수법의 작품이 있으며, 순수한 사실주의라고 할 수는 없으나 A.말로, T.만 등과 같이 시대적 의미나 내용을 지닌 문학작품, 즉 사실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포함한 작품을 쓴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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