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1
소한을 지나 동장군이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일까?
그간 겨울답지 않은 이상기후로 정신과 몸이 쳐진 상태라
이런 상쾌함이 주는 추위는 일상의 긴장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아직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존재하는 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 같은 우인은 비로소 세월의 흘러감을 감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 년을 스물 하고도 네 절기로 구분한 것이 그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피드백을 하여 습득한 자생적 지식이다.
낮과 밤의 길이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학습으로 그들은 농사의 파종시기와
결실의 때를 알아맞춘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문명화되고 더 이상 자연의 법칙이 불필요하게 된 지금은
우리는 어떠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이 세상의 시간을 분석 해석해야 할까?
- 그게 참 난센스다-
단지 문명이 정신주의에서 물질주의로 자리를 옮긴 것, 그 하나의 문제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이 그리 간단하게
진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내일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손바닥의 인공지능으로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마음속 깊은 우물 안에 일렁이는 의심의 파동을 어찌 하리잇가?
그게 문명화된 그대들의 인간적인 고립이며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개별자로서의 고립 이른바,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소외라는 것이다.
분명 세상은 먹고살기 좋아진 시대인데, 그러니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배고픔에 허덕이던
시대를 살았는데 운이 좋게 살아남기는 하였지만 삶의 거울 앞에서
왠지 뒤가 긇히는 그 쓸쓸한 나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비단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의 문제라면 어쩔 수 없으나 미상불 누구나 그같은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필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여류작가가- 그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거니와 문학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역시 사지란 수필을 발표했다. 그 책을 읽어가며 무릎을 친 것이 대개의 인간의 감정은
엇비슷하다는 결론이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근거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즉, 아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때, 그 모습을 본 인간이라면 달려가 그 아이가 누구의 핏줄이건 무시하고 달려가
그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는 의로운 행위를 하리라는 믿음- 그게 인의라면- 그게 유쾌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과연, 그게 옳은가? 나는 생각한다. 그런 자식에게의 아가페적(헌신적) 사랑은 금수에게도 자주 목격되지 않던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본다.
소한을 지나 제법 겨울 다운 추위가 찾아왔다. 나는 이 자연의 섭리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무엇이 무엇이다라는 명제를 자연은 저리도 간단하게 증명해 준다.
복잡한 인간들의 삶이라는 알고리즘에서는 간단하게 밝혀지지 않는 습성을 저, 자연은
보란 듯 간단하게 하루의 일기로 펼쳐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대저 삶도 그러하여야 할 것이다.
- 그게 난센스라면 난센스지만- 인간도 역시 저 대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다시 던져진 그 세상으로 복귀할 문제 말이다.
여기에 삶과 죽음이라는 그 위대한 질문이 존재한다.
그 질문에 우문현답을 바라지는 않겠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