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 선문을 찾아서-제1편 가지산문 보림사
| 구산선문이 열리다(開山 九山禪門) - 장흥 가지산 보림사, 남원 실상산 실상사, 곡성 동리산 태안사, 보령 성주산 성주사지, 강릉 사굴산 굴산사지, 영월 사자산 법흥사, 창원 봉림산 봉림사지, 문경 희양산 봉암사, 해주 수미산 광조사지 - <구산선문 법맥도 九山禪門 法脈圖> 초조 達磨(457~528) ㅣ 2조 慧可(?~593) ㅣ 3조 僧璨(?~606) ㅣ 4조 道信(?~651) -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 智證道憲(824~882) - 양부 - 정진긍양 -희양산문 ㅣ (경상북도 문경 희양산 봉암사, 935년) 5조 弘忍(?~674) ㅣ 6조 慧能(?~718) - 청원행사 - 석두희천 - 약산유엄 - 운거도응 - 眞澈利嚴(870~936) ---수미산문 ㅣ (황해도 해주 수미산 광조사, 932년) 7조 南岳懷讓(677~744) ㅣ 8조 馬祖道一(709~788) ---------- 장경회희 --- 圓鑑玄昱(787~869) --- 진경심희 ----봉림산문 ㅣ (경기도 여주 혜목산 고달사) (경상남도 창원 봉림산 봉림사, 890년) ㅣ ㅣ----- 남전보원 ---澈鑑道允(798~868) --- 징효절중 -----------------사자산문 (전라남도 화순 쌍봉산 쌍봉사)(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882년) ㅣ ㅣ ㅣ----- 마곡보철 ---朗慧無染(801~888) -----------------------------성주산문 (충청남도 보령 성주산 성주사, 847년) ㅣ ㅣ ㅣ---- 염관제안 --- 通曉梵日(810~889) -----------------------------사굴산문 (강원도 강릉 사굴산 굴산사, 847년) ㅣ ㅣ ㅣ---- 西堂智藏(735~814) --- 寂忍惠哲(785~861) ------------------ 동리산문 (전라남도 곡성 동리산 태안사, 839년) ㅣ ㅣ ㅣ--道義國師(?~?) --- 廉居 --------------普照體澄 -가지산문 (강원도 양양 설악산 진전사, 821년)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 860년) ㅣ ㅣ--證覺洪陟(?~?) -------------------------------실상산문 (전라북도 남원 지리산 실상사, 828년) 구산선문 계보도, NAVER지식백과, 시공불교사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신라말기 부패해 가는 귀족중심의 교종(敎宗:종교의 교리,부처님의 말씀만 중요시하는)을 벗어나서 깊은 산속에 참선(參禪)을 중심으로 일어난 九山禪門을 말한다. 처음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일으킨 도의선사(道義禪師)를 비롯하여 혜철(慧徹), 홍척(洪陟) ,현욱(玄昱),도윤(道允), 낭혜(朗慧), 범일(梵日), 도헌(道憲), 이엄(利嚴)등 9명의 선사(禪師)가 창건한 선종(禪宗)을 이른다. 그중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先生은 신라사산비명(新羅四山碑銘)중에 성주산문(聖住山門)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명(白月葆光塔碑銘)과 희양산문(曦陽山門)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지은것이 유명하다. 九山禪門 (구산선문) 1. 迦智山門 가지산문: 道義 도의 (장흥 보림사) 2. 實相山門 실상산문: 洪陟 홍척 (남원 실상사) 3. 桐裏山門 동리산문: 惠哲 혜철 (곡성 태안사) 4. 聖住山門 성주산문: 無染 무염 (보령 성주사) 5. 闍崛山門 사굴산문: 梵日 범일 (강릉 굴산사) 6. 獅子山門 사자산문: 道允 도윤 (영월 법흥사) 7. 鳳林山門 봉림산문: 玄昱 현욱 (창원 봉림사) 8. 曦陽山門 희양산문: 道憲 도헌 (문경 봉암사) 9. 須彌山門 수미산문: 利嚴 이엄 (해주 광조사) * 사굴산문의 闍자는 화장할 사자임, 혹은 망루 도 제1편 장흥 가지산문 보림사(長興 迦智山門 寶林寺) 一. 양양 진전사지(襄陽 陳田寺址)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37번지외3필지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진전사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이자 『삼국유사』 를 지은 일연스님이 14세 때 출가한 절로 이름나 있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에게 공부하고 귀국하여, 당시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 불교에 선종을 소개하였다. ‘중국에 달마가 있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었다’고 평가를 받는 분으로 도의선사의 법맥은 염거(廉居)화상과 보조선사 체징(體澄)으로 이어져 한국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의 폐불정책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에 있는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하고 떠났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발굴조사 결과,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를 새긴 기와 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당초무늬 암막새기와,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들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국보 제122호)과 석조부도(보물 제439호)가 남아있다. 진전사터는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 유적이며, 신라 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에 그 싹을 틔운 곳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가지산문의 법맥도(迦智山門 法脈圖)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 -> 도의(道義, 생몰년 미상) -> 염거(廉居, 미상~844) -> 체징(體澄, 804~880)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진전사지(陳田寺址)는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즉 8세기말에는 창건(創建)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절이며, 선종(禪宗)의 대찰(大刹)로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개산조(開山祖)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신라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래동안 은거(隱居)하던 곳이다. 또한 이 절에서 염거화상(廉居和尙)이나 보조선사(普照禪師)와 같은 고승들이 사자상승(師資相承)하였으며 일연선사(一然禪師)도 이곳에서 체발득도(剃髮得道)하였다고 한다. 이 절의 폐사(廢寺) 시기(時期)는 범우고(梵宇攷)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기록에 없는 점으로 볼 때 16세기경에는 이미 폐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으며, 사지명(寺址名)을 알 수 있는 '진전(陳田)'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연꽃무늬수막새, 당초무늬암막새, 물고기무늬기와 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삼층석탑과 석조 부도가 남아 있다. 진전사지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위치: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진전사지삼층석탑은 높은 지대석 위에 이중기단을 설치하고, 3층 탑신(塔身)을 조성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석탑이다. 밑 기단에는 연화좌(蓮華座) 위에 광배(光背)를 갖춘 비천상(飛天像)이 각면에 2구씩 조각되었고, 윗 기단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각면에 2구씩 조각되었다. 탑신과 옥개석은 한개의 돌로 간결하게 만들었는데, 옥개석(屋蓋石)은 받침이 5단이고 추녀의 네 귀가 약간 치켜 들어 경쾌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풍경(風磬)이 달렸던 자리가 남아 있다. 초층옥신 상면 중앙에는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1변길이 32.5㎝,깊이 11.5㎝)이 있다. 이 탑은 높이가 5m로 상륜부(相輪部)가 모두 없어졌으나 완숙하고 세련된 불상 조각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이다. 진전사지부도(陳田寺址浮屠) 보물 제439호: 통일신라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산1 멀리 동해바다가 내다보이는 진전사터 안의 작은 언덕 위에 서 있는 탑으로, 진전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추정된다. 도의는 선덕왕 5년(784)에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821년에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부도는 일반적인 다른 부도와는 달리 8각형의 탑신(塔身)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아래부분이 석탑에서와 같은 2단의 4각 기단(基壇)을 하고 있어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위로 탑신을 괴기 위한 8각의 돌을 두었는데, 옆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여 둘렀다.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석탑을 보고 있는 듯한 기단의 구조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도의선사의 묘탑으로 볼 때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이 아닐까 한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은 데서 오는 단정함이 느껴지며, 장식을 자제하면서 간결하게 새긴 조각들은 명쾌하다. 이 부도는 8각형(八角形)의 탑신부(塔身部)를 구성하고 있으나, 기단부(基壇部)가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方形) 이중기단(二重基壇)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하층기단은 지대석(地臺石)과 중석(中石)을 한돌로 붙여 4매로 짜고, 각면에는 양 우주(兩隅柱)와 탱주(撑柱)가 뚜렷이 모각(模刻)되었으며, 갑석(甲石)도 2매로 I자형(字形) 은정(隱釘)으로 고정시켰다. 상층기단 중석은 4매로 구성되고 각면에 탱주가 있으며 갑석은 2매로 밑에 부연(副椽)이 있다. 윗 면에는 8각형의 받침이 있고 이 위에 8각의 다른 돌로 괴임대를 놓아 탑신(塔身)을 받게 하였는데 주위에 16엽(葉)의 앙련(仰蓮)이 돌려져 있다. 탑신은 8각으로 아무 조식(彫飾)이 없으며 옥개석(屋蓋石)도 8각으로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이 경쾌하다. 조성년대(造成年代)는 9세기 중반으로 선종(禪宗)의 종조(宗祖)인 도의선사(道義禪師)의 부도탑(浮屠塔)으로 추정된다. 二. 양양 선림원지(襄陽 禪林院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미천골(米川谷)유래 이곳에 있었던 사찰이 번성할 당시 한끼 쌀 씻은 물이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이르러 미천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禪林院址) 선림원은 804년경에 창건되어 홍각선사(弘覺禪師)가 번창시킨 사찰로 당대 최고 수준의 선수련원으로 알려지며, 당시 대규모의 절(一說 억성사億聖寺)로 자리잡고 있었으나 10세기 전후에 대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외 3점과 터가 남아 있는 문화유적지이다. 진전사에서 도의에게 師事받은 염거는 법을 전수받은 후 억성사로 옮기는데 이곳 선림원지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에서 제자 체징에게 법을 전해 주고 체징은 장흥 보림사에서 선종의 최초의 산문인 가지산문을 창건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禪林院址 三層石塔) 보물 제444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아리 이 석탑은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건립된 높이 5m의 3층 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전형적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6매의 판석(板石)으로 짜고 하층기단(下層基壇) 면석(面石)은 대체로 각면 2매씩 8매의 장대석(長臺石)으로 구성하였으며 갑석(甲石)은 6매로 덮었다. 상층기단(上層基壇) 면석은 각면 2매씩 8매의 판석으로 구성하여 양 우주(兩 隅柱)와 탱주(撑柱)로 구획한 후 각각 팔부중상(八部衆像)을 1구씩 조각하였으며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덮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층 1석씩으로 조성되었는데 조식(彫飾)은 없다. 상륜부(相輪部)는 2층 단이 있는 노반(露盤)이 있고, 그 위에 보주형(寶珠形)의 작은 석재가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조각이 섬약(纖弱)하고 석재 구성도 규율성을 잃어 9세기 이후의 제작으로 추정된다. 탑 앞에는 안상(眼象)이 있는 정례석(頂禮石, 혹은 拜禮石)이 남아 있으며 기단 부근에서 소탑(小塔) 64기(基)와 동탁(銅鐸) 1개가 발견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禪林院址 삼층석탑(보물 444호) 各四面에 二像씩 八部衆像을 돋을새김(陽刻)한 모습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삼층석탑 앞 拜禮石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1985년 7월부터 1년이상에 걸쳐 동국대학교 발굴조사에 의해 順應法師에 의하여 창건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48년에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禪林院鐘은 오대산 월정사에 보관하던중 6.25때 화재로 일부파손되었으나 현재 그 일부가 국립춘천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 선림원종의 銘文에 의하면 804년경에 해인사등 화엄종 계통의 의해 조성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대 발굴당시 9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기와가 많이 출토되어 지금 남아있는 삼층석탑,석등,부도,홍각선사탑비 귀부,이수등을 보아 알수 있다 가람배치는 삼층석탑뒤에 정면 3칸,측면 4칸의 맞배지붕 금당건물의 주춧돌이 완전하며, 오른쪽엔 금당과 잇대어 또 하나의 건물지가 있었음을 주춧돌로 알수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禪林院鐘은1948년 강원도 양양군 서면 왕이리 선림원지에서 출토되어 1949년 오대산 월정사로 이관 보존되던 중 6.25로 월정사가 소실될 때 함께 파손되었음. 신라 804년(애장왕 5)에 제작되었다. 높이 96cm, 구경 68cm이다. 종신(鐘身)의 내부에 이두로 된 명문이 있어 주종연대는 물론 승려와 시주자 등의 제작 관련 인물들을 알려주고 있는 매우 귀중한 종이다. 이 종이 출토된 사지에는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가 있어 선종 소속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종이 주조된 당시부터 그러한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禪林院鍾銘의 詳細 貞元卄年 甲申 三月 卄三日 當寺鍾成內之,古尸山郡 仁近大乃末 紫草里 施賜乎 古鍾 金 二百八十廷,當寺古鍾金 二百卄廷,此以 本爲內,十方旦越 勸爲成內在之,願旨是者, 法界有情 皆佛道中到內去,誓內 時寺聞賜主 信廣夫人君 上坐 令妙寺 日照和上 時司 元恩師 鍾成在伯士 當寺 覺智師 上和上 順應和上 良惠師 平法口 善覺師 如於口 日晶誓師 宣司 禮覺師 節唯乃 同說師 해설문 정원20년 갑신(804년 애장왕5,당 덕종20)3월23일에 당사의 종이 이루어지다.고시산군(옥천) 의 인근 대내말과 자초리가 시납하신 옛종의 쇠 280정과 당사의 옛종의 쇠 220정, 이것으로 밑천을 삼고 사방의 단월들이 권하여 이루었다. 원하는 것은 법계의 유정이 다 불도에 이르러 감이다.서원할 때 들으신 님은 신광부인님이시다 상좌 영묘사의 일조화상, 당시 감독 원은스님, 종을 만든 박사 당시의 각지스님, 상화상 순응화상,양혜스님,평법스님,선각스님,여어스님,일정서사, 선사 예각스님,당시의 유나 동설스님 한자 時司: 감독,伯士: 박사,覺智師: 애장왕당시 설악산 禪定寺에서 설법함, 順應和上: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과 동일인물(?) 애장왕의 후원으로 利貞과 함께 802년 해인사창건(?),成內之: 吏讀로서 '이루었다'의 뜻,施賜乎: 이두로서 '베푸신'의 의미 令妙寺: 경주의 靈妙寺(?)- 선덕왕4년(635)창건,旦越: 檀越(施主) [한국고대금석문 제3권에서 인용함]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 부도(禪林院址 浮屠) 보물 제447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부도는 원래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의 기단부를 놓고 그 위에 탑신석(塔身石), 옥개석(屋蓋石), 상륜부(相輪部)가 갖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부도는 일제 침략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1965년에 각 부재(部材)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지금은 기단부만 남아 있다. 원 위치는 뒷산 중턱의 50m쯤 올라간 곳이다. 네모난 지대와 8각의 하대까지가 같은 돌로 2매로 구성되었는데 지대 부분은 땅위에 드러난 부분만 다듬었다. 하대 8각의 각면에는 각기 안상(眼象)이 1구씩이 있으며, 안상안에 교대로 사자 1쌍씩 4쌍이 새겨졌다. 하대 위에는 둥근 모양의 연화대석 (蓮花臺石)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간주(竿柱) 모양의 중대석과 원형평면의 상대석 (上臺石)이 한돌로 만들어져 놓여 있다. 중대석 표면에 운용문(雲龍文)이 있는데 이는 부도 중대석에 나타나는 운룡문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다. 상대 부분에는 앙련(仰蓮)이 장식되고,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괴임대가 새겨져 있다. 이 부도의 건립연대는 신라 정강왕(定康王) 원년(886)으로 추정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 석등(禪林院址 石燈) 보물 제445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이 석등은 4매석으로 된 네모난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를 모두 갖추어 건립된 8각의 신라시대 기본형 석등이다. 8각의 하대 옆면에는 각각 안상이 음각되고, 그 위 복련(伏蓮)에는 귀꽃 치장이 뚜렷이 새겨졌으며, 복련 윗면에 구름무늬와 1단의 높은 괴임을 새겨냈다. 간석(竿石)은 중간 부분에 타원형 꽃잎이 8곳에 배치된 고복형(鼓腹形)으로서 그 윗 부분에는 대칭적인 연화판(蓮花瓣)을 새겼다. 간석 상.하단에는 권운문 (卷雲文)이 있으며 상대석에는 겹잎앙련(仰蓮)이 있다. 화사석(火舍石)에는 4개의 장방형 화창(火窓)이 있는 외에 각면의 아래쪽에 횡(橫)으로 장방형의 액을 마련하엿다. 그 액 안에 각각 1구씩의 안상(眼象)을 새겨넣었다. 옥개석은 전각(轉角)에 귀꽂이 있고 낙수면(落水面)은 물매(傾斜度)가 급하지 않으며, 8각의 합각(合閣)은 사선(斜線)이 뚜렷하고, 그 정상부에 복련(伏蓮)이 새겨져 있다. 상륜부에는 작은 원형의 연화대석(蓮花臺石)이 있을 뿐이다. 이 석등은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와 마찬가지로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홍각선사비는 본래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의 선림원(또는 사림사)터에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비신이 깨져 현재 일부만이 전한다. 비신의 오른쪽 상단 부분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비편 조각 일부를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탁본을 가지고 확인할 수 있다. 홍각선사(弘覺禪師)는 봉림산문(鳳林山門) 소속으로 속성이 김씨이다. 선사는 810년(헌덕왕 2) 무렵 경주에서 출생하여 17세에 출가하고, 해인사와 영암사에서 수학하다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법을 배웠다. 귀국하여 왕실과 접촉하여 왕궁에서 10일 동안 설법하기도 하였으며, 880년(헌강왕 6)에 입적하였다. 비는 제자들의 건의에 따라 886년(정강왕 1) 10월에 선림원(禪林院)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수병부랑중(守兵部郞中) 김원(金薳)이 지었다. 김원(金薳)은 이전에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의 글씨를 쓴 바 있어 문장과 글씨에 능통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신라 하대 선종사상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글씨체는 行書로서 왕희지체(王羲之體)를 집자(集字)했다. 찬자(撰字)는 김원(金薳), 서자(書字)는 운철(雲徹), 찬액(篆額)은 최경(崔瓊), 혜강(慧江)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龜趺 螭首) 보물 제446호, 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 이 탑비는 홍각선사, 811~815-880)의 부도(浮屠,浮圖)탑비로서 신라 정강왕 원년 (定康王 元年) 886년에 세워졌다. 17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파손되어 비신(碑身) 잔편(殘片) 일부는 국립춘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귀부(龜趺)는 용의 머리가 직립한 모습이고,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가 둘러져 있다. 이수(螭首)에는 "홍각선사비명(弘覺禪師碑銘)"이라는 전액(篆額)을 양각(陽刻)으로 새기고 주위에는 운용문(雲龍文)으로 장식하여 신라 하대 석비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인다. 비신(碑身)은 가로 94.0cm, 세로 173.5cm의 크기로 재현하였다. 대략 1,340여자 내외의 글자가 적혀 있었을 것으로 고증되며 총 710자의 글자를 복원하였다. 비문(碑文)의 내용은 비명(碑銘), 비문 찬술(撰述) 관련자, 홍각선사의 생애, 선사 사후(死後) 비석건립 경위, 관련인물, 건비(建碑) 시기 등이 기록되어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이수(螭首) 전액(篆額)에 새겨진 글-홍각선사비명(弘覺禪師碑銘)-을 陽刻으로 새기고 그 주위에 운용문(雲龍文)으로 장식하여 신라 하대 석비의 특징이 나타난다. 전액의 찬자는 최경(崔瓊),서자와 각자는 분황사(芬皇寺)의 스님이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을 쓰고 새긴 혜강(慧江)스님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석등 북쪽에서도 정면 3칸,측면 2칸의 건물지도 발굴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건물지 주춧돌과 석축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홍각선사비,석등,석탑의 모습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가람 외곽 석축 三. 염거화상 탑(廉居和尙 塔, 국보 104호)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四.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가지산 보림사의 일주문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寶林寺 木造四天王像) 보물 제1251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사천왕이란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 왕들로 불법의 수호신이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여러 개의 나무를 잇대어 상을 만들었다. 부분적으로는 표면에 천을 부치고 회를 칠한 뒤 채색을 하였다. 동방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은 분노한 얼굴표정으로 칼의 손잡이와 칼끝을, 서방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은 근엄한 얼굴표정을 하고 양손에는 칼과 짧은 창을, 남방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은 미소를 띠고 있으며 비파를, 북방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오른손에 깃발(幢)을 들고있다. 사천왕상은 중종 10년(1515)에 처음 만들어졌고, 1666년과 1742년에 고친바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조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조각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본보기가 되는 귀중한 유물이다. 보림사 사천왕상은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사천왕상(寶林寺木造四天王像)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각 부의 조각이 매우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기본이 되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그래서 정형화 되어있는 다른 사찰의 사천왕상들과는 형태가 약간 틀리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은 호화롭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얼굴은 분노한 표정을 하였으며, 복장은 갑옷과 천의(天衣)를 입고 있다. 건장한 체구에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고 왼손은 칼끝을 받쳐들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은 높직한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으로 선비형의 눈썹과 긴 턱수염에서 부드러운 문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비파를 들고 있으며, 발 아래에는 힘에 겨운 듯 고통스러워 하는 악귀가 왼쪽다리를 받쳐들고 있다. 남방 증장천왕은 굳게 다문 입과 함께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무엇인가 쥐고있는 듯한 자세만을 취하고 있다. 당당해 보이는 신체는 수호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지르는 듯한 위엄있는 모습이다. 오른손에는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모습인데 보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대부분이 중국식 갑옷에 각기 다른 상징물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는 악귀를 밟는 형태상의 특징을 갖는다. 또한 무장한 분노상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천의자락을 휘날리며 보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귓바퀴를 돌아 어깨 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자비로운 보살상의 모습이 추가되고 있다.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앞서 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조각사적 비중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대적광전과 삼층석탑과 석등(大寂光殿 三層石塔 石燈)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寶林寺 三層石塔 石燈) 국보 제 44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45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불교의 상징적인 예배의 대상이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앞에 남북으로 나란히 2기의 삼층석탑이 있으며, 그 사이에 석등 1기가 있다. 두 탑은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하고 있다. 이 탑은 19233년에 사리장치를 훔치려다 넘어졌던 것을 그 다음해에 복원할 때 1층 탑신부 사리구멍에서 사리와 함께 조성내용이 기록된 탑지가 나와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높이는 남 탑이 5.4m, 북 탑이 5.9m이다.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 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석등은 지대석을 제외한 기단, 몸체돌, 지붕돌 모두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석등은 각 부의 비례가 알맞아 조화도 빼어날 뿐 아니라 손상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높이는 3.12m이다 탑과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고 또한 모두 완전하게 남아 있어 석탑, 석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국보 제 117호 철제비로자나불상 보림사에는 현재 국보 2점, 보물 8점, 전남도 문화재 15점이 보관되어있다. 대적광전에는 국보 제 117호 철제비로자나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신라하대의 철조불상의 대표작이라고 합니다.비로자나불은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는 것을 형상화한 불상이다.불교의 진리 자체를 상징하며 법신불(法身佛)이라고도 한다. 이 불상은 신라불의 조형을 따르고 있으나, 지나치게 작아진 손과 상체에 비해 무릎이 너무 커 상하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법의(法衣)는 비교적 두터우며, 느슨하면서도 얇게 빚은 듯한 옷주름 등에서 9세기 후반의 불상양식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왼쪽 팔 뒷면에-8행 60자- [대중2년(大中二年)] 이라는 글이 있어 불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신라 헌안왕 2년(858)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총 높이는 2.51m이다.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시대에 걸쳐 철조불상이 유행하였는데, 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신라하대의 철조불상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또한 그 조성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조상기(毘盧舍那佛 造像記) 當成佛時, 釋迦如來入滅後 一千八百八年耳.(당성불시, 석가여래입멸후 일천팔백팔년이) - 불상을 조성한 때는 석가여래 입멸후 1808년이다 此時, 情王卽位 第三年也.(차시, 정왕즉위 제삼년야.)- 이때는 정왕 즉위 3년이다. 大中十二年戊寅 七月十七日,(대중십이년무인 칠월십칠일,) - 대중 2년(헌안왕 2, 858) 무인 7월 17일 武州長沙副官 金邃宗 聞奏, 情王口八月卄二日, 勅下令, 口躬作不覺勞인困也. (무주장사부관 김수종 문주, 정왕口팔월입이일, 칙하령, 口궁작불각로곤야.) - 무주 장사현 부관 김수종이 진주하여, 정왕은 8월 22일 칙령을 내렸는데 口 몸소 지으시고도 피곤함을 알지 못하셨다.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권,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참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拜禮石의 모습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열심히 탑의 세부명칭을 위로부터 보주,보개,보륜,앙화 복발,노반,옥개석,옥개받침, 탑신,기단부등, 하대및 상대갑석,양끝에 우주,가운데 탱주,면석으로 기단부와 탑신부,상륜부로 나누어 지는 석탑을 서로 확인하면서 답사의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대웅보전의 柱聯(기둥에 새긴 글씨)과 多包式 건축양식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 보물 제157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10-2 부도는 스님들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이다. 이 부도는 기단, 몸체돌, 지붕돌이 모두 8각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으로 8각의 지대석에는 얕은 괴임이 있고, 그 위에 다시 8각 하대석이 2중으로 놓여있다. 8면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입체적으로 새겨져있다. 중대석은 8각인데 각 면에는 네모꼴에 가까운 상태에 안상(眼象)을 2중으로 조각하였고, 상대석은 8엽의 연꽃잎을 새겼다. 각 면에는 문짝모양과 열쇠모양, 두 개의 고리 모양을 새겼으며, 좌우에는 신장상(神將像)을 새겼다. 지붕돌은 기왓골이 새겨져 있는데 후대에 보수하면서 새긴 것으로 보인다. 부도의 꼭대기에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가 차례로 놓여 있다. 부도의 총 높이는 3.7m이다. 신라말 고승인 보조선사가 헌강왕憲康王 6년(880)에 입적한 후 4년 뒤인 884년에 탑비가 건립되었으므로 이 창성탑(부도)이 만들어진 시기도 이 무렵으로 추정한다. * 보림사 연혁(沿革) 보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이 창건하여 선종(禪宗)의 도입과 동시에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곳이기도 하다.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3보림이라 일컬어졌다. 보림사 창건설화『신라의 명승 원표대덕이 인도 보림사, 중국 보림사를 거쳐 참선중 한반도에 서기가 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 전국의 산세를 살피며 절 지을 곳을 찾았다. 어느날 유치면 가지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데 선녀가 나타나더니 자기가 살고 있는 못에 용 아홉마리가 판을 치고 있으므로 살기 힘들다고 호소해왔다. 원표대덕이 부적을 못에 던졌더니 다른 용은 다 나가고 유독 백룡만이 끈질기게 버텼다. 원표대덕이 더욱 열심히 주문을 외었더니 마침내 백룡도 못에서 나와 남쪽으로 가다가 꼬리를 쳐서 산기슭을 잘라놓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 용꼬리에 맞아 파인 자리가 용소(용문소)가 되었으며 원래의 못자리를 메워 절을 지었다. 보림사 주위에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청룡리, 청룡이 피를 흘리며 넘어간 피재, 용두산, 용문리, 용소, 녹룡리등인데 창건설화에서 토속신앙과 불교의 대립이 있었음을 유추하는 사람도 있다. 보림사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로서 고려말까지 선맥이 이어져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도 가지산문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원응국사와 공민왕의 왕사인 태고 보우국사가 주석하여 선종을 진작시킨 큰 절이었고, 그후 여러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며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보림사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외호문과 사천왕문을 빼고 20여동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950년 가을 전남 지역의 공산군 유격대가 보림사에서 한 겨울을 났는데 다음해 봄 군경토벌대는 '공비들의 본거지'라고 보림사에 불을 질러 버렸다고 한다. 전쟁 이후 조금씩 복원되어 현재는 건물로 외호문과 사천왕문, 1998년에 복원된 대적광전, 대웅전, 새로 지은방각과 요사조사전, 삼성 각, 명부전, 주지실, 암자 등이 절터를 채우고 있으며, 담장도 말끔히 둘렀다.보림사에서 처음보게 되는 일주문은 화려하고 장중한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는다. 사천왕문은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이며, 보물 제1254인 사천왕상은 중종34년(1539년)에 처음 조성되어 정조 때(1780년)중수된 것으로 우리나라 목각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크며 오래된 것이다. 보통마귀를 발로 짓밟고 있는 형상이지만 이곳의 사천왕상은 눈이 동그란 마귀가 동방지국 천왕의 발을 들어 받들고 있다. 눈동자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갈색유리로 만들어 붙여 특이하다. 보림사마당 한가운데는 늘 일정한 수량을 유지하는 약수가 있다. 한국자연 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물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普照선사탑비- 설립연대 憲康王10년(884),撰字는 김영(金穎),書字는 金薳,金彦卿 刻字는 賢暢. 보조선사 體澄(804~880)은 웅진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하여 선종에 입문하여 道義선사의 제자인 廉居문하에서 법인을 받고 837~840년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귀국후 迦智山門을 개창하였고 憲安王및 왕실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 비문의 일부 新羅國武州迦智山寶林寺諡普照禪師靈塔碑銘幷序 朝請郞守定邊府司馬賜緋魚袋臣金穎奉 敎撰 儒林郎守武州昆湄縣令金薳奉敎 書 ~본문~ 聞夫 禪境玄寂, 正覺希夷, 難測難知, 如空如海<중략> (듣건대 무릇 禪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올바른 깨달음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다)<중략> 中和四年歲次甲辰季秋九月戊午朔旬有九日丙子建 從頭第七行禪字已下弟子前兵部侍郞入朝使殿中大監賜紫金魚袋金彦卿書興輪寺 僧釋賢暢刻字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권,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참조)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碑) 보물 제158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산 10-2 비(碑)는 어떤 일의 자취를 후세에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나무. 돌. 쇠붙이 따위에 글을 새겨 놓은 것이다. 이 비은 보조선사 비로 통일신라 헌강왕 10년(884)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문은 선의 경지와 보조국사의 행적, 창건 연기설화 등을 적고 있다. 김영(金穎)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7행의 선(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체로,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체로 썼다.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은 헌강왕 6년(880)에 77세로 입적하였다. 그 후 헌강왕 9년(883)에 왕이 시호를 보조(普照), 탑의 이름을 창성(彰聖)이라 내렸다. 이 탑비의 모습을 보면 거북받침대좌는 용의 머리처럼 표현하였고, 목은 꼿꼿하게 세웠으며, 등에는 6각의 거북등모양으로 장식하였다. 비의 받침 주위로 구름무늬와 당초무늬를 새겼다. 지붕덮개돌에도 연꽃잎무늬와 구름무늬를 가는 선으로 새겼는데, 형식적이다. 그러나 각 부분이 완전히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 또한 커 당시 석비(石碑)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46m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조국사 창성비(彰聖碑). 비문은 전형적으로 귀부(龜趺)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얹었다. 부리부리한 두 눈과 귀갑문(龜甲文) 비좌(碑座)의 운문(雲文)이 선명하게 보인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장흥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장흥(長興)이란 지명자체가 고려 17대 임금 인종은 이자겸의 난으로 두 분의 이자겸의 딸을 폐비시키고 새로운 왕비로 장흥출신 공예(恭睿)태후 任氏를 맞이하여 의종,명종,신종을 낳았기 때문에 왕비의 고향이 길이 번창하라는 뜻으로 내려진 지명이 장흥이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에서 관동별곡과 필적하는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은 백광홍(白光弘)과 후기 실학과 지리학의 대가인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도 장흥출신이었다. 구산선문을 찾아서 제1편 가지산문 보림사를 마치며 이어서 2편으로 전북 남원 실상산문 실상사, 전남 곡성 동리산문 태안사로 이어지겠습니다. 글과 자료는 이일야님의 저서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와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을 참조하였으며 사진은 본인이 답사시에 찍은 자료입니다. 사진과 글 권진순 2024년 8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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