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게 즐거운 詩學을 위하여
- 새로운 시론에의 탐색
전재완
그동안 우리는 시라면 뭔가 고리타분하고 일정한 형식에 얽매인
리듬과 운율 따위의 시의 본래적인 인간의 비인간화 -비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의 입장을 관찰할 수 있기에-를 무시하고 기왕의 관행이 유도한
과거의 시론을 학습하고 반복하는 나머지 정작 시정신이 추구하는
인간성 회복기능에 대하여 몰이해온 듯하다.
말하자면 어떤 시를 읽기는 했는데 읽고 난 후 도무지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망할 놈의 시라는 건달이 주정을 떠는 것에
겸손할 독자는 없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우리가 소월의 시를 읽을 때를 상상하여 보자.
소월의 시를 감상할 때 7,5조의 율격이니 4 음보라느니 따위를 상상하며
소월시를 감상하는 독자가 과연, 소월의 한 맺힌 어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감상할 때 나보기가 역겨워 가신 너를 두고
이런 된장 진달래꽃의 화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 오리다는 이
멋진 역설의 파롤에 시를 읽는 독자는 어쩌지 못하고 전율하지 않더냐?
이게 바로 시를 읽는 맛일 것이다.
소월시가 다 좋다고 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월시의 매력이라면 어쩌면
남도의 영랑과(오해의 소지가 있어 밝힌다. 영랑의 시 역시 여성적인데) 는 달리
여성스러운 시어로 여성스럽지 않은 역설로 그의 시를
읽는 독자를 홀리는 것이다. 그게 소월시가 이 시대에도 읽히는 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이 시대 기라성 같은 젊은 시인들의 시들이 소월의 시와 감히 대적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진정한 시란, 시대를 초월하는 메타포인 것이다.
글을 쓰는 필자 역시 항상 시란 무엇인가? 시를 어떻게 써야지 욕을 먹지 않을까? 따위
전전긍긍하며 시를 만났다 시와 헤어지기 부지기수다.
결국, 시인도 학이시습지가 안되면 단명한다.
모든 위대한 인생의 규칙은 열심히 공부하세!라고 외친 가수 윤시내 씨의 그 유쾌한
노래를 들어보아야 하리.
여기서 공부라는 것은 유년기 시절의 단순암기식의 그런 공부가 아니다.
필자가 말하는 공부란 인생의 수련- 수기치인&극기복례& 무위자연&..... 공염불 소리일 것이다.
나 자신이 시를 배워가며 깨우친 바를 여기에 토로한다.
모든 주의 혹은 사고는 결과적으로 삶의 그림자의 토대가 된다.
즉, 시라는 예술이 곧 나나 그대들 삶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정리한다.
삶을 살아가며 인생의 희로애락이 어찌 없을쏘냐?
그 인생의 칠정 - 나는 그것이 삶의 욕망이자 죽음의 부정?, 아니 , 사람은 때가 되면 다 죽을 운명이다.
그러한 파란만장한 삶의 파롤(개인적인 발화)이 누군가에게는 지식인으로, 누군가에게는 연예인으로,
누군가에게는 아티스트로, 누군가에게는 살인자로, 누군가에는.... 어쩌고 저쩌고 그렇게 표출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 번 왔다 가는 여행자라는 직분을 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스스로의 직분에 얼마나 정직하게 충실하게 너무나 힘들지만 견디고 버티는 근성!
유쾌한 본성은 그렇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왜냐구? ㅎㅎ 돈되는 것에 사익을 원하는 者는 결코, 예술의 고독한 毒을 모르기 때문이다.)
학이시습지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를 쓰건, 공문을 쓰건,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건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즐겁게 - 나도 즐겁고 너도 즐거운 그런 유쾌한 -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보다 즐겁게
오늘 보다 즐겁게
내일은 더 즐겁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