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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수- 시원과 시인론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3|조회수54 목록 댓글 0
*2020 문심 평론

1. 시원의 가치



이 문제를 푸는 것도 시적 이해의 심화과정 중 주요한 하나다. 시를 사랑하는 선인들이 모두 시원을 만들어 거기 들어 풍류를 즐기고 싶어 해서 여러 형태의 이름을 내걸고 정자와 재실을 짓고 시생보내고자 했다. 시림詩 또는 문원 등등 좋은 이름들을 내세우고 시를 창작하고 또 널리 발표하며 즐기는 산실로 하였다. 지금은 많은 문인들의 동인지 이름으로 시 사회의 조직들로 이를 대부분 대신하고 있지만 저간의 시 선인들은 산수를 겸비한 좋은 장소에 시원을 꾸려서 후학들을 교육하는 장소로 하는 등 귀한 명소였다. 각자 시인들은 제 집에서 작시를 하면 그만인데 왜 이런 과한 욕심까지 가졌을까 싶지만 사실 곰곰이 따져 보면 시 한 편이라는 것이 실제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어느 잘생긴 나무 한그루보다 못하다는 부족함을 버릴 수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자연은 비록 잘 못 자란 하잖은 나무 한 그루라도 진정한 문인들이 볼 때는 그 자체로 생명의 우주로 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흰 종이 위의 시 한 편이 이만큼 오묘하고 신비스러우며 천리를 다 구가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이 없을 것이다. 시 한 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결과는 나무 한그루의 우주적 생명 세계에 비집고 들어가서 기껏해야 자기 한 순간의 정념에 젖은 그 이상일 수가 없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작시를 한다는 것은 어차피 하나의 실체 사물들 세계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시적 의식 작업을 하는 것이다. 비록 한 개 사물이라도 시의 입장에서는 거기가 커다란 시원이고 시림이고 문원이다. 따라서 시인들은 시적 정원을 조성해서 항상 거기에 들어 즐기는 것은 바로 종이에 의도적 작시를 하지는 않지만 변화하는 계절과 수시로 달라지는 인심의 다른 얼굴을 접하며 시적 정취에 들어 순간순간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시는 자연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사실 간접적으로 작시하는 셈이다. 시는 심취해서 즐기는 독자 위치만으로도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등산은 전문 산악인만의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본래 시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닌 홀로의 고독한 독백이었다.(시가 존재론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세계가 물질화된 오늘날에 있어 시를 존재론적인 것에 국한할 수 있을까?)  오직 신뢰할 것은 이 우주와 자연뿐인 세상에서 부단히 그 속에 호흡을 전하고 모든 오욕칠정을 조종해서 평화롭게 사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다.

현실은 오랜 반복으로 늘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다. 권태의 이끼가 바로바로 파랗게 끼어 버려 본래의 깊은 그 사물의 다른 특별한 여러 숨은 존재가 안 보인다. 시는 이 이끼를 다시 벗겨서 새롭게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시인은 매일 새로운 사물의 의미를 찾고자 자기 시각을 가꾸고 새롭게 반짝이도록 잘 닦는다.

시원이란 이런 시각에서 보면 바로 매일 한 편의 시 작품이 발표되는 깨끗한 백지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시를 직접 쓰지는 못해도 시원에 드는 자체로 선비요 시인이었을 것이다. 시적 사유의 심화란 시적 의식의 깊이와 광폭을 연찬해 가는 것이라면 일관된 선인들의 작시 세계에 대한 시 정신과 시 쓰기를 얼마나 중시했는가도 엿볼 수 있다.

2. 시원의 경계지대

시원이나 문원은 일상생활 공간에서 벗어난 시적 공간이다. 현실과 일상의 차이 공간이다. 모든 생명 현상의 의식들은 그 이면에 언제나 변화하는 경계 지대를 배후에 갖고 있다. 마치 하루가 밤과 낮의 이원적 공간이듯 그리하여 삶을 고르고 잘 일어 균형을 잡고 다시 새날을 맞듯 그런 내면적 경계 영역을 우리는 드나든다. 밤새 안
녕이란 말을 자주 한다. 그 안녕의 정도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삶이란 그 위험도와 안전도는 마치 손바닥과 손등과 같이 공존한다. 쉽게 간과되는 손바닥과 손등의 경계를 의식하지 못하듯 살얼음판을 걷는 조심스러운 삶의 판을 의식 못 하고 산다. 이런 긴장이 싫어서 그저 순간의 변화를 일상화하며 둔감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생각의 분기점이 읽힌다. 위험은 과연 현상이 항상 그런 것인가. 아니면 현상을 늘 안전한데 행동 주체인 우리들 각자의 판단 부족과 실수가 행위 원인인가는 종합적으로 한 차원을 달리해서 물을 필요가 있다.

너무 과민성 정신질환이라고 하거나 그 반대로 너무 해태하는 둔감이거나를 구분하기 참 어렵다. 그러나 목하 이 사회 현상계를 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오늘까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한 때는 없었다. 늘 부조리하고 불평등하고 살기 어려운 현상으로 보아 내일의 꿈을 설정하지 않고는 고통을 극복할 수 없이 삶은 고통이었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오히려 오지 않아야 할 곳으로 우리는 던져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를 향해 던져진 존재라 했다)차라리 돌이나 동식물들처럼 영혼이 없어서, 위험과 안전을 전혀 구별할 수 없어서, 행불행을 모르는 생명이 언제나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자들로 보였다. 결국 삶의 근원은 이 우주의 질서문제인가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인가로 거듭거듭 묻는 철학적 사고와 시적 시인들이 발생하였다고 본다. 그리하여 이런 어려운 우환 문제를 제시하기 시작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는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하는 생각도 한다.

흔히 식자우환이란 말을 익히 들어왔다. 이 뜻을 좀 철학으로 생각해 보면 참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다음에 제시하는 소식<석창서취묵당>을 보면 이 문제의 심각성이 한층 절실해질 것이다. 인간은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근심이 된다. 또는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도 그만큼 많다고 하는 이 단순한 뜻 너머 바로 인생론이고 어쩌면 문학에 매달리는 애처로운 문인론이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은 글자를 알면서 우환이 시작되니 성명이나 대강 적을 수 있으면 그만둠이 좋다.
어찌하여 초서를 써 빠른 것을 자랑하여 펴 보고 놀라 근심하게 만드는가.
나도 일찍이 좋아는 하였으나 매번 스스로 웃는다.
그대도 이 병이 있으니 어찌 고치겠는가 이 속에 지극한 즐거움있다고 스스로 말하여 기분이 좋은 것이 유유자적함에 다름이 아니로다
요즈음 지은 집을 취묵당이라 이름 하였으니 좋은 술 마셔 온갖 근심 사라지는 것과 같아 유자의 말이 허탄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노라.
병들면 흙이나 숯이 산해진미 같다는 것을 그대는 이 예술에 뛰어나다 할 수 있나니 버린 붓담장에 쌓은 것이 산처럼 많구나.
흥이 일어나 붓 한번 흰 종이에 휘두르면 준마가 잠깐 사이에 구주천하를 밟고 지나간 것 같아 나의 글씨 스스로 만들어 법도 없어 마음대로 쓴 점과 획을 번거롭게 퇴고하고 다듬고 독자적인 견해를 엉터리로 논하고 글씨 하나 종이 한 조각 모두를 거두어 두는가.
종요와 장아무개에 못지않은 그대는 스스로 만족하지만 아래로는 나 아무개와 조 아무개보다 내가 나으리니 연못에 나가 애써 배울 필요는 없도다.
글씨 쓸 비단 모두 가져다가 이불 속에 채우리라.

- 카페 <한시 속으로>에서 인용함

이 시의 첫 구인 '인생은 글자를 알면서 우환이 시작된다.'는 말에서 '식자우환'이 유래했다고 하니 시인과 수필가 등 문인은 바로 식자우환의 고달픈 인간상의 근원인 것이다. 바로 그 당사자들이다. 왜 시인과 선비들은 이런 고단한 삶을 사는 존재들인지 모르겠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문학 작품은 식자우환의 글이고 세상 사람살이에 대한 종합 평가서들이다. 마치 서두에서 말한 그 시원이나 문원이 마치 낭만적인 음풍영월의 한가한 여흥들의 한담 장소가 아니라 현상계의 삶의 경계지대에서 세상을 걱정한 고뇌의 장소였다. 자연은 그대로 두고 보아도 산천경개는 그만하면 나무랄 것 하나도 없는데 굳이 별도로 시원이니 원림이니 문원이니 만들어 따로 들락일 곳 만든 것은 의미가 심장하다. 즉 자연의 우주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의 문제에 대한 고뇌였다고 보인다.

바로 식자와 무식자의 경계지대이었다. 식자가 아니고는 이 현상계와 저 이상적인 이데아계 사이에서 아주 작은 걸음 한 폭도 실제로는 바로 걷기를 알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낫을 앞에 놓고도 그 쉬운 한글, 기억 자 한자를 모르는 범부들이 우주의 진리문제를 어찌 다룰 수 있겠느냐고 하면 타당성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무 한 그루를 베어야 할 어떤 시공간에 다다르게 되었다면 이 하찮은 나무 한 그루를 놓고 사방팔방으로 음양을 묻고 길흉을 따져 운수를 찾는 것이 왜 당연했는가는 거창한 무슨 생태학 문제가 아니라 삶은 우주 문제였고 인간의 지성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개한 원시 인간도 거기는 식자가 있어서 천지 우주와 삶을 함께 다루어 살았다. 우리들 작은 가정의 집 한 채도 거기는 우주의 축소판 시원이요 시림이요 문원이다. 결국 나무 한 그루처럼 시원이요 시림이요 문원이다.

따라서 이 시원의 경계 공간이 지금 사는 현상계의 거대한 경계지면서 미시적으로는 모두의 의식 속 작은 삶의 경계지대이다. 호수의 큰 둑이 터지는 것은 우주의 기상학적 경계지역이면서 호수의 물과 둑의 힘의 역학관계를 조절하는 인간 문제 지역이다. 바늘 구멍만
한 틈새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린다.

시인에게 시원은 건널목 하나와 같다. 도처에 연결된 건널목이 작은 시공간의 곧 문원이다. 시 한 편은 어디론가 시인이 만들어 내놓은 건널목 하나이다. 가령 바람 앞에 등불을 켜고 지킨다고 생각해보면 우리들 어려운 생명 현상들을 비유할 때 이런 풍전등화란 성어는 깊은 잠언이다. 그러면 영원과 현재의 관계는 풍전등화가 아닌가도 한 단계 높여 다시 묻는다. 나의 현재가 영원 앞에 작은 등불로 켜져 있다면 누가 무엇을 어떻게 지키느냐이다. 바람도 불을 끄기도 하지만 삭아드는 불씨를 불어서 불꽃을 일으키기도 한다. 바람은 공기의 실체라서 피부로 현상을 바로 느끼지만 우리들 눈에는 보이거나 귀에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영원도 비록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마음의 눈이니 귀로는 감각된다. 왜냐면 생체의 유종이 시작과 끝나는 것을 멈추지 않기에 끝나는 영원은 보지 못한다. 우주의
질서 그 무엇이 끝나는 것을 보아야 영원이 영원인지 아닌지를 알터인데 모르니 영원일 수밖에 없다.
 현재란 말은 영원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역시 동일한 경계지대이다. 언제 어떤 위험으로 생명을 잃는다면 영원은 바람처럼 지금 바로 옆에 있기도 하다.

3. 시적 사유의 세계

시적 사유의 세계는 바로 모든 삶의 양태들 경계 지대이다. 유한과 무한의 경계 지대이다. 모든 사물과 사물 사이의 시간 경계, 공간 경계, 기능의 경계, 가치의 경계, 사고방식과 의식과 인식의 차이의 경계 등이고 나아가 결국 인간 의식의 지배자인 모든 언어의 경계계이다.

우리는 늘 경계지대에서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리며 살아야 하는 지점에 있다. 철학의 다양한 관념이나 개념도 다 경계 지대의 산물이다. 어느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도 사유의 세계로 오르는 지상의 섬돌 위다. 즉 문원이고 시원이다. 누군가가 오래 지나친 기분이 드는 역사이고 한 마을의 통치지역이다. 실은 이런 중요한 무엇의 주체적 실체를 지나치는 기분이 드는 자리에 늘 우리는 산다 누군가는 나의 진짜 존재일 수도 있고 내가 그리는 이데아가 거기일 수도 있다. 늘 중요한 것이 잡히지 않고 유보되는 세계에 미끄러지며 우리는 산다. 확신할 수 없는 자리에서 산다. 마치 어느 공원 같은 곳을 비켜가는 낯선 세계에 들어 우리는 산다.

우연으로 사는 거라면 내가 태어난 것도 나에게는 우연이다. 내가 나를 생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피투되고 소여된 것이다. 그것은 늘 임시 지대이다. 필연의 지대가 온다면 그것은 죽음의 지역이 되는 모순이 인생이다. 참 이율배반 지역, 아이러니한 세계가 생명의 세계이다. 허무, 염세 사상이 이런 데서 나온다. 초인 사상도 이래서 나온다. 냉정한 사물들, 나를 비껴가는 것들 버리고 가는 것들, 차가운 것들, 늘 결핍의식, 역리지객의 나그네 의식, 배고픔의 굶주림 의식, 이곳이 사는 곳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함 경계 지역에서 울고 있는 신세. 이것이 생명의 실체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사물이 다 이렇게 울고 있는 슬픈 사정에 있는데도 모르고 사는 것들, 무지의 것들을 다양한 경우에서 찾아 낼 수 있고 또 알고 숨기는 것들을 훔쳐볼 수 있다. 귀신같이 이를 알아 폭로하는 자가 시인이 아닌가 한다. 늘 경계지대에 나타나 샅샅이 뒤지는 사람, 즉 시원이나 문원에 들어 사는 식자우환인 환자가 시인이다.

그래서 이 경계 지대에서 가장 핵심인 인간의 삶(생명)에 대한 실상 또는 존재 형식은 필연과 우연의 문제로 계속 경계 지대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문제의식이 생긴다는 것. 우연으로써 생명 현상을 실감하며 그렇게 존재 형식을 취하면 부유하는 떠돌이고 불안한 생명의 실존이 필연인데도 인생은 일회성으로 종말되는 반복이 실존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고 완전한 필연이고 불변의 영원함이다. 이 근원적 존재 형식으로 해서 인간은 어떤 방식의 존재 형식들도 필연은 다 허물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죽음처럼 확실한 필연 존재 속에서 무엇이든 생명의 보장이 없고 임시의 우연적 관계가 오히려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것만 영원이라고 보이지 않는 존재는 인간 한 종뿐이다. 절대시간 존재의 차원이다. 그래서 이 세상 생명체에는 절대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상대적 시간 내에 있는 존재는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즉 죽지 않는 것은 현상계 세계 내의 생명체가 아니다.

따라서 우연이란 말의 개념은 현상 세계 내의 존재이고 무엇이라도 만나야 사는 생명체의 실존적 만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생명체의 필연이다. 차원이 다른 영원과 우연은 비교 자체가 비논리이다. 범주 자체가 다른 세계를 동일 범주로 보는데는 이성이란 선험성이 작용 안 된다. 따라서 비논리다.

이제 이상과 같은 입론으로 우리는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지향하는 한 가치로서의 숙원인 시원이나 문원으로의 입문을 통해서 살아 있는 현재에서 모든 번뇌의 울타리를 풀어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순간의 시적 사고도 우리는 지금 경계 지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장이고 실제이다. 이런 것이 생명은 늘 경계 지대에서만이 실존하는 존재 형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이고 우리가 시가 그 자체 실체다.

아바타란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모든 존재는 아바타이다. 타 존재가 의미를 주는 대로 기능을 하는 관계 존재이다. 꽃을 보면 꽃이 시키는 대로 존재하며 사는 아바타다. 나도 타 존재가 내게 지시하는 대로 하는 것의 무아가 실재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싶다.

*2020 문심 평론

<참고> 전문수 교수

1. 기존 강의의 복습
*.시적 사물의 존재론
가. 사물(현상계)과 이데아(이상계 절대이념 :초월적 절대자)관계
불안하고 미완의 모든 사물들은 서로 분리된 채 이데아의 지향과 이데아의 지배를 받는 다--2 원론적 존재론 --(*인간은 중개자적)---플라톤
나. 사물(현상계)이 인간의 이성 능력 (이 중심이 되어)과 결합한 채 이상계적 이데아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1원론적 존재론--인간이 주재하는 자(이성 중심 구성력) ---칸트

다. 사물(현상계)과 실존(현상학) 관계--1원적, .2 원적 존재론과의 단절론으로 존재는 현상계의 실존과 현상에 의해 지배되어 존재가 결정된다. 사물 간의 실존적 관계에 의해 존재는 의미가 계속 미끄러져 구조화가 되지 않는다. 사물은 본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 다.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훗설 등 실존주의자들 오늘날의 포스트 모더니즘, 시뮬 라르크 시뮬라시옹( 사회학 )
라. 실 제 :예
소나무: 1)이데아, 절대자의 산물, --2) 인간의 구성물-- 3) 세계 -내- 존재

* 시원의 기본개념
詩(시)園(원)이란 한 편의 시가 들어가서 살고 있는 세계- 내- 사물(존재)들의 의미 있는 구성의 시간적, 공간적 동산을 가르켜 부른 이름이다.
이 시원에는 사물들 각자가 하나의 세계면서 이들 세계들이 어떤 의미 체계 내지 사유체계를 새롭게 응집해서 시적 미학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다. 이곳에는 시 작품들 마다 자신의 시론을 전개하고 있다.
1) 참신한 주제의식에 의한 시어들의 적절한 제자리 모습
2) 시적 상관물들 즉 사물들의 매력적인 합류 모습
3) 구성이 미학적 기능을 다해 서로 대화 되고 있는 모습(예; 기, 승, 전, 결의 변증법적 절묘한 이행 등)
4) 시적 형식의 새로운 개발 실천 모습
5) 새로운 사물의 존재론을 개척하는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는 우리의 생명 활동이 실존하고 있는 가장 외연이 큰 세계이다.이 큰 세계 안에 자연과 인간관계의 세계, 사회와 인간관계의 세계, 사물들과 인간과 관계 세계, 인간과 인간관계 세계, 개인과 개인관계 세계 등등 (더 세분하면 무한 세계일 것) 그래서 사물들은 이런 관계 속에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 거기에 들어가 살고 있다. 큰 세계에서 작은 세계로 겹겹이 싸여서 살고 있다. 인간은 한마디로 세계 내 존재로 산다.
시는 이런 세계 구조를 두루 사유한 시원을 만들어야 큰 시를 얻는다

2. 사물 속성

모든 개별 생명활동은 이런 대상 존재들을 어떤 인식의 형식들로 새로운 생명 불꽃을 일으키는 가이다. 이런 이해를 위해서는 사물의 속성들을 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하다. 그래서 나는 좀 무리가 있더라도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개의 범주의 존재 형식들을 권하고 싶다.
가령 쉽게 사물의 속성을 본질적 속성과 偶(우)有(유)적 속성으로 나누어 볼 때와 이 속성들이 실제 세계 내에서는 어떻게 그 속성들이 의미구조를 이루는 가이다.
즉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원에서는 시공적 조건에 따라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본질성과 우유성의 구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 삼각형이 있다고 하면 세 변은 삼각형의 본질이다.
그러나 우유적 속성은 삼각형의 각의 예각이나 둔각들, 변의 길이들은 무한으로 변수이다. 그래서 삶의 본질은 세 변이 본질 같지만 실제 세계 내의 삼각형 생명은 세 변이 아니라 우유적 속성들인 예각들이나 변의 길이, 삼각형의 크기들이다.
이처럼 세변의 본질이 이데아라면 현상계 개별적 실체의 삼각의 본질적 삶의 생명활동은 상대적인 다양한 우유적인 속성의 개별 존재들이 생명으로 불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존재를 지배하는 속성들의 개념을 묶은 것이 범주라고 쉽게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형식들은 이런 세계 내의 생명활동들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오 본다.
물론 이 범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적 존재의 상부 구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지만. 이원론적 존재론이든 일원론적 존재 관점저이든 간에 그리 생각을 해둔다.
이 법주는 존재의 형식을 사물 그 자체 속성으로 보아서 인간의 정신적 인위적 피조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저 일반적 형식의 존재론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 범주들은 일찍이 모두에게 아래와 같은 분류로 널리 인구에 회자 돼 왔다.
한 사물의 세계는 이렇게 그 속성의 법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①이 실체 범주이고 나머지 9개는 속성의 범주에 속한다.
① 무엇일까? (실체 혹은 본질 substance)
② 얼마나 있을까? (양 quantity) = 양quantity은 다시 분리(이산)량(number=discrete quantity) 과
+ 연속량(continuous quantity)으로 나뉜다.

③ 어떻게 있을까? (성질 quality)
④ 다른 무엇에 대하여 어떨까? (관계 relation)
⑤ 어디에 있을까? (장소 place)
⑥ 언제 있을까? (시간 time)
⑦ 위치 혹은 자세 (position)
⑧ 상태 혹은 소유(state or habitus, habit)-어떤 설벽, 체질, 심성적 습관
⑨ 어떤 것을 하는 것인가? (능동 action)
⑩ 어떤 것을 받는 것인가? (수동 affe〉

그래서 우리들이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사물들( 존재)을 현상 세계의 실제에서 늘 이런 정도로 살펴보아도 큰 과오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원의 질료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 내 개념을 다시 정립해 두기로 한다.
세계란 즉 세계 내로 지금 이 현상계의 사물이 다른 여러 사물들의 공존하며 공생 관계에 있는 상태를 말한다. 소나무 한 포기는 여러 현실 조건의 사물 현상들과 함께 공생한다. 즉 세계 안의 존재이다. 그리고 개벌 사물 자체도 그 내부는 다시 이와 같은 원리고 이루어졌으리라고 추측하니 역시 세계라고 보아도 된다.

이상과 같은 이론을 전제로 해서 시원을 시의 존재 세계를 설정하자는 것이다.
예시한 시 작품에서 보인 <공원원의 전개>와 같은 모델로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공원과 같은 세계 내에서 자신의 삶을 지켜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원은 시를 지켜주는 정원이고 시적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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