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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Re: Re: Re: 구산선문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6|조회수28 목록 댓글 0

실상사(實相寺) - 구산선문九山禪門 최초의 가람

세석평전추천 0조회 22113.01.01 19:57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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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만수천 건너 지리산연봉






절 입구의 옛 징검다리에 대한 회상
요즈음 우리는 선우도량이라는 단체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서의현 전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해종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그 역할은 돋보였고 더욱이 개혁회의를 통해 자체정화를 도모하여 호법투쟁이나 개혁회의의 정화 때 튼실한 이론을 제시하며 종단 개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그 단체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 선우도량의 산실이 바로 이 곳 실상사인데, 이는 선우도량의 중심적인 역할을 한 스님들이 실상사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반가운 일은 화엄학림을 이곳 실상사에서 얼마전에 개설하였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이름이 드높았던 선문 실상사에 학림이 보태지고 머지 않아 율원만 만들어지면 실상사는 선원, 학림, 율원을 모두 갖춘 총림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그 터전도 총림이 되기에 넉넉한 형국이다. 비록 주변 논밭들을 매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명지가람의 넓은 터전과 만수천에 흐르는 풍부한 수량, 팔팔 고속도로가 지척인 교통의 편리함, 이 모두가 현대적 의미에서의 총림 역할을 다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건들로서 실상사는 이 모두가 충족된 보기 드문절이다.
우리는 실상사의 초입에 대한 색다른 감회를 하나 간직하고 있다. 해탈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생기기 전의 일로 개울물에
놓인 아기자기한 징검다리에 대한 회상이 그것이다.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 고리봉 주변의 물이 만수천에 모여들면서 실상
사의 왼쪽으로 제법 너른 하천올 이루었고 함양쪽에서는 이 하천을 넘어가야 실상사에 다다를 수 있다 해서 그 운치가 그윽
한 돌 징검다리를 놓았던 것이다. 다행히 그 광경이 영상으로 남아 신영훈 씨가 펴낸 「절로가는 마음」에 실렸으니 한번 찾아 보기 바란다. 하천의 돌들을 모아 만든 ‘도레미파솔라시도’ 와 같은 징검다리를 소란스레 건널라치면, ‘고얀놈들 하며 이맛살을 찌뿌리고눈을 부라리는 사천왕상 격의 돌장승 두 분이 길가 양측에서 우리의 경망을 나무란다.

실상사는 행정 구역으로는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속하며 지리산 반야봉 북쪽 뱀사골짜기 끝부분인 너른 대지에 자리한다. 실상사 오른쪽으로 이 킬로미터쯤에는 전라북도가 끝나고 경상남도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실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통일신라 말에는 웅장한 규모의 건물들이 수십 동이나 즐비하게 자리잡았던 큰 가람이었으나 조선 초 세조 연간에 폐사되고, 그 뒤 수차례 중창을 거치다가 고종 연간에는 방화를 당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국보와 보물급 문화 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증각 홍척스님에 의해 우리나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먼저 문을 연 실상산문 실상사 이 절집은 828년(홍덕왕 3)에 실상산파의 개산조인 증각 홍척스님이 통일신라 말에 형성된 선문구산 가운데 하나인 실상산문을 개산하면서 창건되었다고 일려졌다. 보통 사찰들의 창건설화가 실증 유물에 가서는 허무맹랑함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실상사는 홍척 스님의 탑비와 부도탑이 절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초창을 고증하는 일이 어려운 편은 아니다. 아쉬운 것은 홍척스님의 탑비에 행적을 기록한 비신이 없어져서 홍척스님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행히 그의 제자 수철스님의 탑비와 문경 봉암사 지증 대사비에 새겨진 내용을 참고로 실상사의 초창 상황과 홍척스님에 대해서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다.


지증 대사비의 내용 가운데 도의 선사가 당나라에서 선법을 먼저 배워 왔지만 그 때는 시운이 덜 익어 세상에 전파하지 못하였고 홍척 국사가 돌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문파를 이루었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실상사가 구산선문 가운데 최초로 문을 연 산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도의스님과 쌍벽을 이루었다 해서 북산 도의, 남악 홍척이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잘 알다시피 통일신라는 8세기 사분의 삼 분기부터 이른바 하대 신라라는 새로운 사회로 들어선다. 무소불위의 절대왕권이 쇠퇴하면서 귀족 연합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지방 분권화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사상도 교종보다 혁신적인 선종이 득세하게 되는 일련의 변화과정을 보여 준다. 교종은 왕실과 귀족이 결탁하여 타락할 때로 타락하였고,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새로운 개혁운동이 바로 구산선문이다.

통일신라의 불교가 백성의 고통은 외면한 채 왕족과 귀족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할 때 중국 당나라의 서당 지장스님에게 남종선을 배워온 여러 선승들에 의해 우리나라 여기저기에는 선문을 열게 되는데 이를 보통 구산선문이라 부른다. 사람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었다는 운명론적 인식의 교종 불교는 종래 귀족과 왕실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는 정권 유지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선종의 사상은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을 제공하였다.

통일신라 9세기 초에 중국 남종선이 전래되는 당시 신라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쩌면 요즘의 불교계와 그리 닮았는지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가운데 도선 국사께서 이르신 길지 외에 사찰을 짓지 못하게 한 것은 통일신라 하대 당시의 무분별한 원찰 중창 불사의 폐해가 극심하자 내놓은 극약 처방이라는 사실을 지금 사판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들이 정녕 잊으셨습니까?

선종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에서 설법하는 도중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만이 빙그레 웃으며 그 뜻을 알아 이심전심以心傳心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하며 달마 대사가 갈대 잎을 타고 동쪽으로 와 중국에 전한뒤 육조 혜능과 신수 등에 의해 널리 유포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 선종이 전래된 것은 남악회양의 법을 이은 마조 도일의 법손 서당 지장의 남종선으로 9세기 초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 초에 이르는 사이에 크게 산문을 이루고 번성하게 된다. 초기 선종은 교종 계통의 사찰들에 경주 지역에 밀집한 까닭에 경주 지역에는 산문을 열지 못하고 경주와 멀리 떨어진 전국 여러 지역 - 전라,경상, 충청, 경기, 강원 - 의 유력한 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아홉 개의 선문을 개창하게 된다. 이를 보통 구산선문이라 부른다. 선문의 지역과 산문 이름, 개창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장홍 보림사의 가지산문(도의), 남원 실상사의 실상산문(홍척), 곡성 대안사(태안사)의 동리산문(혜철), 강릉굴산사의 사굴산문(범일), 창원 봉림사의 봉림산문(현욱), 영월 홍법사의 사자산문(도윤),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지증), 보령 성주사의 성주산문(무염), 해주 광조사의 수미산문(이엄) 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구산선문 이외에 도의나 홍척과 비슷한 시기에 하동 쌍계사에 산문을 연 혜소스님처럼 초전선初傳輝을 포교하는 데 앞장선 분들이 더러 있다.

실상산문의 개창조 홍척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홍덕대왕 원년인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 실상사 들녘에 선종 사찰을 세웠다. 회창연간에 벌어진 폐불의 극심한 법난을 피해 줄줄이 귀국한 여러 승려들-혜철(839) 염거체징(840), 범일(840), 무염(845)-좀 더 많게는 이십여 년 적게는 몇 년 앞서 귀국한 초전선승들-도의(821), 홍척(826), 혜소(830), 현욱(837)-가운데 도의스님보다 오 년 뒤늦게 두 번째로 귀국하였으나 산문은 도의보다 먼저 열었다.

홍척스님은 마조 도일의 법통을 이은 서당 지장에게 법을 배워온 정통 선사인데 본디 그는 화엄종 승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법통은 천여 명의 제자 기운데 수철과 편운에게 전해졌고 이들의 승탑은 모두 실상사 경내에 남아 있다. 또한 스님은 재가 제자들도 많이 두었는데 홍덕대왕(826~835)과 선태강자 충공 등을 재가 제자로 삼아 명실상부하게 선종이 신라 사회에 완전히 정착한다. 그의 제자 수철도 단의장옹주의 후원을 받는 것을 보면 실상산문은 반 왕권적인 구산선문의 태생적 한계를 뛰어 넘어 가장 왕실과 밀착된 듯한 인상을 준다. 중앙왕실 귀족들을 제자로 삼아 명실상부하게 선종이 신라 사회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홍척스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홍척의 제자는 수철과 편운스님이며 수철 화상은 의광, 흠광 등에게 법을 전했는데 신라 말 고려 초의 실상사는 이들 제자
들에 의하여 여러 번에 걸쳐 크게 번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실상사는 몇 번에 걸쳐 크게 중창하였으나 그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길이 없다. 조선 초인 세조14년 I468년 무렵에는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그만 폐사되고 말았다.
그 뒤 계속 폐허로 남아있던 실상사터에 1679년에 벽암스님에 의해 면모를 일신하여 새롭게 중창된 것으로 보여진다. 1690년 침허스님을 중심으로 삼백여 명의 승려들이 조정에 절의 중창을 상소하여 1700년에 서른여섯 동의 건물을 세웠다. 1821년에 의암스님이 중수하였으나 1883년에 산청 출신 양재묵과 민동혁이 사심을 가지고 폭약을 터뜨려 절에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때 이들이 절을 폭파하여 방화한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가르침을 바란다.

월송스님에 의해 6월부터 대적광전 자리에 세 칸의 보광전을 급히 조성하여 그 이듬해인 1884년 4월에 완정하였으며, 승방 한 동만 겨우 세웠을 뿐 화재를 면한 약사전, 명부전, 미타전과 함께 미약한 사세를 유지해 왔다. 지금까지 전하는 문화유산으로는 석탑 두 기, 석등 한 기, 철불 한 분, 부도 다섯 기, 탑비 두 기는 당대를 대표할 만한 걸작품들이다. 현재의 금당인 보광전은 세 칸의 작고 보잘 것 없는 건물로 폭도들의 폭약 방화로 불타버린 후 졸속으로 급조한 것이어서 쌍탑과 조화롭지 못하다.

이 무렵 우리가 특별히 기억할 만한 사실은 한국 불교사상사 연구의 큰 별 포광 김영수 선생이 우리 민족의 암울한 시기인
일제 시대에 이 곳 실상사를 지켜 오면서 나름대로 실상사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였다. 그 가운데 1928년 불교라는 잡지에
발표한 ‘편운탑과 후백제의 연호’ 는 단연 압권이다. 최근 혜광스님의 원력으로 실상사는 또 하나의 중창기에 들어선 듯
하나 이제 겨우 금당 일부만 발굴한 상태이고 이직도 실상산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미진한 상태에서 밀어부치기식 중창 불사는 자칫 문화유산의 훼손뿐 아니라 법손으로서의 도리는 아닐 듯싶다.

동국대 박물관의 금당 발굴 결과조사 내용
동국대 박물관에서 1992년쯤에 금당의 주변을 발굴하여 최근에 보고서를 펴낸 적이 있다. 보고서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ꡓ금당 발굴 때 출토된 연화문 막새기와. 당초문 막새기와 그리고 명문 막새기와의 분석을 통하여 신라 이후 자료가 거의 없는 고려 때의 실상사 변천을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조선 후기의 중창 연대가 사적기보다 분명히 앞선다는 점을밝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곧 1681년 금당명문이 출토되어 1690년 심허 조사가 중창했다는 김영수 선생설은 이제 분명히 수정되어야 한다. 연화문 수막새기와 가운데 선사연과 암막새기와에 ‘연항대淵桓代가 있어서 선사 연항대가 이 절을 중창한 스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암막새기와에 해무늬 개와들도 다량 출토되어 고려시대에도 여러번 중창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의 암박새기와에 ’강희이십년유월'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실상사가 조선초에 없어진 뒤 조선조 후반기에 새로 중창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초창때의 기와틀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전면 발굴이 이루어지면 발견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불상의 복장에는 효령대군의 원문과 사경 및 인경이 수백 권이나 있었고, 고려판 화엄경소 등 보기드문 서적
도 몇 가지 있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도난당하였고, 나머지는 건물과 함께 불타버렸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또 하나
범종에 대한 재치 있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제 말기에 홍척과 수철스님의 영정이 봉안된 보광전안에 걸린 범종은 1664년에 만든 것으로 종을 치는 자리에 일본의 지도를 그려 이것을 치며 일본이 망하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이에 소문이 나돌게 되어 급기야는 일본 순사가 잡아다가 사실 여부를 물으며 문초를 하자 오히려 일본이 흥하라는 기도였다고 둘러대어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증각 홍척스님과 그의 법제자 수철스님 부도와 탑비
홍척스님의 부도와 탑비는 극락전 오른쪽 옆과 정면에 놓여 있다. 부도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의 형태로 중석의 안상 안에 공양비천상과 보살좌상 한 분씩을, 팔각 탑신석은 앞뒤 면에 문비형과 그 좌우에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모양은 대체로 길죽하여 전체 형태는 고준하며 표면의 장엄 조각은 대체로 약한 편이다. 증각 대사의 입적 연대를 9세기 후
반으로 추정하고 있어 이 부도의 건립 연대도 그 때쯤으로보아도 무방할 것이다(높이 2.42미터, 보물 제38호). 탑비에는 비
신이 없는 채로 바로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ꡐ응료탑비癡蓼搭碑ꡑ라는 전액이 새겨져 있다. 귀부는 편마암으로 오랜 풍화작용에 의하여 세부의 조식을 판별하기는 어려운데. 당대에 일반화된 용두화한 귀두가 아니라 거북이 머리 그대로를 충실히 따랐으며 이수의 조형도 경주의 ꡐ태종무열왕릉비ꡑ 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탑비의 건립 연대는 부도와 동일한 9세기 후반쯤 일 것이다 (이수높이 1.03미터, 귀부 너비 1.61미터. 보물 제39호). 극락전 앞에 홍척스님의 탑비를 등에 지고 턱 고개를 들고 버티었던 거북이의 머리는 앞산 봉우리를 마주한다. 우연인지 애초부터 이러한 방향을 의도한 것인지는 좀더 살펴 볼일이다.

극락전의 왼쪽에는 실상사의 제2 조사인 수철 화상의 묘탑과 탑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신라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원당형을 기본으로 삼고 중대석 각 면에 안상을 음각하고 그 내면에 사리함 또는 주악상 등 여러가지 조각으로 화사함을 이루고 있다. 탑신은 팔각 면에 양 우주가 각출되고 앞뒤 면에는 문비형이 모각되었으며 그 좌우면에 사천왕상을 양각하였는데 이러한 문비와 사천왕상 등을 배치하는 것은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기점으로 보는 염거 화상탑에서부터 나타나는 양식이다. 이 비문에 의하여 부도의 건립 연대를 893년 신라 진성여왕 7년으로 추정한다(높이 2.42미터, 보물 제33호). 이 탑비의 비신은 청석이며, 이수와 대석은 화강암이다.


수철은 본디 심원사의 스님으로 뒤에 실상사의 홍척 문하로 들어가 실상사의 제2조가 되었다. 893년(진성여왕 7) 5월에 이른 일곱 살로 실상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본디는 심원사의 스님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유당신라국有康新羅國 양주심원사良州深源寺 고국사故園師 수철화상秀澈和尙 능가보월영탑비명병서 愣伽寶月靈塔碑銘幷書로 적었다. 비신의 마멸과 손상이 심해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추만호 씨는 최치원이 짓고 김영이 새긴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글씨는 자경 이 센티미터 안팎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따랐다. 비의 건립 연대 또한 명확하지 않으나 비문 가운데 ꡐ증태사 경문대왕贈太師景文大王ꡑ 및 ꡐ증태전헌강대왕贈太傳獻康大王ꡑ이라는 구절이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동문선」 권33의 최치원이 지은 「사은표」 및 「동사강목」 효공왕 1년 7월조에 이와 같이 앞의 왕들을 추증한 기록이 있으므로, 이 탑비의 건립 연대는 효 공 왕 대(897~912)로 추정된다. 비음에는 일찍이 비가 쓰러져 조선 숙종 40년(1714)에 중건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가 없고 대신 안상 여섯 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다. 그리고 비좌에는 큼직한 복련을 둘렀다. 이수에는 구름 속에 반룡 두 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중앙에는 ꡐ능가보월탑비ꡑ라는 전액이 음각되어 있다(전체 높이 2.9미터. 높이 1.68미터, 너비 1.12미터, 보물 제34호). 홍척스님과 수철스님의 부도, 탑비의 현재 위치가 본디 자리인지는 발굴하지 않은 상태여서 속단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제자리로 여겨진다.


/  이태호, 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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