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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의병장 김백선은 왜 의병을 일으켰을까...

작성자반곱돌|작성시간05.05.05|조회수439 목록 댓글 0

평민의병장 김백선은 왜 의병을 일으켰을까?

이상찬(연구원)

1890년대의 인물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농민전쟁, 갑오개혁, 의병운동 등 성격이 다른 정치적 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서로 다른 성향의 정치세력이 번갈아 집권하기 때문이다. 1896년 의병장 중 김백선이라는 인물 역시 그러하다. 그동안 그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평민적 지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그가 명성왕후 지지세력으로서 농민군 토벌대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의 인물인 셈이다.
 

지평군(나중에 양근군과 합쳐져 양평군이 되었다)에 살았던 김백선은 평민이면서도 단발령 공포 이후 이춘영과 함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반일운동으로 알려진 1896년 의병은 단발령 반대, 국왕의 구출, 명성왕후 피살에 대한 복수, 갑오개혁의 저지, 아관파천 반대(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경복궁으로의 환궁) 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춘영 부대에서 김백선은 선봉장으로서 지평 포군 수백명을 이끌고 단양 장회촌 (長淮村)에서 관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춘영 의병은 나중에 유인석 의병 부대로 흡수되었고, 김백선은 계속해서 선봉장을 맡아 충주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나, 김백선은 양반을 능욕하였다는 이유로 유인석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1896년 의병에서 평민이 간부(장교)를 맡았던 경우는 거의 없다(몇몇 의병에서 이서층이 간부를 맡는 경우는 보인다). 이춘영 의병부대의 주력군이었던 지평포군 수백명과 김백선의 활약은 양반이 아닌 평민층이 '반일운동'에 참여하여 훌륭하게 싸웠다는 증거인 동시에 1896년 의병이 평민적 지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반일의병 활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백선을 처형하였다는 이유로 유인석은 양반 중심의 계급적인 한계를 가진 것으로 비난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이러한 평가에 증거를 제공해 준 것은 한말 의병장과 항일투사의 행적을 현지답사를 통해 채록한 송상도(宋相燾)의 {기려수필(騎驢隨筆)}이라고 할 수 있다. {기려수필}은 김백선을 가장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저자 송상도가 1915년 김백선의 고향을 직접 찾아가서 김백선에 관한 기록을 수집, 정리한 결과였다.
 

{기려수필}은 유인석 측의 기록(예를 들어 이정규의 [종의록])이 김백선의 공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김백선에 관해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충주성 함락과 그 이후의 전투에서 김백선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특히 충주성 함락은 전적으로 김백선의 힘이었다고 하였다. 둘째, 김백선이 안승우와 갈등을 일으킨 후 처형당할 때 김백선이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묶였던 사실(김백선은 스스로 허리띠를 풀러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으로써 나를 묶어 죄를 다스리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여 묶이게 되었다고 한다)을 적고 있다. 세째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김백선 처형이 부당(억울)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1)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번더 달라고 김백선이 애원하였음에도 유인석이 이를 뿌리쳤다.
2) 노모가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나서 죽게 해달라는 김백선의 애원을 유인석이 뿌리쳤다.
3) 김백선 처형이후 의병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제천을 도로 내주어야 했다.
4) 안승우를 함께 처형하지 않았다(김백선이 안승우을 죽이려 한 직접적인 이유는 중군장 안승우가 전투에 필요한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려수필}은 대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서 전투에 필요한 군사를 보내주지 않은 안승우가 오히려 더 잘못이라고 하였고 그러한 안승우를 함께 처형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5) 대의를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서 장수를 함부로 죽였다.

{기려수필}은 결국 유인석이 김백선을 처형한 것에 대해 "적을 토벌하지 않고 먼저 장수를 죽였으니 그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으로서 "나라사람이 모두 억울하다고 여긴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러한 억울함은 전설로 바뀌어서 "매일 밤 하늘이 깜깜해지면 그 동리의 가운데에서 김백선이 원망하며 말을 타고 질풍처럼 달려간다"는 전설이 김백선의 고향에서 전해진다는 것을 또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기려수필}의 기록과 평가는 특히 유인석의 잘못에 대한 지적과 김백선의 억울한 부분에 대해서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김백선은 당시 주력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서 스스로 무장하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주위에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는데 이 대목은 얼른 납득되지 않았었다. 유인석에 대해 반발하고 있었다면 김백선은 특히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유인석이 그를 체포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기려수필}의 기록을 통해 비로소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되고 유인석이 의병부대 대장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스스로 허리띠를 풀러 죄를 청하는 것은 뉘우치고 있다는 증거이며 용서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인석은 김백선을 용서하지 않고 실제로 결박하여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인석 부대에서는 김백선의 처형 이후 포군 병사들이 점차 부대를 이탈하였고, 남은 포군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전투마다 패하였고, 제천읍 전투를 마지막으로 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백선은 과연 평민적 지향을 가진 인물이었을까?
 
 즉, 왜 의병을 일으켰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기려수필}이나, 의병 연구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부분이다. 유인석의 잘못과 김백선의 억울함을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김백선에 대해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평민이었던 그가 과연 평민적 지향을 가졌는가 하는 점을 밝혀 내야만 비로소 김백선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백선이 명성왕후 지지세력으로서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농민군 토벌 사실부터 보기로 하자.
 

김백선과 그가 의병부대에 데리고 들어간 지평 포수는 1894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홍천과 경기도 안성 등지에서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4년 9월 지평군의 포군 400여명은 홍천 지방에 소굴을 둔 지평현 농민군 수백명을 토벌하였다. 이 지평 포군은 농민군 지도자 고석주 이희일 신창희 등을 사로잡아 목을 베었고 창 58자루를 거두어 무기고에 바쳤다. 지평 포군의 지휘자였던 맹영재는 이 때의 군공으로 9월 29일 지평현감에 임명되었고 포수들에게는 각각 포상이 주어졌다.
 
포수 김백선은 부상을 당하였지만 포상 이외의 별도의 조치(예를들어 관직 임명 등)는 없었다. 김백선이 공이 더 많았는데도 백선에게는 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즉 지평 포군의 실질적인 지휘자는 맹영재라기 보다 김백선이었을 수도 있다.
 

이후 김백선이 맹영재와 함께 농민군 토벌에 참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상 치료 때문에 김백선은 집에서 쉬었을 수도 있다. 다만 지평 포군은 계속해서 맹영재와 함께 농민군 토벌에 계속 참여하였다. 지평 포군은 맹영재의 지휘아래 안성, 죽산 등지에서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고 죽산 등지의 농민군 지도자 박성익 등 4명을 잡아서 효수하였다. 10월 21일 이들은 다시 홍천 장야촌으로 행군하여 농민군 30여명을 쏘아 죽이고, 10월 22일 서석면에 이르러 흰 기를 세우고 진을 치고 모여있던 농민군 수천여명과 접전, 수많은 사상자를 낸 후 해산시켰다. 이외에도 지평 양구 여주 이천 원주 등지의 농민군 지도자를 처형하였다.
 
 

김백선이 평민인 것은 분명하지만 농민군 토벌대 출신 또한 분명하다. 따라서 그가 평민이라는 사실에서 기대되는 지향의 참신성(혁신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매우 많다. 평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민적 지향'과 반대 입장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김백선이 명성왕후 지지세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이춘영과 함께 의병(단발령 공포 이후 최초의 의병이다)을 일으킨 실질적인 이유는 명성왕후의 억울함을 복수하고 여흥민씨 정권을 다시 세우려 하였던 데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농민군의 궁극적인 목표가 민씨정권타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농민군 토벌과 명성왕후 복수를 위한 의병을 일으킨 것은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같은 것이었다.
 
 

김백선은 평소 여주 삼전동에 사는 민씨를 "하늘처럼 우러러 보았다"고 하였고, 이 삼전 민씨 집안의 서자였던 민의식을 종사로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삼전동에 사는 민씨는 김백선과 함께 거의하였던 이춘영의 외가를 가르키는데, 이 집안에서 유명한 인물은 갑신정변 때 죽은 민영목이다.
 
그런데 민영목은 이 집안에서 명성왕후 집안으로 입양되었고, 민영목은 친조카인 민형식(閔亨植)을 양자로 다시 입양하였다. 명성왕후의 친정 쪽은 민영익, 민종식, 민형식 등 세 명의 후손이 모두 양자로서 민영익은 당시 홍콩에 나가 있었고, 민종식은 홍주 의병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었다. 양자로 들어가면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의병과 같은 위험한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민형식 등 삼전동에 사는 여흥민씨들은 외손인 이춘영을 내세우고 평소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백선으로 하여금 지평 포군을 전투력으로 동원하게 하였던 것이다.
 

유인석 의병의 모태가 되었던 이춘영 의병은 명성왕후 지지세력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명성왕후 친가, 민승호의 처가, 심상훈 집안, 홍계훈 집안 등 네 가문이 중심이었다. 민승호는 고종의 외삼촌인 동시에 명성왕후의 양오빠로서 여흥민씨 세력의 핵심인물이며 1873년 피살되었다. 심상훈은 고종과 이종사촌이지만, 고종보다는 명성왕후 계열의 인물(민승호는 심상훈의 외삼촌이기도 하다)이다. 홍계훈은 잘 알려진 대로 임오군란 때 명성왕후를 피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후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서 명성왕후 피살 당시 광화문을 지키다가 피살된 대표적인 명성왕후 세력이다.
 

명성왕후 친가쪽에서는 민형식이 '양자'였기 때문에 대신 여흥민씨의 외손인 이춘영이, 민승호의 처가에서는 민승호의 처남 이민성의 둘째 아들 이근영이, 심상훈 집안에서도 심상훈의 둘째 아들 심리섭이, 홍계훈 집안에서는 종손 홍병진이 의병부대에 보내졌다. 그 의병 부대의 전투력은 평소 민형식 집안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김백선이 지휘하는 지평 지역의 포군이었다.

김백선이 명성왕후 지지세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유인석과 김백선의 갈등의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명성왕후 지지세력으로서 아관파천에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춘영과 김백선을 제외하고 이근영, 심리섭, 홍병진 등이 아관파천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3월 중순 의병 부대를 떠났고 다시 한달 후쯤 의병해산을 권유하러 내려왔다. 이춘영과 김백선이 의병부대에 머물러 있긴 하였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의병활동을 중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유인석은 아관파천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친러파 명성왕후 지지세력을 또한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고 친러파 정권에 대항해서 의병활동을 계속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유인석이 기본적으로 고종 지지자로서 국왕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때문이었다.
 

결국 유인석 의병 부대 내부에서 아관파천에 대한 평가(이 문제는 의병부대의 해산 여부와 관련된다)를 둘러싸고 의견대립이 심각했고, 의병부대를 떠나는 이근영, 심리섭, 홍병진 등은 유인석이 어찌할 수 없는 세력가 집안의 자손들이었기 때문에 의병부대를 떠나더라도 유인석이 손을 댈 수 없었고, 유일하게 만만한 상대였던 김백선만 애꿎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김백선 처형 때 민의식도 도망친다).
 
 

김백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또한 필요한 것이 맹영재와의 관계이다. 맹영재는 지평 포군 지휘자로서 김백선과 함께 농민군 토벌에 나섰던 인물이지만, 지평현감에 임명된 이후 개화정책을 지지하였고(어윤중의 심복), 이춘영 의병과 춘천 의병 등에 대해 반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관군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 김백선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지금까지 1896년 의병을 반일의병으로만 보아왔기 때문에 김백선은 긍정적으로, 맹영재는 부정적으로 생각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이 둘은 농민군 토벌대 지휘자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만 정치적 성향, 상황에 따라 개화파 정권 지지(반의병)와 반대(의병)로 나뉘었을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유인석과 김백선의 갈등 역시 정치상화의 변화를 고려해야만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의병이라고 해도 아관파천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고 그 대립갈등이 치열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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