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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물산공진회와 안국선의 공진회

작성자반곱돌|작성시간05.05.05|조회수285 목록 댓글 0

조선물산공진회와 안국선의 [공진회]

김태웅(역사학연구소 연구원)

물산공진회를 아십니까

단지 과거의 사건인 양 치부하고 싶었던 1910년 8월 29일 庚戌國恥가 이 땅에서 재현되고 있다. 다국적 자본의 대리인인 IMF는 상품시장과 금융시장의 개방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이 땅의 경제 주권을 송두리 채 장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IMF 당국자는 그들의 요구를 구조 조정이니 개혁이니 소리쳐 외치고 있다.
 
식민지 망령이 이처럼 '개혁'과 '조정'의 이름으로 이 땅을 휘젓고 있는 현실을 애써 보아야 하는 우리로서는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더군다나 1년 전 이 땅의 고위관료, 언론과 일부 지식인들이 OECD 가입을 열렬히 환영했던 기억을 떠올린다면 마음은 참담할 뿐이다.
 
1910년 강점을 전후하여 일제는 이른바 施政改善事業을 시작할 때 '新政'과 '進步'를 기치로 내세웠고 지식인들은 이런 사업에 자발적으로 적극 동조하는 것을 역사적 임무로 여겼다. 1915년 9월 일제가 시정 5주년 기념 사업으로 대대적으로 벌인 조선물산공진회가 대표적인 예요 安國善이 소설집 {共進會}를 집필하여 세상에 내놓은 것이 이것이리라.
 
 

일제는 조선통치의 정당성을 내외에 홍보하기 위해 1915년 9월 10일부터 11월 30일까지 80여 일간에 걸쳐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그래서 이름이 '始政五年紀念 朝鮮物産共進會'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를 맞추어 가정박람회, 조선철도 천마일 기념식, 전국기자대회, 전국교육가대회 등을 열어 이러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개최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금회의 공진회는 총독정치 개시 이래로 5년간에 있었던 조선산업의 진보 발달을 보이고 이로 말미암아 바깥으로는 조선의 산업을 소개하고 안으로는 금후의 개량진보를 장려할 것이다."
 
산업의 발달을 핑계로 5년간의 조선 지배를 미화할 뿐만 아니라 정당화하려는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총독부 당국은 일찍부터 이 대회를 준비해 왔다. 1914년 3월 제31회 日本帝國議會에서 경비예산을 책정했고 같은 해 6월 29일에는 총독부 훈령으로 공진회 사무장정을 공포하였다. 특히 이들이 주안을 두었던 것은 과거 5년간에 산업의 진보, 각종의 시설 및 그 성적을 보일 만한 물건의 출품이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상품 그 자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출품은 조선의 물산을 비롯하여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교통, 경제 등에 관한 시설과 통계도 망라할 뿐더러 그 밖의 문물의 실황, 개선 진보의 상황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전시 장소는 경복궁 내 7만 2천평의 광활한 지역이 전시 공간으로 책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근정전, 경회루, 교태전 등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궁안의 殿, 堂, 樓閣 등 4천 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하였다. 남의 나라 왕궁 면적 총 7,225칸 반에서 무려 절반 이상을 공진회 개최를 명분으로 철거하여 각종의 진열관을 새로 조영하여 설비하였던 것이다.
 
공진회의 사용건물은 무려 총계 5,226평에 달했다. 이를 두고 당국자는 일본의 府縣 연합 공진회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자평하였다. 그리고 미술관을 영구적으로 쓰기 위해 煉瓦로 지었고, 조선의 예술을 대표할 석불상과 석탑 따위를 가져와 음악당 설치에 이용하였다. 그리고 경회루 부근에는 매점, 음식점, 여흥장으로 개방하고, 경성협찬회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다.
 

전시관은 제1호관(1), 2호관(7), 심사관(8), 미술관(4), 기계관(3), 博愛館(오늘날 적십자관), 農業分館, 수산관, 참고관(6)으로 나누고 별도로 참고미술관, 인쇄사진관, 鐵道國特設館(9), 營林廠特設館(2), 觀測館, 東拓特設館(14), 牛舍, 鷄舍, 羊豚舍 등을 두었다(그림 참조, 그 외 음악관(5), 경회루(13), 양어장(11) 등). 이 진열관에 전시된 물품은 산업, 臨時 恩賜金事業, 교육, 토목, 교통, 경제, 위생, 慈惠, 警務, 司獄, 미술, 고고자료 등 별반의 제도 문물에 관한 출품으로 조선의 산업과 그 밖의 개선 진보 상황을 보여주는데 걸맞다고 판단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일본제품과 그 밖의 외국제품 중 일제가 판단하기에 조선의 산업상에 필요한 물품 및 일상필수품도 빼놓지 않았다. 특히 식민지 조선과 거래가 활발한 도쿄, 오사카, 나가사키 등 24부현의 상품들을 대거 전시했다.
 

또한 일제는 물품의 선정과 배열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중 조선총독부 철도국, 영림창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관련 전시물은 따로 지은 별관에 두어 조선인들의 눈길을 끌도록 하였다. 그 밖의 물품 중에는 水利施設의 모형, 그림과 각종의 동력기 등이 포함되었다. 이 품목들은 주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대륙 침략을 '진보'와 '개선'의 이름으로 호도하기 위해 전시된 것이다. 이 점에서 공진회는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원료생산지이자 상품시장으로 적극 개발 공략하기 위한 홍보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일제는 공진회를 통해 조선인을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조선인 유지와 일본인 유지가 함께 모여 '조선인과 일본인의 오해'를 푼다는 것이다. 이런 효과를 극적으로 거두기 위해 일제는 '천황' 친척인 閑院宮載仁親王 부부를 불러 은사금을 내게 한 뒤 천황의 은택이 조선 전국에 뻗쳐 진보와 개선을 가져올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들의 말대로 끊임없이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민족해방운동을 잠재우고 조선 통치의 기초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1915년 9월 10일 공진회는 일제의 치밀한 준비 끝에 열렸다. 그리고 10월 1일 閑院宮載仁親王 부부가 참여하여 행사 분위기를 돋구었다. 비행기가 상공을 날아 극적 효과를 연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조선 전국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참관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감상을 받아내어 홍보하였다. 당시 일제가 발표한 관람자의 감상 내용을 보면 과거 조선시대에 비해 문물이 번성하고 개발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했더거나 앞으로 자식들에게 신지식을 습득케 하여 신사회에 나가게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일제가 바랬던 바였다. 그리고 어느 부인은 정신이 황홀하고 천황폐하의 덕화를 느꼈으며 이후 장래 5년에는 산업의 발달이 오늘보다 몇 배나 발달할 것이라 낙관한다는 내용도 소개되었다.
 
더 나아가 매일신보는 이런 공진회를 통해 경성부의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고 대문짝하게 보도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음식점, 잡화상, 토산품, 궐연초, 오복, 골동품, 인력거, 자전거 등의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세하게 열거하였다. 또한 공진회의 영향으로 경성의 수출입액이 9,10월 사이에 583,000여 엔이 증가하고, 식료품 및 면포류, 견포, 모직물류 등의 직물과 피혁 등의 재고품이 팔리고 예금액이 점차 증가하여 불경기가 끝났다고 보도하였다. 공진회는 '天來의 복음'으로 '今秋의 상업계는 無前大豊'이라 떠벌일 정도였다.
 
대부분이 공업제품으로 일본 제품이 잘 팔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심지어는 공진회의 시초는 신라 때의 가배절이라 하며 우리 나라의 전통 행사인 양 둘러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공진회를 통해 그들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나아가 조선인을 동화시켜 천황의 신민으로 탈바꿈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총독 자신이 '무지한 군중에는 정부가 성의로써 기도하는 시설에 대하여도 간혹 猜疑의 마음을 품는 자가 있으므로 의외의 장애를 야기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內地(일본)와 크게 같지 않다'고 실토하였다. 일제의 집요한 홍보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많은 조선인들이 저항하였던 것이다.
 

安國善은 왜 소설집 {공진회}를 집필했는가
 
"총독부에서 새로운 정치를 시행한 지 다섯 해 된 기념으로 공진회를 개최하니, 공진회는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벌여놓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경하게 하는 것이어니와, 이 책은 소설 <공진회>라. 여러 가지 기기 묘묘한 사실은 책 속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이니, 총독부에서 물산 공진회를 광화문 안 경복궁 속에 개설하였고, 나는 소설 <공진회>를 언문으로 이 책 속에 진술하였도다. 물산 공진회는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이오,
 
소설 공진회는 앉아서나 드러 누워 보는 것이라. 물산 공진회를 구경하고 돌아와서 여관의 차가운 등불 아래 적적한 밤과 기차 타고 심심할 적과 집에 가서 한가할 때에 이 책을 펼쳐들고 한 대문 내려보면 피곤 근심 간 데 없고, 재미가 진진하여 두 대문에 세 대문을 책 놓을 수 없을 만치 아무쪼록 재미있게 성대한 공진회의 여흥을 돕고자 붓을 들어 기록하니 이 때는 大正 사년 초팔월이라."
 
이 구절은 신소설 작가 안국선이 1915년 8월 소설집 {공진회}를 세상에 놓으면서 책 머리에 쓴 서문이다. 한마디로 소설집 {공진회}가 물산 공진회의 참가를 권유하고 여흥을 돋우기 의해 집필된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안국선이란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고발하고 약육강식의 세계를 비판한 그의 1908년작 신소설 {금수회의록}을 금새 떠올릴 것이다. 이 소설은 동물들이 모여서 인간의 행위를 비웃는 8가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통감부 출판법에 위반되어 압수서적에 포함되었다. 이인직이 {혈의 누}에서 일본의 문명을 찬양하고 조선과 청국의 야만을 비판했음을 상기한다면 안국선은 단연코 애국 소설을 쓴 작가로 기억됨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가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공진회'의 나팔수가 되어 홍보에 적극 나섰다. 왜 그랬을까. 단지 그의 변절이었는가. 아니면 세상 사는 이치 때문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그가 걸었던 길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1878년 12월 5일 안직수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6년 7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본관은 竹山으로 가까운 일가로 한말 친일 정객이었던 안경수가 있으며 훗날 안경수의 양자로 들어갔다. 안경수는 아버지와 같은존재였던 것이다. 그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게이오 의숙 보통과에 입학한 것도 안경수의 절대적인 도움이었고 그의 정치 노선도 안경수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게이오 의숙을 1년만에 졸업한 뒤 1896년 8월에 도쿄전문학교(와세대 대학의 전신)의 邦語政治科에 진학하여 1899년 7월에 졸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생단체인 친목회의 회계를 맡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여느 관비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사상적으로는 후쿠다 유기지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정 수립을 내세워 광무정권 타도운동에 깊숙이 가담하였다. 그에게는 문명화가 최우선의 과제였고 일본은 그 모델로 비쳤던 것이다. 아울러 '朝鮮 愚民'에 대한 '敎化'와 대한제국 타도가 개혁과 진보의 첩경으로 파악했다. 대신에 의병운동을 어리석은 백성이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는 행동으로 인식했다.
 
이 시기 문명개화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안국선도 현실관이 이러했다. 따라서 그는 1899년 11월 귀국 즉시 정부에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특히 안경수가 황제 폐위 운동을 전개하다가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한 사건이라든가 1899년 11월 귀국 직후 박영효가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을 배후 조정해서 일으키려 했던 쿠테타 미수 사건과 깊은 연관을 가졌다.
 

그는 일제가 한국정부의 국권을 강탈한 지 1년도 안된 1906년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사회활동에 적극 가담하여 정치학, 외교학 관련 서적들을 번역하였으며 특히 '박영효 귀국 환영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정치 영역으로까지 확대해 갔다.
 

그의 이런 노력은 주효해서 드디어 1907년 11월 30일자로 일제가 황실재산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帝室財産整理局의 사무관으로 官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理財局 監督課長, 國庫課長 등의 탁지부의 요직에 앉아서 황실재산을 일본에 넘기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이런 공을 인정받아 1911년 3월 청도군수에 보임되었다.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그는 출세하였고 망국의 책임을 느낄 리 없었다. 그는 이후 관직을 떠나 대부분을 광산 등의 사업에 손대는 가운데 민족개량주의의 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상무이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회장이었던 박영효와 밀접한 관계를 말년까지 지속하였다.
 

그는 이러했길래 조선물산 공진회를 조선이 진보되고 개혁되는 계기로 파악했다. {공진회}에 들어있는 [기생]의 한 구절을 보자.
 
"문명이니 개화이니 발달진보이니 하는 여러 가지 말이 지금 세상에 행용덜 하는 의례건의 말이라. 조선도 여러 해 동안을 문명진보에 열심 주의하여 모든 사물의 발달되어가는 품이 날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도다. 이번 공진회를 구경한 사람은 누구든지 조선의 문명진보가 오륙전에 비교하면 대단히 발달되었다고 할 터이라. "
 
일제의 식민 통치가 과거 대한제국시기보다 훨씬 발전하여 매우 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을 가져다주는 일제를 은인으로 여기고 고마워했다. 이번에는 [인력거군]의 구절을 들어보자
 
"공진회를 개최한다는 소문이 있더니 서울서 공진회 협찬회가 조직이 되었는데 공진회는 총독정치를 시행한 지 다섯 해 된 기념으로 하는 것이라 하는 말을 김서방의 내외가 들었던지 경찰서에서 돈을 내어준 것을 항상 고마워하고 총독정치의 공명함을 평생 감사하게 여기던 터이라 공진회협찬회에 대하여 돈 이백원을 무명씨로 기부한 사람이 있는데 이 무명씨가 아마 김서방인 듯하더라"
 
안국선에게 일제는 문명을 베풀고 정의를 실천하는 은인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안국선은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 일제의 식민 통치와 수탈을 정당화하고 조선민중들에게 이를 열심히 홍보했다.
 

그러나 그가 바랬던 바, 진보되고 발달된 세상은 조선인들의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것임을 그는 알았을까. 매일신보는 공진회가 경성의 불경기를 일소하고 호경기를 가져오는데 큰 요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과연 조선인들에게 해당되었던가. 물론 경성부는 이를 계기로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여기 저기 상점이 들어서고 신문화가 급속히 자리잡았다. 그러나 경성부의 조선인은 일본인과 반대로 점차 상권을 잃고 있었고 인구 마저 줄어들고 있었다. 1910년에 조선인이 238,999명이었는데 10년이 지난 1920년에는 181,829명으로 준 반면 일본인은 38,397명이었는데 무려 65,617명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1915년 11월말 공진회가 끝난 뒤 일본인 상인들은 그들의 초기 거점이었던 '本町'(충무로), '明治町'(명동)에서 벗어나 부동산 매입 등을 통해 경성부의 동부, 서부까지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조선상인들의 오랜 거점인 종로일대까지 침투했다.
 
반면에 조선인들은 서울 외곽으로 쫒겨가기 시작했다. 왕십로로 마포로 경성부 주변으로 이사가야 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가 통계학자의 말을 빌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30년 후에는 일본인구가 30만으로, 조선인은 15만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할 정도였다. 이제 조선상인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상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마저 송두리 채 빼앗겼다. 이처럼 경성부는 1910년대를 거치면서 식민지 상업도시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植民地의 剩餘를 유출하는 大據點이자 조선인과 일본인의 희비가 엇갈리는 생활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이순탁이라는 경제학자는 서울이 '경성이냐 게이죠우(경성의 일본식 발음)냐' 하며 한탄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안국선은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나 알고 있었던가. 아니면 이광수 같은민족개량주의가 늘 지적한 바대로 조선인의 게으름과 무지를 또 한번 강조하지 않았을까.

바로 1년전에 일부 정치가, 관료 및 지식인들은 1만불 시대니 OECD 회원국이니 하며 허리끈을 풀 때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들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싶을 정도로 국가 도산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의 과소비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역설하고 있다. 왜 우리가 역사 앞에서 숙연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곰곰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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