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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산선문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6|조회수42 목록 댓글 0

구산선문 원류를 찾아 (1)

"그대는 뱃길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구산선문조사들의 구법지도

한국 선종은 사조도신(四祖道信)의 법맥을 이어온 법랑(法朗)선사를 시원으로 북종선(北宗禪)을 이어온 신행(神行)선사 등 무수히 많은 선승들로부터 태동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신라인 구법승들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마곡보철(麻谷寶徹), 염관제안(鹽官齊安), 남전보원(南泉普願), 장경회휘(章敬懷暉) 등에게 대거 인가받았다. 스님들은 귀국한 이후 구산선문을 개창해 신라에 달마의 정통선법을 이어갔다.

821년 서당지장선사로부터 선법을 이어온 도의(道義)국사, 홍척(洪陟)국사, 혜철(惠哲)국사 등이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문(迦智山門), 실상산문(實相山門), 동리산문(銅裏山門) 등 3파를 형성하여 신라에 남종선(南宗禪)을 널리 전하였다.

그후 범일(梵日)국사의 사굴산문(山門), 무염(無染)국사의 성주산문(聖住山門), 원감현욱(圓鑑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지증(智證)국사의 희양산문(曦陽山門)이 개산했다. 이엄진철(利嚴眞徹)선사가 932년(태조15)에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후원을 받아 해주(海州) 광조사(廣照寺)를 창건, 맨 마지막 산문인 수미산문(須眉山門)을 개창했다. 구산선문은 115년간 형성되어갔다.

한편 구산선문을 이야기할 때 마조문하(馬祖門下)의 법손들이 선맥을 이어와 신라에 남종선풍을 널리 전하였던 것으로 평가되어왔으나, 신라왕자인 무상선사가 중국 오백나한 중 455번째 조사에 오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선종사의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2001년 백림선사에 세워진 <한중우의조주고불선다일미기념비>는 “정중무상은 일찍이 서촉(西蜀) 땅의 주인 되어 문하에 고족(高足)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있다. 마곡(麻谷)은 무염(無染)에게 인가하고 서당(西堂)은 도의(道義)에게 전하고 염관(鹽官)은 범일(梵日)을 배출하여 사자상승 법계를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구산선문중 7개파가 마조도일의 법손이라는 점에서 한국 선불교의 형성에 무상선사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지금부터 구산선문의 원류가 되는 조사의 흔적들을 하나씩 밝히려 한다.

뱃길로 당에 건너간 구법승들

신라의 구법승들은 사신행차(仕臣行次)의 배를 빌려 타고 구법행을 결행했다. 선덕왕 5년(784) 입당한 도의국사(道義國師)가 뱃길로 오대산(五臺山), 광저우(廣州)를 거쳐 장시(江西)에 이르러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로부터 인가받고 귀국하여 가지산문을 개창했다. 대관령국사 성황신으로 받들고 있는 범일국사는 태화연간(827)에 왕자인 김의종(金義琮)과 함께 당으로 건너갔다. 범일국사는 구도행각 중 저장성(浙江省) 해창(海昌) 염관원(鹽官院)에 주석하고 있던 염관제안선사와 만나게 됐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동국에서 왔습니다.” “수로(水路)로 왔는가? 육로(陸路)로 왔는가?”

“두 길을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 “해와 달에 동과 서가 무슨 장애이겠습니까.”

그 말을 듣더니 염관제안선사가 빙그레 웃으며 “실로 동방의 보살이구나”라고 찬탄하며 그를 인가했다. 염관제안선사의 법맥을 이은 범일국사는 회창 7년(847)에 귀국했다.

입당구법승들은 사신행차의 배를 빌려 타고 산둥성(山東省)의 판교진(板橋鎭)과 저장성(浙江省) 닝보항(寧波港)을 통해 구법길에 올랐다. 이들은 장시성(江西省)과 저장성(浙江省) 염관진(鹽官鎭), 안후이성(安徽省) 남전촌(南泉村)을 찾아가 조사의 심인을 받고 중국에 머물다가 귀국길에 올랐다. 대부분 장보고선단(張保皐船團)을 통해 청해진항으로 귀국하여 구산선문을 개창하여 신라에 달마선법을 전승해갔다. 장보고선단을 통해 당과 신라에 길이 이어지면서 밍저우(明州)항을 통해 실크, 자기와 차 등이 건너왔다.

구산선문 개창조사들의 흔적들

이엄진철선사가 구법한 진여선사

철감도윤선사가 감전선사에게 법맥을 이은 한후이성 남전사의 옛모습.

공공산 보화사 서선당

113년간(784-896년) 구산선문의 조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달마로 전승되어온 조사의 심인을 이어왔다. 구산선문을 연 조사의 입당 구법행로는 장시성(江西省), 안후이성(安徽省), 저장성(浙江省), 산시성(山西省) 등 4개의 성에 걸쳐 이루어졌다.

7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입당구법행은 8세기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고 당시 중국 선종계에서는 선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참설이 크게 유포됐다. 그 무렵 서당지장(西堂智藏), 마곡보철(麻谷寶徹), 장경회휘(章敬懷暉), 남전보원(南泉普願), 염관제안(鹽官齊安), 석상경제(石霜慶諸), 운거도응(雲居道應), 소산광인(疎山匡仁) 등이 신라인을 인가함으로써 소위 동유지설(東流之設)을 이끌어냈다.

마조의 법손인 서당지장선사의 법맥을 이어온 도의, 홍척, 혜철선사가 구법한 장시성에 자리한 공공산 보화사는 여전히 말없는 가운데 선법이 도도하게 흘러갔다. 마조의 법손인 남전보원선사의 법맥을 이어온 철감도윤(澈鑒道允)선사가 구법한 안후이성(安徽省) 츠저우(池州)의 남전촌(南泉村)은 폐허가 되었다가 10년 전 복원되어 남전의 선풍이 이어져가고 있다.

범일국사가 염관제안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던 저장성(浙江省) 염관진(鹽官鎭)에 있는 염관원은 폐허가 되었다. 염관원은 여러번 법란을 겪으면서 안국사(安國寺)로 바뀌었는데 항주만(杭州灣)이 시작하는 전당강(錢塘江)에서부터 시작된다. 염관과 범일국사가 나눈 대화 중, “그대는 몇 걸음에 왔는가”라는 문답을 절묘하게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뱃길에서 왔는가 아니면 걸어서 왔는가”라는 문답은 바로 안국사(安國寺)가 시작되는 전당강(錢塘江)의 자연 풍광을 그대로 노래한 듯했다.

마곡보철(麻谷寶徹)선사에게 인가를 받고 돌아온 무염(無染)국사가 구법한 산시성(山西省) 융지시(永濟市)를 방문하고 여러 문헌을 찾다가 설화산(雪花山)이 옛 마곡산(麻谷山)이라는 사실도 확인하게 됐다. 일본 선학계도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마곡암도 발견했다. 마곡암은 중국 5대 총림에 자리매김 되었다.

봉림산문(鳳林山門)을 연 장경사(章敬寺)는 서안(西安)에 있다. 원감현욱선사가 마조도일선사의 법제자인 장경회휘선사의 법을 이어받고 귀국해 창원에 봉림산문을 열었다. 구산선문 중 맨 마지막 산문인 수미산문을 연 이엄진철선사가 구법한 장시성 운거산(雲居山) 진여선사(眞如禪寺)는 중국의 모범적 선종사찰로 농선병중(農禪幷重)을 실천한 위앙종(仰宗)의 중흥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구산선문 원류를 찾아 <2>

한국선종의 조정 공공산 보화사

“강서(江西)의 선(禪)이 모두 동국(東國)으로 건너가는구나”

불교신문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

신라의 도의, 홍척, 혜철선사가 구법한 보화사.

 

공공산 보화사를 찾아 장시성 난창(南昌)에서 저녁 열차를 타고 남단하여 감주시(州市)로 향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감현(縣) 전촌향(田村鄕)까지 가야 공공산으로 갈 수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이었다. 이렇게 험난한 공공산을 찾아간 까닭은 서당지장선사로부터 선맥을 이어 도의, 홍척, 혜철선사로 이어져간 ‘말 없는 말 법없는 법’의 실체를 찾기 위해서였다. 장시성 감주시 감현 전촌향에 자리잡고 있는 공공산은 멀리 대수령(大瘦嶺)에서 뻗어진 줄기가 이어져, 북쪽으로 구불구불 낙맥하였으며 주위에 둥글게 감싸안겨 얼핏 보아도 보배로운 땅이다 보화사 산문 입구에는 보화고사(寶華古寺)라고 쓰여진 편액이 반긴다. 편액 밑으로 양쪽에 ‘천하명산마조홍주제일(天下名山馬祖洪州第一)도량’ 이란 주련이 걸려있다. 서당지장의 선법을 찾아 한국에서 왔노라고 말씀드리자 석회창(釋會昌) 주지스님이 반갑게 맞았다. 회창스님은 보화고사 관련 사료들을 꺼내면서 신라의 오교구산(五敎九山) 형성과 보화사 관련 내용을 소개했다.

“한국불교는 구산선문을 형성해 갔는데 가지산파, 실상산파, 동리산파가 서당지장선사에게 참학(參學)하여 심인(心印)을 이어갔다.”

도의는 832년에 귀국하여 가지산문을 개산했고 혜철은 814년 입당하여 공공산을 찾아와 서당지장선사에게 인가받고 839년에 돌아가 동리산문을 개산했다. 홍척국사는 입당하여 공공산 서산당(西山堂)에서 지장(智藏)대사에게 수법하여 인가받고 돌아가 실상산문을 개산했다.

명 가정 연간에 편찬된 <감주부지(州府志)>에 따르면 “마조가 공공산에서 홍법할 때 서리산에서 같이 온 제자 도통(道通), 지장(智藏), 회해(懷海), 보원(普願)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남전보원(南泉普願), 백장회해(百丈懷海) 등이 마조로부터 심법을 이어받아 마조 입실 3대 제자가 되었다”고 전한다.

청 도광 15년(1835)에 세운 <중수보화산대웅보전비>에 따르면 산의 이름이 공공산인 것은 지형으로 인해 붙여졌으며 명나라 초기부터 보화라 했는데 보화사는 마조로부터 법을 받은 서당지장선사가 행화를 펼친 곳이다.

서당지장선사가 공공산에 주석하면서 서당선(西堂禪)을 펼쳐보인 공공산은 한국선불교의 조정(祖庭)이나 다름없다.

한국에 선을 전파한 도의·혜철·홍척국사

중국 선종계에서 선법이 동쪽나라로 흘러간다는 참설이 유포되던 신라말기 구법승(求法僧)들이 앞을 다투어 당 나라로 건너가 조사의 심인을 이어 귀국했다. 이들은 신라말 고려초에 구산선문을 개창했다. 도의국사는 선덕왕 5년(784)에 김양공(金壤恭)을 따라 배를 타고 구법길에 올랐다. 오대산의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광저우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장시성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선사를 뵙고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했다.

지장선사는 도의에게 마치 돌솥에 구슬을 얻고 조개 가운데 진주를 줍는 것과 같도다고 말하고 “진실로 법을 전할 사람이 도의 말고 누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인가했다. 이같은 사실을 접한 마조도일의 제자 백장선사는 “강서의 선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 있구나” 라고 말했다.

혜철선사는 현덕왕 6년(814) 8월에 부처님의 말씀을 좇아 서쪽으로 갔다. 혜철선사가 천길 물 위를 달려 발길 닿는 대로 가는 동안 여러 해가 바뀌었고 그가 마침내 찾아간 곳이 장시성 공공산 보화사다. 그는 서당지장선사를 찾아가 간절하게 스승의 예를 갖추고 여쭈었다.

“저는 동방에서 태어났기에 하늘과 땅의 길을 물어 중국에 와서 큰스님의 법문을 듣기를 청합니다. 만일 후일에 말 없는 가운데 말과 법없는 가운데 법이 바다 밖(신라)에 유포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지장선사가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부터 만난 듯하네.”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제자들 몰래 심인을 전해주었다. 이로써 말 없는 가운데 법을 받았으니, 장시의 선을 혜철이 잇게 된 것이다.

도의국사와 쌍벽을 이룬 홍척국사는 입당년대가 불분명하나 서당지장을 찾아가 선법을 이어왔다. 당시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으로 불릴 정도로 쌍벽을 이루었다. 홍척은 826년 실상산문을 열어 강서의 선법을 천하에 전하였다

서당지장선사는 속성이 요(廖)씨, 건화사람으로 8살 때 출가했다. 모습이 특이하여 관상을 보는 이가 “스님의 기골이 특이하여 비범하시니 반드시 법왕이 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선지가 뛰어난 선사로 알려지고 있다. 지장선사는 도의, 홍척, 혜철선사에게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신라로 건너간 서당의 선맥

보화사엔 보화 10보(寶) 중의 하나인 용천수(龍泉水)와 대죽(大竹)이 있으며 서당이 마조에게 차를 올렸던 차나무도 남아 있다. 대웅전 바로 뒤 채소밭 언덕 위에 자라고 있는 사람 팔뚝 만한 차나무가 서당이 손수 비벼 말렸던 차나무라고 말하는 보화사 회창스님은 보화사에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이 1천 년간 녹아 있었다고 강조했다.

<당공공산 서당시호 대각국사중건 대보광탑비명(唐公山西堂諡號大覺國師重建大寶光塔碑銘)>의 출현으로 호가 ‘대각(大覺)’, 당호가 ‘대보광(大寶光)’으로 밝혀짐으로써 서당지장선사의 선사상(禪思想)에 관한 연구가 빛을 밝히고 있다. 비문을 살펴보면 서당과 홍선유관의 관계를 밝힐 수 있다. 마조의 제자 중 유관은 북(北)을 종으로 삼았고 서당지장은 남(南)을 종으로 하여 동쪽 나라에 선의 씨앗을 뿌렸다. 서당지장선사가 도의, 홍척, 혜철을 인가하게 되자 마조의 법맥을 이어간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는 “강서의 선이 몽땅 동국으로 건너가는구나”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신라인을 경계했다.

현덕왕 14년(822)에 무염(無染)국사는 김흔(金昕) 일행과 함께 화성의 당은포(唐恩浦)에서 출발, 중국 산둥반도(山東半島)를 거쳐 낙양(洛陽)으로 발길을 옮겼다. 훗날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산한 무염국사가 불광사(佛光寺)에 이르러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으니 “내가 많은 사람을 겪었으나 그대와 같은 동국인을 본 적이 드물다. 뒷날 중국에 선법이 없어지면 동이에게 물어야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곡보철선사를 찾아갈 것을 권했다. 그후 무염은 마곡보철선사로부터 인가받고 귀국하여 성주산문을 개산했다.

서당지장선사의 묘탑.

천여 년 전 선종의 주무대인 장시성에서 마조문하인 서당지장선사가 일으킨 선종은 서당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 도의, 홍척, 혜철에 의해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문으로 이어져 그 법맥이 천여년 간 지속됐다.

○ 구산선문 원류를 찾아 <3>

보화사에서 확인한 三山의 근원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에 차 공양을 올립니다”

불교신문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

공공산 보화사의 서산당에 모시고 있는 서당지장선사 부도탑.

서당지장 선맥 신라로 건너갔다

신라말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로부터 선맥(禪脈)을 이어온 도의(道義)·홍척(洪陟)·혜철(惠徹)선사로부터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 실상산문과 동리산문이 태동되었다.

필자는 서당지장의 진영(眞影)을 살피다가 불조도영(佛祖道影)에 서당지장의 계보가 누락된 사실을 발견했다.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의 법통(法統)을 이어간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남전(南泉)과 백장(百丈)이 드러났다.

그중 마조의 3대 제자(서당·남전·백장)인 서당지장 선사가 선보에서 사라지고 그 뒤를 대주혜해(大珠慧海)로 이어져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한국 선종사 연구가들은 이 같은 사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았는지 궁금해져 <중국불학인명사전>에 남악회양(南岳懷讓)의 계보를 살피니 백장회해와 남전보원은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유독 서당지장은 당대의 처미(處微) 화상 단 한 사람만이 서당의 선맥을 이었을 뿐 중국 선보에서 조차 단절되었음을 도표로 확인했다.

서당이 혜철에게 전해준 ‘무설지설 무법지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란 화두가 아니었으면 서당의 선보를 자세히 살필 수조차 없는 실정이었다. 마조의 제자 중 서당지장 선사가 마조도일의 제일의 제자로 평가받아 왔는데도 서당이 중국 선보에서 사라진 것은 한국인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선종의 계보는 남악회양, 마조의 제자 백장회해(百丈懷海)로 이어지면서 마조의 제자 서당은 선보에서 존재가 없다. 따라서 서당지장의 법손(法孫)인 도의·홍척·혜철선사 또한 선보에서 존재가 없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서당지장의 법맥을 이은 신라의 도의·홍척·혜철 선사의 선맥은 고려의 태고보우(太古普愚)로 이어졌음을 공공산 보화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서당지장은 누구인가

경내에 세워진 ‘중건대보광탑비’에 서당지장선사의 생애가 자세히 기록돼있다. 

 

마조의 법맥을 계승한 서당지장 선사는 속성은 요(寥)씨로 중국 장시성(江西省) 남강(옛 건주) 사람이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13세에 마조의 제자가 되었다. 당시 서당과 백장, 남전보원 등이 마조의 입실(入室) 제자가 되었다.

당시 마조도일 선사를 따라 감주(州市) 공공산(公山) 보화사(寶華寺)로 옮겨 수행했다. 마조가 처음 장시를 개척했을 때 간 곳은 임천(臨川) 의황현(宜黃縣) 석공사(石鞏寺)였다. 마조가 공공산 서산당(西山堂: 현 보화사)를 개산하기 직전 잠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하루는 마조가 세 명의 제자들과 달이 중천에 떴을 때 함께 공공산 보화사의 뜰을 거닐다 마조가 넌지시 묻는다. “바로 지금 같을 땐 무엇을 했으면 좋겠는가?”

서당스님이 “공양하기에 딱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백장스님은 “수행하기에 좋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남전스님이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장(藏, 서당)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바다(海, 백장)로 돌아가는데 보원(普願, 남전)만이 사물 밖을 벗어났구나”라고 했다.

당대 서당지장 선사가 공공산 보화사에서 선풍을 드날리다가 원화9년(814년) 80세로 입적하자 장시(江西)관찰사 설방(薛傍)이 주도하여 이발(李渤)이 비문을 쓰고 헌종(憲宗)이 대선교사(大禪敎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목종(穆宗)이 장경 원년에 (820) 대각선사(大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새롭게 밝혀진 한국의 선맥

공공산 보화사 가는길.

공공산 보화사를 찾았을 때 주지 석회창(釋會昌)스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방장실로 우리를 안내하던 스님은 <보화사지>를 편찬 중에 있어 서당과 관련된 신라 관련 자료들을 요청해 왔다. 특히 필자에게 한국 선종의 조정을 찾은 한국인이 드문 이때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이 기쁘다고 말씀하셨다.

회창스님이 차 한 잔을 내어준 뒤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신라로 선종이 들어간 조정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중국 선승으로부터 듣는 가슴 벅찬 이 말에 필자는 감격을 받았다. 보화사 주지 회창스님은 <보화사 간사(寶華寺 簡史)>라는 근래 보화사 역사가 담긴 간략한 책을 건넸다. 책은 조선불교 삼산(三山)의 근원을 밝힌 간략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조선의 불문에 ‘오교구산(五敎九山)’이 있는데, ‘구산’이란 선종의 아홉 개 파벌을 지칭한다. 그 가운데서 가지산파(迦智山派), 실상산파(實相山派), 동리산파(桐理山波)는 모두 공공산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에게 직접 법을 이어받았다.”

이렇게 <보화간사>는 한국의 구산선문 중 3개파가 서당의 선맥을 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 선의 조정이 된 공공산은 신라의 도의가 가지산문을 열고, 홍척이 실상산문을, 혜철이 동리산문을 열어 구산선문의 시대를 열어 놓았던 땅이다. 예전에 장시성 지역의 선(禪)연구가인 허밍동(河明棟) 선생에게 “왜 서당의 후학이 중국 땅에서 인멸되었느냐”고 묻자 모두 신라승을 인가하면서 자연 중국인 제자를 길러내지 못하면서 중국 선보(禪譜)에서 존재가 희미해졌다고 고백한 바 있다.

서당이 구산선문에 영향을 끼친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스님이 난창(南昌) 우민사(佑民寺)에 <도의국사구법기념비>를 2008년 건립했다.

지관스님은 “신라의 도의, 홍척, 혜철조사의 구법처인 이곳에 구법기념비를 건립해 그 법은(法恩)에 보답하고자 한다”라며 “이 비문은 한국불교 조계종과 중국 임제종이 동근동조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한·중불교 교류 1700년과 한·중수교 15주년을 맞아 두 나라의 불교 간 신뢰를 더욱 돈독히 하는 징표로 영원히 종문의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도의국사 구법기념비가 세워진 난창(南昌) 우민사는 당(唐)나라 당시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로 서당지장 선사가 머물렀던 행화도량(行化道場)으로 알려지면서 도의국사 구법기념비가 건립되었다.

필자는 중국불교를 중흥시킨 허운대사가 중간한 <불조도영집(佛祖道影集)>에도 36대 조사의 반열에 서당이 빠져버린 현실에서 참담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신라로 선맥을 이은 서당지장의 영혼 앞에 차를 공양하여 그의 정신을 높이 받드는 것 또한 후학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 구산선문 원류를 찾아 <4>

남전선사의 법인(法印)이 모두 동국으로 간 까닭

선사가 일으킨 평상심의 차(茶)는 법류(法流)로 흐른다”

불교신문 최석환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 회장

남전촌 주변에서 만나게 된 수고우.

다시 깨어난 남전산(南泉山)

1999년 1월 신라 말기의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연 철감도윤(澈鑒道允)의 자취를 쫓아 안후이성(安徽省) 동릉시(銅陵市) 남전촌(南泉村)을 찾아갔을 때 남전사는 폐허로 남겨졌다. 끽다거(喫茶去) 공안으로 일세를 풍미한 조주종심(趙州從, 778~897)선사의 법형제 되는 신라의 철감도윤(澈鑒道允, 798~868)선사의 스승인 남전보원(南泉普願)선사가 선풍을 일으킨 남전사가 폐허로 남겨진 광경을 보고 참담했다. 신라말기 철감도윤선사가 구법(求法)한 남전사가 폐허 속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대숲을 헤치고 들어가 남전지묘(南泉之墓)라고 쓰여진 묘탑을 발견하는 순간 그 앞에서 합장을 하고 남전보원의 위대한 정신을 되새겼다. 그리고 대숲 주변에 자란 차나무들을 살피다가 천년 전 남전의 제자 조주종심의 끽다거 공안이 스쳐갔다.

남전의 제자 조주종심 선사는 스승의 평상심을 끽다거로 깨웠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하면 대력원년(大元年, 766)에 우두종의 혜충(慧忠)의 제자 도견(道堅)이 남전산에 은거하였다. 그로부터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정원(貞元) 11년 (795) 마조도일의 법맥을 이은 남전보원 선사가 남전산으로 들어와 회상을 열었다.

대화초년(大和初年, 827) 남전의 법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지양태수(地陽太手)로 있었던 육긍과 계원(契原) 문창(文暢) 등이 그의 법을 듣기 위해 산문을 열 것을 간청했다. 청을 받아들여 보원은 산문을 열어 홍법하기로 결심하고 산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1000여명의 학도가 몰려들었다. 그중 조주종심이 남전의 가르침을 받은 장사경잠(長沙景岑, ?~868), 자호이종(紫胡利踵, 800~880)과 신라의 쌍봉도윤(雙峯道允, 798~868)이 그들이다.

나의 종법(宗法)이 동국으로 가는구나

1999년 처음 남전사를 찾은 이후 남전사의 실체가 처음 드러났다.

신라 말 달마의 선법이 중원을 석권하게 되자 중국의 선종계에 선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참설(讖說)이 크게 유포될 때였다. 그때 신라의 유학승들은 당나라로 유학하여 조사의 법인(法印)을 받으려 중국행을 결행했다. 입당구법길에 오른 철감도윤(澈鑑道允)선사는 28세 때인 헌덕왕 17년(825)에 사신 행차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츠저우의 남전산에 주석하고 있는 남전보원 선사를 찾아갔다. 남전 선사를 만나자 제자의 예를 갖추니 첫눈에 도가 있음을 알고 말했다.

“우리 종의 법인(法印)이 몽땅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吾宗法印 歸東國矣).” 철감선사는 스승 남전선사가 열반(834)한 이후에도 13년 동안이나 당에 머물다가 당 무종(武宗)에 의해 회창법란(會昌法難)이 일어난 5년 뒤(845) 문성왕 7년(847) 4월에 50세의 나이로 귀국선에 올랐다. 철감선사는 귀국 후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산 자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쌍봉사에 주석하게 된다. 철감은 남전으로부터 이어온 선맥뿐 아니라 차맥을 함께 이어와 신라 땅에 다선일미를 전승해나갔다.

마조도일의 법맥을 이어간 남전보원은 자신이 일생동안 공부한 것을 모두 후학들에게 쏟아 부어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주종심(趙州從), 장사경잠(長沙景岑), 악주수유(鄂州茱萸), 백마담조(白馬曇照), 자호이종(子湖利踪), 행자감지(行者甘贄), 쌍봉도윤(雙峰道允) 등 1000여 명에 달한다. 그의 제자들은 대부분 고승대덕으로 모두들 그의 선법을 능히 전수하였는데 조주종심, 장사경잠, 백마담조, 자호이종, 쌍봉도윤 등은 모두 독자적 선풍을 열어 일방(一方)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쌍봉도윤은 그의 선법을 지니고서 신라로 돌아가 휴암절중(休巖折中)에게 전하여 사자산문을 개창하여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가 되었다. 남전의 제자 중 신라의 철감 선사와 법형제인 조주 선사가 나와 선차문화를 전승했다. 조주가 끽다거를 들고 나와 당대 영향을 끼쳤다. 근세의 고승 범해각안 선사는 선가에 전해온 조주의 화두를 강조했듯이 조선후기에도 조주의 화두가 선가에서 유행했다.

이류중행 실천하는 남전보원

남전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남전보원 묘탑.

마조의 법을 이어간 남전이 “소가 되고 말이 되라”고 평생을 질타한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외침은 바로 다선일여의 경계를 직관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남전의 속성은 왕씨이고 정주 신정현에서 태어나 30세가 되어서 회선사에서 호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강서(江西)로 건너가 마조문하에서 수선 안거, 마조의 800여 문도 중에 으뜸가는 법제자로 손꼽혔다.

마조선사의 3대 제자는 백장·남전·서당선사이다. “경(經)은 서당으로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으로 돌아가고, 남전만이 사물 밖으로 벗어났구나”라는 스승과 제자와 나눈 선문답을 통해 남전선사가 부각되었다.

마조로부터 사물 밖으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남전은 정원 11년(795)에 지양(池陽, 현 지주) 남전산에서 선지를 드높였을 뿐 아니라 30여 년간을 소에게 풀을 먹이고 논밭을 갈며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차나무를 경작하며 대중을 교화했다. 남전의 법을 이어 허베이성으로 옮겨간 조주는 그곳에서 다선일여 정신을 이어갔다.

1999년 봄 필자는 조주원을 탐방한 자리에서 징후이(淨慧) 화상으로부터 조주의 끽다거 공안에 대해 여쭈었다. “조주 끽다거의 끽다를 한마디로 말씀하신다면 화상께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징후이 화상은 찻잔을 들어 보이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조주 또한 대중들의 교화에 있어서 끽다(喫茶)로 대중을 제접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차학의 권위자인 야나기무네요시는 남전의 평상심이 그 아름다움을 낳은 어머니라고 평하기도 했다. 서여 민영규 선생은 남전이 외친 이류중행 사상이 고려 일연선사가 1260년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으면서 경초선으로 되살아났다고 기뻐했다. 경초(莖草)란 마우(馬牛)가 먹는 풀을 가르킨다. 문득 남전의 수고우 공안이 떠올랐다. 남전이 어느 날 수고우를 한 마리 끌고 승당 안으로 들어와 당내를 빙빙 돌았다. 수좌가 수고우의 등을 세 번 치자 남전이 빙빙 돌기를 멈추었다. 이때 조주가 수좌 앞에 풀을 한 단 가져다 놓았다. 수좌는 아무말도 못한 채 당황했다. 이것이 ‘수고우 순당 이라는 화두인데 남전은 수고우 공안에 대해 수없이 설파했다.

평상심도를 실천한 남전보원 선사

남전사지.

남전은 남전산에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로 대중을 이끌면서 많은 화두를 남겼다. 그중 남전선사가 차를 논했던 인선입차(引禪入茶)라는 화두를 통해 조주가 나와 끽다거를 제창했고 남전의 법맥을 이어 신라의 철감선사가 귀국한뒤 쌍봉사에서 다선일미를 실천했다.

<오등회원(五燈會元)>권3 ‘남전보원 선사’의 인선입차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전산 아래에 한 암주(庵主)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남전화상이 세상에 나왔는데 어찌 뵈러 가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암주가 “남전이 세상에 나왔다 하더라도, 설령 천불이 나왔다고 해도 나는 가지 않소”라고 말하였다. 남전이 듣고 조주(趙州)를 시켜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주가 바로 가서 예를 올리니 암주가 봐주지도 않았다. 조주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갔다. 다시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도 암주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조주가 “초야의 도둑이 대패하였습니다(草賊大敗)”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발()을 뿌리치며 돌아와 사부에게 알렸다. 남전이 “이제까지 암주를 의심하고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남전과 조주는 병에 차를 담고, 잔 3개를 가지고 암자 앞에 이르러 병과 잔을 땅에 놓았다. 남전이 “어제, 어제!”라고 말하였다. 암주가 “어제가 무엇이오?”라고 말하였다. 남전이 조주 등을 툭 치며 “나를 속였구나, 속였어!”라고 하며 옷소매를 뿌리치며 갔다. 남전이 조주를 데리고 차를 화두로 암주를 시험한 것으로 이는 선종사에서 인차입선의 중요한 공안이다.

남전선사가 일으킨 평상심의 차는 남전의 제자 조주선사가 끽다거를 일으켜 다선일미의 정신이 법류처럼 흘러갔다. 오늘날 남전산은 선종의 창(窓)이 되어 츠저우(池州)로, 신라로, 세계로 선종을 퍼져나갔다. 문화혁명 초 남전사는 역사상 가장 많이 훼손되었으며 동시에 역사적으로 말살되어 잔해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츠저우 사람들이 힘을 모아 남전사를 복원하여 남전선사의 평상심의 선사상은 대하(大河)가 되어 강물처럼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출처] 구산선문 원류를 찾아 【1】|작성자 잣골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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