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2주(다해.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4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전 세계 교회에 다음과 같이 권고하셨습니다.
저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하여, 현대 세계의 충실한 그리스도 제자들에게 보편적 성화 소명을 다시 한 번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 우리는 덕행의 영웅적 실천을 인정받은 남녀 가경자들,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의 삶을 사랑의 봉헌 예물로 주님과 형제자매에게 바친 이들, 시복 시성 안건이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들을 생각합니다. …
저는 모든 개별 교회가 저마다의 지역에서 성인과 복자와 가경자와 하느님의 종들을 같은 날에 공동 기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따라서 저는 개별 교회들이 다가오는 2025년 희년부터 시작하여 해마다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이 거룩한 이들을 기억하고 공경하도록 권고합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 주교회에서 올해부터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에 순교자들과 복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했습니다. 광주대교구에서는 우리 교구와 관련된 순교자 8분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본당 신부들에게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3분의 순교자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유문보 바오로(1813?-1872)는 전라도 나주 사람으로 옥구·장성 등지에서 살다가 장성에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고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습니다. 1871년 신미박해 때 유문보 바오로는 장성에서 한 동료의 밀고로 체포되어 나주로 압송되었습니다. 나주 진영의 감옥에서 유치성 안드레아 회장과 강영원 바오로와 다른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유문보 바오로와 유치성 안드레아, 강영원 바오로는 나주 영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때 나주 영장이 “진실로 천주 신앙을 믿느냐?”고 묻자, 그들은 함께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나주 영장이 “이후에도 천주 신앙을 믿겠느냐?”고 묻자, 그들은 다시 “만 번 죽더라도 천주 신앙을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나주 영장은 “너희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형벌을 가했습니다. 이때 유문보 바오로는 발등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살이 타고 진물이 흐를 정도가 되었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유문보 바오로는 혹독한 고초로 병이 들어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부르다가 1872년 3월 20일과 4월 16일 사이에 선종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 정도였습니다.
유치성 안드레아(1825-1872)는 경상도에서 태어났으며, 두 살 때에 일어난 1827년의 정해박해로 부모가 체포되어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충청도에서 자랐습니다. 어른이 되어 충청도를 떠나 전라도(현 전북 고창군)으로 이주해 살면서, 유치성 안드레아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71년 신미박해가 일어난 다음 해인 1872년 1월 2일에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포교가 그에게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하고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밀고하라.”고 하였으나, 그는 “절대로 배교할 수 없고,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도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주로 끌려간 유치성 안드레아는 나주 진영의 감옥에 갇혔고, 이곳에서 유문보 바오로와 강영원 바오로, 그리고 다른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이후 그들은 모두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유문보 바오로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먼저 병으로 옥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유치성 안드레아는 강영원 바오로와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갔습니다.
나주 영장은 그들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들은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해졌음에도 결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나주 영장은 그들에게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고, 유치성 안드레아는 백지사형을 받아 1872년 4월 16일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습니다.
참고로, 독약인 사약을 먹여 죽이는 사사형(賜死刑)이 있고, 백지사형(白紙死刑)에는, 머리를 자르는 참형(斬刑)인 교수형(絞首刑)이 있고, 살을 저미고 몸을 자르는 능지처사형(陵遲處死刑)이 있었습니다.
강영원 바오로(1822-1872)는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홍산에서 순교하자,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전라도 용담(전북 진안군 용담면)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정읍으로 이주하여 임군명 니콜라오의 집에서 품을 팔며 살면서,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나의 소망은 ‘박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입니다. 지존하고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수난을 받으셨으니, 나같이 비천한 사람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표양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신미박해(1871년)가 계속되던 1872년 1월 3일에 강영원 바오로는 교우들과 함께 니콜라오의 집에 모여 기도를 하던 중에 포교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천주교 서적들을 챙겨 피신할 준비를 하다가 니콜라오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나주로 압송될 때, 강영원 바오로는 신발도 없이 눈길을 걸어야만 하였다. 나주 진영의 감옥에 갇힌 강영원 바오로는 그곳에서 유치성 안드레아 회장과 유문보 바오로, 그리고 다른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감옥에서 유문보 바오로가 병이 들자, 강영원 바오로는 밤낮으로 그를 돌보면서 임종을 잘하도록 기도했습니다.
얼마 뒤 강영원 바오로는 유치성 안드레아와 함께 나주의 군사 훈련장이요 형장이었던 무학당으로 끌려갔습니다. 이곳에서 나주 영장은 그들에게 다시 형벌을 가하도록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들은 태장(笞杖) 30여 대를 맞아 정신이 혼미해졌음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나주 영장은 그들에게 백지사형(白紙死刑)을 내렸습니다. 강영원 바오로는 1872년 4월 16일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한국의 순교자들과 복자들이 성인품에 오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