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가는 길 1
임영조
내 하던 말 마감하면
그대에게 가리라
영화 속을 빠져나온 주인공처럼
영욕과 슬픔과 대사(臺詞)도 버리고
그대 중심으로 들어가 쉬리
89년식 르망 몰고 소백산 넘어
부석사 들려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풍기 봉화 영양 스쳐 길을 계속 당기면
나 홀로 세 들다 뜨고 싶은 곳
갯마을의 고요가 나를 당기네
침엽수들 냇물에 그림자 씻는
불영계곡 백여 리 길 돌고 돌아
그대 찾아가는 길 내내
뙤약볕에 목 타는 하루를 건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
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오, 아름다운 환멸이었네.
그대에게 가는 길 2
임영조
경부 고속도로 달리다 천안서 들어
저녁놀 쓰고 청양으로 들어가
속살 참 매끈하고 흰 하현과 동침
열에 들떠 흥분한 칠갑산 한 자락
슬그머니 끌어 덮다 화상을 입고
뭉그러진 시행(詩行)처럼 마음을 절며
그대에게 가던 길은 너무 멀었네
장곡사 뒤란 감나무 우듬지 끝에
환하게 내건 시(枾 ) 하나
애틋한 화두처럼 호롱불처럼
농익은 시(詩)한 편 읽다 내려오는 길
문득 만져본 내 머리통은 참 딱딱하였네
설익은 땡감처럼 옹고집처럼.
그대에게 가는 길 3
임영조
성주산 물소리에 새벽잠 털고
여관을 빠져나와 혼자 걸었네
난생 처음인데 꼭 와본 것 같은 길
걷다가 너무 뜻밖에 만난
전생에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 같은
씨방을 막 날려버린 민들레와 걸었네
귀 시린 시냇물이 졸랑졸랑 따라나서고
나승개꽃 광대마물꽃 오이풀꽃들
자운영꽃 만개한 논두렁의 염소와
누렁개와 장닭과 푸른 숲이 예사로
나를 받아주는 곳, 내년쯤 수롬된다는
기막힌 사연에 왈칵, 목이 메는 길
이 다음 그대와 묵다 슬몃 눈 감고 싶은
걷다 보면 물소리에 젖은 길 헝클어져서
가던 길을 아주 잊고 싶은 곳
모처럼 찌든 귀 씻고 눈 씻고
온작 생각까지 헹구는 새벽 산책길
이 길 다 가고 나면 어디로?
그대에게 가는 길은 미로 같아서
가끔씩 몸은 두고 마음만 가네.
그대에게 가는 길 4
임영조
그대를 죽어라 사랑하고 싶은데
가장 절실한 말을 몰라 허둥대던 날
글 쓰고 책 읽기도 시큰둥한 날
무작정 차 몰고 서해로 갔네
해 뜨고 진눈깨비 내리는 진창길
그대 만날까 싶어 차를 몰았네
인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내 마음이 발 뻗는 외로움의 끝
그 적막한 뒤란 어딘가에는 필경
그대에게 가는 길 열릴까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달렸네
썰물 다음 드러난 대부도 뻘밭
그 허망한 치부 어딘가에서도 혹시
착한 새끼 게 몇쯤 만날까 싶은 날
난바다를 달려온 물너울들이
내게 무슨 말하려 달려들다가 저런!
방파제에 온몸을 찧고 물러서는
물러섰다 또 덤벼드는 눈 시린 투신
물 맑은 치정을 보네.
그대에게 가는 길 5
임영조
가다 보면 길들은 자구 끊기네
끊어진 길은 때로 아련한 기억 속
메꽃빛 등불로 사운대거나
벼랑 끝에 이르면 언어로 집을 짓네
먼 마을 스치는 구름의 기척에도
마음 벽 쩍쩍 금이 가는 집
온 채가 제 무게로 기우뚱거려도
모든 길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네
가파른 삶은 때로 길을 비뚤게 하고
고행은 서역처럼 멀고도 쓸쓸하나
더러는 가슴 아린 열락을 덤으로 얻네
이녘은 조용한데 밤낮 치대는 파도
그 소리 좀 엿듣다가 오던 길 놓고
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도 위험한 불씨를 감춘
그대 뜨거운 언어의 중심으로 들어가
나 화려하게 자폭하리라, 그 후는
바다에 더 출렁이는 그리움 되리
오래된 시집처럼 헤어진, 그래서
눈길보다 추억이 먼저 닿는 섬
허나 제부도는 늘
물때를 알고 가야 길을 내주네.
그대에게 가는 길 6
임영조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는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통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뒤를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 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물 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그대에게 가는 길 7
임영조
섭씨 삼십사 도 팔 분
불쾌지수 팔십오 프로
누가 십오 프로만 건드리면
금세 펑! 요절낼 찜통더위다
이른 저녁 먹고 내복 몇 벌 챙겨 넣고
무작정 강남 고속터미널로 나간다
두 시간을 기다려 10시 10분발
광주행 우등 고속버스를 탄다
무념무상 비몽사몽 흔들거리며
어둠을 밀고 가는 꽃상여 한 패로 떠
캄캄한 바다를 고속으로 달린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생도 새삼
가파르고 아찔한 커브길이 많았다
새벽 두 시, 광주 공용터미널에 내리니
불시에 유배된 듯 도시 온통 낯설다
온천표지 네온등 붉게 색 쓰는 여관
낡은 에어컨 소리 퀴퀴한 방에
혼자 누워 잠을 청한다, 언뜻
잠결에 누가 와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 가는 길이냐?
내가 왔던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은 밤이라 일러줘도 모를테니
내일 날 밝거든 답하마!
그대에게 가는 길 8
임영조
1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석탑을 머리에 인 네 마리 사자
앞에서 본 두 마리는 입 크게 벌려 웃고
뒤에서 본 두 마리는 이 악물고 낑낑거린다
너무 딱해 대신 거들어주고 싶은
저 상반된 노역이 내 마음을 붙든다
즐거운 자와 괴로운 자의 명암은
화엄의 세상에도 존재한다고 몸소
시범을 보여주는 불당 앞 네 사자
저 위치를 슬쩍 돌려놓으면
이 세상 음양도 일순 딴판으로 바뀔까?
내내 웃던 놈들은 울상이 되고
인상 쓰며 불평하던 놈들은 낄낄 웃을까?
2
어느 집 앞에서 본 명문(銘文)이었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허나 나는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닌
남이 보면 우습고 내가 보면 엄숙한
사잇길을 혼자서 걸어왔을 뿐이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는 대개
우는 자 뒤에서 함부로 웃은 죄였다
사자 네 놈 중 한 놈이 더는 못하겟다고
반야봉 숲속으로 어슬렁 사라진다면
탑은 와르르 당도 절도 깨질 것
깨진 탑 뒤에서 웃는 자도 있을 것
염려 마시라! 저 모순의 천년 노역이
온 산의 자비를 더 넉넉케 하고
매미 소리 마냥 푸르게 하고
물소리도 제멋대로 흐르게 하니
3
생을 길게 보려는 욕망이 탑을 세운다
표정 각자 다르고 생각 달라도
너무 높아 무겁고 불안한 탑은
합동으로 온전히 해당하는 네 사자
절대로 내려놓거나 흔들지 않고
천년 넘게 떠받드는 저 합종(合從)
이 세상 중심을 본다
임제는 말한다
"사자가 한번 울부짖으면
여우의 머리통이 빠개지도다"
*「화상 임제」. 대일출판사. 1994. 92족
그대에게 가는 길 9
임영조
운주사행 첫 버스를 타고
안개 속 길 없는 길 달린다
능주 지나 도곡 들녘 참깨 밭 머리
호박꽃 장관 환한 들길 달리니
마음 온통 저절로 부유해진다
바람이 다림질한 푸른 도암 들
담배 밭이 질펀하게 뒤따라온다
끊었던 담배 다시 피운 듯
생각이 자꾸만 메슥거리고
가는 길이 갑자기 구부러진다
나의 도착이 늦은 것일까
구름이 주인인 운주사
구름은 모두 어디로 외출하고
천불천탑이 천년 고요를 지키고 있다
이제 막 뱃머리를 하늘로 대고
닻을 올리려는 구름배 한 척
구름배에 무슨 임자 있을까 싶어
운주사([雲舟寺) 끌고 그만 하산하는데
이런! 바다를 저어갈 노가 없다니!
나 아직 세상에 그리운 사람 있어
가장 슬픈 사원 하나 짓고 싶은데
말을 종종 엎질러 갈 길을 지우다니!
운주사 처마 끝 풍경이 뒤통수친다
네가 곧 사원이다 뎅그렁!
네가 곧 주인이다 뎅그렁!
내려와도 연신 뒤통수친다.
그대에게 가는 길 10
―조양강을 지나며
임영조
42번 국도 타고 평창 막 지나
정선읍 못 미쳐 우회전하면
조양강이 길 하나 느리게 끌고 가지
시멘트로 포장하다 말다 한, 흡사
낡은 댕기같이 끊어질 듯 이어진
길 가노라면 마음 절로 느슨해지지
강 건너 아찔한 절벽들 각각
겸제풍 산수화가 생생한 병풍바위들
밤꽃 냄새 질탕한 산허리 돌면
도라지꽃 천궁향에 다시 취해서
아무데나 털썩 몸 부려놓고
발 뻗고 마냥 쉬고 싶은 곳
곤고한 생의 허리띠 풀고
혼절하듯 깜박 졸다 뜨고 싶은 곳
보라 꽃등 환한 감자밭 머리 어느 숲속
뻐꾹새 피울음에 오다가 익는데
아무도 없다! 문득 적요하고 외로워
거기 누구 없어요? 속으로 외쳐본다
산그늘에 늘린 인가 몇 채가
시큰둥 바라보다 도로 엎드려 졸 뿐
가도 가도 인적조차 뜸한 길
강물은 가수리 지나 운치리쯤에서
내내 옆구리에 끼고 오던 길 놓고
저 혼자 영월로 흘러가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나?
나 혼자 슬몃 당겨보는 길
너무 멀다, 그대여!
-임영조 시전집『그대에게 가는 길 2 (제5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천년의 시작,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