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that is 공부거리

사물의 존재 원리와 시의 이해- 전문수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3|조회수22 목록 댓글 0

 

사물의 존재 원리와 시의 이해-신춘문예 럭키슈퍼 해설

전문수 창원대학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평론 추천완료, 경상남도문화상 등 수상, 창원대 인문대학장, 경남문협·마산문협 회장 ※경남 의령 출생. 1964년 《경향신문》. 1970년 《중앙일보> 동시 당선, 1981년 (마산문협회장, 초대 경남문학관장 역임. (사)의령예술촌 명예이사장, 창원대학교 명예교수


사물들은 타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선험적 능력을 태초에 갖고 나온 것들이다. 사물은 이 능력을 침묵하다가 타 사물과의 관계를 누군가 자의식하게 되면 숨긴 묵언으로 응답하여 자기 존재의 기능을 드러낸다. 보고자 하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란 현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인간 이해요 해석이다.

우리가 자주 버릇처럼 쓰는 이치란 말은 가장 기본적인 궁리가 격물치지란 말이었다. 마치 오랜 화두처럼 들렸었다. 뜰 앞 잣나무 한 그루가 참 존재의 이치라면 이 화두를 격물치지로 푸는 상징성이 이해된다존재의 본질이 실은 바로 모든 사물들이다. 어떤 가치 있는
시작과 끝은 이 격물치지고 물격치지라는 좀 무리한 생각도 해본다.

격물치지는 인간이 사물을 깨닫는 입장이고 물격치지는 사물이 인간을 깨닫는 입장에서 본 것인데 선험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묵언하고 있뿐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다. 공자가 성인인 것은 사서의 대학에서 밝힌 이 한마디가 대도를 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불교의 연생 연멸과 중도의 원리도 다 같은 원리이다.
눈만 뜨면 무명을 모두 한탄하는데 이 무명이 무엇인지를 너무 어렵게 가르치고 있어서 더 무명을 만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이 공개념은 한자의 '빌 공'이라는 뜻풀이 때문에 습관적으로 텅 빈 것을 생각해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순간도 고정된 채로 실체를 갖고 있지 않다. 이런 변화의 대도가 생명의 기본 원리이다. 우주의 대도는 변한다는 이 동사 한 단어다. 연생, 연멸이란 것은 의미 없이는 변하지 않는다는 가치개념이 다분히 짙은 듯해도 생성 소멸의 연생연은 진리이다. 가치가 있든 없든 생성의 기본 원리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결합과 소멸의 조건 반사이다. 특히 생명 현상은 그 신비성에 대해 우리는 더욱 심각하다. 자체로 살아서 움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 생명을 현상에서 적응해서 성장하고 종자를 만든다는 이 신비는 연생 연멸로 쉽게 납득 안 되는 부분이 있으나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는 측면 때문에 객관적인 인과관계를 내세워도 그 신비함에 대한 이해는 정말 쉽지 않다. 왜 인간처럼 영적인 존재가 신을 찾아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신성성에 대한 문제는 아마도 예술성에서 답을 얻어야 하는 구경의 경지가 아닌가 싶다.

시는 이런 존재 문제에서 언어로는 도저히 접근 못 할 영역을 다룬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런 시를 자기가 경험대로 사물의 존재를 해석하거나 인식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작 시 자신은 전혀 하지 않는다. 언제나 시는 생명 현상의 순간마다의 거대 사건보고서에 불과할 수 있다. 우선, 시가 인식이란 것은 기존에 없던 존재를 처음 발견한다는 뜻이다현실 속에서 사물들이 하는 짓을 보고 거기서 있는 대로 본다는 관조와 보관이라는 기본자세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지난날의 어떤 체험을 근거로 재체험된다는 생각은 이미 이 시대 시를 보는 눈은 아니다. 항상 시를 어떤 언어로 만들지 말라는 강조는 이래서였다. 우리는 고집이나 애착이나 고착은 기존의 답습이거나 어떤 재해석도 기존 관념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시는 현실의 사물 관계를 새로운 존재의 개연성으로 시적 논리를 정연하게 하는 사유 구조를 지켜야 한다. 자기도 자신이 정확하게 사물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얼버무려서 마치 무엇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시인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안 된다.

자신을 속이는 자는 우선 시인이 될 수가 없다. 시인의 제일차적 덕목은 정직성이고 착한 순수성이다. 정직하지 못한 시는 읽으면 바로 속이 들여다보인다. 좀 어패가 있지만 사기 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문학은 자기의 인생을 위해 하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신학자들의 시론과 시를 읽어서 공부를 해야 한다. 자기 혼자 흥타령 하는 것은 밭매고 논매며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한풀이로 많이 했다. 문학은 이제 존재의 인식이라는 차원이 다른 예술이고 철학적 미학이 된 지 오래다.

2022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 작품을 보기 바란다. 어떤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지 그 시적 인식 내용과 표현의 지혜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 존재의 근원적 원리가 함께 숨어 있어서 매우 지혜가 넘치는 시라고 필자는 어떤 밴드 강의에서 매우 강하게 강조했다.

럭키슈퍼 /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벗겨지지만
맨발이면 어떻습니까?
매일 걷는 골목을 걸어도 여행자가 된 기분인데요
아차차 빨리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바람이 불고 머리 위에서 열매가 쏟아집니다
이게 다 씨앗에서 시작된 거란 말이죠

씹던 껌을 껌 종이로 감싸도 새것은 되지 않습니다

자판기 아래 동전처럼 납작해지겠지요 그렇다고
땅 파면 나오겠습니까?

나는 행운을 껍질째 가져다줍니다



이 시는 시의 핵심이 첫 연에 다 암시돼 있다. 시는 본래 말하고 싶은 말을 말로 하지 않고 말하는 농담같이 보이는 매우 썰렁한 형상화 표현법이 기본이다. 그렇다고 농담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반적 농담은 희롱이 많고 그야말로 장난하는 우롱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껍질째 먹는 과일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알맹이만 깎아내는 진실한 제시를 하지 못하지만 역시 잘 씹어먹다 보면 그 알맹이 맛이 있기는 하다는 간접 지시 표현이다실업자로 있는 젊은이들이 다 능력이 없어서 실업가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고 기죽지 말고 힘내라는 노련한 간접법이다. 럭키슈퍼란 제목의 담이다. 동네 슈퍼지만 얕보지 말라는 농담의 장이 되고 있다. 이 시 전체가 이런 식 농담 속의 진담 형태로 이끌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이 첫 문장을 받쳐주는 바로 다음 문장이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라는 이 문장이 바로 이 시의 주제문이라는 점을 못 깨달으면 이 시는 전혀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는 인간이 못 먹겠다고 해서 버려진 것이지만 까마귀에게는 더없이 귀한 것이다. 더구나 전봇대 아래까지 배려했으니 까마귀는 천혜를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전봇대 아래가 쓰레기 장소일 수 있지만, 전봇대로서는 불공평한 것이다.

우주의 존재에 대한 대도를 깨닫지 못한 점을 이 시는 가르쳐 주고 있다. 설령 시인은 존재의 대도까지를 못 깨달았다 해도 이것을 아는 자에게는 분명한 진리이다. 냄새 심한 인분이 귀한 거름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썩은 것만 골라서 먹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썩어야 거름이 된다는 것 다 안다. 그러나 이것이 존재의 대도 원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못하고들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한 자와 들어간 자의 차별은 본래 없다. 이 시의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만이 이런 차별로 인간의 우열을 가려서 피나는 경쟁을 하고, 시기 질투를 하고 산다. 이 지구에서 가장 성공한 생명체는 식물이라고 한다. 식물들은 최소한 함께 사는 존재의 우주 시의 눈은 비로 이런 눈이다. 불경의 모든 문장은 거의 다 시적 운율과 율격으로 구성되고 형상화로 비유되어 경전은 불입문자라고 하고 있다. 시가 바로 불입문자로 존재 그 자체이지 언어 문자로 설명하면 이미 시의 미학적 신비가 달아나 버린다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공자는 일찍이 시경이라 해서 세계 최초로 시 3백이 사무사라고 선언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