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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왕손이란 남씨시조 기원(起源)에 관한 고찰(1)

작성자대쪽|작성시간16.07.17|조회수340 목록 댓글 0

 

신라왕손이란 남씨 시조 기원(起源)에 관한 고찰(考察)

 

                            남구만 공이 그린 남씨 시조 남민의 초상화

 

1. 연구 동기

2. 계유보(癸酉譜)상의 문제점

 

남씨 최초의 족보 계유보(癸酉譜) 발간시의 시대적인 배경

시조의 기원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영양 김씨 와 평해 구씨

남구만(南九萬) 공이 계유보 서문(序文)에서부터 먼저 문제 제기

서기 755년의 당시의 역사적 정세 고찰

중국의 김씨 성(姓)의 고찰

안록산의 반란군에 항전한 남씨 성(姓)의 <남제운> 장수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면 조류를 따라 남방지역으로 남하

 

3. 남씨 시조(南敏)는 김알지 계통의 경덕왕 후예로부터 생긴 동원이성(同源異姓)

사기로 신라 김씨 왕조사

 국정문란이 신라 멸망 주요 원인

대보공 김알지(金閼智)후손 신라김씨(경주김씨) 소개

경주 김씨 대동보에 표기되어있는 신라김씨의 분관록(分寬錄)

신라 멸망 전후 탄생한 새로운 성씨들

김알지 후손의 동원이성(同源異姓) 성씨들(9)

 

4.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형산강의 전설과 왕룡사원의 목상 

  형제산과 형산강(兄山江) 전설  

  ☞ 왕룡사원내 경순왕과 태자 김충의 목조 문무인상                                            

 

5. 맺는 말

 

첨부 : 용량관계로 함께 싣지 못하고 별첨

       #1 신라 왕계표 #2 신라김씨 분관록(分寬錄) #3 사관(賜寬)및 사성(賜姓)일람

       #4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형산강의 전설과 왕룡사원의 목상  

          #5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춘원 이광수의 마의태자 소설 소개  

 

 

 

 

1. 연구 동기(動機)

 

1995년경 부산 양정2동 225-1번지을 지나다 [한국 족보 도서관]이 있어 찾아 보았다.

그곳에는 박병재(T:051-863-8244)라는 분이 사재를 털어 족보를 수집하고 보급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남씨는 본래 김알지 계통의 신라 왕족의 김씨였는데, 남씨로 사성(賜姓)

된 성씨라고 하면서 유인물 두장을 받았는데, 당시로서는 너무나 엉뚱한 얘기로 여겨

오랫동안 잊고 지내 왔다.

 

그 뒤로 1693년(숙종 19)에 남씨 최초로 발행된 계유보(癸酉譜)서문에 남구만(南九萬)

공이 시조(始祖)의 유래를 전하면서도 많은 의문을 표하였고, 또한 북한 주민이 동해로

탈출해 오면서 표류하다 일본으로 도착하는 기사를 보면서 동해의 조류(潮流)는 남쪽

인데 왜 우리 시조는 오히려 북상하게 되었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에서 검색하면서 자료를 수집하다보니 1991년 1월 발행한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동보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는 신라김씨 분관록 동원이성(同源異姓)란에

<영양남씨 시조 남민(敏)>은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경덕왕의 후예(後裔)>라고 명확히 나

와 있지 않는가?

 

이에 본인이 운영하는 <의령남씨 의산위파 화수회> 카페와 <부산 남씨 종친회> 카페에

올렸더니, 대구 남씨 종친회 측에서 이 사실을 남씨들이 알게 되면 혼란만 부추겨 단합을

저해한다고 강하게 비판해와 올렸던 글을 삭제 해 버렸던 일도 있다.

 

남씨 시조가 김알지(金閼智)계통의 <신라김씨>로부터 나왔다는 기록이 알려지게 되면,

당사자인 남씨 후손들은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며,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한마디로

일축하고 말 일이다.

그러나 신라 김씨(김알지 계)는 인구수가 제일 많은 성씨인데, 그분들의 각 파에서 발행

하는 대동보 분관록에서는, 신라 왕족인 김씨 자신들의 성씨에서 <영양남씨>로 개성(改姓)

되어 나간 성씨로 엄연히 기록되어 있고, 인터넷에서 <신라김씨 분관록>이라고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는가?

 

이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경주에 포항으로 가는 형산강의 전설과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잇는 용왕사원이란 절에서는 200년 전부터 바로 경순왕과 태자 김충(金忠)의 목상을 만들어 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지금에 와서 결론을 내리기 어렵겠지만, 우리 남씨가 중국 외래성이 아닌 신라 왕족의 성씨라면 굳이 나쁠 것도 없는데, 김씨들은 대부분 알고 있고, 당사자인 남씨들은 모르거나 애써 못 본 체 하여서야 되겠는가? 생각되어 다시 용기를 내어 이글을 싣는다.

 

다시 한번 먼저 많은 이해를 하시고 읽어 주시길 바란다.

 

2. 남씨 최초의 족보 계유보(癸酉譜)상의 의문점

 

                                ▲ 남씨 최초의 족보 계유보(1693년)의 남구만공이 쓴 서문(序文)

 

남씨 최초의 족보 계유보(癸酉譜) 발간시의 시대적인 배경

 

조선 초기 양반은 1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선중기 양반 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평민들도 각 씨족별로 구전되어 자료에 의해 족보를 만들기 시작 하였고, 토착민들도 지역별 연결에 따라 동일 씨족으로 족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족보는 숙종(재위: 1675-1720)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는 족보가 없으면 사회적인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비록 양반이라도 족보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게 되고, 또 양반에게는 군역(軍役)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는데, 족보가 없으면 군역을 치러야 했었다.

그래서 군역을 피하기 위하여 심지어 상민들은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남의 족보에 끼어드는 폐습도 생기고, 본관은 하나인데 파(派)가 몇 개씩 갈라지고 그 파가 족보를 따로 만들어, 당파 싸움이 심해지면서 족속의 단결을 위해 족보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져 갔다.

 

이와 같이 숙종 대(代)는 족보의 전성기였다.

거의 대부분의 성씨가 이때에 만들어졌으니, 조선왕조 이전의 기록은 대부분 믿을 없는 것이 통례가 되어 있다.

남씨 족보 역시 이 범주를 벗어 날수 없다.

영양, 안동, 의령, 고성 중에서 그 당시 가장 번영을 누리고 있던 의령이 가장 먼저 족보편찬을 먼저 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697년(숙종 23년)8월에 발행된 의령 남씨 계유보가 남씨 최초로 발행한 정확한 족보로서 제일 오래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성행하던 시대는 의령남씨 계유보 발행시(1693년)와 비슷한 시기인 숙종(1675~1720년) 때부터 크게 유행하여 대부분의 성씨가 이때에 족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남구만(南九萬)공이 계유보 서문(序文)에서부터 먼저 문제 제기

 

계유보는 1693년(숙종 19) 계유(癸酉)년에 남익훈(南益熏)이 함흥에서 최초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도 족보의 서문이 있었을 텐데, 왜 4년 후에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공이

발간경위 설명과 인사 정도가 아니고, 남씨의 유래를 위주로 쓴 머리글(序文)을 丁丑(1697)년에 다시 써서 대체하여야 했는가? 하는 의문점이 나온다.

 

이는 필시 그 당시에 남씨 시조의 유래에 대한 논란이 많아,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공이 직접 나서서 시조 공 김충(金忠)에 대해

“천보년대(天寶年代)에 당 현종(玄宗)이 촉(蜀)에 행차할 때 시종한 신하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에 표착하였다는 기록은 당서(唐書)에나 동사(東史)에 하나도 없고, 안렴(按廉)이란 직명도 또한 천보년대에는 없었으니, 이것이 모두 후세 사람들이 말로만 서로 전해서 들은 대로 기록하였으니, 고증(考證)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의문시되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3파(영양,의령,고성)로 분파되기 이전의 500여년 동안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버리고, 시조 영의공 남민(敏)의 신라 표착 사실도 당나라 서적 또는 동사(東史, 조선 역사)에도 그 기록이 없고, 후세 사람들의 구전(口傳)과 수문(隨聞)으로 기록 하였기 때문에, 3파로 분파된 1세조 이상의 대(代)는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부정확하고, 1세조 이하는 정확한 기록이라 믿을 수 있다.”라고 구보(舊譜)에서 전하여 오던 얘기를 쓸 수 밖에 없는 사정을 토로 하면서 일단락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 755년의 당시의 역사적 정세 고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14年

 

서기 660년 신라 무열왕(武烈王) 7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 문무왕(文武王) 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켜 형식상으로는 삼국통일을 완성하였으나,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땅은 물론 신라에까지 계림도독부(溪林都督府)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도독(溪林都督)으로 삼았다.

신라는 이에 맞서 676년에는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 부대가 서해침입해오자 이를 격파하여 제해권(制海權)을 쥐게되자, 당나라 도독부도 겁을 집어 먹고 철수하자 비로소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통일신라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시조 영의공(英毅公)의 신라(新羅) 유린(有隣)에 표도(漂到) 한 것이 755년 경덕왕(景德王) 14년이니, 이시기의 신라는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려 극성기(極盛期)에 있을 때다.

경덕왕(景德王) 14년의 사기(史記)를 보면 4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와있고, 경주 분황사(芬皇寺)의 약사여래(藥師如來) 동상(銅像)을 주조(鑄造)하였고, 효자(孝子) 동덕(同德)에게 상을 준 기록이 나와 있을 뿐, 중국사신의 표도(漂到)해온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당천보(唐天寶) 14년의 당사(唐史)

 

서기 755년 당천보(唐天寶) 14년이면, 당사(唐史)의 기록은 거의 전부가 안록산(安祿山)의 반란(反亂)에 관한 기록(記錄)으로 매워져 있다.

이해 11월에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글씨체로 유명한 안진경(顔眞卿)이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12월 달에는 고선지(高仙芝)를 부원사(副元師)로 삼아 난(亂)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안록산은 12월에는 이미 동경(東京)을 함락 시켜버렸다.

황제 현종(玄宗)은 서촉(西蜀)으로 피난(避亂)하고 756년 천보(天寶)15년 6월에는 양국충(楊國忠) 및 그의 여동생 천하일색을 자랑하던 양귀비(楊貴妃)도 사사(賜死)되었다.

황제 현종(玄宗)은 다시 마외(馬嵬) 로 피난하였다.

서기 757년에는 숙종(肅宗)이 등극하고 이해 1월에 안경서(安慶緖)가 자기 아버지인 안록산(安祿山)을 죽이고, 9월에는 곽자의(郭子儀)가 서경(西京)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758년에는 다시 사사명(史思明)이 반란(反亂)을 일으켜 759년 건원(乾元) 2년에는 사사명(史思明)이 안경서(安慶緖)를 죽이고 연왕(燕王)으로 자칭(自稱)하게 되었다.

서기 760년 11월에는 다시 유전(劉展)이 반란을 일으켜 다음해 1월에 유전(劉展)이 잡혀 사형당하고, 3월에는 사조의(史朝義) 사사명(史思明)도 사형 당하였고, 서기 762년에는 황제(皇帝) 숙종(肅宗)이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서기 755년 당천보(唐天寶) 14년 부터 불과 6년사이에 황제(皇帝)가 두번이나 바뀌고 해마다 반란(反亂)이 계속되어, 당(唐)나라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고, 김충(金忠)에 관한 기록이라던지 일본에 사신을 보낸 기록 등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일설에는 영의공(英毅公)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동국(東國)에 왔다고 하나 이 설도 타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동국에 왔다면 이듬해인 경덕왕(景德王) 15년으로

정사(正史)에 어떤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없으니, 사학적(史學的)인 연구로 이를 규명(糾明)해 나갈 도리(道理)가 없다.

참조 : 영양 남씨 카페지기 남경칠씨의 카페 글

 

중국의 김씨 성(姓) 고찰

 

오늘날 중국의 성씨는 56개 종족에 12,000여개의 성씨가 있을 것이라고 그것도 추정된다고 하니, 가히 13억 인구답게 성씨 백화점이라고 할 만하다.

혹자는 중국에는 김씨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국에서는 김(金)씨가 없는 것은 아니고, 표기는 같이하되 부를 때에 <금씨>라고 한다.

따라서 본래 남씨의 시조로 일컫는 김충(金忠)은 <금충>이라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김씨는 신라시대에는 왕손의 성씨로 귀한 성씨였으나, 오늘날에는 약 22%로서 5명중 1명일 정도로 많다.

중국에서는 이(李)씨가 제일 많고, 다음 왕(王)씨, 장(張)씨 순으로 금씨는 64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보아 당나라 시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금씨는 그리 흔한 성씨가 아닌 것만은 사실이다.

김충의 고향이라고 하는 중국의 여남에 남씨 대종회에서 김충의 남씨 기원사적을 세울 적에, 그곳에 김씨들이 살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안록산의 반란군에 항전한 남씨 성(姓)의 <남제운> 장수의 활약상

 

참고로 <알기 쉽게 이야기로 꾸민 중국사> 390P에 당시에 중국에는 남씨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천보(唐天寶) 14년 11월에 평노절도사(平盧節度使)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동경(東京)을 함락 시켜버렸다.

황제(皇帝) 현종(玄宗)은 서촉(西蜀)으로 피난(避亂)하고, 756년 천보(天寶)15년에는 다시 마외(馬嵬) 로 피난하였다.

 

이 시기에 특기 할 만한 일은 6천명의 군사로 수양성을 지키고 있던 허원은 장순과 함께 반란군의 윤자기군 13만명을 상대로 끝까지 항전하는데, <남제운>이란 남씨 장수의 맹활약으로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차례나 적을 격퇴시켰으나, 중과부족으로 끝내 함락되어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 항전의 여파로 반군들의 힘이 많이 소모되어 3일후에 하남절도사 장호가 거느린 지원병이 윤자기 일당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라에는 없었겠지만, 그 당시 중국에는 이미 남씨가 존재해 있었고, 오늘날에도 100위 이내에는 들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조공의 표류시 조류(潮流)는 남방지역으로 표착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다 태풍으로 풍랑을 만나 표류(漂流)하게 되면 조류(潮流)를 따라 더 남방지역으로 표류하게 되는데, 왜 거슬러 올라와 영덕 축산항에 표착하게 되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북한을 탈출하기위하여 어선을 타고 동해바다에서 표류하다 일본에 표착하게 된 3건의 사례를 상기하게 된다.

 

1987년 1월 15일 새벽1시 북한의 청진의대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해 오던 김만철(金萬鐵, 당시 46세)씨 가족 11명이 북한의 청진항에서 청진호(50톤)를 타고 북한을 탈출하였으나, 이튿날인 16일 대화퇴(大和堆) 부근에서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다, 20일 하오 6시 경 일본 후쿠이(福井) 외항에 예인되어 남한에 입국하는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해 당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이로부터 20년 후인 2007년 6월2일에도 일가 4명이 목숨을 걸고 역시 청진항을 떠나 900km를 항해한 끝에 일본 아오모리현 후쿠우라(深浦)항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2011년 9월 13일에는 일가친척 9명이 8일 북한의 함경북도 어대진항을 출발하여 나오다 표류하다 일본 해상 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되어 인근 가나지와(金澤)항에 예인되었다.

 

이와 같이 동해상에서의 조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다 표류하게 되면, 대만이나 필리핀 쪽으로 도착 될 것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시조의 기원이 동일하거나 유사한 영양김씨 와 평해구씨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씨의 시조가 중국인을 숭상하는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중국과 연관하여 있는 성씨가 240개 성씨로 우리나라 성씨의 53%에 달한다고 하니, 조선 땅에 사는 사람들이 주체의식을 갖지 못하고, 왜 그렇게 중국 사람을 숭상하였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영양김씨 시조 김충(金忠)의 유래

 

원조 김충(忠)은 당나라 하남성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형주자사(刑州刺使)를 지냈다.

 

755년(신라 경덕왕 14, 당나라 현종)에 안염사(安廉使)가 되어 당(唐)의 사신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오는 도중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신라 유린지(有隣地,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에 도착하게 되었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이를 알고 당나라에 통보하였으나, 당나라 천자가 "김충이 원하는 대로 해주라"고 하자 경덕왕이 영양군(지금의 경북 영양군)에 봉하고 여남(汝南)에서 왔다며(일설은 남쪽에서 왔다고 해서) 성을 남(南)씨로, 민첩하다하며 이름을 민(敏)으로 해서 하사함으로써 남(南)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함께 일본에 다녀오던 그의 첫째 아들인 김석중(錫中)은 성을 받기 전에 출생하였으므로 본래의 성을 따라 영양 김씨로 하였으며, 후에 출생한 자식들은 성를 남씨로 하였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남씨는 성은 틀리나 원조는 김충으로 같다.

그러나 그 이후 몇대에 걸친 후대의 기록이 없으므로 후손인 김충황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영양으로 하였다.

 

남민이 최초로 살았다는 곳이 축산(丑山)이라 하고, 축산에는 남민과 그의 후손들이 살았다는 <김이부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아직도 동네 사람들에게 전해내려오고 있다.

 

집성촌(集姓村) : 경북 영천군 화산면 연계동, 경북 봉화군 봉성면 외삼리

본관지(本貫地) : 경북 영양(英陽)

인구(人口) : 1985년도 6,850명, 2000년도 7,462명

 

평해구씨(平海丘氏)

 

평해구씨(平海丘氏)는 중국 당나라 장군인 구대림(丘大林)을 시조로 삼고 있다.

구대림은 663년(문무왕 3)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경상북도 평해의 월송정(月松亭) 부근에 표착(漂着)하여 해안의 남쪽 언덕 미포(美浦)에 터를 잡고 세거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구대림 이후 700여 년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신에 책훈(策勳)되고 민부전서(民部典書)에 오른 구선혁(丘宣赫)을 1세조(一世祖)로 삼고, 구대림이 처음 정착한 평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분적종 및 분파

교도공파(敎導公派), 영양파(英陽派), 서천파(舒川派), 철원파(鐵原派)가 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평해구씨는 827가구 총 2,683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3. 남씨 시조(南敏)는 김알지 계통의 경덕왕 후예로부터 생긴 동원이성(同源異姓)

 

  史記로 본  신라김씨 왕조사

 

 20대  경덕왕(景德王) : 신라왕 35대

 

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은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비는 의충의 딸 만월부인 김씨. 효성왕이 후사가 없으므로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

• - 원년에 일본국에서 사신이 왔으나 받지 않았고, 12년에도 왔다가 되돌아갔다.

• - 신라 왕실의 전제왕권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로 행정구역 개편, 직제개편 등을 단행하였다.

• (9주 5소경 117군 293현)

• - 751년 김대성이 다보탑,석가탑을 증건.

• - 759년 의학을 전공하는 학자를 선임하고 율령박사 2인을 두었다.

• - 성덕왕 신종(일명, 에밀레종)을 주조

• - 24년 6월 왕이 돌아가시니 지금의 내남면 사적 제23호 왕릉이다.

 

 21대  혜공왕(惠恭王) : 신라왕 36대 

 

휘는 건운(乾運), 경덕왕의 왕자, 모는 만월부인 비는 신보왕후 김씨, 차비는 김씨장군의 딸, 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앙후가 섭정하였는데 나라가 몹시 어지러웠다.

 

• 3년에 일길찬 대공형제가 모반하다가 토평(討平)되었다.  6년에는 대아찬 김융이 모반하다가 복주(伏誅)되었다.  11년에도 두번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 오묘(五廟)를 세워 미추왕을 비롯 태종,무열,문무,성덕,경덕왕의 위패를 모시었고 봉덕사 종이 주조되었다.

• 16년(780년) 왕은 성색을 좋아하여 기강이 문란하니 모반하는 자가 많다가 왕과 왕비가 난병에게 해쳐졌다.

• 내물왕의 10세손인 김양상(金良相)이 자립하여 왕 [宣德]이 됨. 

 

22대  선덕왕(宣德王) : 신라왕 37대 

 

재위 780∼785년. 성은 김씨. 이름은 양상(良相). 경덕왕 23년(764) 시중(侍中)에 임명되었고, 그 뒤 감찰기관인 숙정대(肅政臺)의

장관이 되었다. 혜공왕 10년(774) 상대등에 임명되었고, 776년에는 한화(漢化)된 관제의 복고작업을 주관하였다. 780년 왕당파이

던 이찬(伊飡)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범하자, 상대등이던 양상은 김경신(金敬信)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김지정을

죽이고 혜공왕과 왕비를 죽인 뒤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원년(780년)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고 왕위에 오름.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 5년 왕이 손위하려하니 군신이 세번이나 상소하여 말리므로 손위하지 못했다.

• 6년 정월 당나라 덕종이 지절사를 보내 왕을 ‘검교대위 계림주자사 영해군사 신라왕’으로 책명하였다. 이 달 왕이 병으로 위석하여 왕위를 선양하고 13일에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이라 하였다.

  

선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어룡성(御龍省)에 대한 개편을 실시하였으며, 패강진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781년 패강의 남쪽 주현을

안무(按撫)하였고, 782년 한주(漢州;지금의 서울지역)에 순행하여 민호(民戶)를 패강진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783년에는 김체신

(金體信)을 대곡진(大谷鎭) 군주, 즉 패강진 장관에 임명함으로써 개척사업을 완료하였다. 패강진 개척은 왕권을 옹호해 줄 배후세

력의 양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당의 덕종(德宗)이 검교대위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檢校大尉鷄林州刺史寧海軍使新羅王)

의 봉작을 주었다. 유언대로 불법에 따라 화장하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23대  원성왕(元聖王) : 신라왕 38대

 

신라 제38대 왕. ?∼798(재위 785∼798).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세손으로 효양(孝讓)의 아들이다. 어머

니는 계오부인(繼烏夫人) 박씨(朴氏)이고, 비(妃)는 김신술(金神述)의 딸 연화부인(蓮花夫人:淑貞夫人) 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

(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혜공왕 16년(780) 김양상(金良相;선덕왕)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반란을 진압하여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

이 후사 없이 죽자 태종무열왕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이기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하자 아버지 효양은 명덕대왕(明德大王), 조부 위문(魏文)은 흥평대왕(興平大王), 증조부 의관

(義寬)은 신영대왕(神英大王), 고조부 법선(法宣)은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는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였

다.

원성왕 1년(785) 총관을 도독으로 바꾸었고,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다. 788년 독서삼품과

를 설치하여 실력 위주로 관리를 임용하도록 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한 태자로 책봉된 인겸이 죽자 792년 의영을, 794년 인겸의 맏아

들 준옹(俊邕;소성왕)을 연이어 태자로 책봉하여 왕과 태자가 중심이 된 근친왕족이 권력을 장악케 하였다.

불교에 관심이 많아 승관(僧官)을 두었고, 795년 봉은사(奉恩寺)를 지었다. 한편 790년에는 김제의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

사를 장려하였으며, 발해(渤海)와 통교하였다.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24대  소성왕(昭聖王) : 신라왕 39대

 

휘는 준옹(俊邕), 원성왕의 손자, 비는 계화부인 김씨, 대아찬 숙명의 딸.

• - 청주(지금의 진주), 노거현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함

• - 재위 2년만에 별세하니 이 이후로 왕위 쟁탈전이 극심해짐.  이때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가 나타났고 폭풍이 불어 임해,인화의 두 문이 부서졌다고 함.

혹은 소성왕(昭成王)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준옹(俊邕). 원성왕의 큰아들인 인겸(仁謙, 惠忠太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 성목태후(聖穆太后)이

다. 비(妃)는 계화부인(桂花夫人)으로 숙명(叔明)의 딸이다.

소성왕은 원성왕의 장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 궁중에서 자라면서

789년에 대아찬(大阿飡)을 제수받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790년에는 파진찬(波珍飡)을 제수받아 재상이 되었다.791년 10월

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그 이듬해 8월에 병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태자에 책봉된 아버지가 일찍 죽고, 또 그에 뒤이어 태

자가 된 숙부 의영(義英)이 또한 794년에 죽자 그가 795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98년 12월 29일 원성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

다. 소성왕의 치적으로 청주(菁州:지금의 진주)의 노거현(老居縣)을 학생녹읍(學生祿邑)으로 설정한 것을 들 수 있다.재위 2년째인

800년 6월에 죽었다.

 

                                25대  애장왕(哀莊王) : 신라왕 40대

 

휘는 청명(淸明), 소성왕의 태자, 모는 계화부인, 비는 박씨.  13세에 즉위하여 아찬 병부령 언승이 섭정했다.

• - 2년 탐라국이 조공했고, 3년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했다.

• - 5년 일본과 수교를 맺고 사신을 파견함. 금3백량을 보내왔다.

• - 10년 7월 왕의 숙부 언승과 아우 이찬 제웅이 왕을 시해했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청명(淸明)인데 뒤에 중희(重熙)라 개명하였다.

소성왕과 계화부인(桂花夫人)김씨 사이에서 원자로 태어

나 800년 6월 부왕의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따라서, 즉위초부터 왕은 작은아버지인 병부령(兵部令) 김언승(金彦昇:뒤의 憲

德王)의 섭정을 받았다.

애장왕의 치적으로는 두가지를 들 수 있으니, 805년(애장왕 6) 공식(公式)20여조를 반포하였으며, 808년12도(道)에 사신을 파견하

여 군(郡), 읍(邑)의 경계를 정하였다. 이것은 애장왕의 중앙과 지방제도에 대한 개혁조치로 볼 수 있다.

공식 20여조를 반포하기 1년 전 동궁(東宮)의 만수방(萬壽房)을 새로 만들었으니, 이는 곧 태자의 위치를 굳건히 하려는 조처로 생

각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취해진 공식 20여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개혁으로 봄이 마땅하다.

805년 위화부(位和府)의 금하신(衿荷臣)을 고쳐 영(令)이라 하고, 예작부(例作府)에 성(省) 두 사람을 두는 등의 관제개혁 조처도 같은 성격으로 이해된다.

806년에는 교지를 내려 불교사원의 새로운 창건을 금하고 오직 수리만을 허락하며, 금수(錦繡)로써 불사하는 것과 금은으로 기물(器物)만드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 조처 역시 2년 뒤에 취해진 지방 군현의 경계를 정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족들은 막대한 토지와 재력을 지니고 지방의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대체로 원당(願堂)과 같은 절을 세워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다.

장왕 7년에서 9년에 이르는 개혁조처는 귀족세력을 왕권에 복속시키려는 것이다.그러나 왕권강화를 위한 애장왕의 개혁조처는 중대의 전제주의가 무너지고 귀족세력이 난립하는 하대사회의 풍조 속에서 많은 도전을 받아 성공할 수는 없었으며, 그 결과 그는

위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애장왕대의 개혁은 이전 경덕왕대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이은 것으로 왕권강화이지만, 그개혁의 주체는 애장왕이 아니라

당시 실력자인 김언승과 수종(秀宗:뒤의 興德王)이라고도 추측된다.

애장왕은 국내정치의 개혁과 병행하여 대당외교(對唐外交) 외에 일본과의 국교를 트고 있다.

802년 12월 균정(均貞)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제수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803년에는 일

본국과 우호하여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이와는 별도로 802년 순응(順應), 이정(利貞)에 의하여 가

야산에 해인사가 세웠졌는데, 해인사는 당시 왕실에서 경영하는 절이었다.

809년 7월 언승이 제옹(悌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왕을 죽였다.

 

                                26대  헌덕왕(憲德王) : 신라왕 41대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

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악무를 좋아했고 숭례전에서 잔치를 배풀며 스스로 고금(鼓琴)을 탔다.

 

• 굶주리는 백성이 많아 자식을 팔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 810년 국내의 제방을 수리.

• 824년 한산이북의 사람 1만명을 징발하여 패강(대동강)에 300여리의 장성축조

• 18년(826년) 10월에 돌아가시니 동천동 사적 제29호 왕릉이다. 

 

                                   27대  흥덕왕(興德王) : 신라왕 42대

 

휘는 수종(秀宗), 헌덕왕의 친동생, 비는 장화부인 김씨, 소성왕의 딸.

• - 3년(828년)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병졸 만명으로 왜적을

방어토록 하였다.(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 - 기근이 심하고 도적이 여러곳에서 일어났다.

• - 9년 복색제도를 고치고 분에 넘치는 사치를 금함.

• - 11년 12월에 돌아가시니 유언대로 장화부인과 합장하였다. 안강읍 육통리 사적 제30호 왕릉이다.

 

                                28대  희강왕(僖康王) : 신라왕 43대

 

희강왕(僖康王, 재위 836-838)은 본명이 김제륭(金悌隆)이고, 이찬 헌정(憲貞, 또는 草奴)의 아들이자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며,

왕비는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재위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는다.

 

희강왕(僖康王)은 그의 당숙과의 왕위쟁탈전 끝에 김명(金明)의 추대로 즉위하였으나 그를 추대했던 김명(金明)이 난을 일으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9대  민애왕(閔哀王) : 신라왕 44대

 

휘는 명(明), 원성왕의 증손 대아찬 충공의 아들. 비는 윤용왕후 김씨. 형정을 바로잡고 상대등으로 있다가 반란을 일으켜 왕으로

등극. 그러나 김양(金陽)이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와 합세하여 달구벌(대구)에서 왕의 군사를 물리쳤고 왕은 도망하다

가 김양의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 재위 2년만에 김우징[신무왕]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능은 내남면 망성리 사적 제190호

 

                               30대  신무왕(神武王) : 신라왕 45대

 

휘는 우징(祐徵)이니 상대등 균정의 아들이요 희강왕의 종제이니 어머니는 정교부인 박씨이다. 비는 진종부인 김씨니 명해의 따님

이다.기미 원년(당 개성4년 서기 839) 4월에 즉위하고 조고 예영은 혜강왕으로 고 균정은 성덕왕으로 어머니 박씨는 현목태우라 추

존하고 아들 경응을 태자로 세웠다.

7월 23일 왕이 훙하니 신무라 시호 올리고 문성왕이 즉위하여 선왕을 형제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

 

                               31대  문성왕(文聖王) : 신라왕 46대

 

휘는 경응(慶膺), 신무왕의 태자요 모는 진종부인이고 비는 소명부인 김씨니 시중 위흔의 따님이다.

 

• 경신 원년(당 개성 5년 서기 840) 8월에 대사(죄수를 석방하고 감면함)하였다.

• 장보고를 노공하여 청해장군을 삼고 장복(章服)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8년에 자객을 보내 죽였다.

• 흉년이 자주 들고, 모반자가 많았다.

• 9년 아들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14년 10월에 졸 하였다.

• 17년 정월에 관원을 보내어 서남지방의 백성들을 안무하였다.

• 19년 8월에 시중 김양이 졸하니 왕이 심히 애통해 하였으며 서불한(舒弗翰)을 추증하고 증부(부조를 말함)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예에 따랐으며 태종왕릉에 배장(왕릉곁에 장사함)하였다. 9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문성이라 시호를 올리고 헌안왕이 즉

위하였고, 서악동 사적 제178호 왕릉이다

 

                                 32대  헌안왕(憲安王) : 신라왕 47대

 

휘는 의정(誼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모는 조명부인.

 

• 3년(859년) 기근이 심하여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함.

• 5년 1월 돌아가시니 서악동 사적 제179호 왕릉이다.

                               

                                  33대  경문왕(景文王) : 신라왕 48대

 

성은 김씨, 이름은 응렴(膺廉), 혹은 의렴(疑廉)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버지는 계명(啓明)이며,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할아버지는 희강왕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큰 딸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고,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이고,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며,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찍이 국선(國仙)이 되었는데, 헌안왕이 불러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본일을 묻자 선행을 행한 세 사람을 말하였는데, 첫째는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하여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는 부호이면서 검소하게 옷을 입은 사람이요, 셋째는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헌안왕이 어짐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여 왕의 두 딸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게 하였다. 이에 낭도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에는 興輪寺僧이라고 함.)의 조언을 받아들여 왕의 큰 딸과 결혼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 - 신라 말엽으로 국내 정세는 내란과 동요가 심하였다.

• - 5년에 당나라 의종이 사신을 보내 선왕을 조문하고 책문과 선물을 보냈다.

• - 14년(874년) 최치원이 당에서 급제하였고, 황룡사 탑을 증수하였다.

• - 15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경문왕은 불교에 비교적 관심이 많아 낭도 중에도 승려가 많았으며 864년에 감은사에 행차하였고, 866년에는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을 구경하기도 했으며, 871년에는 황룡사구층탑을 개조하였다.

경문왕은 불교뿐 아니라 국학에도 관심이 있어 864년에는 국학에 행차하여 박사로 하여금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하였다. 즉위한 직후 나라를 잘 다스려보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때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

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 〈대도곡 大道曲〉, 〈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

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즉위 초 861년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862년 이찬(伊飡) 김정(金正)을 상대등으로, 아찬(阿

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866년에는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

后), 왕비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삼는 등, 열의를 가지고 정치를 했지만, 진골귀족간의 오랜 분쟁은 일시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기 이후에는 반란사건이 계속 일어났다.

866년 이찬 윤흥(允興)과 그 동생 숙흥(叔興), 계흥(季興)의 모역과, 868년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의 모반, 874년 근종(近)

등의 모역이 있었다.

그리하여 경문왕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죽었다. 한편,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역시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 속에서 만들

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34대  헌강왕(憲康王) : 신라왕 49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큰 아들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

이다.이 왕 대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 4년 일본에서 사신이 와서 왕은 조원전에서 인견하였다.

• 6년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학사들에게 경의(經義)를 강론케 함.

• 왕의 시중 민공이 “음양이 고루 화평하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농사가 잘 되어서, 백성의 생활이 충족하며, 변경은 잠잠하여 거

  리가 환락에 찼으니 이는 성덕의 소치입니다” 하였다.

• 11년(886년) 최치원이 당에서 돌아왔고,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百高座講經)을 베풀었다.

• 12년 보로국(여진족)이 신라와 화통하기를 청했다.

• 12년 7월 왕이 돌아가시니 남산동 사적 제187호 왕릉이다.

 

                             35대  정강왕(定康王) : 신라왕 50대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은 휘(諱)는 황(晃)이고,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로 형인 헌강왕(憲康王)에 이어 즉위하였다.

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87년 7월에 왕이 왕은 왕위에 올라 일년 만에

환으로 돌아가게 되자, 아들이 없어 유언으로 여동생을 왕으로 세우게 함으로써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36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신라왕 51대

 

휘는 만(曼), 헌강왕의 여동생이며 정강왕의 누이. 각간인 위홍과 내통하며 정사를 의논했다.

 

• - 지방에서 조세가 걷히지 않고 도적이 발호. 견훤, 궁예 등이 내침.

• - 2년에 위홍과 대구화상에게 향가집 삼대묵을 편찬케 함. 위홍이 죽자 소년 미장부를 불러들여 요직을 주어 기강이 무너졌다.

• - 5년 궁예가 명주(강릉) 일대 10여 군,현을 침탈하였다.

• - 6년 완산(전주)의 도적 견훤이 후백자라 자칭하고 무주(광주) 동남 군,현을 점령하였다.

• - 8년 최치원이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지어 올리고 아찬이 되었다.

• - 10년 적고적(붉은 바지의 도적)이 일어나 서울 서쪽 모량리까지 들어와 민가를 약탈하고 달아났다.

• - 11년 6월 왕은 “근년 이래로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봉기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라. 현인을 가리어 왕위를 선양하려

한다”라 하고 태자 요(堯)에게 선위하고 그 해 12월 북궁에서 돌아가시니 왕산에 장사했다.

 

신라 시대 3인의 여왕 중 마지막 여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만(曼). 할아버지는 희강왕의 아들로 의공대왕(懿恭大王)에 봉

해진 김계명(金啓明)이며, 할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으로 광의왕태후(光義王太后)로 봉해졌다. 아버지는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헌안왕의 장녀로 뒤에 문의왕후(文懿王后)에 봉해진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이다. 형제로는 정(晸:헌강왕)·황(晃:정강왕)·윤(胤)

등이 있다. 진성여왕은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

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887년(진성여왕 2) 2월 숙부(叔父)이자 남편이었던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던 왕거인(王巨人)의 국왕 비판 등이 있었으며, 888년부터는 주·군으로부터 세금이 들어오지 않

게 되어 국고가 비게 되었다. 이에 관리를 각지에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였고, 이를 계기로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때

원종(元宗)과 애노(哀奴)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에서 난을 일으켰으나 이를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계속해서

적당(賊黨)의 난이 일어났다.

891년에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이 부하인 궁예(弓裔)를 시켜 동쪽으로 원정하게 하여 명주(溟州:지금의 강릉)

까지 함락시켰다. 그 다음해에는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에서 견훤(甄萱)이 스스로 후백제를 건국하니 무주(武州:지금의 光州)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그에게 항복하였다.

 

895년에는 영주를 손에 넣은 궁예가 다시 저족(猪足)·생천(生川)을 거쳐 한주(漢州)·철원(鐵圓)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

라 국가의 실질적인 통치영역은 경주를 중심한 그 주변지역에 그치고, 전국토는 대부분 적당이나 지방호족세력의 휘하에 들어갔

다. 또,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경주의 서부 모량리(牟梁里)까지 진출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등 수도의 안위조차 불안

해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최치원(崔致遠)은 894년에 시무10조(時務十條)를 제시하였다. 이 제의는 받아

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

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897년 6월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嶢:뒤의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해 12월에 죽었다. 황산(黃山)에 장사 지냈다. 한편,

진성여왕 때에는 거타지(居陀知) 설화가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용녀(龍

女)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비슷하다.

 

                                 37대  효공왕(孝恭王) : 신라왕 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은 본명이 요(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재위기간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

였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에게 국토를 유린당하여 많은 국토를 빼앗겼다.

 

• 궁예와 견훤의 발호(跋扈)로 신라기강은 날로 깨어짐.

• 2년 궁예가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했다.  5년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칭함.

• 8년 궁예가 신라제도를 모방하고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9년 궁예가 국도를 철원으로 옮겼다.

• 11년 견훤에게 일선군 이남 10여성을 빼앗김.

• 14년 나주에서 견훤군과 궁예군의 큰 싸움이 있었다. 이 해에 궁예가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이라고 하였다.

• 왕이 천한 첩에 홀리어 정사를 돌보지 않음으로 대신 은영이 간했으나 듣지 않으므로 은영은 그 첩을 잡아다가 죽이었다.

• 16년 4월 왕이돌아가시니 도반동 사적 제183호 왕릉이다.

 

                                  38대  경순왕(敬順王) : 신라왕 56대

 

경순왕(?-979)은 신라 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승하한 뒤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신라의 민심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쪽으로 기울었다.

 

 935년 후백제의 잦은 침공과 각처의 군웅 할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자 김봉휴로 하여금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여 재위 8년의 신라

마지막 왕이 되었다.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을 하사 받고 태조의 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정승에 봉해지는 한편 경주를 식읍으로 받았으

며 경주의 사심관으로 고려 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신라왕릉으로는 경주를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왕릉이다.

 

백성들을 위해 천 년 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경순왕이 잠드신 능은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다.

 

     3년(서기 929년) 6월에 천축국(인도)의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 7월에 견훤이 의성부성(지금의 의성)을 공격하자 고려 장군 홍술이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

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으나, 전날 원봉의 공을 생각하여 이를 용서하고 순주를 현으로

고치게 하였다. 

 

• 4년(서기 930년) 태조가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에서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이기고 견훤군을 참살하였다. 

• 5년(서기 931년) 2월에 고려 태조는 50여 병사를 이끌고 도성 가까이 와서 신라 왕을 만나자고 하였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서 맞이하고, 궁으로 모시고 와서 큰 잔치를 베풀며 술을 권하였다. 잔치가 무러익어 가자, 왕은  "나는 하늘의 도움을입지 못하여 환난이 끊이지 않고, 견훤이 옳지 못한 일을 자행하며 우리 나라를 쳐서 빼앗으니 얼마나

통분할 일인지 모르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울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을 위로하고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 9년(서기 935년) 10월, 왕은 사방의 강토가 모조리 남의 땅으로 빼앗기고 나라의 힘이 약하여 스스로 지킬 수 없슴을 알고, 신

하들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은 각기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의논이 분분하였다. 이 때 왕자(마의 태자)가 말하기를, 

"나라가 존재하거나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정하는 것이오. 그러니 마땅히 충신과 의로운 사람들을 모아 민심을 수습하고,

우리 힘으로 나라를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이면 모르거니와, 어찌 천 년을 지켜온 국가를 하루 아침에 남에게 내줄 수가 있

으리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이제 와서 더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을

만큼 약하게 되었으니,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 하고 시랑(侍郞) 김봉규(金封休)에게 국서를 주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 왕자는 울며 하직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옆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 왕자는 베옷 차림에 풀뿌리,

나무 열매를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 11월, 고려 태조는 국서를 받아보고, 대상 벼슬의 왕철 등을 신라까지 보내어 경순왕을 맞게 하였다. 마침내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나 송도로 향하는데, 행렬이 30리에 뻗쳤다. 

 

• 고려 태조 왕건이 송도 교외에 나와 경순왕을 맞아 위로하니, 이로써 신라는 나라를 세운 후 922년 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경

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

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출처 : 史記로 본 신라김씨 왕조사

    

  국정문란이 신라 멸망 주요 원인

 

모든 왕조가 그러하듯이 신라 멸망기에 접어들어서는 국정 문란이 극에 달했다.

헌간왕때부터 상대등의 벼슬을 누리고 잇던 위홍(魏弘)이 태후 영화부인과 상간(相姦) 하고 또 딸인 제51대 진성여왕이 즉위한후에는 여왕과 정을 통해 국정을 농단하다 보니 그아래 잇는 대신이나 지방장간들도 온전할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후 3명의 박씨가 등장하여 신덕왕(박씨. 재위 912-917)-경명왕(박씨. 재위 917-924)-경애왕(박씨. 재위 924-927)이 15년 동안 통치하다보니,  지방호족들이 득세하고, 김씨의 후손이었던 견훤과 역시 김씨의 후손이었던 궁예, 궁예의 뒤를 이은 왕건이   세력을 넓혀 갔고 신라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박씨 왕조에 대한 김씨들의 정치적-군사적인 반발이 신라를 근본에서 무너뜨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라말 경애왕 때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추대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왕실의 김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켜,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기치게 되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권씨 성을 내리고 높은 벼슬을 내리고,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안돈 권씨와 같이 신라의 멸망과 함께 새로운 성씨들이 많이 생기게 된 되었다.

                                                                                                                          

 

대보공 김알지(金閼智)후손 신라김씨(경주김씨)

 

경주 황남동 계림에 있는 김알지(金閼智) 비각  

우리민족사에서는 단군신화로부터 건국되던 일들은 건국신화로 신성시 하였다. 신라 박혁거세는 백마의 알에서 탄생하엿고, 석탈해는 까치의 보호아래 뗏목 속에서 나왓는데, 김알지는 금궤속에서 탄강하엿다고 한다.

경주 김씨계의 원조(元祖)인 김알지는 신라 왕실의 박(朴). 석(昔). 김(金) 3성 중 김성(金姓)의 시조인데, 알지의 탄생에 대하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알지가 나왔으므로 성을 [金]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후 김알지는 벼슬이 대보(大輔:영의정)에 이르러 당시 탈해왕이 왕위를 전수하려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박씨(파사왕)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왕실 계통을 보면 역대 56왕 중 박씨가 10명, 석씨가 8명, 나머지 38왕이 김씨인데, 김씨왕으로는 제13대 미추왕(味鄒王)이 시초요, 그는 곧 알지의 7대손이 된다.

이러한 박.석.김 3성의 왕실 교체는 곧 신라 6촌(六村: 6개 부족) 중에서 우세한 3개 촌의 부족에 의하여 통수(統帥)의 자리가 세습되었음을 뜻한다.

신라 김알지계 김씨(新羅 金閼智系 金氏)는 경주 김씨를 대종으로 하고 대소 수십본으로 나뉘어 있다.

경주 김씨측이 58년에 편찬한 <김씨대종사>에 따르면 김알지의 후손은 신라.고려.조선에 걸쳐 전후 600여 본관으로 분종(分宗)되었는데, 동서(同書)는 그 중 266본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비교적 세계(世系)가 분명한 종파로 김성(金姓) 50여본과 동원이성(同源異姓) 7성씨(七姓氏)를 들고 있다.

그런데 그 50여 본 가운데서 광산 김씨(憲康王系). 강릉 김씨(武烈王系). 영동 김씨9神武王系)를 제외한 나머지는 거의가 경순왕의 후손으로 되어있다.

 

      신라김씨 대동보에 전해 내려오는 신라김씨 동원분관분성

 

 

신라김씨 동원분관분성(同源分貫分姓) 

貫姓(관성)

始祖

官職位(관 직위)

系統(계통)

경주김씨

알지

신라 대보 추존세조왕 以下金氏都始祖也

 

중시조

조선책순충부의 좌명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封계림군贈諡제숙공 特追계림부원군

계림군파

중시조

자수

고려 가정대부 충청도 도관찰사

상촌공파

중시조

충한

고려 봉익대부 예의판서

수은공파

중시조

조선 정헌대부 형조판서 諡 문간공

충암공파

중시조

명종

신라 파간 諡 영분공

영분공파

중시조

은열

고려 시중시랑 封 보국대안군

대안군파

중시조

순웅

고려 장군

장군공파

중시조

인관

고려 검교 태자태사

태사공파

중시조

장유

고려 판도판서

판도판서공파

중시조

천서

조선 封 월성부원군

월성부원군파

중시조

문기

조선 정헌대부 이조판서

백촌공파

중시조

인찬

조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封 익화군

익화군파

가평김씨

계공

조선 정국공신 병조판서

대보공 후 태종무열왕 후예

:

:

중간 생략 (부록 참조)

英陽김씨

 

 

대보공 후예

:

:

중간 생략 (부록 참조)

희천김씨

고려 문하시중신호위대장封희천군

경순왕 후 삼척군 후예

 

同源異姓(동원이성)

감천문씨

世光

대보공 후예

경북 안동

강릉왕씨

順式

대보공 후 태종 무열왕 후예

강원도 강릉

곡산연씨

壽昌

경순왕 후 대안군 후예

황해도 곡산

광주이씨

宗金

대보공 후 헌안왕 후예

전남 광주

수성최씨

永奎

경순왕 후 대안군 후예

경기도 수원

안동권씨

대보공 후예

경북 안동

영양남씨

대보공 후 경덕왕 후예

 

철원궁씨

弓裔

대보공 후 헌안왕 후예

강원도 철원

태안사씨

克胤

대보공후 신무왕후예

 

                                   

 

 

 

 

 

 

 

 

 

 

 

 

 

 

 

 

 

 

 

 

 

 

 

 

 

 

 

 

 

 

 

 

 

 

 

 

 

 

 

 

 

 

 

 

 

 

 

 

 

 

 

 

 

 

 

 

 출처 : 경주김씨 계림군파 대동보(1991년 1월 발행)

 

신라 멸망 전후 탄생한 새로운 성씨들

 

9세기 이후 후삼국이 출현할 무렵 통일신라는 통치력이 점차 약화되면서 각 지방에 실질적인 세력가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족이었다.

35대 경덕왕 이후 여러차례 왕위 쟁탈전으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신라의 왕권은 51대 진성여왕이후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 하였다.

진성여왕은 왕위에 오르긴 하였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자신의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에게 있엇는데, 위홍이 1년 만에 죽고 죽고나자, 진성여왕은 타락하여 왕으로서의 지도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진성여왕이후 등극한 52대 효공왕 때에는 신라의 영향력은 죽령 이남으로 후퇴되었고, 왕권은 서라벌 이외의 지역에서는 유명무실하였다.

 

효공왕이 개혁을 포기하고 정사를 게을리 하자 김씨를 제쳐두고 박씨로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가 곧 53대 신덕왕인데, 5년만에 타계하자 아들인 경명왕이 이었다.

54대 경명왕 이후 신라는 고려와 화친하고, 55대 경애왕 때에는 노골적으로 후백제를 적대시 하였다.

 

이에 몹시 분개한 견훤은 927년 신라지역인 영천을 공격하였고, 이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남하하는 왕건을 상대하지 않고, 경주를 공격하게 되자 무방비 상태로 있던 경애왕은 달아나다 붙잡혀 자진케 하고 만다.

견훤은 경애왕을 대신하여 경순왕을 오르게 하였다.

경순(敬順)왕은 신라 마지막 제56대왕(재위 927-935년)으로 성은 김씨이고, 경애왕의 외종재였다.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이미 왕으로서의 권위가 전혀 없었다.

그저 고려와 후백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유지되고 있을 뿐, 양국의 싸움에 의해서 결정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경순왕 10년인 935년 경순왕은 사방의 영토가 모두 다른 사람들의 소유가 되어 존립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소신료들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여 개성으로 가 고려에 귀화하고 만다.

 

경순왕의 후손들

 

 ▶ 죽방부인 박씨

 

죽방부인(竹方王后) 박씨(朴氏)는 예부시랑 박광우의 딸이라고도 전하는데, 죽방부인의 출

 

신은 명확하지 않다. 소원왕후라는 명칭은 죽방부인이 사망한 이후에 고려에서 내려준 시

 

호이다.

 

자녀 ① 마의태자 김일(金鎰), 첫번째 부인의 장자(출-삼국사기), 아들 김교(金較)-부안김씨

  

      * 형산강의 전설과 왕룡사원의 경순왕과 태자 목상, 춘원이광수의 마의태자 소설에서

 

        는 김충(金忠)으로 표기된다

 

• ② 범공대사 김굉(金皇), 첫번째 부인의 계자(출- 삼국사기), 아들 김운발(金雲發), 김우

 

발(金雨發) - 나주김씨

 

• 덕주공주

 

• ③ 영분공 김명종(金嗚鍾), 경주김씨 영분공파

 

낙랑공주 왕씨

 

낙랑공주(樂浪公主) 왕씨(王氏)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유(劉)씨

 

의 장녀이다. 신명순성왕후고려 제3대 정종, 고려 제4대 광종의 어머니이다. 낙랑공주

 

혼인 전에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에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

 

으며,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으로도 불리었다. 《삼국사기》, 고려사에 따르면 935년 11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장녀 낙랑공주

 

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자녀 ④ 대안군 김은열 : 경주김씨 대안군파

 

• 1녀 헌숙왕후(고려 경종의 처)

 

• 2녀(경주 이씨 이금서(李金書)에게 하가, 이주좌의 증조모)

 

• 3녀(황경(黃瓊)에게 하가)

 

• ⑤ 의성군 김석 : 의성 김씨 시조

 

• ⑥ 강릉군 김건 : (후)강릉 김씨 시조

 

• ⑦ 언양군 김선 : 언양 김씨 시조

 

• ⑧ 삼척군 김추 : 삼척 김씨 시조, 고려 초 문하시중 역임

 

 

부인 왕씨

 

 

왕건과 성무부인 박씨의 딸 왕(王)씨는 경순왕의 아내이다. 성무부인 박씨는 평주의 호족

 

수경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왕건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는데, 딸 왕씨

 

경순왕의 부인이 되었다. 경순왕과 결혼한 성무부인 박씨 딸 왕씨는 자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시호는 전하지 않는다.

 

기타 후궁들

 

• 별빈 안씨-⑨ 민담설화, 신라삼성연원보에 등장하는 경순왕의 마지막 부인-울산 김씨

 

• 후궁 무명씨 -1녀(육보(관성 육씨 시조)에게 하가)

                                 * 참고 : 다음 싸이트 신라 경순왕 검색 李離和 글

 

김알지 후손의 동원이성(同源異姓) 성씨(9)와 외래성씨들

 

경순왕 직계외에도 신라가 극도로 부패하고 잇단 민란으로 국운이 기울어가자 신라왕족인 김씨 중에는 궁예와 같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거나,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 공신이 되어 성(姓)을 사성(賜姓)받는 등 알지계에서 다른 성으로 갈라져나간 성씨도 있다.

김행(金幸)은 안동권씨로, 김순식(金順式)은 강릉왕씨로, 궁예의 후손 순백(珣白)은 광산이씨로, 궁예의 17세손 세광(世光)은 감천문씨(甘泉文氏)로, 경순왕의 아들 은열(殷說)의 13세손 영규(永奎)는 수성최씨(隋城崔氏)로 분리되었다.

1991년 1월 발행 경주김씨 대동보에 명기된 동원이성(同源異姓)을 함께 살펴보면, 남씨의 시조의 기원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① 감천 문씨

감천 문씨 시조는 경주 김씨 17대손(고려초 900년 이후 30X17=510년) 김고벽(생몰, 1410년-오차 50년)의 아들로 전한다.

김고벽이 남양 문씨 감천공파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아들이 모계성인 문씨 성을 개대하면서 감천 문씨가 창성 된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②강릉 왕씨

강릉 왕씨는 신라 명주 군왕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 김선희(金善希)의 아들 김예(金乂), 또는 왕예(王乂)을 시조로 하는 성본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김주원의 7대손 김예(金乂)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김예(金乂)에게 왕씨 성을 사성하면서 창성되었다. 이후 고려 태조 왕건의 아들 왕유도 강릉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

③ 곡산 연씨(延氏)

곡산 연씨(延氏)는 본래 중국의 남양(南陽)에서 계출(系出)된 성씨로 고려 때 연계령(延繼笭)의 7세손이 제국대장공주(帝國大丈公主,고려 충렬왕비)를 배종(陪從)하고 고려에 들어와 谷山(곡산)에 정착하게 된 것이 우리나라 延氏(연씨)의 始原(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繼笭(계령)을 시조로 하고 本貫(본관)을 谷山(곡산)으로 世系(세계)를 이어왔다.

그전에 신라 김씨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수 없다.

광산 이씨

광산 이씨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세손 이정(李靖)을 시조로 한다. 득성조는 이정의 아버지는 이종금(李宗金)으로, 그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의 40만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웠고, 1018년 거란의 3차침입때에도 강화성을 굳게 지켜 광산군에 임명되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을 하사받았다. 후손들은 이종금을 득성조, 그의 아들 이정을 시조로, 이정의 7세손 이순백, 이숙백, 이승백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隋城崔氏)

시조 최영규(崔永奎)의 본래 성은 최씨가 아니라, 경주김씨에서 분적한 안동김씨의 후예로 신라 경순왕 김부의 13세손이다. 그는 고려 원종 때 서경의 학도들에게 학문을 가르쳐 명망이 높았다. 충열왕 때 지금의 수원 일대에 풍속이 퇴폐하고 사람들의 행동이 짐승과 같아 왕이 개탄했다.

이 때 최영규가 자청하여 호장으로 나가 백성을 잘 다스려 윤리. 도덕을 회복시킨다. 왕이 가상히 여겨 1302년(충열왕28년) 그를 수원백에 봉하고 최씨를 사성(賜姓)했다. 수성은 수원의 옛 이름이다.

⑥안동 권씨(安東權氏)

시조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본래의 성은 김씨이다.

신라말 경애왕 때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입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추대하였다.

이에 격분한 권행은 930년(경순왕 3년) 겨울 후백제의 견훤이 대군을 몰아 고려 태조와 대치했을 때 이 고을 성주 김선평(신 안동김씨 시조), 그리고 이 곳 지도급 인사 장정필(안동장씨 시조)과 의논, 함께 향병을 모으고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군 병산(지금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리)에서 견훤의 8천 대병을 함몰시키고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고창은 후삼국의 전략상 중요지역이었으며, 병산에서 이들 세 사람의 도움으로 승리함으로서 후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항복 등 삼국통일에 큰 영향을 준 싸움이었다.

김행의 공을 가상히 여긴 고려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권씨 성을 내리고 벼슬을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래서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하였다.

⑦ 영양 남씨

전해져 오는 남씨의 시조 기원은 익히 잘 알고 있어 생략한다.

특히한 점은 우리와 영양 김씨는 시조가 중국의 김충(金忠)으로 같은 사람인데, 영양김씨는 사성(賜姓) 성씨가 아니고, 시조 남민(南敏)은 대보공 후손으로, 경덕왕 후예라고 표기된점이 특이하다.

⑧ 철원 궁씨

철원 궁씨 시조 궁예(弓裔)는 신라 제48대 경문왕(또는 헌안왕의 손자)의 아들이다. 그는 본성(本姓)이 김씨(金氏)로 승호(僧號)가 선종(善宗)이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하여 독자 세력화했다. 918년 장군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등의 모의로 왕건(王建)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철원에 도읍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철원으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천김씨(順天金氏), 광산김씨(光山金氏), 광산이씨등은 궁예와 관련이 있거나 궁예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⑨ 태안 사씨(泰安舍氏)

사씨(舍氏)는 본래 광산김씨(光山金氏)였던 김극윤(金克胤)이 성(姓)을 사씨로(舍氏) 개성(改姓)하였고 본관을 태안(泰安)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외래 성씨들

 

 문허비고(文獻備考)나 전고대방(典攷大方)등의 문헌에 의하면 柳氏, 全氏, 吳氏, 黃氏, 嚴氏, 林氏, 姜氏, 南氏, 安氏, 文氏, 張氏, 呂氏등은 중국인이 중국인이 동래귀화(東來歸化)한 귀화성(歸化姓)성씨와 외래성씨가 우리나라 성씨의 53%에 달한다고 한다.

 

4.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형산강의 전설과 왕룡사원의 목상 

  ☞ 형제산과 형산강(兄山江) 전설

                                                       

 

 ▲ 형산강과 포항시내, 멀리 포항 제철소가 보인다

 

포항을 가로 질러 흐르는 강을 형산강이라 한다. 강이름에 산이 들어간 경우는 좀 특이하다.

형산강, 그 형산(兄山)이란 형의 한자가 兄(맏 형)이다. 포항 진입하기 전에 강 양쪽으로 갈라져 마주 보고 있는 산이 있다. 오른쪽 높은 산이 형산(兄山)이고, 왼편 낮은 산이 제산(第山아우 산)이다.  즉 이들은 형제의 산이었다.

 

형산강은 이 두 산 사이를 지나 포항으로 흘러 든다.

옛날 형제산이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남천, 북천, 기계천의 물이 안강일대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다, 범람하면 경주까지 피해를 입었다.

안강의 치수문제는 신라의 숙원사업이었다.

경순왕 김부가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후삼국이 일어나 각축을 벌였고, 사방에 도적 떼가 일고 치안은 문란했다. 신라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항을 수습하기 위해 형제산을 둘로 잘라 안강호수의 물을 이용사 즉 영일만으로 흘러 보내면 임정현땅의 지정왕기가 제압되어 역적 출현이 정지 될 것을 믿었다.

 

경순왕과 태자 김충과 백일기도를 올렸다.

경순왕은 하늘에 오르고, 태자 김충은 형제 산맥 단절을 천지신명에 기도하였다.

기도 끝에 큰 뱀이 되었다. 큰 뱀을 사람들이 용으로 불러줘야 용이 될 수 있었지만 사람들은 불러주기는 커녕 두려워서 달아났다.

 

왕과 약속한 백일이 불과 하루 남았다. 낙심천만이다.

안강 유금이란 노인이 손자를 업고 지나가다 큰뱀을 보고 저런 큰 뱀도 있나하자, 업고 있던 손자는 할매,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이에요 소리쳤다.

그러자 뱀에서 용으로 변한 태자는 꼬리로 형제산을 내리쳐니 형제산은 형산과 제산으로 갈라지고 그 틈으로 안강호수의 물과 경주에서 내려오는 물이 강을 이루어 영일만으로 흘러들어가니 지금의 형산강이 되었다.

뱀을 용으로 불러 준 아이에게 논밭을 주고 아이 이름을 따서 "유금들"이라고 불러지고 있다. 현재 경주강동면 유금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 왕룡사원내 경순왕과 태자 김충의 목조 문무인상 

 

            ▲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에 있는 왕장군용왕전(王將軍龍王殿) 의 현판

 

   ▲ 경순왕 김부대왕의 문인 목상과 태자 김충의 무인목상

 

경순왕과 아들 김충이 200여년 전에 이 곳 형산 정상부에 목신으로 모셔져 있다.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ㅡ1 의 형산의 정상부에 법당의 현판에는 '왕장군 용왕전'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걸려있고, 사찰 명칭도 왕룡사가 아니고 '왕룡사원'이다.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고 송도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서거하자, 신라 유민들은 그를 추모하여 북형산성터에 형산 성황사(城隍祀)라는 사당을 건립하고 두 분을 모셨다. 원래는 유덕을 추모하는 사당으로 춘추향제를 올려 넋을 위로하였다.

 

본래 사당은 토막식 건물로 조선 말엽까지 있었으나, 조선말 어지러운 상황을 틈타 연일의 어느 문중에서 이 사당을 철거하고 분묘을 설치하자, 성터 밑에 위치한 왕룡사 경내로 옮겨 지금까지 모셔오고 있다.

왕룡사원 내부에는 경순왕과 태자 김충을 의미하는 목조 문.무인상이 있다.

약 200년 전에 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둘 다 오른 손은 옷 속에 감추고 왼손만 밖으로 드러나게 조각이 되어 있으며 얼굴이 목상 길이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신장은 매우 짧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상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푸른 옷에 얼굴은 살갗색으로 칠해졌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손에 무엇을 바쳐든 것 같은 형태이며 역시 푸른 옷에 얼굴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문인상은 경순왕 김부대왕, 무인상은 태자 김충이라고 하고, 또는 마이태자로 보는 이도 있다. 

신라인들이 왕을 잃은 마음을 신으로 되찾아, 신라인들의 안녕을 빌어 줄 것이라는 믿음의 표상이기도 하다

도지정 민속자료 제 73호로 지정되어있다. 위치: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49-1번지  

                         출처 : 형산(兄山)에 경순왕과 태자 김충이 神이되어 돌아왔다.    2009.6.5 庭光散人 글돋 선생

 

 

4. 김충(金忠)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춘원 이광수의 마의태자 소설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광수가 동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쓴 최초의 역사소설이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장편 역사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역사적 사실을 가미한 픽션으로 경순왕을 비롯한 등장인물 대부분이 실명으로 나오는데 특히 주목하는 바는 분명히 경순왕의 태자를 남씨 시조의 원조인 김충(金忠)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기술한 형산강의 전설과 용왕사원에 경순왕과 태자 김충이 나란히 목상으로 새겨져 해마다 제를 지내오고 있는 사실과 너무나도 일치한다. 

 

이소설은  신라말기 약 100여년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 소설의 전반부는 태봉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고려의 왕건이 천하의 패권을 다툰 정립상(鼎立相)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소설은 한국판 삼국지적인 성격으로 궁예대왕은 담대하고, 용력이 출중하며, 진실한 인물로 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궁중의 음모로 인해 버려지고 다시 자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하면 궁예대왕의 동문으로 그려져 있는 견훤이나, 궁예대왕를 배반하고 왕권을 찬탈한 왕건조차도 부정적인 인물로 표현되어 있다.

 

제목으로 미루어 보면 의당 마의태자로 불리우는 김부(金傅)의 아들 김충(金忠)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나, 후반부에 가서야 비로소 우국지사로 등장하여, 헌강왕때 부터 상대등의 벼슬을 누리고 잇던 위홍이 태후 영화부인과 간통하고, 또 영화부인의 딸 즉위한 후에도 여왕과 정을 통해 국정을 온단 하는등 신라가 멸망할수 밖에 없었던 신라 조정의 부패상을 파헤쳐 당시 조선 민족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하엿던 것으로 보인다.

 

태자 김충은 국운이 쇠한 신라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던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삼베 옷, 즉 마의(麻衣)를 입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사실(史實)을 통해 인생이 사는 것이 일장춘몽에 불과하다는 불교적인 無常철학을 제시해 주면서 끝맺고 있다. 

 

 

4. 맺는 말

 

여기서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것 같다.

기존 시조의 기원설에 대하여는 남구만공이 서문에서도 언급한 바와같이 여러 가지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그러나 남씨들은 족보에 전하는 대로 만 알고 왔을 뿐인데, 최근 우리나라 김씨의 최대 계파인 <경주 김씨 대동보>의 분관록에 동원이성(同源異姓)으로 남씨의 시조가 김알지 후손의 경덕왕 후예(後裔)란 사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 더욱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포항시내를 가로지르는 형산강(兄山江)의 전설과 해마다 왕룡사원(王龍祀院)에서 경순왕과 태자 김충(金忠)의 목상을 만들어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는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수 없다.

 

소설이긴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한 춘원 이광수의 <마의태자> 소설에서도 역시 경순왕의 태자 김충(金忠)으로 나와있다. 

 

분관록에서 경덕왕 후예(後裔)라고 하였는데,  신라 말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신라가 멸망할 시기인 경순왕 때 신라부족들이 오히려 고려를 도와 공을 세워 새로운 성씨들이 많이 생겨났음을 볼수 있다.

 

경순왕의 태자는 마이태자로 신라김씨 대동보에서는 김일(金鎰)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김충(金忠)일수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씨의 시조로 알려져온 <김충>은 신라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인데, 한창 족보 만들기가  성행하던 숙종시대에 대부분의 성씨들이 모화사상(慕華思想)의 영향으로 중국인을 시조로 내세우듯이, 멸망한 왕조의 태자를 세우느니, 차라리 우리도 중국인을 시조로 삼앗지 않았겠나 생각할수도 있다.

 

마의태자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자 할때, 이를 극구 반대하다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그 아들들은 축산항부근에 은둔하면서 영양김씨 시조 내력에서와 같이 큰 아들은 신라 왕손 김씨로 그대로 두고, 둘째는 남씨로 개성(改姓)하였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앞서 계유보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족보는 지금처럼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전해 왔던게 아니라, 주로 1700여년경 조선 숙종 때 부터 만들어 졌기 때문에, 실록이나 역사적인 사실에 비해 틀린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종중의 임원들은, 역사적인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때 마다 이를 족보에 반영하여 수정해 나가야 마땅하나, 오히려 족보가 더 우선한다고 우기면서 이를 배척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새대들은 역사를 먼저 배워 왔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으면 더욱 족보를 멀리하고 신뢰하지 않게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또다시 비난을 무릅쓰고 감히 시조의 유래에 대해서 논하여 보았는데, 개인적인 관점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왔던 내용을 함부로 부정하기도 어렵다.

 

바라건데 이를 기초로 대종회 또는 종친회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이에 대한 사학(史學)적인 연구와 토의가 있었으면 바란다.

 

             참고자료 : 삼국 사기, 삼국 유사, 신라하대의 왕위계승과 정치과정(이기동, 1980)

                                경주 김씨 계림군파 대동보 중 신라 김씨 분관록 (1991년1월)

                                인터넷 검색 <동원이관성同源異貫姓>

 

 첨부 : 용량 초과로 <신라왕손이라는 남씨 시조 기원에 관한 고찰 (2)> 별도 항목으로 계속

 

        #1 신라 왕계표     

 

        #2 경주김씨 대동보에 실린 신라김씨 분관록

 

         #3 사관(賜貫) 및 사성일람 (賜姓一覽)

 

        #4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형산강의 전설과 왕룡사원의 목상

 

        #5 김충이 경순왕의 태자라는 춘원 이광수의 마의태자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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