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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성수침(成守琛)-문정공(文貞公) 청송(聽松) (1493-1564)

작성자운영자-성점경|작성시간16.03.08|조회수420 목록 댓글 0

문정공(文貞公) 청송(聽松) 성수침-11세(成守琛) (1493-1564) 창녕成씨 / 사대부 묘 (ㅅ~ㅇ)

2011.06.06. 19:05

부친 사숙공 성세순 / 아들 우계 성혼


성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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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청송서 필첩

성수침(成守琛, 1493년 ~ 1564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죽우당(竹雨堂)·파산청은(坡山淸隱)·우계한민(牛溪閒民)이다.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기묘사화 이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백악산(白岳山) 기슭에 '청송서실(聽松書室)'을 짓고 '대학','논어'를 읽으며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후 사헌부집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좌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성리학자 성혼의 아버지이며, 성삼문, 성담수, 성담년의 일족이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스승 정암 조광조

대사헌 세순(世純)의 아들로, 아우 수종(守琮)과 함께 정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문건(李文楗), 홍봉세(洪奉世) 등이 그의 동문이었다.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스승인 조광조와 그 문하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단념하였다.

관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한 성수침은 청송이라는 편액을 걸고 경서공부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으며, 1541년 후릉참봉의 벼슬을 사양하고 처가가 있는 경기도 파주 우계(牛溪)에서 모친을 봉양하였다. 1552년(명종 7),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예산현감(禮山縣監)·토산현감(兔山縣監)·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임명받았으나 이를 모두 사양하였고 1564년에는 사지(司紙)에 임명받았으나 이 또한 고령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가 죽었을 때 집이 빈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음을 알고 사간원의 상소로 나라에서 관과 미두, 역부 등을 지급하고 사헌부집의로 추증하였다. 사후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가 훗날 다시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물계(勿溪)의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면앙정 송순(宋純) 등과 친하게 지냈다.

저서로 《청송집》을 남겼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들 성혼을 비롯해 여러 석학들을 가르쳐 성리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정희맹(丁希孟), 장포 김행(金行), 최안(崔安)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 및 작품[편집]

가족관계[편집]

  • 할아버지 : 성충달(成忠達)
    • 아버지 : 성세순(成世純)
    • 어머니 : 김극니(金克怩)의 딸
      • 동생 : 성수종(成守琮)
      • 부인 : 파평윤씨
        • 장남 : 성혼(成渾)
          • 손자 : 성문영(成文泳)
          • 손자 : 성문준(成文濬)
          • 손녀 : 남궁명(南宮蓂)에게 출가
          • 손녀 : 윤황(尹煌)에게 출가
        • 장녀 : 민사도(閔思道)에게 출가

[편집]

이리도 태평성대

이리도 태평성대 저리도 태평성대
요지일월이요 순지건곤이로다
우리도 태평성대에 놀고 가려 하노라

기타[편집]

성수침의 글씨

그의 아들 우계 성혼은 그의 동문이기도 한 휴암 백인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 김행(金行)도 그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는 적성현감 청송 성수침의 묘소다. 부친은 이조참판을 지낸 사숙공 성세순, 조부는 현령 성충달, 증조부는 한성부윤을 지낸 성득식이다. 성수침의 6대조가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성여완이며, 5대조는 예조판서 정평공 상곡 성성연이고, 고조부가 성녕대군의 장인인 희정공 성억으로 성수침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했던 가문 사람이다.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강화부사를 지낸 김극니의 딸로 좌의정을 지낸 정정공 서석 김국광의 손녀이다. 성수침은 4형제 중 둘째로 창릉참봉 성수근, 성수종, 성수영과는 동기간이며 비록 높은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모두 문정공 정암 조광조 아래에서 수학하며 높은 학식으로 사림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부인은 파평윤씨로 판관 윤사원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는데 외동아들은 율곡 이이의 지기(知己)이며 율곡과 함께 높은 학식으로 사림에 존경을 받아 문묘에 배향된 문간공 우계 성혼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성수침은 어린시절 아우 성수종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공자의 풍체처럼 키가 크고 체구가 매우 우람하였고 성품은 늘 온화하고 담백하였다. 스승 조광조의 아낌을 받으며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27세에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처음에는 그도 스승 조광조의 도학사상이 대의명분과 요순(堯舜)의 이상정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스승의 처형 이후 현실정치의 벽을 느끼면서 자기 수양과 후진 양성에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다.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아들 우계 성혼을 비롯하여 김행, 곽희온, 안함, 박종문을 들 수 있으며 넓게는 신독재 김집, 수몽 정엽, 선원 김상용 등 성혼의 문인과 율곡 이이까지도 그의 문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높은 학문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계속 내렸지만 실제로 부임했던 적은 거의 없다. 필자가 첫 문장에 적성현감 성수침이라고 적었는데 적성은 그가 살았던 파주에서 가까운 곳이라 잠시 부임했을 뿐이었다. 필자가 살아생전 관직을 억지로 적으려고 적성현감이라고 적었던 것이고 실제로 성수침은 현감이 아니라 조선중기 사림의 맥을 이었던 큰 학자이다.

 

  조선 중기 성리학에서 성수침의 위치는 그가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면서 더욱 잘 알수 있게 된다. 조정에서는 그를 사헌부 집의에 추증하고 다시 좌의정에 추증하였으며 이렇다 할 관직생활을 하지 않은 그에게 문정(文貞)이라는 높은 의미의 시호를 내렸다. 또한 그의 *행장과 묘지명, 묘갈명, 묘갈음기를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포저 조익이 짓는다. 이름만으로도 조선 성리학을 대표할 만한 이들이 모두 그를 기리는데 참여하였던 것을 미루어 보아도 그가 학자로서 어느정도 신망이 있었는지 생각케 하는 대목이다. 묘소 앞에 있는 퇴계 이황이 지은 묘갈명에서 퇴계는 성수침을 " 혼탁한 물이 흐르던 맑은 물이 흐르던 간여하여 휩쓸리지 않았고 구름 속의 밝은 달은 때때로 보이다가 금새 다시 숨어버려 세상이 변하여도 은둔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고 표현하고 있다. 묘갈명을 지은 퇴계 자신 역시도 성수침처럼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에 성수침을 동경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묘소는 아들 성혼의 묘소 바로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부인 파평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 앞쪽으로 묘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놓여 있고 이렇다 할 관직생활은 하지 않아서인지 문인석은 없고 상석 좌우로 동자석만 한 쌍 놓여 있다. 묘표 전면에는 聽松成先生之墓라고 해서로 적혀 있고 후면에는 聽松成先生諱守琛之墓라고 적혀 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뒷면의 글씨가 처음에는 앞쪽에 있었지만 글씨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이름을 쓰고 싶지 않았는지 지금 앞면으로 보이는 면에 글씨를 다시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묘소 아래쪽 비각 안에는 나란히 두 기의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바라보는 방향에서 우측은 우계 성혼의 신도비이고 좌측의 것이 청송 성수침의 묘갈이다. 묘갈은 비각 안에 있어서 신도비 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서로 聽松成先生墓碣銘 이라고 제액(題額)이 되어 있어 묘갈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辛卯年(1651년)에 세워진 묘갈은 崇政大夫議政府右賛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李滉撰幷書 라고 적혀 있다. 비문은 동방의 주자로 칭송받는 대학자 문순공 퇴계 이황(1502-1571)이 직접 글을 짓고 글씨도 함께 썼으며 뒷면의 추기(追記)는 좌의정을 지낸 문효공 포저 조익(1579-1655)이 지었으며 글씨는 성수침의 외증손으로 대군사부를 지낸 동토 윤순거(1596-1668)가 묘갈을 세울 때 썼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이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율곡 이이에게 자신의 부친 성수침 행장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행장을 다시 퇴계 이황에게 가져가 퇴계가 묘갈명을 쓰게 되었다고 비석에는 적혀 있다.

 

  * 행장(行狀)은 죽은 사람의 문하생이나 동료가 죽은 사람의 가계와 관작, 행적등에 대해 서술한 문장이다. 행장은 이후 편찬되는 것들에 대한 사료로 쓰이며, 묘비명이나 묘갈명, 전기 등을 짓는데 자료로 제공되는 것이다. 필자도 고조부의 행장을 보았는데, 얼마 전까지도 동료나 문인들이 고인에 대한 행장을 쓰는 문화는 지속되었던 듯하다.

 

  * 묘갈명(墓碣銘)은 묘갈에 새겨진 죽은 사람에 관한 글로, 일반적으로 행장이 먼저 쓰여지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의 가계와 행적, 찬(撰)을 하는 사람의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이 담겨 있는 글이다. 이 글을 묘비에 새기면 묘비명이 되는 것이다. 

  * 묘지명(墓誌銘)은 묘갈과 내용이 비슷하나, 돌이나 도자기에 글을 새긴 후 무덤 속이나 무덤 앞에 묻어두는 것을 말한다. 세월이 지나서 묘비가 마모되어 보이지 않거나 묘비가 없어지는 경우를 대비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묻어두는 것이다.  

 

  * 묘갈음기(墓碣陰記)는 묘갈명처럼 묘갈에 새기는 것이나, 앞면에 새길 수 없는 내용이나 묘갈이 세워진 이후 생긴 일들에 대해 기록하는 추기(追記)를 묘갈 뒷면에 새기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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