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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0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화상

 초암 정만순 ・ 2026. 2. 2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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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화상

 

백파 긍선 진영(선운사)

백파 긍선(白坡亘璇) 화상은 조선 후기 1767년(영조 43) 4월 전북 고창(高敞) 무장현(茂長縣)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파(白坡), 본관은 전주(全州), 속성은 이씨(李氏)이며,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일곱째아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이다. 부친은 송계 이종환으 모친은 김해 김씨(金氏)였다.

긍선은 1778년(12세)에 고창 도솔산 선운사(禪雲寺)의 시헌(詩憲) 장로를 은사로 출가해, 연곡(蓮谷) 화상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790년(24세)에는 지리산 영원암(智異山 靈源庵)으로 가서, 화엄의 대가인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의 수계산림(受戒山林)에 참여해 서래종지(西來宗旨)를 배웠고, 스승이 입적하기 한 해 전에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긍선(亘璇)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후에 순창 영구산(靈龜山) 구암사(龜巖寺)에서 상언의 제자인 설봉 회정(雪峰懷淨)으로부터 편양파(鞭羊派)의 주류 법맥을 이었고, 백파당(白坡堂)이라는 당호(堂號)를 받았다. 이 때 암자 명칭을 따 실호(室號)를 구산(龜山)이라 했다.

1792년(26세)에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 개당해서 설법을 시작해 대중 100여 명에게 설법을 했고, 이후 20여 년 동안 학문을 닦고 연구에 전념했다.

1811년(45세)에 “불법의 진실한 뜻이 문자에 있지 않고 도를 깨닫는데 있건만 스스로 법에 어긋난 말만 늘어놓았다”고 참회하면서, 평안북도 초산(楚山)의 용문암(龍門庵)에 들어가 5년 동안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전개하고, 수행하다가 심지(心地)가 열려 오도(悟道)했다.

그는 율(律)과 화엄과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이었으며, 평소에 교유가 깊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라고 격찬한 바 있다.

그 후 다시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선법(禪法)을 현양해, 당시에 호남 선백(禪伯)이라고 불렸다. 이때 선의 지침서인 <선문수경(禪門手鏡)>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됐다.

<선문수경>은 조선후기 백파 긍선(白坡亘璇) 화상의 저서로, 송대 이후 선문 종사(禪門宗師)들의 염(拈)ㆍ송(頌)ㆍ거(擧)ㆍ평(評)과 찬(讚)ㆍ화(話)ㆍ창(唱)ㆍ화(和) 등을 판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시한 논법이 바르지 못한 해석으로 전체

를 그르쳤다고 보는 후학들이 출현했다.

대흥사(大興寺)의 의순(意恂-艸衣, 1786~1866)은 <사변만어(四辨漫語)>를 지어 비판했고, 추사(秋史) 역시 의순의 편을 들어 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이들이 <선문수경>을 비판하자, 백파의 제자 설두(雪竇)는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저술해 스승을 옹호해 초의와 추사를 통박하고 나섬으로써 조선후기에 선(禪) 논쟁이 활발했다.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禪雲寺) 입구에 있는 부도 밭에 서있는 <백파대사비>는 추사 김정희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의 제목을 ‘화엄 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 한다고 했다.

백파가 입적한 지 3년 후인 1855년, 추사 나이 70세 때 백파 문도들의 요청으로 비문을 직접 짓고 썼다. 추사는 친구인 초의 선사가 당대 최고의 선지식 백파 화상과 선문요지(禪門要旨)에 관해 왕복 토론을 벌이자, 추사 또한 제주에 귀양 가 있던 시절인 1853년 선(禪)에 관해 격렬한 왕복 토론을 벌인바 있다.

백파 화상은 1830년(64세)에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서 이후 20여 년 동안 선강법회를 열어 팔도에서 모여든 후학을 지도했고, 1840년부터는 화엄사의 선사 영당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행정진하며 좌선하다가 1852년(철종 3년) 4월에 입적했다. 세속 나이는 86세, 법랍은 75년이었다.

 

백파비(선운사)

긍선 화상이 입적한 후 구암사에 탑이 세워졌고, 선운사에 추사 김정희가 비문을 쓴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가 세워졌다.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은 설두 봉기(雪竇奉琪, 1801~1876)가 그의 제자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당시 불교를 폄하하던 유교사회에서 자존심 강한 선비 추사가 승려인 초의와 막역한 친구사이였다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거니와 당대 선지식과 그것도 선에 관해 격렬한 토론을 벌렸을 만큼 불문에 밝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파의 제자들이 추사에게 가서 비문을 써 달라했던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거니와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그동안 토론을 통해 상했을 감정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손수 좋은 내용의 비문을 짓고, 이를 그 빼어난 글씨로 써주었다니 그들의 차원 높은 교유와 기개야말로 정말로 범상치 않았다.

그리하여 이 ‘백파대사비’의 글씨는 추사의 글씨 중에서도 또 다른 명필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아마 우리나라 국보로 보존될 날도 머지않을 것으로 보인다.

고창 선운사 들어가는 입구 오른편 부도 밭에 서있는, 소위 「대기대용지비(大機大用之碑)」로 알려진 비석은 워낙 글씨도 빼어나고 유명해서 사람들의 탁본이 잦았다. 선운사 측에서는 비석의 훼손이 우려돼, 그 자리에 모조품을 만들어 세워두고, 진품은 박물관 안으로 들여놓았다.

추사 김정희가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화엄사에 왔으며, 화엄사가 연화장 세계 사찰이라는 것을 알고 기념으로 ‘華藏’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그 후 국운(國云) 주지 스님이 편액으로 만들어 보제루 안에 달았다.

법계는 휴정(休靜)의 4대 종파의 한 법손인 편양문파(鞭羊門派)이며, 화엄사상과 선을 겸수하는 가풍을 지닌 지안(志安)의 문손(門孫)에 속한다.

법맥은 청허휴정(淸虛休靜) ― 편양언기(鞭羊彦機) ― 풍담의심(楓潭義諶) ― 월담설제(月潭雪霽) ― 환성지안(喚醒志安) ― 호암체정(虎岩體淨) ― 설파상언(雪坡尙彦) ― 백파긍선으로 이어진다.

저서로는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선문수경(禪門手鏡)>, ,육조대사법보단경요해(六祖大師法寶壇經要解)>, <태고암가과석(太古庵歌科釋)>, <식지설(識智說)>, ,오종강요사기(五宗綱要私記)>, ,선문염송사기(禪門拈頌私記)>, <금강경팔해경(金剛經八解經)>, <선요기(禪要記)>, <작법귀감(作法龜鑑)> 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백파집(白坡集)>이 있다.

――――<선문수경(禪門手鏡)>으로 인한 논쟁――――

조선후기 불교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머물고 있던 백파 긍선(白坡亘璇) 화상이 지은 <선문수경>에 관한 논쟁이었다. 백파 긍선은 19세기에 초의 의순(草衣意恂)과 <선문수경>의 내용을 놓고 선 논쟁을 펼친 것이다.

이 논쟁은 선론(禪論)이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것이지만 견성성불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떤 차원이 있게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뜻하지 않게 논쟁이 일어났다.

이 논쟁은 백파 화상이 <선문수경>에서 선문의 오종(五宗)과 삼처전심(三處傳心)에 대해 언급하면서 고래(古來)의 견해와는 다른 주장을 많이 했다.

긍선 화상은 화엄학의 대가인 설파 상언(雪坡尙彦)에게 교학을 배워 설법을 시작했으며, 편양파(鞭羊派)의 법맥을 이었다. 40대 중반 이후 선 수행에 전념했고, 선 관련 주석서인 <사기(私記)>를 다수 남겼다.

긍선 화상은 <선문수경>에서 선을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의 3종으로 분류했다. 조사선과 여래선은 격외선(格外禪)으로, 의리선은 교육과 학문, 문자의 습기를 벗어나지 못한 낮은 단계로 규정했다.

그래서 <선무수경>이 나온 뒤 선의 진정한 뜻이 오도되고, 불타와 달마의 근본사상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초의 선사는 <사변만어>를 지어 <선문수경>의 선론을 반박한 것이다.

이러한 사건이 터지자 추사가 끼어들어, 초의 선사를 대신해서 대대적으로 백파 대사를 공격했다. 추사는 비록 유학자였으나 불문에서도 대선사와 선론을 놓고 다툴 정도로 경론에도 해박했다.

『삼종선이란 선(禪)의 심천(深淺)과 성격에 따라 선을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세 종류로 나눈 것을 말한다. 백파는 <선문수경>을 통해 조사선의 본령을 드러내기 위해, <경덕전등록>과 <선문염송> 등 선적(禪籍)에서 언급된 선어(禪語)들을 삼종선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했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조사선이고, 중간이 여래선 그리고 가장 열등한 것이 의리선이다. <선문수경(禪文手鏡)>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백파 화상이 삼종선을 주창하게 된 것은 ‘선문(禪文)’즉 선적(선어록)에 실린 선어에 대해 ‘수경(手鏡)’ 즉 손거울과 같이 누구나 그 내용과 심천을 알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삼종선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선문수경>에서 백파 화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종 문하에서 나온 말이나 문구를 찾아 궁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중국 송나라 승려 지소(智昭)가 지은 <인천안목(人天眼目)>과 (조선 숙종 때 지안(志安)의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고려 후기 백련사 제4세 사주인 진정국사 천책(眞靜國師天頙)의 <선문강요집(禪門綱要集)>을 반드시 제일 먼저 구해서 읽되, 무엇보다도 임제 3구의 의미와 행상을 궁구한다면 환하게 밝아져 의심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선문염송집>과 <경전전등록>과 ‘사집’ 등에 나오는 말과 문구를 읽을 때에도 이 3구를 사용해서 낱낱이 적용해 대조해보면 모든 말과 문구가 마음에 분명히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18세기 조선불교계는 임제―태고 법통설이 정착하면서 조선 중기의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문도들에게는 임제종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화엄에 대한 강학이 발달하면서 교학에 대한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경향은 성리학자들과의 영향과 경쟁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백파 화상은 바로 청허 법통의 계승자이자 화엄 강학의 최고봉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의 생애를 보면 화엄 교학을 먼저 공부하고 이어 선 수행에 전념했다. 선 수행과정 속에서 과거 명안종사들의 어록을 보면서 그 심천을 나누어 보고자 헸는데, 그 기준점은 임제의 3구였던 것이다. 즉 임제 1구는 조사선에, 2구는 여래선에 그리고 3구는 의리선에 배대하여 3종류의 선사상을 주창했던 것이다.

백파 화상의 삼종선이 임제종의 창시자인 임제 의현 선사의 3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임제를 계승한 측면이 있지만, 임제가 제시한 3구는 제자들을 제접(提接)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반면, 백파 화상의 경우 수행자들이 선어록을 통해 자신의 선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86세를 살았던 백파 화상은 49세 이후 열반에 들 때까지 37 년간을 선 수행에 몰두했다. 그런데 다른 선사들과 다르게 깨달았다거나 혹은 오도송을 지어 공표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국과 한국의 선가에서 전해지고 있던 선어록에 대한 깊은 천착을 통해 선가의 핵심적인 쟁점에 대한 자신의 안목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가 지은 <선문수경>에서는 <선문염송집>, <구자무 불성화간병론>, <염송설화>, <인천안목>, <사가어록>, <경덕전등록>, <선문강요집>, <선문오종강요> 등의 세세 한 내용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있다. 진정으로 선에 대한 깨달음의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 김방룡

이에 대해 초의 의순은 <선문사변만어>에서 근기의 우열에 따라 선을 차등화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했다. 또한 사람을 기준으로 조사선과 여래선, 법을 기준으로 격외선과 의리선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통적 통설이라고 반박했다. 이후 의순의 설을 지지한 우담 우행(優曇禹行, 1822∼1881)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 긍선의 후손으로 그를 옹호한 설두 유형(雪竇有炯)의 <선원소류> 등이 연이어 나오면서 선 논쟁이 확산됐다.

19세기 '선 논쟁'에서는 선과 교의 관계 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18세기 성행했던 화엄 교학을 배경으로 “조사선과 화엄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 불교사상의 흐름 속에서 나온 주제였다. 백파 긍선 화상은 계율과 화엄, 선 모두에 정통했던 승려로, 선의 우위와 임제종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초의 의순의 절친 추사 김정희가 초의 편을 들어 논쟁에 끼어들었다. 억불정책이 절정이던 시기, 추사는 열린 지식이라서 그런 차별의식 없이 승려들과 절친으로 사귀었고, 불설에도 해박해 감히 선 논쟁에 끼어들 정도였다.

백파와 추사 간에 격렬한 논쟁이었으나 결론을 내지도 못한 채 백파 화상이 열반에 들었다. 백파 화상이 열반에 들자 추사는 단숨에 달려가서 위문하고 백파 제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 유명한 백파비문을 직접 짓고 써서 그의 혼백을 위로했던 것이다.

[출처]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 화상|작성자 초암 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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