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빈낙도安貧樂道
전재완
거처함에 있어 가진 것이 없되 희노애락 그 인생을 삶(살아간다)에 있어 만족함(팔자의 족함)을 안다.
그 비릿한(인생은 투쟁의 연속) 삶의 족함(깨달음)을 알면 또한 거친 황무지 같은 삶이나 기꺼이 나의 현 위치를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겠느냐?
공자의 제자 중 안회가 그 안빈낙도의 삶을 일상사다반사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속세에 물든 아무개들에게 이 지극한 도란 간단하지만 실천궁행하기가
밀물과 썰물같이 중심 잡기가 쉽지가 않다.
단추를 채웠으면 오픈하는- 단추를 해체하는 철학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일상인에게 있어 안빈낙도라는 철학을 맡기기에
우리의 삶은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된 것과 같이 니체가 말한 대로 신은 죽었다.
그러니까 이 복잡 다양한 시대를 살며 유한자인 인간,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여기에 나는 왜 사느냐는 존재론적인 철학이 탄생한다.
그 물음을 탐구하는 공부의 방식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답은 하나다.
문제는 그 답이 정해진 답은 아니라는 것!
어떻게 살아가느냐? / 어떻게 죽느냐?
이 물음표에 영민한 그대들이라면 왜 햄릿을 읽어야 하는지?
알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안빈낙도란 인간삶의 가장 깊숙한 비상의 기술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
알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남(나다)과 감(가다)의 처리기술에 대한 물음도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있다.
댓 이즈 물음이다.
한국말로 앎, 즉 삶에 대한 갈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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