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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不作 一日不食

2026.1.11

작성자전재완|작성시간26.06.17|조회수14 목록 댓글 0

2026.1.11

 

소한을 지나 동장군이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일까?

그간 겨울답지 않은 이상기후로 정신과 몸이 쳐진 상태라

이런 상쾌함이 주는 추위는 일상의 긴장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아직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존재하는 바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 같은 우인은 비로소 세월의 흘러감을 감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일 년을 스물 하고도 네 절기로 구분한 것이 그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피드백을 하여 습득한 자생적 지식이다.

낮과 밤의 길이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학습으로 그들은 농사의 파종시기와

결실의 때를 알아맞춘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문명화되고 더 이상 자연의 법칙이 불필요하게 된 지금은 

우리는 어떠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이 세상의 시간을 분석 해석해야 할까?

- 그게 참 난센스다-

단지 문명이 정신주의에서 물질주의로 자리를 옮긴 것, 그 하나의 문제가 불러일으키는 파장이 그리 간단하게

진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내일 비가 올지 눈이 올지 손바닥의 인공지능으로 알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마음속 깊은 우물 안에 일렁이는 의심의 파동을 어찌 하리잇가?

그게 문명화된 그대들의 인간적인 고립이며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공동체를 잃어버린

개별자로서의 고립 이른바, 인간이기 때문에 겪는 소외라는 것이다.

분명 세상은 먹고살기 좋아진 시대인데, 그러니까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배고픔에 허덕이던

시대를 살았는데 운이 좋게 살아남기는 하였지만 삶의 거울 앞에서

왠지 뒤가 긇히는 그 쓸쓸한 나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비단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만의 문제라면 어쩔 수 없으나 미상불 누구나 그같은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언필칭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여류작가가- 그는 에세이스트이기도 하거니와 문학지의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역시 사지란 수필을 발표했다. 그 책을 읽어가며 무릎을 친 것이 대개의 인간의 감정은

엇비슷하다는 결론이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근거에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즉, 아이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때, 그 모습을 본 인간이라면 달려가 그 아이가 누구의 핏줄이건 무시하고 달려가

그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는 의로운 행위를 하리라는 믿음- 그게 인의라면- 그게 유쾌한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

과연, 그게 옳은가?  나는 생각한다. 그런 자식에게의 아가페적(헌신적) 사랑은 금수에게도 자주 목격되지 않던가?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본다.

소한을 지나 제법 겨울 다운 추위가 찾아왔다. 나는 이 자연의 섭리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무엇이 무엇이다라는 명제를 자연은 저리도 간단하게 증명해 준다.

복잡한 인간들의 삶이라는 알고리즘에서는 간단하게 밝혀지지 않는 습성을 저, 자연은

보란 듯 간단하게 하루의 일기로 펼쳐 보여주지 않는가 말이다.

대저 삶도 그러하여야 할 것이다.

- 그게 난센스라면 난센스지만- 인간도 역시 저 대자연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다시 던져진 그 세상으로 복귀할  문제 말이다.

여기에  삶과 죽음이라는 그 위대한 질문이 존재한다.

그 질문에 우문현답을 바라지는 않겠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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