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창녕성씨 ♡ 이야기방

창녕성가를 빛낸 선조

작성자운영자-성점경|작성시간16.03.06|조회수2,339 목록 댓글 0

<창녕성씨>고려시대 호장 성인보의 후손

시조 아들 성송국, 문하시중·군기감 역임 명문으로 일궈 사육신 성삼문, 세조때 유학자 신념·절의 위해 목숨 바쳐

기사입력 2011-04-06 오후 8:56:00 | 최종수정 2011-04-06 20:56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때 호장을 지냈다. 호장은 고려시대에 지방민을 다스리는 호족장이다. 성인보 이래 대대로 창녕에서 호장을 지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성씨가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이 문하시중과 군기감을 역임하면서 시작된다.
창녕성씨의 계보는 성송국의 아들 성공필과 성한필 등 형제 대에서‘노상파(路上派)’와‘노하파(路下派)’등 2개 파로 갈린다. 길을 가운데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 그 이후의 분파는 6세조를 파조로 하여 13개 파로 나누어진다.
성씨는 조선 개국때 성석린, 성석용, 성석연 3형제가 개국에 참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씨는 조선조에 1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다. 이중 재상이 5명, 대제학 10명, 청백리 5명 등 숱한 석학과 절신을 배출, 명문의 이름을 떨쳤다.
독곡 성석린과 회곡 성석용, 상곡 성석연 등 3형제는 조선 초에 성씨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 중추적 인물이다. 3곡(三谷)으로 불린 이들 3형제는 바로 고려 말의 절신 성여완의 아들들이다. 아버지와 아들 3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간 셈이다.
이들 ‘삼곡’ 집안 중 특히 회곡의 후손에서는 성삼문, 성빙수 등 절신이 나왔으며 상곡의 후손에서는 성 현, 성 혼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매죽헌 성삼문은 도총제 성승 의 아들이며 성석용의 증손자다. 1456년(세조1년)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탄로나자 유학자로서의 신념과 절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렸던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세조는 “나의 녹을 먹는 자가 어찌 반역을 꾸몄느냐”고 물었다. 이 때 매죽헌은 “나으리는 나라를 도둑질했거니와 삼문은 신하된 도리로서 임금이 쫓겨남을 차마 볼 수 없어 옛 임금을 다시 모시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성삼문은 세조를 전하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다.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의 집안은 멸족의 비운을 겪는다. 그의 아버지 성승과 삼고, 삼빙, 삼성 등 세 아우 그리고 원, 맹첨, 맹평, 맹종과 갓난아기 등 아들들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북소리가 이 목숨을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어, 황천길엔 주막도 없을 것이니 오늘밤은 뉘집 찾아 쉬어갈꺼나’‘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회두일욕사(回頭日欲斜)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성삼문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지은 이 시는 지금도 숱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 
성삼문은 1418년 태어나 145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불과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역사상에 남긴 그의 행적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1447년 문과에 장원 급제, 집현전 학자로서 정음청에서 겨레의 자랑인 훈민정음 창제와 음운 연구에 종사했다. 당시 세종은 성삼문을 비롯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최 항 등 젊은 학자들을 매우 총애했다.
세종은 또한 그들에게 단종을 잘 보필하도록 부탁했다. 세종의 유언을 받은 이들은‘계유정난’이라는 정권 변동기에 서로 다른 영욕의 길을 가게 된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종의 유명을 상기시키면서 신숙주를 꾸짖은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세조가 가산을 몰수해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의 녹은 한 톨도 손에 대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그의 방에는 거적만이 깔려 있었다.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성빙수는 성삼문과 6촌간이다. 그는 아버지 성 희가 단종 복위 사건에 관련되어 심한 고문과 함께 유배를 당한 뒤 돌아와 죽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 파주에 은거했다. 그 후 조카 성몽정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면서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방안에 자리조차 없었다. 몽정이 돌아와 자리를 보냈으나 끝내 거절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성삼문(成三問):문과(文科) 세종29년(1447) 중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성진(成晉):문과(文科) 세조11년(1465) 춘당대시 을과(乙科) 장원급제

▲성몽열(成夢說):문과(文科) 중종34년(1539)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성이민(成以敏·1565·乙丑生):문과(文科) 선조28년(1595)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성덕윤(成德潤·1689·己巳生) :문과(文科) 경종2년(1722)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성유열(成有烈·1698·戊寅生):문과(文科) 영조2년(1726)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성준(成俊·1436·丙辰生):문과(文科) 세조5년(1459) 식년시 병과(丙科)

▲성가의(成可義, 1436 丙辰生):문과(文科) 세조6년(1460) 평양별시 이등(二等)

▲성임(成任·1436·丙辰生):문과(文科) 세조12년(1466) 발영시 이등(二等)

▲성세명(成世明·1447·丁卯生):문과(文科) 성종6년(1475) 친시 병과(丙科) 등 모두 482명 이 있다. 문과 134명, 무과 21명, 사마시 322명, 음양과 5명이다.
 
해방 후 창녕성씨는 학자의 가문답게 많은 석학을 냈다. 

전 인하대  총장 성좌경(공학박사), 전 충남대 총장 성낙서(철학박사), 경제학계의 석학 성창환(경제학박사·고려대 경영대 명예교수), 성 백(철학박사·고려대 문과대학장), 성경린(국악원장·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학 기능보유자), 성낙승(문화공보부 실장), 성주호(의학박사·연세대의대 학장), 성백능(이학박사·서울대 교수), 성래운(연세대 교수), 성기철(교수), 성기조(시인),성석기(조선일보 상임감사), 성기수(공학박사·과기원 시스템공학센터소장), 성정순(체육회 이사), 성낙응(의학박사·이대의대 교수)씨 등이 학계의 인물들이다.
이밖에 성낙정(경인에너지 사장), 성해기(산림청 임정국장), 성민경(변호사), 성태경(변호사), 성백전(한국해외건설 사장), 성상영(삼성물산, 제일모직, 대성모방 사장), 성진영(한일염직 사장), 성순택(동아공업, 건일식품냉동(주)사장), 성창순(인간문화재)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이 안됐음)
집성촌은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경북 영천군 북안면 신리동

▲경북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가정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직교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경남 창녕군 대설읍 효정리

▲경남 창녕군 고암면 억만리

▲경남 창녕군 대설읍 석리

▲경남 창녕군 창녕읍 외부리

▲충남 대덕군 구측면 둔곡리

▲충남 대덕군 구측면 금탄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

▲경북 영천군 화북면 선천동

▲경북 상주군 모서면 삼포리

▲경북 영천군 화북면 대천동

▲경남 상주군 모서면 지산리

▲경남 의령군 궁유면 가현리

▲경남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

▲경남 창녕군 대설읍 창산리

▲경남 거창군 가북면 몽석리 등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6만7903명이다.
/언론인·성씨 전문기자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의 묘역>

소재지: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맥산
시조의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맥산에 있고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성인보의 묘소는 풍수 형국으로 유어농파형(遊魚弄波形·) 물고기가 물결을 일으키며
뛰노는 형국으로 잉어의 머리 부분이다!.
그의 아들 성송국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하여 온천지에 흰눈을 내리고,
호랑이로 하여금 발자국을 내어 명당자리를 지정해 주었으며, 이 자리가 성인보의
묘지가 되었다 한다. 이후로, 성인보의 후손들은 수많은 절신 명신을 배출하여 명문
거족으로 번성하게 된다.>>>
 
어느해 정월초 성인보는 송경에서 지방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갑자기 병이들어 병사하자, 문하시중으로 있던 그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은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시신이든 관을 직접 질머지고 통곡하며 개성에서 창녕까지 먼 길을 걸어 왔는데,
천리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고향 가까운 청산원 고암면 어은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쉬어 가게 되었다.

 
<<<풍수에선 적선(積善)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명당을 얻으려면 그만큼 덕을 베풀어야 한다
는 것이다. 사악한 일을 하면서 좋은 땅을 구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도리를 거슬리는
어불성설이다. 비록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결국엔 그 재앙이 스스로에게 닥칠
것이다. 좋은 땅은 하늘이 낸다고 했다. 풍수는 순리(順理)를 중시하는 학문이다!...>>>


성송국은 지친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아침이 되어 깨어보니 밤사이에 많은 눈이
내렸는데, 아버지의 시신은 간곳이 없고, 그 위로 호랑이 발자국만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송국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 가보니 끝 간 곳이 지금의 묘자리가 있는
맥산이었다. 그곳엔 조금도 해하지 않은 아버지의 시신이 있었는데, 신기한 것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혀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있었다.


이에 아들은 하늘이 점지해준 자리라 여기고, 그곳에다 아버지 시신을 모시게 됐다고 한다.

이후로, 성인보의 후손들은 창녕(昌寧)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대대로 세거하며,
충(忠)과 효(孝)를 대변하는 명문거족으로 크게 번성하여 시조의 손자 3세 공필(公弼),
한필(漢弼) 대에서 크게 두계통으로 갈라져서 6세때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 지금에 이르러 왔다!.........


                                   가문의 인물

창녕성씨가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 대부터다.
그는 문하시중, 혹은 군기감을 역임했다.
창녕성씨의 계보는 성송국의 아들 성공필과 성한필 등 형제 대에서 <노상파(路上派)>와
<노하파(路下派)> 등 2개 파로 갈린다. 길을 가운데 두고 아랫마을과 윗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 그 이후의 분파는 6세조를 파조로 하여 13개 파로 나누어진다.
성씨는 조선 개국 때 6세손 성석린, 성석용, 성석연 3형제가 개국에 참여, 고관에 오름으로써
가문의 번창을 가져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씨는 조선조에 1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낸다.
이중 재상이 5명, 대제학 10명, 청백리 5명 등 숱한 석학과 절신을 배출, 명문의 이름을 떨쳤
다. 창녕성씨가 고관대작을 많이 낸 집안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배출하여 절개의 이름난 문중이 된 것이다.


창녕성씨가 절개의 가문으로 이름을 낸 것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 무렵 성씨 문중은 절신
성여완을 배출한다.
그는 공양왕 4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국운이 기울었음을 통탄하고 경기도 포천 주왕산에
은거,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성여완의 아들 독곡 성석린과 회곡 성석용, 상곡 성석연 등
3형제는 조선초에 성씨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 중추적 인물이다. 3곡(三谷)으로 불린 이들
3형제는 바로 고려 말의 절신 성여완의 아들들이다. 아버지와 아들 3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간 셈이다. 이들 <삼곡> 집안 중 특히 회곡의 후손에서는 성삼문, 성빙수 등 절신이
나왔으며 상곡의 후손에서는 성현, 성혼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이 우왕때 정당문학으로
창녕부원근에 봉해졌으나, 1392년 충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의 왕방산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로 불렀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원로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왕씨의 신하이니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하며
절의를 지켰다.


이성계와 옛친구로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석린(石璘)은 태종때 좌명삼등 공신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석린의 아우 석용(石瑢 : 대제학을 역임),
석연(石王因 : 대사헌. 우정승. 호조판서를 역임), 석번(石王番 : 낭장을 역임)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 석용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달생(達生)이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승(勝)은 중추원 부사를 거쳐 단종때 의주 목사에 이르렀다.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축출하는 피비린내 나는 계유정난(1452년)을 일으켜 성사 시키고
왕좌를 차지하자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에서 개최될때 도총관 유응부와 함께 운검
을 쥐게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로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질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
되어 아들 삼문(三問),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승의 맏아들 삼문은 홍주 노은동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출생할때 "났느냐"하는 소리가
세번 들렸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고 한다.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삼문은
집현전에서 학사, 수찬 등을 역임하며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서리발
같은 절의와 함께 그 공로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자 박팽년, 이개, 하위지, 류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거사전에 탄로가 나서 아버지 승, 3형제의 동생, 아들 원(元),
맹첨(孟瞻), 맹평(孟平), 맹종(孟終) 4형제와 더불어 모두 극형에 처해졌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을 할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집을 적몰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방에 쌓아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한편 창산부원군 사달(士達)의 아들 부(溥)와 승문원 교리 희(熺)의 아들 담수(聃壽)도
절신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말에 형부총랑을 역임했던 부(溥)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개성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고, 삼문과 재종간인
담수(聃壽)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하여 심한 고문끝에 김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영이 있는 파주 문두리에 은거하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태종때 대사헌과 우정승을 거쳐 형조 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의 후손으로는 그의
아들 암과 억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중 장남 염조(念祖)는 이조정랑, 도승지,
경창부윤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 우찬성, 영중추원
사를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후 우의정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 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때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던 임(任)은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에 능하여 해서, 초서, 예서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자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뿐"
이라면서 거문고를 배웠으나 서른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탈한
그의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염조의 조카 준(俊)은 연산군때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영, 우의정 이극균과 함께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때 하루는 내연(內宴)
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자리
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 하니 결국 그는 갑자사
화때 직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 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정랑에 이르었으나
아버지가 화를입고 자손들까지 남겨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그외 선조때 우참찬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던 세장(世章)과 중종반정에 공을세워
창산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랐던 희안(希顔 : 찬의 아들)이 뛰어 났으며, 수침의
아들 혼(渾)은 유학계의 거목으로 해동십팔현으로 문묘에 배양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조헌, 이귀, 정엽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시켜 창녕성씨 문중에 더욱 명성을 떨쳤다!..........


                                     창녕성씨 인물

성여완
 
성여완(成汝完) 1309(고려 충선1)~1397(조선 태조6)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이헌(怡軒),
시호 문정(文靖), 전객서부령 공필(公弼)의 손자이고, 판도총랑(版圖摠郞) 군미(君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삼사좌윤 오천(吳蕆)의 딸이다. 시조로부터 5세손이다.
1336년(고려 충숙왕5) 문과에 급제 후 예문 춘추 검열을 거쳐 군부정광, 상서우승, 지형
부사, 대사중승, 전법판사 등을 역임하고 해주(海州), 충주(忠州)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로 재임시 요승 신돈(妖僧 辛旽)이 주살을 당하자 그 일파로
몰리어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풀려 방면되었다. 우왕 4년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에
기용되었으며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392년(공양왕4)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산수가 아름다운 포천의 왕방산(王方山) 아래 신북면 계류촌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왕방거사(王方居士)라 하였다.

고려 말, 조선 개국을 꿈꾸며 이방원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고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시작되는 하여가를 부르자, 정몽주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로 응대했다. 제일가는 충신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조선 태조가 될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개국을 꿈꾸고 있는 이방원에겐 최대의 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써 자신의 운명이 다하고 곳, 죽임을 당할 것임을 직감한 정몽주는
끝까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은 녹사 김경조와 함께 막역한 친구인 성여완의 집으로 가서
마지막 술상을 받아 해질 무렵까지 취하게 마신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을 죽이러
올 사람을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다며, 말을 거꾸로 타고 갔다.

 

"정몽주가 말을 꺼꾸로 타고 간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리를 거슬리는 이성계의 역성 혁명에 대한 저항의 몸짖이 아니었을까?............


이때 그의 죽음을 하늘도 슬퍼 했는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집에서 가까운 선죽교를 지나게 되자, 그를 죽이기 위해 숨어서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자객으로 보낸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와 그의 부하가  철퇴로
내려쳐서 죽이니 그 자리에서 유혈이 낭자한 죽임을 당했다.


"그가 죽어가며 흘린피는 내리는 비와 함게 선죽교를 붉게 물들이니",
그 때가 (1392년) 고려 말 공양왕 4년 4월4일로 향년 56세였다. 이성계는 살아서 나라를
세웠고 정몽주는 죽어서 만고의 충신이 되었다. 그리고 성여완은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가곡원류』에 그가 남긴  유명한 시조 한 수가 전한다.


                           일 심어 느즛 피니 군자의 덕이로다/

                           풍상에 아니 지니 열사의 절이로다/

                           세상에 도연명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성여완

<<<일찍 심어서도 꽃은 늦게서야  피어나니, 이는 모든일에 신중을 기하는
군자의 덕행이라 할수 있도다,
비바람 눈서리 에도 꽃은 떨어지지 않으니, 높은 지조를 가진 열사의 절개와도
같도다, 옛날 진나라가  멸망했을때 벼슬에서 물러난 도연명과 같은 이를
지금 세상에서는 볼수 없으니 이를 슬퍼 하는도다,

국화는 예로부터 군자의 꽃이라고 했다. 성여완은 도연명이 없다고 말한 것은 도연명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국화가 없다는 말이다.
기울져가는 고려 왕조를 지켜줄 열사가 없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도연명은 중국 대표적인 전원 시인이었다.
‘내 어찌 5두미(斗米;현령의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대할소냐’라고, 하며
현의 사찰(査察)로 온 군(郡)의 말직에게 굽신거릴 수 있겠는가 하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현령의 직을 내 팽개쳤던 도연명.
그리고는 그는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며 고향인 전원으로 돌아갔었다.

성여완은 국운이 다한 고려 왕조를 그리며, 비분한 심정을 그리고 있다,
무너저가는 고려조정을 일으켜 세워보고자 하는 아무런  의지도  없이, 당장 눈앞에
번쩍이는 이씨 일파의 칼과 창이 두려운 나머지 스스럼 없이 변절을 자행 하는 고려의
신하들을 볼적마다 성여완의 가슴은 무척 아팠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옛날 중국 진나라때 국화를 매우 사랑했던 도연명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이 시조는 고려의 멸망을 바라보며, 작자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재삼 다짐한
것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이씨조선이 세워지자 새 왕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벼슬을 하지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끝까지 절의를 지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결국 숙청의 대상이 되어 모두 불에 타 죽임을 당하는데,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이때부터 유래 되었다.

조선조 개국 후 이태조(李太祖)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창성부원군(昌成府院君)에
봉하고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성여완은 받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를
지켰다. 그리고 아들에게 나는 전 왕조에 절의를 지킬것이니 너희는 지금의 왕조에 충성을
다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원으로 돌아가 은거하여 평생을 시로 달래며 생을 마쳤다...........

 
                                                          <성여완 묘역>
소재지: 경기도 포천시 신불면 고일2리
포천시 향토유적: 제 21호, 지 정 일  1986. 04. 09

<<<성여완 [成汝完, 1309~1397]은 고려말의 충신으로 조선 개국 후, 검교문화시중에
임명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충신이었다.
묘역은 부인 경안택주 금성군 나씨와 합장묘로서 묘역에는 상석. 향로석. 묘비2기. 동자석
문인석 등 석물이 배치되어 있어 조선초기 묘제와 석물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1.6m, 지름은 3m이다.>>>


한번은 이태조(李太祖)가 경회루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초청한 적이 있었는데,
부득이 참석은 하였으나 평복인 흰 옷을 입고 참석해 충신의 절조를 나타냈다.
당시 아들 3형제가 모두 고위관직에 있어 부득이한 참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397년(태조6) 89세로 졸하니 나라에서는 쌀과 콩 100석을 하사해서 장사를 후하게 치르
도록 하였다. 그 후 아들은 모두 현달해서 석린(石璘) 호 독곡(獨谷)은 영의정이 되고
석용(石瑢) 호 회곡(檜谷)은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석인(石姻) 호 상곡(桑谷)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이 3형제는 창녕성씨의 파조(派祖)가 되어 독곡파(獨谷派), 회곡파(檜谷派), 상곡파(桑谷派)
로 나누어졌고 이 3파를 삼곡파(三谷派)라 부른다. 그 후손 회곡파에서는 만고충신 성삼
문(成三問)이 나왔고, 삼곡파에서는 성종조 때 우의정 성봉조(成奉祖)가 나왔고, 또 연산조
때 영의정 성준이 나왔고, 인종조(仁宗朝) 때 좌의정 성세창(成世昌)이 나왔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된 대학자 우계 성혼(牛溪 成渾)이 그 후손이다. 묘는 신북면 고일에 있다.

문례현(問禮峴) 물어고개의 전설(傳說)이 있는데 포천시 신읍덩에서 신북면 심곡리 사이에
있는 고개를 물어고개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
선생이 고려조가 망하게 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왕방산(王方山)아래 신북면 계류리에 왕
방거사(王方居士)라 자처하며 은거해 있을 때 조선조 이태조(李太祖)가 새 왕조에 출사할 것
을 예를 갖추어 왕사(王使)를 보내 입조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부터 이 고개를 예를 갖추어 찾아온 고개라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고개는 문례현의 와전(訛傳)이라고 전한다!.


성석린

성석린(成石璘)은 1338년(고려 충숙왕 7)∼1423년(조선 세종 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문정공 성여완(成汝完)의
아들로 시조로부터 6세손이다.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 학유(國子學諭)를 제수받았으며, 승진하여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國史)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 후의
상서원(尙瑞院))의 필도치(ıy赤)으로 등용하였으며, 다시 지인 상서(知印尙書) · 예부
총랑(禮部摠郞) 등을 역임하였으나 신돈(辛旽)에게 아부하지 않아 미움을 사서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갔다가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 지신사(知申事) ·
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우왕 4년(1378) 여름 왜구가 개성(開城) 가까이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여 수성좌리공신(輸誠佐理功臣)이 되었다.
그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다시 양광도 도관찰사
(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의창(義倉)의 설립을 건의하여 각도에 의창을 설치케 하였으며
문하부 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공로로 공양왕 2년(1390) 단성
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예문 대제학(藝文大提學)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다. 

  
                  [성석린 좌명공신왕지]                                           [성석린 필적]              

성석린 좌명공신왕지 : 보물 제746호.
제2차 왕자의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운 성석린에게 내린 태종의 사령장.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 태조가 되어 즉위
하자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었고 개성부 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쳐 태조
4년(1395) 6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제수되었으니, (지금의 초대 서울 시장이다.)
이어 정종이 즉위하자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 평양 부윤(平壤府尹) · 문하시랑
찬성사를 거쳤는데, 이때 이방원(李芳遠 : 태종)을 해치려는 박포(朴苞)의 난(亂)이 있어
이방원을 도와 이를 평정하여 그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녕부원
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하 우정승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1401년(태종1)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진봉되고, 태종 3년에 우의정, 태종 7년에 좌의정을 지내고, 태종 11년에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태종 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태종 15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廓杖)이 하사되었고
86세를 일기로 죽었다.


성석린은 오늘날의 법무부장관격인 전법판사 성여완(成汝完)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성군미(成君美)는 판도총랑, 증조부 성공필(成公弼)은 전객부령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으니 성석린의 가문은 고려조정에서 대를 이어 명성이 높았던 벌족이었다.
성석린의 아버지 성여완은 이성계 일파의 공양왕 옹립정변에 가담하여 정몽주 · 정도전
등과 함께 이른바 9공신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자 포천
왕방산에 숨어버렸던 고려의 충신이었다.


성석린은 1357년 공민왕6년 19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첫 벼슬로 종9품 국자학유(國子學諭)
를 받으니 요즘으로 치면 국립대학교에 소속한 초급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성석린은
타고난 재능과 온화한 성격, 튼튼한 가문을 배경으로 주변의 시선을 받으니, 곧 당대의 명신
이제현(李齊賢)이 적극 추천하고 공민왕도 성석린을 알아보아 끝내 비서실장격인 지신사(知
申事)에 발탁 중용하였다.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도 즉위하기가 바쁘게 성석린을 챙겨
창원군(昌原君 )에 봉군하고 두 번이나 공신으로 책록하였다.

 
送僧之楓岳(송승지풍악) 풍악(가을 금강산)에 가는 스님을 보내며,
                               
一萬二千峰(일만이천봉)  금강산 일만 이천 봉/
高低自不同(고저자부동)  봉 마다 높낮이가 서로 다르지/
君看日輪上(군간일륜상)  여보게 자네 일출 모습 꼭 보시구려/
何處最先紅(하처최선홍)  어느 봉우리가 맨 먼저 붉어지나!.

                                                     成石璘(성석린)


눈 들어 강산 바라보니 아득하고도 아득한데/
집에서 온 편지 너무반가워/
깊은 밤 달 보니 부모님 생각/
대낮에 구름 바라보니 아우 생각 간절하다/
두 눈이 어두워 봄 안개 낀 듯 보이지 않고/
늙은 머리 비녀 꽂음에 새벽 서리 차갑네/          
봄바람은 시름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가고/
푸른 나무 꾀꼬리 소리 숲속에 가득하네!.
                                 
                                                   成石璘(성석린


성석린은 한때 양광도 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가 있었는데, 마침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백성 들이 기근에 허덕이게 되자 각 고을마다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는
창의적인 제도를 펼쳐 이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가 되도록 한 일도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성석린은 이색(李穡) · 우현보(禹玄寶)등 개국을 달갑지 않게 여기
는 편으로 몰려 추방되기도 하였으나 특별히 태조가 아껴 챙기니 그는 새조정의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고 이어 한성부판사에 오르니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이었던 셈이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심덕(心德)하나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했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으나 태조 이성계가 인품에 끌려 친구로 대해 주었던 세살 아래의
성석린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는 어지러운 고려조정에서 묵묵히 제
할일을 다하고 있던 성석린을 매우 믿음직스러워 했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명필로 알려진
성석린의 해서체와 초서를 이성계는 매우 좋아하였다.


정종을 거쳐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고위관직를 역임한 성석린은 1415년 78세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곧 노령을 구실삼아 청해부원군으로 비껴 앉아 국가원로 역할을
하였다. "다음은 성석린이 절친한 친구 조재신이 죽자 슬프하며 지은 만가이다".


온화한 나의 이로운 벗/
정담을 몇번이나 나누었던가/
반드시 어진 사람이 오래사는 것도 아니도다/
속절없이 어른의 풍모만 남았구나/
책시렁 위에는 티끌만 쌓이고/
약 화로에는 불이 꺼졌구나/
슬프다 그대 평생의 일/
소나무와 오동나무에는 밤 달빛이 둘러싸는 구나!.

                                               成石璘(성석린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절개와 의로움이 있었는데, 영의정에 있을 때 대사헌
맹사성(孟思誠)이 태종의 부마 조대림(趙大臨)이 국법을 어긴 일로 심문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사형에 처하게 된 위기에서 맹사성을 위해 태종에게 지성으로 간언(諫言)하여
맹사성을 구한 일화에서도 그 일면을 볼 수가 있다.


또한 왕자의 난 이후 태조와 태종의 사이가 불화하여 태종즉위년, 태조가 마음이 상해
옥쇄를 거머쥔 채 함흥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모시려 가는 사신마다 죽여버리는 사달이
나니 그는 자청하여 그해 유난히 무더운 여름, 성석린은 한사람의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흰수염을 날리며 길을 떠나는데, 등이 몹시 구부러진 그의 뒷 모습은 보는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다. 성석린은 노구를 이끌고 태조의 옛 친구로서 찾아가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여,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태조가 설득하는 성석린에게 태종을 위해 아양을 떠는 것이냐고 질책하자
“만일 그렇다면 저의 자손은 반드시 눈먼 소경이 되리다”고 맹세하였는데 후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장님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거짓 맹세가 그대로 들어 맞았다고 한 일화가
전하고 있다.


당태종의 신하 덕이는 태평세월 못보았는데/
팔십에 봄을 만나니 더욱 하늘에 감사하도다/
복숭아꽃 오얏꽃은 성에 가득하고 향기로운 비 지나 가는데/
귀양온 신선은 어느 곳 술집에서 자고 있는가!.

                                              成石璘(성석린)      

           

그는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모시었고,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시문(詩文)
에도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 특히 글씨는 초서(草書)를 잘 썼으며,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健元陵神道碑)〉를 80세의 고령에 썼는데도 필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의 성내(城內) 향교동(鄕校洞)에서 살다가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약현(藥峴 :
지금의 중구(中區) 중림동(中林洞))으로 옮겨 한가롭게 살았는데 이곳은 개국 초에 무학
대사(無學大師)가 터를 잡아 준 곳이다. 그는 이곳에 넓은 동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동산
안에는 위생당(衛生堂)이라는 작은 서재를 짓고 가동(家童)들과 약을 조제하며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언충신 행동경하고 그런 일 아니하면/
내 몸에 해 없고 남 아니 무이하니/
행하고 여력(餘力)이 있거던 학문(學文)조차 하리라!.

                                           成石璘(성석린)

 
                                                <문경공 성석린 묘>
 
소재지: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산30
포천시 향토유적 제22호 지정일 : 1986. 4. 9

<<<문경공 성석린의 묘는 부인 화숙택주 순홍군 안씨와 합장묘로서 묘 앞에는
상석2개, 장명 등, 그리고 좌우에는 신 구 묘비와 문인석이 2기씩 각각 배치되어 있다.
성석린선생은 1338(충숙왕 복위7)-1423(세종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자수, 호는 독곡, 본관은 창녕, 부원군 여완의 아들로 1357년(공민왕6)에
문과에 급제, 전리 좌랑.전교 부령.전리총랑을 지낸 후 신돈에 아부하지 않아
해주 목사로 나갔다가 다시 불리어 성균 사성이 되고, 밀직 대언.지신사에 올랐다.>>>


1423년 세종1년 1월 말년을 검소하게 살던 성석린은 8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고일리에 부인 순흥안씨와 합장으로 된 성석린의 묘소가 있고,
조카인 참판 성개(成槪)가 쓴 묘비가 향토유적 22호로 관리되고 있다. 묘역 앞에는
1984년 새로세운 신도비가 있는데, 학술원장 이병도가 짓고 정주상이 글씨를 썼다.
성석린의 형제들로 성석용(成石瑢)은 대제학,석인(石因)은 예조와 호조의 판서, 막내


석번(石?)은 낭장(郎將)이었다. 성석린의 아들 성발도(成發道)는 좌참찬에 이르렀고,
성석용의 아들 성달생(成達生)은 판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성석린 형제들에서 많은 인물
들이 나왔다. 성석용의 현손에 역사상 만고충신의 상징적 인물인 성삼문이 있는 등 그들
형제들의 후손에는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줄을 이어 쏟아져 나와 창녕성씨 문중을 빛냈다!.

저서로는 《독곡집(獨谷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성석용
 
성석용(成石瑢) ?∼1403년(태종 3).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옥(自玉), 호는 회곡(檜谷).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여완(汝完)의 아들로,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아우이며 시조로부터 6세손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시대에는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비롯하여
대언(代言)·지신사(知申事)·밀직부사(密直副使)·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에 공이 있어 태조가 그에게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을 내렸다.
벼슬은 대사헌을 거쳐, 개성유후(開城留後)·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맑으며, 말이 없이 벼슬에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창녕성씨 회곡공파의 파조이며, 성삼문의 증조부이다.


성석인

성석인(成石因) ?∼1414(태종 14).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유(自由), 호 상곡(桑谷)
시호 정평(靖平), 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여완(成汝完)의 아들이며,
성석린(成石璘) · 성석용(成石瑢)의 아우이며 시조로부터 6세손다.
초명은 성석인(成石岩)이었으나 국왕의 휘를 피하여 석인(石岩-因)으로 개명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우왕 3년(1377)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지평 · 경연
강독관을 역임하였다. 다시 조선왕조에서 강원도 도관찰사 · 충청도 도관찰사를 거쳐
경연관 · 대사헌 · 예문관 대제학과 형조 · 호조 · 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정평(靖平)이다.


 성사제

성사제(成思齊) 본관은 창녕, 호는 두문자(杜門子), 정승 성유득(成有得)의 아들로
시조로부터 6세손이다.
성사제의 호가 두문자(杜門子)인 것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杜門不出)하겠다는 의지를 호에 새긴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건두문불출(公子虔杜門不出)’ 에서 유래한 말로 성사제는 자신뿐 아니라 아들의
이름까지도 두문불출의 의미를 담아 두(杜)라고 고쳤는데, 고려에 대한 그의 단심(丹心)을
읽을 수 있다.................


창녕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 의 후손 가운데 고려말 충신으로 성여완과 성사제를 꼽는다.
성여완은 성사제의 당숙이다. 성여완 처럼 성사제도 조선에 협력하지 않는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성석린 과 6촌인 점을 감안하면 조선조 개국에 협력하라는 엄청난
회유와 권유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씨(王氏)의 귀신이 될 지언정 이가(李家)의 신하는
못한다며.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다. 그는 내가 죽더라도 시체를 염하지 말것이며
봉분도 만들지 않음이 옳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고, 결국 만수산 두문동에서 순절하고
무덤도 없이 잊혀져 갔다................


성사제는 신현(申賢, 1298~1377)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신현은 안향과 우탁의 도통(道統)을
이색, 원천석, 정몽주에게 연결시켜준 유학자다. 원천석 감수, 범세동 편찬, 성사제가 증보
(增補) 작업에 참여한 ‘화해사전(華海師全)’은 신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책이다.
조선시대 내내 잊혀졌다가 1931년 군산에서 발견된 ‘화해사전’은 비록 위서(僞書)의 논란이
있지만, 고려 말 유학의 계통과 성리학의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성사제는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문장과 책문(策問)을 만지는 일을 주로 했고,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直提學·정사품)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1392년 7월 마침내
수창궁에서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사제는 통곡하며,
이제는 우리 종국이 망하였으니 내가 어디로 가겼는가?...........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寧爲王氏鬼不作李家臣)”하고 
부인 이씨를 불러놓고  “나는 고려의 신하라 신조(新朝·조선)에 벼슬해서 조상을 욕보이지
않을 것이고, 이제 곧 죽을수 밖에없소 말하고는 외 아들을 않혀놓고 그 이름을 두(杜)라고
개명하며 이어 부인에게 선조의 뒤를 잇는것은 이 아이이니 그대는 고향 창녕으로  내려갔어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우리 성씨(成氏)의 대를 끊지않게 해 주오 내가 대대로 국은을 받고
살았으도 나라에 다 갚지 못하고죽어도 망국대부를 면치 못하겼으니 어찌 지하에서 선조를
뵈오리오, 나는 비록 죽어도 봉묘가 없는것이 옳은 것이오, 하고는 부인과 아들을 창녕으로
보내고 뜻을 같이하는 고려의 유신들과 만수산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자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경덕궁에 친히 와서 이들을 불러 마음을 돌려 설득하고자 했으나
두문동 72현은 갓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삿갓을 쓰고 초석을 지고 경덕궁 앞 고개를
넘어가 응하지 않았다. 이에 태조는 크게 분노하여 두문동을 불살랐으니,,,,,,,, 이들은 모두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죽어갔다. 후인들을 이들의 충절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삶을 잃어버린 개자 추의 한이요/ 몸을 죽인 왕탁의 원통함이로다!.

후세의 사람들은 그들이 갓을 벗어 건 곳을 수개현이라 하고,
고개를 넘어 간 곳을 부조현이라 했다!..............


성사제의 존재가 다시 부각된 것은 1796년(정조 20) 유생들에 의해서였다.
그의 행적을 알게 된 유생들이 개성유수에게 알리고,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그 결과 1808년(순조 8) 개성 표절사에 그의 이름이 오르게 됐다. ‘두문동선생실기’가
간행된 것은 그 이듬해의 일이었다.

                      
                                           <성사제 신도비각>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대지면 석리 729-5
문화재자료: 경남 제24호, 지정일 : 1983.07.20 , 소유자 : 창녕성씨정절공파종회,

<<<신도비란 그사람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신도비는 고려말의 충신인 성사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낮은 담장이
둘러진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성사제는 공양왕 때 보문각 직제학의 벼슬을 지내었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를 한탄하며 끝까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다. 두문동은 원래 경기도 광덕산 서쪽의 골짜기를 이르는 지역이나, 고려말
72명의 신하들이 조선 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거부하고 숨어지내던 곳으로 더 유명하다.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후손들이 그의 충절에
보답하기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2003년 9월 18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고려충신 성씨비에서 고려충신 성사제 신도비로 명칭 변경 되었다.>>>


현재 창녕에 사는 성씨의 9할은 성사제의 후손이다. 부인 성산 이씨와 아들 두(杜)는 고향에
내려와 아버지의 유지를 잘 받든 셈이다. 물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이들도 물론 성사제의
후손이다. 성사제의 후손들은 무덤조차 없는 것을 아쉬워해, 1812년에 창녕읍 조산리의
부인 성산 이씨 묘 옆에 망송각(望松閣)을 짓고 그 안에 망제단(望祭壇)을 마련했다.
망송각 아래쪽에는 신도비(神道碑)도 세웠는데, 신도비는 현재 창녕 성씨 시조 묘가 건너다
보이는 대지면 대지초등학교 앞쪽으로 옮겨져 있다.


두문자 성사제가 끝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충(忠)이었고, 효(孝)였다. 나라를 위한 충은
자신이 지켰지만, 선조를 위한 효는 아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충효를 삶의 지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도비를 건너다보고 있는 시조 묘의 사연에서 비롯 되었을 것이다!.......


영원한 충절 성삼문

성삼문(成三問) 1418년(태종 18년)~1456년(세조 2년)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성석린의 동생인 성석용의 현손으로
조부는 성달생이며, 시조로부터 9세손이다.
창녕성씨 의 인물중에는 세종시대의 문신 성삼문(成三問)이 가장 유명하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삼문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
             
                        
                                  <매죽헌 성삼문 영정>

성삼문은 1418년(태종 18년)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특이하게
삼문(三問)인 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때 그는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의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막, 낳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인해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성삼문은 어릴적 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 하였다,
1435년(세종 17) 생원(生員)시에 합격하였고 14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역임했다.
그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신숙주·하위지·이석정(李石亭) 등과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을 도와서 한글의 창제를 위해 정음청(正音廳)에서
같은 집현전 학사들인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박팽년·신숙주·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
등과 함께 랴오둥[遼東]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건너가 음운 연구를 겸하여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한후,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마침내, 최초의
한글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케 했다.

      
<성삼문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세종은 자신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운 이들 젊은 학사들을 특별히
총애해서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아 정사를 논했다. 이때, 세종은 어린 원손(후일단종)을 무릅에
않히고 성삼문과 신숙주 들에게 일러 경들은 후일, 어린 세손을 잘 보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문종에 이어 어린 단종이 1452년 즉위하자 야심가 수양대군(후일세조)은 그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어켜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 대신들 수십인을 무참히 참살하여, 제거하고 집현전의
여러 신하들을 회유하기 위해 정난(靖難) 공신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다투워 돌아가며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고 정난에 가담하지도 않은 성삼문 에게도 공신의 호를
내리자 성삼문은 이를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세조는 스스로 영이정에 올라 전권을 장악한후, 1455년 마침내 어린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끌어않고 통곡하였으나 단종을 보필할
힘이 없습을 한탄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456년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게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의 아버지 성승이 별운검을 서는것을 기회로 그날을 거사일로 정한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 박쟁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한명회 윤사로
정인지 권람을 죽이게 하고 병조정랑 윤영손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무사들이 나무워 척살 하기로 정했다.

그러나 연회 당일 아침에? 낌세를 알아차린 한명회의 권유로 세조는 갑자기 연회자리가
비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시하였다. 


이 운검은 임금이 정좌한 뒤에 큰 칼을 들고 서서 호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도총관으로 있던 성승(成勝: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운검으로 내정되어
그 자리에서 처치하기로 한 것이었다.

별운검의 시립이 패지되자 유응부는 그대로 거사를 강행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성삼문이 극구 말려서 후일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에 같이 모의를 했던 김질이 성사가 지연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여
그의 장인 인 정창손에게 밀고를 하자 정창손은 그날밤으로 한명회에게 밀고하여
모의한 자들이 모두 세조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측근들이 시립한 가운데 세조가 직접 국문을 하는데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세조를
가르켜 "나으리라" 호칭하면서 모의 사실을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이 계신데 내가 어찌 나으리의 신하인가,
나으리가 준 녹봉은 하나도 먹지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 해 모두 가져 가시오 하였다.

그가 형을 당한뒤 그의 집을 수색해 보니 세조가 준 녹봉은 하나도 먹지않고 어느날 받은
녹봉인지 전부 표시를 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아니라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었을 뿐이었다 한다.

 
                                            <성삼문 유허비>

소재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4호.
 
분을 이기지 못한 세조가 쇠를 불에 달궈 단근질로 팔다리를 뚫고 온 몸을 지지자
성삼문은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참혹 하구려,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궈 오시오 했다.
격노한 세조가 주리를틀고 손가락을 잘라내게 하였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불의를 조목 조목 꾸짓어 나무라기 시작했다...
또한, 세조의 옆에 시립 해 있는 한때는 절친한 친구였던 신숙주에게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져버리고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신숙주를 꾸짖으며 했던 말이다...
"네 이놈 숙주야! 우리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무어라 했는가".
천추만세 뒤에 그대들은 원손을 잘 보위하라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진정 너 홀로 잊었단 말인가!
의리를 저버리는 너의 사악함이 오늘날까지 이를 줄은 차마 알지 못했구나!"

일이 이렇게 되자 세조는 더욱 광분하여 네 이놈" 네놈의 입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하며" 더욱 잔인한  형벌을 가하기 시작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과 뼈가 드러나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그는 추호도 흔들림 없이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성삼문은 만고의 충신으로 천추에 길이 회자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읇었으니!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순간 장래는 물을 끼언진 듯 숙연해 졌다". 분을 이기지 못한 세조는 삼족을 멸하고
거열형(車裂刑)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라는 명을 내린다.
삼족을 멸함은, 친족. 처족. 외족을. 일컸는 형벌로 그야말로 씨를 말리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달 8일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이개 하위지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박중림 김문기
박쟁들과 함게 군기감앞에서 (거열형) 능지처사형을 당하였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그때, 그의 동생 삼빙 삼고 삼성과, 조카들 아들 맹첨 맹년 맹종 및, 갖난아기까지 남자는
모조리 삼대가 모두 살해당해  혈손이 끈겼고, 그의 조부 성달생의 묘는 파헤쳐져 부관참시
되어 훼손되었으며, 그의 아내와 딸은 박종우의 집 노비로 분배 되었고,
다른 딸들은 관비가 되어 끌려갔으며 재산은 몰수되었다.
혈손이 모두끈겨 제사지낼 사람도 없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首陽山(수양산) 바라보며 백이숙제 恨(한) 하노라

주려서 죽을 진들 고사리를 채식터냐

아무리 푸새기인들 그뉘땅에 났더냐!.
                                                          성삼문


<<<수양산을 바라보며 백이, 숙제 형제를 원망 하노라, 굶어 죽을지언정 고사리를
캐어 먹는단말인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풀이기로서니 그것이 누구의 땅에 났더냐,
그것 역시 그대들이 섬길수 없는 주나라 무왕의 땅에 난것이 아닌가?....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무왕(武王)의 신하가 될수없다하여
이를 한탄 하면서 망한 은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수 없고 주나라의 곡식 또한 먹을수
없다하여 수양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를 뜯어먹고 연명하며 살았다.


이때 왕미자 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주나라의 녹은 받을수 없다 하더니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일은 어찌된 일인가? 하며 책망하자, 이에 두사람은 고사리 마져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는 고사이다. 성삼문은 백이숙제를 논하여 송죽같은 절개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首陽山(수양산)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이름과 공교롭게도 같은 이름이었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처형장으로 끌려갈때 일곱살 먹은 어린딸이 울며 따라오자
뒤돌아 보며 "아이야 울지마라", "사내 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필이 살아 남을 것이다".
하며 목이 매어 말을 잊지 못했다.


수래가 잠시 멈춘 사이 집의 하인이 울면서 가져온 술병을 기우려 한잔 술을 권하자
성삼문은 마지막 한잔술을 받아 마시고 아래와 같은 시 한수를 읊는다!.............


"성삼문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며 읊은 절명시이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소리 둥둥 내 목숨 재촉하고

西風日欲斜(서풍일욕사)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구나

黃泉無客店(황천무객점)          황천길에는 여관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 밤은 뉘 집에서 묵어갈꼬!.

 
                                               (성산문의 묘)

소재지: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1호.

거열형이란 형벌이 있다.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묶고, 그 수레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것이다. 성삼문은 한강에서 거열의 극형을 당한 후,
그 시신의 일부들이 전국의 산하에 각기 매장된다. 그의 일지(一肢)를 (육신의 일부분)
수습하여 묻었다 하여 그래서 이 무덤을 일지(一肢)총이라고도 한다.


성삼문(成三問)... 그의 묘는 세 곳에 있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사육신묘(死六臣墓) 그리고 충남 논산시 양촌리,
다른 한 곳은 그의 외가이고 그가 태어난곳 충남 홍성군에 있는 것이다.
사후에 1691년 (숙종17년)에 신원이 되어 1758년 (영조34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리고 1791년 (정조15년) 단종충신어정배신록에 올랐다!.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다.                              

단종(端宗)의 시, 子規樓詩(자규루시)


一自寃禽出帝宮(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묏부리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乃愁人耳獨聽(하내수인이독청)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사육신이 일어킨 단종복위 거사 실패이후 단종은 적막한 영월땅으로 귀양가
피를 토하는 한 마리 원통한 (자규)두견새가 되어 죽어가야 했었다!............


숙주나물?

성삼문과 신숙주는 한때 집현전에서 세종의 총애를 받은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두사람은 서로다른 정치적 신념으로  인하여, 상반된 운명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신숙주는 한명회와 사돈지간으로 맺어져 더욱 번영을 구가하게 되는데,

"숙주나물의 본래 이름은 녹두나물이다".
"그런대 외?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하는가???............
녹두나물을 보라" 자라면서 금새 머리가 없어지고 두갈래로 잎이 피어나며 머리를 숙이는데,
세인들은 절게를 지키지 못한 신숙주를 그런 녹두나물에 빗대어 그때부터 숙주나물이라고
불렀으니, 지금 까지도 전해져서 우리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한다.
"무심코 숙주나물이라고 말 할때" 한번쯤 그뜻을 혜아려 볼 일이다!............................
       
    
<성삼문(成三問) "매죽헌 사우" 문절사 전경과 내부>
 
소재지: 충남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333번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호,

성삼문의 호가 매죽헌 인 것은 눈속의 매화와 대나무의 절개를 나타냄이다!...........

매죽헌 사우 문절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전기의 절신 성삼문(成三問)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문절사는 달전리 부락의
북쪽에 위치하며 사우는 동향하고 있는 정면 3간 측면 2간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외손 박호가 홍성에서 봉사(조상의 제사)하던 중 1903년 고종의 어명으로
후손 성주영이 봉사손이 되어 사우를 건립하고 봉사하였으며,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문절사라 현판하였으며 그 기념비를 세워 선생의 충의(忠義) 정신을
후세에 기리고 있다!.


성현

성현(成俔)1439(세종 21)∼1504(연산군 10),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 부휴자(浮休子), 허백당(虛白堂),으로 시호는 문대(文戴) 아버지는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염조(念祖)이며, 6세 상곡공(桑谷公) 성석연(成石珚)의 증손자로
시조로부터 9세손이다.


1462년(세조 8) 식년문과에,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 觀光錄》
이라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대사성·동부승지·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에 평안도관찰
사로 있었는데,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이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
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용재 성현의 필적>

성현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
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 雙花店〉·〈이상곡 履霜曲〉·〈북전 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한편으로는 관상감·사역원·전의감(殿醫監)·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
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용재총화》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 浮休子談論》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성현의 용재총화>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초기의 문신 학자 성현이 지은 필기잡록류(筆記雜錄類)에
속하는 책. 10권으로, 성현의 호가, 용재이며 기록한 내용이 다양하므로 '총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성현은 폭넓은 학식과 관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이 책을 정리 하였다.
그 내용은 고려로 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형성, 변화된 민간풍속이나 설화 문물
제도 · 문화 · 역사 · 지리 · 학문 · 종교 · 문학 · 음악 · 서화 등 문화 전반에 걸쳐 다루고  있어
며, 유명 인사에서 하층민까지 가리지 않고 서술 대상으로 삼으면서 음담패설이라 할 만한
것까지 포함시켰다. 각 권은 편차(編差) 없이 서술되어 있으며, 권별의 구분도 내용과는
관계없다.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되어 3권 3책이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것이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간행한 《대동야승 大東野乘》에 채록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의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귀중한 책이다.

제일 먼저 우리나라의 유학에 관하여 논하여, 정몽주(鄭夢周) · 권근(權近) 등 경학(經學)의
대가들이나 최치원(崔致遠) · 정지상(鄭知常) 등 신라와 고려의 명현(名賢)과,
서거정(徐居正) 성임(成任) 등 조선 초기의 문인들의 학문적 특성과 문장가로서의 성격을
풀이하고 있다. 한편 필법에 대하여도 언급하여 김생(金生) · 이용(李瑢) 등의 특징을 이야
기하며 고려의 공민왕으로부터 조선 안견(安堅)의 산수화에 이르기까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음악에 대해서는 신라의 현금(玄琴)이나 금관국(金官國)의 가야금 및 송태평(宋太平) ·
도선길(都先吉) 같은 악공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는 각 도읍의 형세와 명승
지를 언급하고 있다. 풍속에 있어서는 잔치음식의 가짓수와 맛의 특징 등을,
그밖에 나례(儺禮) · 처용무(處容舞) · 관화(觀火) 등의 절차를 설명하고 있어 귀중한
민속학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밖에도 중국사신의 접대에 따르는 의식절차, 사신들에 대한 인물평, 과거제도에 대한
것과 성균관의 제도, 제사풍습, 불교와 승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 설정에 있어서는 왕세가(王世家)의 양반관료는 물론이고,
유학자 · 서화가 · 음악인 · 문인 또는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과부나 중 · 복서(卜筮) · 기생,
심지어 탕녀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일화나 해학담(諧謔譚), 일반 대중이나 천인들의 소화(笑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설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특히 민속학이나 구비문학 연구의 자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성세창
                                                    
성세창(成世昌) 1481(성종 12)∼1548(명종 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시호 문장(文莊).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낸 염조(念祖)의 손자이며,
예조판서 용재 성현(成俔)의 아들이고 시조로부터 10세손이다., 성세창은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1501년(연산군 7) 진사시에 합격,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용되었다. 이어 저작(著作)·박사(博士)로 승진되었고 사간원정언을 지냈다.
1509년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인사행정의 불공정한 처사로 서반(西班)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후 다시 동반(東班)으로

복직되어 사간원헌납·홍문관교리·사헌부집의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쳤고, 그뒤 사간원사간으로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임하였다.
1517년 홍문관직제학으로 있을 때 조광조(趙光祖) 등이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려 하자,
그 폐단을 지적하고 불가함을 주장하였다.
1519년 정국이 위태롭게 되어가자 평소에 친하였던 김정(金淨)·이자(李  )·김수온(金守溫)
의 의기를 충고하고 자신은 신병을 이유로 파주의 별장에 거처하면서 화를 피하였다.
1521년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형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주문사(奏聞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돈재(遯齋) 성세창(成世昌)의 필적>

그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관하 선산군수가 여악(女樂)을 설치한 것이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고 일시 파직되었다. 그뒤 성균관대사성·동지중추부사·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
하였다. 정광필(鄭光弼)이 영의정이 되면서 예조참판· 이조참판이 되어 기묘사화에 죄를
입은 사람들을 등용시키는 데 힘썼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30년 대사헌·홍문관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권신(權臣) 김안로(金安
老)를 논척(論斥)하려다가 도리어 평해에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와 그 일당이 숙청
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우윤·형조판서·이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
하였다. 일시 지중추부사로 있다가 곧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어서 예조판서·호조판서·의정
부우찬성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으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좌의정으로 임명되었고, 판중추부사·영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성균
관사 등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해에 을사사화가 일어나 윤임(尹任) 등이 숙청되고
윤원형(尹元衡) 등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되었고 마침내 황해도
장연(長淵)으로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후, 선조 때에 복작되었다.

돈재 성세창은 학식과 문장이 모두 뛰어나 오랫동안 홍문관에서 봉직하였으며 문형(文衡)
을 맡아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필법에 뛰어났고 글씨·그림·음률에 정통하여 3절(三絶)이라 불렸다.
저서로는 《돈재집 遯齋集》·《식료찬요 食療纂要》가 있으며 글씨로는 파주의 성이헌여
완갈(成怡軒汝完碣), 경기도 광주의 부사정광보묘비(府使鄭光輔墓碑)·이집의수언묘비(李
執義粹彦墓碑), 파주의 성지사세명묘비(成知事世明墓碑), 용인의 정포은갈(鄭圃隱碣),
홍주의 민대사헌휘비(閔大司憲暉碑), 익산의 소자파표(蘇自坡表) 등이 있다.
 

성수침

성수침(成守琛) 1493년(성종 24)∼1564년(명종 19). 조선 중종·명종 때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옥(仲玉), 호 청송(聽松)· 죽우당(竹雨堂)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버지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훈구대신들의 모함으로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죄없는 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는 화를 입게되자 정치의 비정함에
한멸을 느끼고 벼슬길을 포기하고 초야에 묻혀 청송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두문불출하였다.
이때부터 벼슬에 뜻을 버리고, 《대학》 《논어》를 읽고 《태극도》를 그리면서 조화의
근본 탐구에만 몰두했다.


그후, 1541년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우계(牛溪)에 은거하였다.
그후에도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土山縣監)·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청송(聽松) 또는 죽우당(竹雨堂)이라는 그의 호가, 말하듯이 그는 자연을 벗삼아 청빈낙도를
실천하여 매사에 유유자적 하였으며 글씨를 잘 써서 문명을 떨치고 문하에서 아들 혼(渾)을
비롯하여 많은 석학들을 배출했다.
성수침이 죽었을 때에는 너무나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비용조차 없었다 한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하여주어
장례를 치룰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성리학의 토착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도학사상으로 나타났거니와 이들은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지치(至治)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은일(隱逸)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요순시대 같은 태평성대를 꿈꾸는 작자의 이상이 깃들어 있는  시조 한수이다"


                               이리도 태평성대 저리도 태평성대/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에 놀고 가려 하노라!.
                                  
                                                                  청송(聽松) 성수침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필적>

2009년 문화재청에 위해 대전선사박물관 소장 <성수침 필적>이 보물 1623호에 지정되었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은 조선전기 명필가이자 유명한 성리학자로 약 450여년전에
쓰여진 자료로 표제(表題)에는 청송서(聽松書)라고 되어 있다.


성수침은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도학자 명필로 전해오는 그의 필적은 드문 편이다.
현재 그의 소자(小字)는 몇몇 전하고 있는 상황이고 대자(大字)는 목판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처럼 큰 글자로 쓴 작품이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며 담묵을 즐겼던 그의 특징이
또한 잘 나타나 있다. 서예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서첩의 내용은 중국 만당(晩唐) 시인인 가도(賈島), 두목(杜牧), 이상은(李商隱), 과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 시(詩)를 차례로 썼다.


내지에 늑천 송명흠(宋明欽)의 아버지 묵옹 송요좌(宋堯佐, 1678~1723)의 소장인(淸隱堂)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요좌가 소장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수침 필적은 지난 1999년에 은진송씨 늑천 송명흠 가에서 대전시에 기증한 유물로
대전 지역과 인연이 깊다. 성수침의 아들인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은
율곡(栗谷)이이(李珥,1536~1584)와 교류하였고 율곡의 학통을 잇고 있었던 은진송씨
집안에서는 글씨 뿐만 아니라 학문적 전통에서도 관련 깊은 이같은 글씨첩을 소장한 것으로
사료된다.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필적>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송집》이 있으며, 글씨를 잘 썼는데
〈방참판유령묘갈 方參判有寧墓碣〉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문정공 청송 성수침(成守琛)과 정부인 파평윤씨 쌍분묘 전경>

소재지 : 파주읍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유자 : 창녕성씨 종중

성수침의 묘갈은 1651년에 건립된 것으로서 퇴계 이황(李滉)이 찬(撰)하고 서(書)하였다.
"뒤로 보이는 단분이 우계성혼의 묘소이다"
                            

성혼

성혼(成渾)중종 30년(1535)~선조 31년(1598) 본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源). 호는
우계(牛溪)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좌의정에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
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서울 순화방(順化坊, 현
창성동)에서 태어나 10세가 되던 중종 39년(1544) 파산(坡山)의 우계(牛溪 현 파평면 늘노
리)에 이사하여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명종 6년(1551) 생원, 진사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청빈낙도 한
아버지 청송(聽松)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학문에만 전념 하였다.

                  
                                       <우계성혼 선생 영정> 

성혼은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명종 9년(1554)에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어 평생의 지기가 되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선조 1년(1568)에는 이황을 만나게 되고,
이후 깊이 존경하게 된다. 같은 해 경기감사 윤현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에 봉해졌고,
이후 벼슬이 좌참찬까지 이르렀으나 대부분 사양하거나 부득이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곧 사퇴하였다.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 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혼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임금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이후로 점점 미움을 받았다. 왜란 중 유성룡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는데, 강화를 주장한
이정암의 입장을 옹호하다  선조의 분노를 사자 사직하고 고향인 파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성혼은 동서분당기에는 이이·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성혼선생 필적>                                             <성혼의 문행열전 책판>

소재지 :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504 물계서원
지정번호 : 경남유형문화재 제266호 지정연도 : 1990년 1월 16일
소장 : 창녕성씨 대종회 크기 : 가로 22cm, 세로 49cm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물계서원에 보관된 성혼(成渾)의 문집책판.>

그는 정치적으로는 서인의 영수에 해당하며, 학문적으로는 이이 사후에 사실상 기호학파의
주도자였다. 그러나 성혼은 정치가라기보다 학자에 가까운 인물이라 하겠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
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 논의는 성혼이 기대승과 이황의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에 있어서 이황의 설을 지지
하면서, 이이의 의견을 묻는 것으로 시작되어 1년에 9차례의 서신을 주고받으며 논쟁을
계속하였다.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
(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
가가 있으며, 외손 윤선거, 사위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이이와의 토론을 통해 체계화시켰다.
성혼과 이이 사이에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인 이 '율우논변(1572)'은
성리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좌)우계 성혼선생 묘역 (중)신도비각 (우)우계사당 전경>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유자 : 창녕성씨 종중

"우계와 율곡의 아름다운 우정"
우계와 율곡이 모두 학문에 일가를 이루고 있고, 그 도학적 품성에 있어서도 존경을 받고
있으나, 그런 가운데서도 두 사람의 학문적 특성이나 기질의 차이는 있었다.
우계는 대체로 그의 인품에 있어 별 시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효성이 지극한 효자로서 모범을 보여 주었고, 그의 언행은 세상의 모범이 되어 명예
와 절개를 소중히 여기고, 겸손을 자처했으며 이해를 매개로 남과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율곡이 “만약 견해의 이른 바를 논한다면 내가 조금 낮다 할 수 있으나,
몸가짐의 독실함에 있어서는 내가 미치지 못 한다”고 한데서 극명해진다.

마찬가지로 율곡은 우계의 장점과 자신의 결점을 말하기를, “의리를 아는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우계보다 나아 우계가 나의 말을 따른 것이 많으나, 나는 성품이 느슨하고 해이하여
비록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지만, 우계는 알고 나서는 곧 하나하나 실천하여 실제로 자기
것으로 만드니, 이는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라고 하였다.
율곡은 또 자신의 결점은 迂疎함에 있고, 송강 정철의 결점은 술을 지나치게 즐김에 있으니,

 
                                                       <우계사당>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 유 자 : 창녕성씨 종중

이와 같이 율곡은 자신이 성리의 오묘한 경지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우계보다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성리의 실천과 내면적인 자기수양에 있어서는 우계가 자신보다 낫다는 점을 솔직
히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율곡의 嫡傳(적전)이었던 沙溪金長生(사계 김장생)의 우계에
대한 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율곡에게는 심복(心腹)하여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늘 생각했지만, 우계에 대해서는
약간 차이 있게 보는 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런 때문에 우계의 문인들은 꽤 불평이 있었다.
그 후 우계에게 왕래하며 익숙해짐에 따라, 그의 氣貌를 보고 그의 의논을 듣고 나서야
율곡이 그를 도의교로 여겼던 것에는 까닭이 있었음을 알았다...............


                    시절이 태평토다 이몸이 한가하니/

                    죽림 푸른 곳에 오계성 아니런들/

                    깊이든 일장하서몽을 어느 벗이 깨우리!.
                                      
                                                          우계성혼

시절이 태평하여 푸른 죽림에서  잠이드니 한낮의 닭울음 소리가 아니었던들
깊이든 이 좋은 꿈을 깨울 벗이 어디 있겼는가?

성혼은 선조 초부터 여러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 좌참찬에
이르렀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우계로 돌아와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고향 파주로 돌아간 이후로 성혼은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에
전념하다 선조 31년(1598) 6월 향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도 많은 참소를 당하여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한때 삭직되었으나,
사후에, 인조 11년(1633)에 복직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간이라 시호하였다.
1681년(숙종 7)에 동국십팔현(東國十八賢) 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고,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저서로 『우계집』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이 있다.

 
                                       <문간공 우계 성혼선생 묘역 전경>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유자 : 창녕성씨 종중

이 곳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牛溪) 성혼선생의 묘이다.
묘역은 사성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묘비가 세워져 있으며 봉분 정면에
상석과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상석 앞에는 장대석으로 계단을 쌓았으며 좌우에 문인석을
배치하였다. 묘소의 입구 오른쪽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이 지었으며,
전액(篆額:비문 제목 글자)는 김상용이 써고,(상헌 상용은 형제이며 대청 척화파로
유명하다.) 글씨는 김집이 썼다고 한다.

                世外雲山深復深  세상 너머 구름산 깊고 또 깊어/

                溪邊草屋已難尋  시냇가 초갓집 찾기조차 어려워라/

                拜鵑窩上三更月  그대 집 위 하얗게 뜬 삼경의 저 달/

                應照先生一片心  틀림없이 그대의 맘 비추고 있으리!.
     
                                                      우계성혼

벗의 죽음을 슬퍼함. 곡사암(哭思庵)
재상을 지낸 사암(思庵) 박순(朴淳)1524~1589)이 세상을 떠나자 조문한 만시(輓詩)가
수백편이었으나 유독 우계성혼의 절구(絶句) 한수가 절창이었다고 허균의 성수시화와
신흠의 청창연담에 다 같이 기록하고 있다.

 
                     <(좌)문정공 청송 성수침신도비 (우)문간공 우계 성혼신도비>

소재지 : 파주읍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유자 : 창녕성씨 종중

                    말없는 청산이요, 태(態)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없는 명월이라 /

                    이 중에 병 없는 이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우계성혼

청산은 말이없고 흐르는 물은 자치조차 없으니 바람은 왔다가 흔적없이 스러지고
밝은 달은 주인이 없구나 이 중에 머물곳 없는 이몸이 속절없이 늙으가리라!.

 
                                   <문간공 우계 성혼선생 묘역 후경>

소재지 : 파주읍 향양리 산 8-1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지정년원일 : 1981년 4월 22일
소유자 : 창녕성씨 종중

앞에보이는 묘가 우계 성혼의 아버지 문정공 청송 성수침(成守琛)과
정부인 파평윤씨 쌍분묘 이다.

                    말이 놀라거늘 혁(革) 잡고 굽어보니/

                    금수청산이 물 속에 잠겼어라/

                    저 말아 놀라지 마라 이를 보려 하노라!.

                                                          우계성혼

말이 놀라 말가죽을 잡고 내려다보니 아름다운 산하가 물속에 비추이고 있구나
말아 놀라지 마라 이를 내가 보려 하노라!.
      

성수종

성수종(成守琮) 연산군 1년(1495)∼중종 28년(1533)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숙옥(叔玉)이고, 호는 절효(節孝)이다. 충달(忠達)의 손자로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이며,죽우당(竹雨堂) 성수침(成守琛)의 아우이다.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때 남곤(南袞)·김구(金絿)· 김식(金湜) 및 조광조 등이 시관(試官)으로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김정(金淨)·기준(奇遵) 등 신진사류들이 화를 당할때. 그때 그도 조광조의 문인이라 하여
대사간 이빈(李蘋) 등의 탄핵을 받고 급제가 취소되었다. 사사된 조광조의 장례 때 다른
사람들은 감히 가지 못하였으나, 그는 이연경(李延慶)·이충건(李忠楗) 등과 함께 가서
통곡하였다.


기질이 영특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1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서는
3년 동안 시묘를 하면서 자신은 죽을 먹으면서 매일 세번씩 상식(上食)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 그는 과거에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청빈하게 살았다. 그가 기묘사화로 인해
과방(科榜)에서 삭제된 사건은 후에 몇 번의 논란이 있었다. 죽은 뒤인 1553년(명종 8년)
6품 관직을 제수받았고, 1568년(선조 1년) 홍패(紅牌)를 환급받았으며, 1741년(영조 17)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무겁고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경복(敬服)하였다.
사후에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과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성문준

성문준(成文濬) 1559~162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중심(仲深), 호(號)는
영동(永同)· 창랑(滄浪).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연은전참봉(延恩殿參奉)·세마를 지냈다. 아버지가 무욕(誣辱)을 당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임천(林泉)에서 14년간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사포(司圃)를 거쳐,
영동현감을 역임하였다. 박학한 학자로서 글씨도 잘 썼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태극변 太極辨》·《홍범의 洪範義》·《창랑집 滄浪集》이 있다.


성안의

성안의(成安義) (1561~1629) 본관 창녕(昌寧). 자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으로
시조로 부터 16세손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 각지에서 왜적과 싸웠다.
1597년 지평(持平) 등을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내고, 1612년(광해군 4) 광주목
사(光州牧使) 때 소송(訴訟) 처리를 소홀히 다루어 파직당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되어 사성(司成) 등을 지내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공주(公州)로 호종, 이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628년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취임하지 못했다. 이조판서 ·대제학이
추증, 창녕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부용당일고(芙蓉堂逸稿)》가 있다.
 
                   
                  성안의(成安義) 영정(影幀)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222
지정번호 : 경남문화재자료 제247호지정연도 :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성준기가 소장하는 조선시대 문신성안의의 영정.
영정은 1602년 성안의가 영해부사로 있을 때 제작된 초상화 1점으로 길이 160㎝에
이르는 명주 바탕에 채색한 그림이다. 무색 도포를 입고 있는 전신 입상으로 상투튼
머리에 몸을 약간 옆으로 틀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이성

성이성(成以性) 1595(선조 28) ∼1664(현종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습(汝習), 호는 계서(溪西). 승지 성안의(成安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안김씨
호조참판 김계선의 딸이다. 시조로 부터 17세손이다.
그는 경상남도 창녕 사람으로 남원부사를 지낸 성안의 의 아들로서 조선 인조 5년(1627)
문과에 급제한 후 진주 목사 등 6개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네 번이나 암행어사가 되었으며,
성품이 근면하고 검소하여 재물을 탐내지 않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여러
곳에 선정비가 세워졌으며, 옳은 일이 아니면 하지 아니하여 간신 김자점이 여러 번 나쁜
일을 하자고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사후에 부제학에 추서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라고 불렀다.

 
                              가평리 계서당(佳坪里溪西堂)

소 재 지 :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301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 171호 지정연도 : 1984년 1월 10일
시 대 : 조선 현종 8년(1667) 부속문화재 : 안채, 사랑채, 사당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物野面) 가평리(佳坪里) 마을에 소재하며
조선 중기 계서 성이성(1595-1664)이 살던 곳이다.


성송연

 
                             <정조의 후궁 의빈창녕성씨 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

소재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소재

의빈 성씨는 정조의 빈(嬪)으로,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 있는 송연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성윤우(成胤祐)의 딸로 태어났다. 성송연은 영조29년(1753년7월8일)
태어나 정조10년(1786년9월14일) 33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돌아갔다.


장남인 문효세자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살의 어린 아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 궁에 들어와서 궁녀가 되었고 정조의 승은을 입고
아들 문효세자를 낳은뒤, 정1품 빈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정조 10년(1786) 5월 11일에 왕세자가 홍역에 걸려 5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발병한지 8일 만이었다.


의빈 성씨는 어린 아들의 죽음에 상심한 탓일까? 그해 9월 14일에 의빈성씨 또한 세상을
떠나니, 아들 문효세자가 죽은지 넉 달 만이었다. 죽을 당시 성송연은 회임하고 있었다.
출산할 달을 기다려서 호산청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병에 걸려 죽은 것이었다.
문효세자를 잃은 정조는 아들을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뒤이어 그녀의 죽음을 전해듣고
식음을 전패하고 몹시 슬프했으며 조정과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한다.
9월 20일에 의빈 성씨의 장사를 치루워 그녀는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묻혔다.


현재 의빈의 묘는 서울과 인접한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에 소재하고 있다.
묘의 우측에는 오석으로 만들어진 정조의 어제비(御製碑)문이 있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어제비는 임금이 직접 지은 비문으로 이 비문이 정조가 직접 의빈 성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것으로, 실록에는 정조가 “이제 국사를 의논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며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 온다.


의빈 성씨와 아들 문효세자의 묘소는 처음에는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에 있었다.
정조는 이 지역을 ‘효창원’이라 칭하여 왕릉과 같이 돌보게 하였으며, 또한 친히 비문을 짓고
이들의 묘소를 가까이 두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정조와 송연이의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1944년 강제로 서삼릉으로 옮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장 작업을 부실하게
하여 의빈 성씨 묘소의 석물들이 바뀌었고, 원형도 크게 훼손되었으며, 후궁들의 무덤의
위치도 바뀌어 서열이 지켜지지 않았고, 빈의 품계에 어울리지 않게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우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있다!......................


성기운

항일투사 성기운 선생의 본관은 창녕 (昌寧)이며 자는 순재 (舜在)이고 호는 덕천(德泉)으로
대제학 회곡 성석용(大提學 檜谷 成石瑢)선생의 17세 손이며 시조로 부터 22세손이다.
선생은 1877년 (고종 14년) 11월 13일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 신촌동 신안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풍모가 청수하고 천성이 총명하여 나이 8세에 이미 시를 지어 그 학문에
어른들이 감탄하였고 13세때 향시 (鄕試)에서 문장은 낭철하고 응대 동작이 의면해서
만장의 칭송을 받았다 한다.

                        
                         성기운(成璣運)의 영정

소재지: 충남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 "병산사"
병산사는 한말의 항일의사 성기운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우이다.

성장하여 한말의 대유학자 간재 전우(艮齋 田愚)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고을은 물론 전국적인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고종의 국상 때 상경 하였는데 정부고관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알고 벼슬길에
오르라고 간곡히 권유하고 추천하나 이를 거부하고 사양하다 지쳐 급급히 귀향하였다 한다.

1904년 (고종 41년)부터 일본이 내정간섭을 시작하여 오다 급기야 통감부(統濫部)를 설치
하여 주권을 유린하며 오다. 드디어 한일합방을 감행하고 일본은 무단정치를 시작하면서
조선총독부는 민적령을 전국에 내려 호적을 만들기 시작하자 전국의 유림들은 이를 반대
하여 물 끓듯 하였다. 청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반대 하였으나 시일이 흐르고 왜경들의
강압과 회유에 빠저 몇몇 선비들을 제외하고는 초지를 굽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선생은 호적뿐만 아니라 조세, 부역등 각종 일들을 무시하고 반대 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선생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선생의 벗인 손영석 (孫永錫)의
노옥일기(虜獄日記)에 의하면 1917년 (丁已) 5월 20일에 청도경찰에서 부장과 수명의
순사들이 들이닦쳐 선생을 연행 하려하자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대한국민인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하니 왜경이 말하기를 "무슨 이유로 호적을 하지 않느냐" 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한국유민 (韓國遺民)인데 왜 너희들 왜적의 호적을 해야하느냐
더구나 나는 우리 한국땅에 살고있는데 왜 너희들의 호적에 들어가야 하느냐"하니
왜경들은 할일없이 돌아갔다 한다.


1917년 (丁已) 5월24일 또 다시 찾아온 왜경에 의해 청도경찰서에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선생은 일체의 식음을 전폐하였다. 다음날인 25일에 순사 수명에 이끌려 사법실에 들어서니
소위 왜인경찰서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노기등등하여 고함을 치며 말하기를 "너는 역적이
아니냐" 선생은 정색하여 말하기를 "나는 내나라 한국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역적이 될수
있느냐.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바로 역적이 되는것이다. 너희들은 천지신명이 굽어 보는것도
두렵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그들은 한편으로 위협하고 한편으로 회유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철석같았다. 그들은 욕설을 퍼붓고 음식 먹기를 권하고 하여도
선생은 끝내 듣지 않았다.


다음날은 선생을 밀실에 불러내어 또 위험하고 달래고 하였으나 선생은 시종일관"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 이니 너희들 일본호적을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선생을 회유하기
위해 내려온 대구도경무부장이 이를 보고 4일동안 이나 한 모금의 물과 한 술의 밥도 먹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의연할 수 있다니 정말 진실한 의사(義士)라고 말하고 석방 하였다.

그 후 6월 11일에 또다시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고 7월 3일 구금되어 15일에 석방되어
7월19일 대구 경찰에서 내려와 모진 고문과 설유를 하였으나 끝내 불응하니 또다시 총독부
고관이 내려와 회유와 협박을 해도 선생은 태연히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고 너희들은 불구
대천의 원수인데 어찌 너희들 호적으로 고칠수 있겠는가. 나는 대한유민(大韓遺民)이다"
하고 크게 꾸짖었다 하며 , 또한 일본 경찰들이 음식을 권하니 선생은 "원수들인 너희와
말도 하기 싫은데 어찌 너희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하며 물도 마시지 않으니 일경들 마저
경외하였다 한다. 일경들의 박해는 계속하여 8월 1일에 구금되어 8월 5일에 석방되고
한것이 20수일이 었다.


이와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 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호적을
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의사가 다니며 치료하였으나 선생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왜경들은 당황하여 석방 하였는데 경찰서에서 나올때 지팡이를 주니 선생은 너희들
지팡이는 필요없다 하며 꼿꼿이 걸어서 나왔다 한다.
이로부터 배일거두로 지목되어 이지방에서 살지 못하고 유배생활을 하다 선조의 고향인
현 달전리로 이주하게 되자 이곳학도들이 선생의 충의에 감동되어 선생을 따르는 제자가
800명이나 되었다.


선생은 끝내 호적을 고치지 않았을뿐 아니라 이름 위에는 반드시 대한 유민이라고 쓸 만큼
민족 정신이 투철하고 고고한 의기로 일제에 항거 하였다.
그 후 선생은 1953년 충현서원장을 지냈으며, 1956년 8월 5일 향년 80세로 돌아가셨다.
1972년 문인과 고을 유림들이 충남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에 사우(병산사:屛山祠)를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이곳에는 선생이 남긴 문집과 목판(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성이복

성이복 본관은 창녕(昌寧) 효자 성이복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단을 쌓아 기원한
효성스런 마음씨에 호랑이 마저 자취를 감추었고 시묘살이3년 통곡 속에 산중을 헤매이다
탕건이 벗겨 진줄도 모른채 내려오니 까마귀조차 탄복한 지라 성이복의 대문밖 대추나무에
탕건을 물어다 걸어놓고간 하늘도 감동시킨 효자였다.
효성이 지극한 이복은 아버지 병에 하늘의 힘을 빌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집뒤에
단을 쌓고 청수를 떠놓은 후 병의 쾌유를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호랑이
한 마리가 이복이 빌고 있는 단 위에서 천지가 떠나갈 듯 울어댔다.
그러나 이복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병을 고쳐 달라고 계속하여 빌면서 앉아 있었다.

 
                                                      <성이복 효자문>

소재지 : 충청남도 연기군 서면 와촌리
시대 : 조선시대 : 서기 1632년 명정을 받아 1891년에 건립하였다.
 
이를 본 호랑이는 이복의 정성에 크게 감동하여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참판 이대식은 아래와 같은 글을 지었다.「아버지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복의 효성된 마음은 분명히 사랑으로 시작되었고, 또 사랑으로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은 효도를 의무처럼 생각하나 효도는 의무이기
앞서 자연히 솟아나는 것이다」

[출처] 2014년 12월 27일 오후 12시 33분에 저장한 글입니다.|작성자 운여

▢ 성현(1439년, 세종 21∼1504년, 연산군 10)

   ○ 자는 경숙, 호는 용재·허백당, 시호는 문대

   ○ 예조·공조판서, 경상도·평안도관찰사, “청백리”에 녹선

   ○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로서 대제학 겸임

   ○ 조선의 문신·음악가·시인, 부관참시(갑자사화, 연산군 10)

   ○ 악학궤범(유자광과 공동저술) : 장악원의 의궤(儀軌)와 악보 정리

   ○ 용재총화 : 조선 초기 정치·사회·문화·제도·풍속 연구의 중요 자료

       (문장,시,그림,인물,역사적 사건 등을 다룬 잡록형식의 글 모음집)

   ○ 성임(1421, 맏형), 성간(1427, 둘째형)도 시를 잘 씀.

   ○ 맏형 임(任)을 따라 명나라 사행(使行) 때 지은 기행시를 정리해

       ≪관광록(觀光錄)≫으로 엮음.

   ○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쌍화점』,『이상곡』,『북전』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씀.

   ○ 부친은 지중추부사(정2품 무관 벼슬) 성염조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0호,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산 60-1 위치

 

▢ 성세장(1506년, 중종 1∼1583년, 선조 16)

   ○ 자는 경회, 중회, 호는 사암, 조선중기의 문신

   ○ 예조·형조·호조판서, 대제학, 우참찬, 한성부판윤 “청백리”에 녹선

   ○ 좌찬성에 추증

   ○ 김안국의 문인, 사도시정으로 춘추관 편수관(시정을 기록하는 관청의 정3품 벼슬)

      을 겸직『중종·인종실록』편찬에 참여

   ○ 대사헌으로 윤원형, 이양 등 외척세력의 매관매직 잘못을 충고.

   ○ 부친은 창녕현감 성희문이며, 증 이조판서 성희적에게 입양됨.

    ※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 위치

 

 

▢ 성영(1547년, 명종 2∼1623년, 광해군 15)

   ○ 자는 사암, 호는 우천과 태정, 시호는 양혜

   ○ 여주목사, 한성판윤, 경기도순찰사, 중추부지사, “청백리”에 녹선

   ○ 선조 후반기 소북 유영경 측근,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 등

      대북 세력에 의해 관직이 삭탈되고 문외출송 되었으며, 1616년 연일로 유배되고,

       1623년 유배지에서 사망함.

   ○ 부친은 중추부첨지사 성세평, 영의정 이양원의 사위

 

 

▢ 성하종(1573년, 선조 6∼1645년, 인조 23)

   ○ 자는 이술, 창흥군에 봉해짐, 조선중기의 무신

   ○ 길주목사, 형조좌랑, 강계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병자호란 발생 시

      전라우도수군절도사로 강화도에 갔으나 이미 강화도 함락되어 고의로 출동을

       늦췄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기도 함,

       1636년(인조 14) “청백리”에 녹선

   ○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북방의 방어에 공헌

   ○ 1645년 경성 임지에서 사망하자 조정에서 병조판서로 추증

   ○ 신도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撰하였음, 부친은 참판 성수익

 

 

▢ 성이성(1595년, 선조 28∼1664년, 현종 5)

   ○ 자는 여습, 호는 계서, 조선중기의 문신

   ○ 부교리, 수찬, 사간 등 주로 언관직 역임, 직언으로 주위 견제 고위관직 미등용,

      임금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암행어사로 3번이나 민정을 살피고 돌아옴,

       1695(효종 21)에 “청백리”에 녹선

   ○ 진주목사 등 4개 고을의 수령을 지냄.(강계·창원·담양 부사)

   ○ 1650년(효종 1) 사간으로『인조실록』편찬에 참여

   ○ 스승은 정경세, 강복성(김굉필, 이연경 학통 계승), 퇴계 이황학파

   ○ 사후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됨, 부친은 승지 성안의

 

※ 금준미주(金樽美酒)는 천인혈(千人血)이요.

    (금동이의 좋은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

    (옥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燭淚落時)는 민루락(民淚落)이요.

    (촛농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가성고처(歌聲高處)는 원성고(怨聲高)라.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다)

 

 

▢ 성석린(1338년, 고려 충숙 7∼1423년, 세종 5)

   ○ 자는 자수, 호는 독곡, 시호는 문경, 고려 말·조선초의 문신·서예가

   ○ 1380년 외구가 순천지방을 침입하자 원수(元帥)로 참전 승전함.

     양백연 옥사에 휘말려 함안으로 유배, 정당문학, 문하부평리, 대사헌 등을 역임,

     조선초 3대왕에 걸쳐 찬화, 원종, 익대, 좌명공신 등 4회나 공신에 책록됨.

   ○ 86세까지 장수하며, 3정승을 두루 역임함

   ○ 함흥차사로서 유일하게 살아왔으며, 태조와 태종 화해의 주역

   ○ 시에 능하였으며, 글씨는 특히 초서를 잘 썼고, 명필로 이름을 날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신도비를 써서 현재에 전함.

   ○ 초대 판한성부사(현 서울시장)를 역임함.

   ○ 양광도 관찰사 재직 시 흉년이 들자 “의창”을 설치 백성을 구휼함

   ○ 창원군에 봉해지며, 부친은 창성부원군(조선) 성여완

 

 

▢ 성석용(1352년, 공민왕 1∼1403년 태종 3)

   ○ 자는 자옥, 호는 회곡, 시호는 문숙, 조선전기의 문신

   ○ 강원·경기·전라도관찰사, 대사헌, 개성유후, 보문각대제학

   ○ 태조가 개국원종공신으로 녹권을 내려 줌.

   ○ 우왕 2년(1376년) 급제하여 여말에 밀직부사, 밀직제학을 지냄.

   ○ 태조 원년(1392년) 백형 석린과 함께 목은 이색, 양호당 우현보 당(黨)에 연좌

      되어 본향에 안치됨

   ○ 배위는 정부인 광산김씨 저작 김성리의 따님

   ○ 순박하고 참되며, 단정하고 아담하여 말이 적으며,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또 글씨를 잘 썼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 4. 26-

   ○ 부친은 창녕부원군(고려) 성여완, 영의정 성석린의 弟

 

 

▢ 성석인(?∼1414년, 태종 14)

   ○ 자는 자유, 호는 상곡, 시호는 정평, 조선전기의 문신

   ○ 고려말 우왕 3년(1377) 문과급제 지평·경연강독관 역임

   ○ 강원·충청도관찰사, 예문관 대제학, 호조·형조·예조판서

   ○ 초명은 석연(石珚)이었으나, 국왕의 휘를 피해 석인(石因)으로 개명.

   ○ 예조판서로 조정의 일을 의논 중에 졸도하여 순직함.

   ○ 문집에는《상곡집(桑谷集)》이 전함.

   ○ 부친은 창녕부원군 여완, 형은 석린, 석용

 

 

▢ 성봉조(1401년, 태종 1∼1474년, 성종 5)

   ○ 자는 효부, 유행, 시호는 양정, 조선전기의 문신

   ○ 충청도관찰사, 대사헌, 이조판서, 형조판서, 공조판서, 우찬성, 우의정,

      궤장을 하사 받음.

   ○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3등 좌리공신으로 창성부원군에 봉해짐.

   ○ 형조판서로서 사육신 사건을 다스림.

   ○ 세조(수양대군)와는 동서지간(부인이 세조 비 정희왕후의 동생)

   ○ 성종실록 졸기에 “사람됨이 후덕하고 고사를 잘 알았다”고 평가

   ○ 과거급제가 아닌 문음(음서)으로 관직에 나감.

   ○ 부친은 동지충추원사 엄, 조부는 석연(상곡공파 시조)

 

 

▢ 성준(1436년, 세종 8∼1504년, 연산군 10)

   ○ 자는 시좌, 시호는 명숙, 조선전기의 문신

   ○ 전라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 병조·이조판서, 3정승 역임

   ○ 영의정 재직 시 세자사(世子師)를 역임함.

   ○ 좌의정 재직 시 연산군 난정(亂政)의 시정을 위해 2명의 정승과 함께

      시폐 10조 주청했으나, 실효는 거두지 못함.

   ○ 갑자사화 때 두 아들과 함께 죽음.(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

   ○ 조부는 성석연, 부친은 참판 성순조.

 

 

▢ 성세창(1481년, 성종 12∼1548년, 명종 3)

   ○ 자는 번중, 호는 돈재, 조선전기의 문신

   ○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 이심원에 역학 수학

   ○ 갑자사화에 부친(성현)이 부관참시 당하자 그도 영광에 유배됨

   ○ 중종반정으로 사면되며, 1514년 사가독서를 함.

   ○ 1517년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이 현량과를 실시하려 하자 반대함.

   ○ 1519년 병으로 사직하여 기묘사화의 화를 피함

   ○ 1530년 김안로를 논척하다가 평해에 유배, 김안로가 유배 뒤 사사되자 풀려나

      이조·호조·예조·형조·공조 5판서, 대제학 역임

   ○ 1545(인종 1)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으나, 같은 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중추부의 한직으로 좌천된 후 황해도 장연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

   ○ 1567(선조 즉위) 신원됨.

   ○ 문장에 뛰어나 많은 외교문서를 작성, 글씨, 그림, 음률에 뛰어나 삼절이라 불림.

 ○ 글씨로는 군포의 동래정씨 정광보의 묘갈명이 있음.

   ○ 저서로는 《돈재집》, 《식료찬요》가 있음.

   ○ 고조부는 석연, 증조부는 엄, 조부는 염조, 부친은 예조판서 현.

 

 

▢ 성염조(1398년, 태조 7∼1450년, 세종 32)

   ○ 자는 자경, 시호는 공혜, 조선초기의 문신

   ○ 도승지, 이조참판, 경상도관찰사, 판한성부사, 지중추원사 역임, 글씨를 잘 썼음.

   ○ 사람됨이 관대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겉과 속이 한결 같으며,

      세종이 충성스럽고 순박하며 정직하다 칭찬 함.

 ○ 세금 거두는데 가혹, 재산 모으는데 힘써 많은 비방을 받음.

   ○ 조부는 석연(인), 부친은 엄, 자는 현

 

 

▢ 성임(1421년, 세종 3∼1484년 성종 15)

   ○ 자는 중경, 호는 일재, 안재, 시호는 문안, 조선초기의 문신

   ○ 1453년 계유정난 때 세조에 협조하여 “원종공신” 봉해짐.

   ○ 도승지, 전라도관찰사, 형조·이조·공조판서, 좌참찬 역임

   ○ 시문(율시에 능함)과 서예에 뛰어나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

   ○ “오례(五禮)” 개수, 고금의 이문(異聞)을 편집한 “태평통재”를 펴냄.

   ○ 증조부는 석연, 조부는 엄, 부친은 동지중추원사 염조

 

 

▢ 성혼(1535년, 중종 30∼1598년 선조 31)

   ○ 자는 호원, 호는 우계, 시호는 문간, 조선중기의 학자

   ○ 휴암 백인걸 제자, 성리학 연구, 부친 청송 성수침의 문하생

   ○ 사헌부 대사헌, 좌찬성 역임

   ○ 율곡과 “사단칠정이기설”을 논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 율곡의 “이기이원론”과

      퇴계의 “이기일원론”을 절충함.

   ○ 1584년 율곡이 죽자 출사, 서인의 영수가 됨, 동인의 공격을 받음

   ○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주장 사직하고 파주로 귀향

   ○ 1602년 북인에 의해 삭탈관작, 1633(인조) 때 복직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 됨,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율곡과 함께

     문묘에 배향됨, 기사환국으로 남인 집권하자 출향되었으나,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복향됨.

   ○ 조부는 세순, 부친은 현감(취임 거부) 수침

 

----------------------------------------------------

 

분류:창녕 성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 분류에 대해서는 창녕 성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위 분류

 

"창녕 성씨" 분류에 속하는 문서

다음은 이 분류에 속하는 문서 54개 가운데 54개입니다.

*

  • 고려충신 성사제 신도비
  • 성풍세효자비
  • 창녕 성씨

ㄱ

  • 금남 문절사

ㅅ

  • 성기영 (야구인)
  • 성기운
  • 성낙만
  • 성낙수
  • 성낙영 (1860년)
  • 성낙인
  • 성달생
  • 성담수
  • 성동일
  • 성두식
  • 성부 (여말선초)
  • 성사달
  • 성삼문
  • 성석린
  • 성선임
  • 성수경
  • 성수침
  • 성승
  • 성시경
  • 성양민
  • 성영
  • 성영훈
  • 성완종
  • 성운 (1497년)
  • 성운 (문신)
  • 성원경
  • 성원묵
  • 성유리
  • 성유미
  • 성윤문
  • 성윤환
  • 성의준
  • 성이성
  • 성일용
  • 성일환
  • 성장현
  • 성재기 (1933년)
  • 성재기 (조선)
  • 성재기 (활동가)
  • 성정수
  • 성주경
  • 성준 (조선)
  • 성진우
  • 성진환
  • 성하국
  • 성현
  • 성혼
  • 성희안
  • 스핀 (가수)

ㅇ

  • 의빈 성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분류:창녕_성씨&oldid=14433695"
분류:
  • 성 (성씨)
  • 창녕군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 댓글 0
  • 댓글쓰기
  • 답글쓰기
댓글 리스트
맨위로
  • 전체보기
  • PC화면
  • 카페앱
  • 서비스 약관
  • 청소년보호정책
  • 카페 이용 약관
  • 상거래피해구제신청
  • 개인정보처리방침
© AXZ Corp.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
  • 답글 제목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