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
[ 成
]
| 원본글 출처 | 성직의 비명(碑銘) |
|---|---|
| 저자 | 박세채(朴世采) |
| 이명 | 자 : 자교(子喬) 호 : 매변(梅邊), 정옹(鼎翁) 시호 : 정혜(靖惠) |
| 원전서지 | 국조인물고 권36 음사(蔭仕) |

현종 대왕(顯宗大王) 6년인 을사년(乙巳年, 1665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 창녕(昌寧) 성직(成)공은 수(壽) 80세에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리라 명하고 연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ㆍ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임명되었으며, 7년 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특전으로 인하여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라 명하고 이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임명되었다. 금상(今上, 숙종)께서 즉위하신 2년째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에 공의 나이는 90세이나 기력은 더욱 강녕하였다. 연신(筵臣, 경연(經筵)에 입시한 신하)의 청으로 인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올리라 명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3년 뒤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 왕후전(王后殿)에 잔치를 올리게 됨으로 해서 은전이 베풀어져 정헌 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올리라 명하였고, 좀 뒤 또 연신(筵臣)의 청으로 인해 명하여 숭정 대부(崇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다시 지중추부사로 임명하자, 드디어 상소(上疏)하여 사임하였으나 따뜻한 말로 이르며 윤허하지 않다가 여러 번 사임을 해서야 체직(遞職)이 되었다. 그런데 그해 겨울 12월 23일 파주(坡州)의 계상(溪上) 옛집에서 고종(考終)하니 수는 95세였다. 또 연신의 청으로 인해 명하여 조제(弔祭)와 부(賻) 등 여러 의전(儀典)이 내려졌고, 다음 해 정월에 고을 북쪽 녹문리(鹿門里)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그 후 6년째인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13년)에 정혜(靖惠)란 시호(諡號)가 내려지니 이에 노인을 우대하고 망자(亡者)를 높이는 성조(聖朝)의 도가 갖추어졌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자(字)는 자교(子喬)요, 호(號)를 매변(梅邊) 또는 정옹(鼎翁)이라 하였다. 국초(國初)의 휘 여완(汝完)은 부원군(府院君)이요,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다가 휘 세순(世純)에 이르러 대사헌(大司憲)에 시호는 사숙(思肅)이니, 이분이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수침(守琛)은 현감(縣監)을 지내고 증(贈) 우의정(右議政)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호는 청송(聽松)이다. 조부 휘 혼(渾)은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증(贈) 좌의정(左議政)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고(考) 휘 문준(文濬)은 현감을 지내고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이며 호는 창랑(滄浪)이다. 이 3대의 명성과 덕행은 한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비(妣)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주부(主簿) 조감(趙堪)의 딸이다. 만력(萬曆) 병술년(丙戌年, 1586년 선조 19년) 12월 27일에 공을 낳았는데, 돌이 못되어 말하고 걸어다니매 사람들은 특이하게 여겼다. 장성하기에 미쳐 가정에서 배워 시(詩)와 문(文)을 모두 잘하였는데, 이때 문간공(文簡公)이 영인(嶺人)들의 추후 무함(誣陷)으로 벼슬이 삭탈(削奪)되자 드디어 과거(科擧)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천계(天啓)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 창랑공(滄浪公)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하되 예가 있었다. 숭정(崇禎)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년)에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어 차례로 옮겨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가 되었으며, 외직에 나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었는데, 일을 보게 되자 아전은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은 깊이 사모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12년)에 조정에서 전국의 전토(田土)를 다시 측량(測量)하였는데, 이 고을의 전토는 본래 척박하여 부(賦)가 하(下)의 하에 해당하였다. 공은 몸소 전답(田畓) 사이를 다니며 그 전안(田案, 토지 대장)대로 따르려 하였다. 양안(量案, 측량한 대장)을 올리자 균전사(均田使)가 이를 물리쳤는데, 이에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 “높은 등급을 요구하는 것은 곧 백성들에게 영원히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인정(仁政)은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는 차라리 벼슬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니, 균전사가 깨달아 사과하였는데, 고을 백성들은 지금까지도 그 덕을 칭송하고 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14년)에 서쪽의 오랑캐가 깊숙이 들어오자 공은 난리가 일어났음을 듣고 고을 병사를 인솔하여 앞장서 달려갔는데, 좀 뒤 자그마한 일로 인하여 파직이 되었다. 오랜 뒤 안기 찰방(安奇察訪)에 임명되었는데, 모부인(母夫人) 상을 당하였으며, 복제(服制)를 마치자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임명되었다가 익위(翊衛)로 승진하였고,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27년)에 다시 나아가 양근 군수(楊根郡守)가 되었는데, 고을의 한 백성이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전임 군수를 심히 헐뜯자, 공은 부임하여 곧 매를 쳐죽였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인(仁)으로 이럴 수 있느냐?”고 하니, 공은 웃으며 “불인(不仁)을 제거함은 곧 인을 위해서이다.” 하였다. 방백(方伯)이 고과(考課)하여 청렴 성실하다고 올렸으며, 떠나게 되자 백성들이 돌을 세워 기록하려 하였는데, 토호(土豪)의 저지를 당하자 모두 분개(憤慨)해 말하기를, “돌은 세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나의 구비(口碑)야 없앨 수 있겠느냐?”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3년)에 안산 군수(安山郡守)에 임명되었는데, 마침 큰 송사(訟事)가 제기되어 을(乙)이 감사(監司)의 비호를 받았으나 내용이 정당치 못하였으므로, 공은 힘의 개입을 미워하여 곧 패소(敗訴)시켰다. 그러자 감사는 결국 공을 파직시켰는데, 곧 서용(敍用)이 되어 다시 익위(翊衛)에 임명되었다.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 사직서령(社稷署令)에 임명되었고,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옮겼다. 공은 아름다운 광채의 영향을 받아 천성이 온화하고 중후(重厚)하여 말은 무겁고 행동은 근신하였으며, 덕(德)이 기질(氣質)에 부합하였으므로 대하는 자 순선(諄善)한 군자(君子)임을 알았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되 힘을 다하여 일찍이 법도를 어기는 일이 없었고, 맏형의 성격이 엄하여 혹 면려하는 말이 있으면 공은 곧 순종하여 받들었으며,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는 가묘(家廟)에 예를 올렸고, 선대의 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받들기에 더욱 독실하였다. 그리고 물러 나와 책을 보고 글씨 쓰기를 늙도록 철폐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되 한결같은 성심(誠心)이었고 과오를 발견하면 곧 의(義)를 들어 책하였다.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경진(競進)을 깊이 치욕으로 여겼다.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가 늘 공을 애중(愛重)하여 임금께 아뢰어 특진시키려 하자, 공이 걱정스레 힘껏 사양하였으므로 일이 중지되었다. 벼슬에 임하여 소임을 다하여 인(仁)과 남을 이해하는 데 힘썼고, 백성들을 늘 환자처럼 대하였다. 그리고 손상 익하(損上益下)란 말 등으로 스스로를 격려하였고 명예와 덕색(德色)으로 백성을 대하려는 속된 관리(官吏)를 매우 미워하였으니, 그 마음에 지닌 바가 그러해서였는데, 유독 여우처럼 권세에 의지하려는 자를 조금도 용서하려 아니하다가 안산(安山)에서 파직이 되자 포저(浦渚) 조공(趙公, 조익(趙翼))은 글을 보내 위로하고 세도(世道)를 더욱 한스러워하며 ‘청약(淸約)함이 보통보다 뛰어나다’고 하였다. 평생 밭 한 뙈기도 경영치 않았고, 서울과 지방에 끝내 두어 칸 집 하나 없이 살았으며, 관복(冠服)이나 대화(帶靴)도 역시 친지의 도움을 받았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ㆍ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년) 연간에 간흉(奸凶)이 권세를 부리며 예화(禮禍, 예론(禮論)에 의한 화)를 크게 일으키자 공은 서울에 있을 마음이 없어 마침내 여러 아들에게 명하기를, “나는 품계(品階)도 높고 나이도 많아 미미한 분수에 이미 지나쳤으며 시사(時事) 또한 이러하니 고산(故山,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려 한다.” 하고 곧 결연히 돌아가니, 식자(識者)는 그 뜻을 알았다. 공의 부인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기묘 명현(己卯名賢) 김식(金湜)의 증손이요, 증(贈) 좌찬성(左贊成) 김비(金棐)의 딸로서 맑고 슬기로웠으나 일찍이 졸(卒)하였다. 계배(繼配)는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로서 판윤(判尹) 남궁 숙(南宮淑)의 증손이요, 사인(士人) 남궁 행(南宮荇)의 딸인데, 부덕(婦德)을 매우 갖추었으므로 창랑공(滄浪公, 성문준(成文濬))이 현량(賢良)하다고 칭찬하였다. 역시 먼저 졸하였는데, 공이 졸하게 되자 그 묘를 옮겨 따라서 장사를 지냈다. 4남 3녀를 낳으니 맏이 성희적(成熙績)은 사의(司議)요, 다음 성희주(成熙胄)는 군수(郡守)이며 다음 성희집(成熙緝)은 참봉(參奉)인데, 모두 출계(出系)하여 백형(伯兄)과 형의 후사(後嗣)가 되었으며, 다음은 성희명(成熙命)이다. 딸 맏이는 도사(都事) 배유화(裴幼華)에게, 다음은 호군(護軍) 홍이원(洪爾遠)에게, 다음은 진사(進士) 김용서(金龍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側室)로부터 1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성희하(成熙夏)요, 딸은 호군 서한민(徐漢民)과 양심(梁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은 거의 백여 인이 된다. 불녕(不佞) 세채(世采)가 일찍이 들으면 수고(壽考)의 뜻을 ≪시경(詩經)≫에 읊었고 ≪홍범(洪範, ≪서경(書經)≫의 편(篇) 이름)≫에 말하였으며 ≪예경(禮經)≫에 실려 있는데, 이로 인하여 선왕(先王)이 늘 양로(養老)를 나라의 대정(大政)으로 삼았으니 그 취지가 고상하였다. 다만 우리 역대(歷代)의 조정에 그러한 사람이 많다고 일컬었으며 근간에까지도 또 그러하였는데, 지금 가만히 미루어 논해보면 아마도 공에게 미치는 자가 없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90세 나이이면서도 보고 듣는 것이 어긋나지 않음이 그 하나요,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세록(世祿)을 일으킨 것이 그 둘이요, 분수를 헤아리고 때를 알고서 돌아와 고산(故山)에 누운 것이 그 셋이며, 선조의 유훈(遺訓)을 이어받아 욕되게 한 바가 없음이 그 넷이요, 아들이 많고 복경(福慶)이 몰려오는 것이 그 다섯이다. 이 많은 미덕(美德)을 모아 보면 양성(兩聖, 두 임금)의 포장(褒獎)이 특이하게 여긴 바 되어 벼슬은 높은 품계에 올랐고 지위는 경(卿)의 반열(班列)에 끼였으므로, 관직에 있는 이들과 지방에서 모두 부러워하였으니, 지난날 제공(諸公)이 소유한 바에 견주어 볼 때에 어찌 두어 자격만 더하고 만 것뿐이겠는가? 대체로 그 큰 업적과 성대한 사업은 마땅히 태사씨(太史氏, 사가(史家))에게 자세히 알리고, 명성을 금석(金石)에 드러내어 신도비(神道碑)에 새겨야만 거의 다함이 없이 전할 것이다. 공의 사손(嗣孫) 성지선(成至善)이 이 일을 위하여 나 세채(世采)가 선덕(先德)을 존중하고 사모하여 일찍이 공의 상하(床下)에 절을 올렸다는 사실을 대략 알고 여러 번 글을 보내 간절히 비명(碑銘)을 청하므로 의에 있어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삼가 서술하고,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국조(國朝)의 흥성에 따라 성씨(成氏)도 아울러 창대(昌大)하였네. 사숙공(思肅公)에 이르러 대대로 공경(公卿)으로 이어졌다네. 청송공(聽松公)은 출중한데다 일찍이 스승을 만났고, 그 형제로부터 은덕(隱德)은 어김이 없었다네. 오직 문간공(文簡公)은 당시의 동량(棟梁)이었네. 학문은 연원(淵源)이 있고 도(道)에는 활동과 응용이 있었다네. 창랑공(滄浪公)이 이어서 문(文)과 행(行)에 어긋남이 없었다네. 조심스레 이 백록(百祿)을 후사(後嗣)에게 넘기었네. 공은 태어나 특출하게 재지(才智)가 있어 부조(父祖)의 교훈을 숙습(熟習)하였다네. 인(仁)과 서(恕), 염(廉)과 약(約), 효우(孝友)와 순근(醇謹)이었다네. 나라에서나 가정에서 덕(德)은 아름다웠고 허물은 없었다네. 나이 90세가 되어 임금으로부터 총명(寵命)이 내려졌는데, 어찌해 주어졌는가? 품계로 보아 공을 높인 것이라네. 양성(兩聖)이 이어서 능히 시작과 끝이 한결 같았다네. 살아선 영화, 죽어선 슬픔을 그 누가 실추(失墜)시키랴? 이 돌에 시(詩)를 새겨 길이 전하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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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 성직
[네이버 지식백과]성직 [成
]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공(成公) 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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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직(㮨), 자는 자교(子喬)이며, 성은 창녕 성씨(昌寧成氏)이다. 사숙공(思肅公) 휘 세순(世純)의 현손이자 문정공(文貞公) 청송(聽松) 선생의 증손이며,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선생의 손자이다. 부친 휘 문준(文濬)은 호가 창랑(滄浪)이며,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주부(主簿) 감(堪)의 따님이자 충숙공(忠肅公) 백인걸(白仁傑)의 외손녀이다.
공은 만력 병술년(1586, 선조19) 12월 27일에 태어났다. 모친의 뱃속에서 거의 열두 달 만에 나왔으며, 태어난 지 한 돌도 되지 않아 말을 할 줄 알았으므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자 용모가 헌걸차고 성품이 순후하며 부모를 섬기고 형들에게 순종하여 공경하고 우애가 있었다. 그런 다음에 과거 공부하였고 문장과 글씨도 훌륭하였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소인배들이 우계 선생을 무고하여 벼슬을 추탈하자 다시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마흔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음보(蔭補)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규례에 따라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로 승진하였다가 봉화 현감(奉化縣監)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모친을 모시고 가서 봉양하였다. 하루는 호조에서 고을에 문서를 보내어 설면자(雪綿子)를 무리하게 요구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이 늘 비축해 둔 물건이 아닌데 이처럼 급하게 백성에게 요구한다면 백성은 장차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하고는 곧바로 예전에 마련해 놓은 자신의 집 누에고치를 대신 보내 주니, 백성이 그 은혜를 칭송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12)에 양전 사업(量田事業)을 시행하였는데, 공이 균전사(均田使)에게 말하기를,
“산중의 토지는 모두 5, 6등급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기어이 등급을 올리려고 한다면 그 폐해가 영원토록 미칠 것이니, 인정(仁政)은 토지를 정확하게 구획하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말한 맹자(孟子)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하니, 균전사가 강요하지 못하였다. 양전이 끝나자 노인들까지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병자호란 때 고을의 군사들을 이끌고 전선(戰線)으로 가다가 일선 부대까지 가지 못하고 체차되었다. 이에 공은 모친을 모시고 태백산(太白山) 아래로 피란을 갔다. 난이 진정된 뒤에도 영남에 그대로 거주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으로 복직하였다.
임오년(1642)에 모친상을 당하자 관을 싣고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백씨(伯氏)와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나고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세자익위사 사어(世子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다가 익위(翊衛)로 승진하였다. 또다시 양근 군수(楊根郡守)로 나갔는데, 관찰사가 청렴하고 부지런한 것으로 고과 성적을 보고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 안산 군수(安山郡守)로 있을 때에 송사(訟事)를 다루며 안찰사의 뜻을 맞추지 못해 파출되었는데, 조 문효공(趙文孝公)이 편지를 보내 위로하기를,
“전원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니 그대의 처지에서야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다만, 세상을 위해서 개탄스러울 뿐이다.”하였다. 얼마 후 익위(翊衛)로 다시 서용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하고 세자익위사가 없어지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와 여러 해를 보냈다.
임인년(1662, 현종3)에 사직서 영(社稷署令)에 제수되었고, 갑진년(1664)에 선공감 첨정(繕工監僉正)으로 옮겼으며, 을사년(1665)에 80세의 나이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세 차례에 걸쳐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경술년(1670) 겨울에 돈녕부 도정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신해년(1671)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받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지돈녕부사로 승진하자 휴가를 받아 조상에 분황(焚黃)하였다.
을묘년(1675, 숙종1) 봄에 경연관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성직(成㮨)은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의 친손자이고 나이 또한 90세가 되었으니 특별한 은전을 베풀어 주어야 하겠습니다.”하니, 상이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고 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으며, 돌아가신 부모를 추은(推恩)하였다. 이에 공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는데 걸음걸이가 전혀 휘청거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보기 드문 일이라고 전하였다.
얼마 후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위가 높고 오래 살았으니 내 분수에 너무 지나친 일이다. 이제는 조상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내 목숨을 마쳐야겠다.”하고는 병진년(1676)에 마침내 파산(坡山)으로 돌아갔다. 정사년(1677) 여름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무오년(1678) 봄에 또다시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자 경연관이 지난 을묘년(1675, 숙종1) 때처럼 또 상에게 건의하여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시골로 은퇴한 지 4, 5년이 되도록 봉록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계속 지급하였으니, 이 또한 공에 대한 특별한 예우였다. 이 일을 두고 절구(絶句) 1수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내 나이 이제 백 살이 되어 가니 / 百歲今將至
조정에서 녹봉을 그대로 내리고 / 朝廷記祿科
한가로이 수역에 노닐고 있으니 / 安閑遊壽域
각별히 많은 성은 내리셨도다 / 偏感聖恩多이 시는 바로 공의 절필시(絶筆詩)가 되었다.
경신년(1680) 여름에 다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자 다시 정장(呈狀)을 올려 체차되었다. 이해 11월 23일에 계상(溪上)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95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예조 판서가 상주하기를,
“음보(蔭補) 출신으로 숭반(崇班)에 오른 사람에게는 조제(弔祭)를 거행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만, 성직(成㮨)은 여러 차례 판부사(判府事)에 의망된 사람이니 은전을 내려야 마땅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예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사람의 경우는 나이가 100세에 가깝고 게다가 1품에까지 오른 만큼 조제와 부의(賻儀) 등을 특별히 거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담당 관청에서 부의와 조제를 예법대로 거행하였다. 이듬해 신유년(1681) 1월 모일에 파주(坡州)의 치소 북쪽 녹문리(鹿門里) 장포(長浦) 가 부묘(負卯)의 언덕에 안장하였는데, 서쪽으로 향양리(向陽里)의 문간공(文簡公) 묘소와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공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꾸밈이 없으며, 일찍이 거칠게 말하거나 조급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는 효우(孝友)와 근검(勤儉)을 실천하였으며 책을 좋아하고 행실을 조심하여 늙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였으며, 어진 마음이 집에서 기르는 닭과 돼지에까지 미쳐서 그 울음소리만 들어도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관직 생활에서는 청렴과 신중을 기본 신조로 삼았다. 예를 들어 공자(孔子) 사당에 석전(釋奠)을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몸소 그 제사에 올릴 곡식을 깨끗이 장만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 지내는 망궐례(望闕禮) 때에도 또한 몸소 향을 피웠다.
봉화에서 돌아올 때 그전에 얻어 놓은 호피(虎皮) 하나가 있었는데, 공부(公簿)에다 귀속시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모피(毛皮) 가운데 돈이 될 수 있는 물건이니 차지해서는 안 된다.”하였다. 벼슬살이 50년 동안 중외(中外)의 관직 20여 자리를 역임하면서도 몇 칸짜리 집이나 한 뙈기의 땅도 장만한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을 독려하기를,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청렴결백한 전통을 더럽히지 않고 나라에 보답하려는 나의 조그마한 정성을 다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하였다.
만년에 건강하게 장수를 누려 눈과 귀가 흐려지지 않았다. 때로는 시를 지어
자신의 감정을 달래 보기도 하고, 때로는 지팡이를 꽂아 놓고 채마밭을 가꾸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큰 글씨를 쓸 때 필력이 더욱
힘이 있어 인가(人家)에서 병풍과 족자를 많이 받아 갔다. 서울에 있을 때 참의 이유겸(李有謙)과 박정호(朴正濠)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동경회(同庚會)를 만들었는데, 여러 현사(賢士)들이 수창시(酬唱詩)를 지어 낙사(洛社)에 견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의 선비들이 각자 잔치 비용을 대고 술잔을 들어
축수(祝壽)를 올리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자신의 호를 매변정옹(梅邊鼎翁)이라 불렀으며, 시집(詩集) 약간 권이 집안에
사본(寫本)으로 보관되어 있다.
공의 첫째 부인 청풍 김씨(淸風金氏)는 대사성 식(湜)의 증손이자 좌찬성에 추증된 비(棐)의 따님으로,
현숙하고 명철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자식이 없이 별세하여 적성현(積城縣) 백운리(白雲里)에 안장되었다. 둘째 부인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는
행(荇)의 따님이자 부사 제(悌)의 손녀이다. 이분 또한 경인년(1650, 효종1) 3월 9일에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향년 60세로서, 공과
한 무덤에 안장되었다. 나중에 두 부인이 다 같이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남궁 부인은 부녀자의 도리를 매우 잘 갖추고 있어
창랑공(滄浪公)이 언제나 새 며느리의 덕이 가문을 창성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분은 아들 넷에 딸 셋을 낳았다.
첫째 아들
희적(熙績)은 관직이 사의(司議)에 그쳤고, 둘째 희주(熙胄)는 군수인데, 공의 명으로 세부(世父)
첨정공의 양자가 되었다. 셋째 희집(熙緝) 또한 중부(仲父)
별좌공의 양자가 되었으며, 막내아들은 희명(熙命)이다. 첫째 딸은 도사(都事) 배유화(裵幼華)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호군(護軍) 홍이원(洪爾遠)에게 시집갔다. 막내는 진사 김용서(金龍瑞)에게 시집갔는데 절행(節行)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공은 측실
소생으로 아들 희하(熙夏)와 두 딸을 두었는데, 사위는 서한민(徐漢民)과 양심(梁深)이다.
손자는 지선(至善), 지화(至和),
지행(至行), 지민(至敏), 지헌(至憲), 지태(至泰), 지중(至重), 지후(至厚), 지인(至仁), 지건(至健), 지손(至遜), 지순(至順),
지신(至信), 지우(至愚)이다. 지선은 공의 초상 때 맏상제 노릇을 하였고,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에 올랐다. 지행과 지민은 모두
참봉이고, 지중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증손은 효석(孝錫), 순석(順錫), 수석(壽錫), 현석(顯錫), 영석(永錫), 인석(仁錫),
의석(義錫)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그 가운데 효석은 진사로, 공이 살아 있을 때 아들을 낳아 현손을 안겨 주었다. 내외 손자 증손 모두 합쳐
90여 명이라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희하(熙夏) 아들 지정(至亭)입니다.(내용추가)
공의 외제(外弟)인데, 항상 말하기를,
희주씨가 지선을 시켜 공의 행장을 짓게 하고 나에게 무덤에 넣을 묘지(墓誌)를 쓰라고 하명하였다.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어짊은 선행의 으뜸이요 / 仁是善長
장수는 복의 으뜸이라 / 壽乃福首
그래서 성인께서 말씀하기를 / 先聖有言
어질면 반드시 장수한다네 / 仁者必壽
질박함은 어짊에 가깝고 / 木訥資近
적은 욕심 마음을 보존하며 / 寡慾心存
마음 집중하고 조화 이루어 / 守一抱和
하늘이 내린 수명 다하니 / 終我天年
사람들은 장수했다 칭송하지만 / 人貴公壽
나는야 어진 행실 받든다네 / 我歆公仁
살아서는 삼달을 이루고 / 生爲三達
죽어서는 남은 복을 내리니 / 歿有餘祥
자손들이 많이많이 불어나 / 振振子姓
번성하고 훌륭히 되었도다 / 式昌以臧
훌륭한 이 산소 자리를 / 有樂斯丘
지인(至人)에게 점지하여 / 格人所徵
의관을 여기 묻으니 / 衣冠是藏
천년토록 길이 편안하리라 / 千載永寧
[주D-001]우계
…… 추탈하자 : 경상도 유생 문경호(文景虎) 등이 기축옥사(己丑獄事)
때에 성혼(成渾)이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게 했다고 상소하여 관직이 추탈되도록 한 사건을 가리킨다.
[주D-002]설면자(雪綿子) : 누에고치를 삶아서 늘여 만든 솜으로 ‘풀솜’이라고도 한다.
[주D-003]조
문효공(趙文孝公) : 문효는 조익(趙翼:1579~1655)의
시호이다.
[주D-004]수역(壽域) : 사람들마다 천수(天壽)를 누리는 태평성대를 이른다.
[주D-005]숭반(崇班) :
1품의 관직을 가리킨다.
[주D-006]낙사(洛社) : 낙양(洛陽)에서 결성한 원로들의 모임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당나라 때에 74세인 백거이(白居易)의
주도로 89세인 호고(胡杲), 86세인 길민(吉旼), 84세인 정거(鄭據), 82세인 유정(劉貞), 82세인 노진(盧眞), 74세인 장혼(張渾)
등 7명과 70세가 아직 안 된 적겸모(狄兼謨)와 노정(盧貞)을 합쳐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후대에 이를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둘째는 송나라 때에 77세인 낙양 유수(洛陽留守) 문언박(文彦博)이 79세인 부필(富弼), 77세인 석여언(席汝言), 76세인 왕상공(王尙恭),
75세인 조병(趙丙), 75세인 유궤(劉几), 75세인 풍행기(馮行己), 73세인 초건중(楚建中), 72세인 왕신언(王愼言), 71세인
왕공신(王拱辰), 70세인 장문(張問), 70세인 장도(張燾), 64세인 사마광(司馬光) 등과 함께 결성한 모임으로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라고 한다.
[주D-007]세부(世父) 첨정공 :
세부는 백부(伯父)와 같다. 성직의 백형 성력(成櫟)을
가리킨다.
[주D-008]중부(仲父) 별좌공 : 성직의 중형 성익(成杙)을 가리킨다.
[주D-009]외제(外弟) :
여기서는 고종사촌 동생을 일컫는다.
[주D-010]삼달(三達) : 세상에서 공통적으로 높이 받드는 세 가지 덕목으로, 작위, 나이, 덕행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