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몽룡의 실존 모델 추적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 현 준
우리나라 고대소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춘향전이 아닐까 싶다. 춘향전은 판소리, 뮤지컬, 연극, 영화로도 널리 알려졌고, 주요 무대인 남원시는 춘향이의 이름값을 톡톡히 보고 있다.
춘향은 남원의 이미지요, 브랜드가 되었다. 해마다 춘향제가 열려 미스 춘향을 선발하며, 요천 건너 춘향 테마파크는 관광단지로 이름이 났다. 춘향과 이 도령의 데이트 장소였던 광한루를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남원시 관광홍보 부서에서는 어떻게 하면 춘향전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다.
최근 계사 성이성(1595-1664)의 후손이 다수의 유물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면서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물은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하여 받은 어사화와 암행어사가 얼굴을 가릴 때 쓰던 사선紗扇, 그리고 암행어사로 활동하며 일기처럼 쓴 《암행록》등이다. 성이성이 이몽룡의 실존 모델이라는 학설은 국문학자인 연세대학교 설성경 교수가 1999년 처음 발표했다. 성이성 자손 집안에 내려오는 유품과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연구였다. 성이성의 생가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 있다. 이곳은 현재 창녕성씨 계서공파 13대 종손 성기호 씨가 농사를 지으면서 종택을 지키고 있다.
홍문관 교리, 진주목사 등을 지낸 성이성은 17세기 초 남원부사였던 부친 성안의를 따라 열두 살 때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남원에서 살았다. 열여섯 살은 소설 속에서 이몽룡이 성춘향과 만난 시기다. 성 도령은 이때 같은 또래의 춘향을 사귄 듯하다. 남원 광한루 안에는 성안의 부사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성안의가 선조 24년(1591)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지평, 영해, 남원부사를 거쳐 광주목사를 지냈다. 선조 40년(1607년) 남원부사로 부임하여 광해군 3년(1611) 2월까지 4년여 동안 베푼 선정을 기리기 위해 광해군 3년 8월에 부민들이 세웠다고 적혀있다.
성이성은 남원에서 조경남(1570-1641)으로부터 문장을 배웠다. 조경남은 <난중잡록>과 <속잡록>을 엮은 인물이다. 부친을 따라 남원을 떠난 성이성은 1627년 문과에 급제했고, 삼사의 요직을 거치면서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네 차례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1639년과 1647년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갔다.
두 번째 암행어사로 갔을 때의 일을 적은 암행록에는 ‘날이 저물어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광한루에 앉았다. 흰 눈이 온 들녘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희었다. 소년 시절의 일을 거듭 회상하고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그날 광한루를 찾은 성이성을 늙은 기생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 강경남이 맞았는데, 이들은 소년 시절 성 도령과 인연이 닿은 인물로 여겨진다. 성 어사는 늙은 기생 여진과 함께 자신의 소년 시절을 회상하였는데, 그의 연인은 기생이거나 관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는 성 도령과 이별한 뒤 절개를 지키려다가 관기 사회의 규제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게 아닐까 싶다.
이몽룡은 동부승지로 승차한 부친을 따라 한양에 올라가 면학에 힘썼다. 몇 년 뒤 과거에 급제하여 암행어사로 남원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성이성은 광주목사로 전근해간 아버지를 따라간 뒤, 나이 32세가 되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암행어사로 남원에 처음 갈 때는 44세의 나이였고, 두 번째로 남원에 갔을 때는 50이 지난 나이였다. 성이성은 춘향을 다시 만나지 못했으나, 첫사랑의 추억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그리워한 로맨티시스트였다.
‘소년 시절의 일’이 춘향과의 만남을 뜻한다고 설 교수와 성이성 후손들은 주장한다. 설 교수는 ‘성이성이 1차 암행어사 때 스승인 조경남을 만나 소년 시절의 일을 얘기했고, 조경남이 이를 바탕으로 1640년께 춘향전을 지었다.’고 추측한다. 성이성을 이몽룡으로 교체하고 춘향을 성이성의 성씨로 바꾼 뒤 가상인물 변학도를 등장시켜 춘향전을 지었다는 설이다. 여진은 월매나 향단으로, 강경남은 방자로 회상했지 싶다. 춘향전이 처음 나온 뒤 20년 넘게 살았던 성이성은 남원에서 전해진 춘향전을 듣고 어떤 마음이었을까?
춘향전에서 추가했으면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춘향이와 만나며 글공부에 소홀한 이 도령을 꾸짖는 아버지의 지엄한 모습을 그렸으면 좋겠고, 향단이와 방자는 부부의 연을 맺게 했으면 어떨까?
성이성의 4대손 성섭(1718-1788)이 쓴 <교와문고> 3권 ‘필원산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 고조(성이성)께서 암행한 곳에 이르니, 호남 12읍 수령이 큰 잔치를 베풀어 술판이 낭자하고 기생의 노래가 한창이었다. 어사가 걸인 행색으로 들어가 지필을 달라 하여
준중미주천인혈樽中美酒千人血/ 반상가효만성고盤上佳肴萬姓膏/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를 적고 이어 어사 출두가 외쳐지고…….’ 당일에 파출시킨 자가 여섯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향전에는 위 구절에서 네 글자만 제외하고 칠언절구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준중은 금준으로, 반상은 옥반으로 수정되었다. 그중에서 준과 반을 제하면 두 글자만 다를 뿐이다,
국학진흥원에 유물을 맡긴 성이성의 13대 종손 성기호 씨는 ‘조상이 이몽룡이라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들었다. 다만, 사랑 타령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뭣해 말을 아꼈다.’고 했다.
소설 속의 이몽룡과 실재인물 성이성이 암행어사로 내려가는 경로가 유사한 점도 눈에 띈다. 이몽룡은 남대문을 출발하여 청파역에서 말을 타고 남태령을 넘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성이성의 기록에는 남대문을 나와 남관왕묘, 청파역, 동작동, 남태령, 과천을 거쳐 용인에 도착했다고 적혀있다.
어사 성이성, 그는 뛰어난 경세가이자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잘 살핀 어진 목민관이었다. 강계부사 재직 시에는 관서활불關西活佛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 사후에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과 청렴을 높이 평가하여 청백리에 올렸다.
경상북도 봉화군에서는 창녕성씨 종택을 ‘이몽룡 생가’라며 관광 상품으로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남원시와 더불어 지자체끼리 사돈협약을 맺고 상호 교류하며 문화콘텐츠 사업을 개발한다면 상생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본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춘향전 작자라고 추정하는 조경남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것이다. 작정하고 파고들면 좀 더 믿을만한 자료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2015.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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