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깨뜨리기
김리윤
시간이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서로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둔 친구들아
실패하지 않는 사랑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기
이런 것만이 우리의 소원은 아닐 거야
오른발로 유리잔을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웃음소리
슬픔을 깨뜨리며 슬픔을 기억하기
미래의 불행을 미리 깨뜨리기
깨진 컵을 버리는 여자들과
새 컵을 찬장에 채워 넣는 여자들
우리는 와장창 웃으며 미래로 간다
세상에는 검은 모래의 해변도 있어
백사장이라는 말을 몰랐더라면 우리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모래를 뭐라고 부를까 골몰할 수 있었겠지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우리는 미래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다
뒤를 걸으면서 앞을 보기를 멈출 수 없는 것 같다
한쪽 현실을 바라보는 사이 또 다른 현실이 흔들리며 흩어지네
우리는 어떤 인과도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걷고 웃고 먹고 잠드네
바깥의 여름 속을 걸으며 더위의 인과를 묻고 싶어져
정말 덥다,
여름이니까 덥지
이런 대답 대신
새롭게 열리는 땀방울을
이상한 질감의 피부와 미친 햇빛을
앞사람의 손에 들린 봉지 속에서 흔들리는 복숭아 두 알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애들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신호를 기다리는 것을 본다
여름 나무의 빼곡한 잎이 부드러운 천장을 만든다
여름 바람이 만드는 틈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구멍 난 천장이 두 개의 새끼손가락에 동그랗게 걸리는 것을 본다
초록 불이 켜지면 사방에서 쏟아지는 얼굴들
먼지 속에 숨을 수도 없이 환한 여름에
드러난 사랑의 부수러기들
사람들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모두 얼굴이라고 불러왔네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사랑의 형식들을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터지는 모두 다른 웃음소리
@ 서로 다른 얼굴과 서로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지만
실패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미래로 달아날까(현실 외면? 도피?)
골몰하는 우리, 그러나 우리는 먼지 속에 드러난 환한 여름의
부스러기다. 인과율처럼 신호를 기다리다 사라지는
우리는 기호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인과도 배운 적 없는 사람처럼
어떤 것도 인과로 저장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걷고 웃고 먹고 잠드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은 존재들이다.
살면서 우리는 제각각 사랑의 쓴 맛을 경험한다.
사랑의 형식은 다양한데, 그 사랑의 시련을 서둘러 잊으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마음 속 창고에다 소중한 추억으로 남겨두는 사람도
있다. 사랑의 형식은 어떤 부스러기와 부딪혔을 때 과감히 버리는 타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건 좋건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타입으로 구별될 것이다.
전자가 이기적인 사랑의 형식이라면 후자는 이타적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얼굴과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시간을 흘러 보낸다. 그 사랑이 부스러기를 오른발로 밟으면
와장창 웃음소리가 터지는 까닭은 무얼까? 약자인 왼발이라면
또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