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
허수경
그렸다.
꿈꾸던 돌의 얼굴을 그렸다.
하수구에 머리를 박고 거꾸로 서 있던 백양목
부서진 벽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어깨
붉게 울면서 태양과 결별하던 자두를 그렸다.
칼에 목을 내밀며 검은 중심을 숲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짧아진다는 거, 목숨의 한 순간을 내미는 거
정치도 박애도 아니고 깨달음도 아니고
다만 당신을 향해 나를 건다는 거
멸종해가던 거대 짐승의 목
먹다 남은 생선 머리 뼈 꼬리 마침내 차가운 눈
열대림이 눈을 감으며 아무도 모르는 부족의 노래를 듣는 거
태양이 들판에 정주하던 안개를 밀어내던 거
천천히 몸을 낮추며 쓰러지는 너를 바라보던 오래된 노래
눈물 머금은 비닐봉지도 그 봉지의 아들들이
화염병의 신음으로 만든 반지를 끼는 거
어둠에 매장당하는 나무를 보는 거
사랑을 배반하던 순간, 섬뜩섬뜩 위장으로 들어가던 찬물
늦여름의 만남, 그 상처의 얼굴을 닮아가면서 익어가는 오렌지를
그렸다.
마침내 필통도 그를 매장할 때쯤
이 세계 전체가 관이 되는 연필이었다. 우리는
점점 짧아지면서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했으나
영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단독자, 연필 한 자루였다.
헤어질 사람들이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에서
영원한 목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한 자루였다.
당신이야, 그것뿐이었다.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이느냐
운명에 맞서 투쟁하느냐
전자가 예술의 길이라면
후자는 혁명가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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