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이 되자 한다 - 황규관
쏟아지는 폭우에 왈칵 무너진
저 흙더미와 바위들이
모든 길의 시작인지 모른다
그러지 않고 저리 무자비할 리 없다
노인들이 사는 집을 덮치고
들 가운데를 뚫은 지하차도로
아무 경고도 없이 강물이
아비규환으로 밀려드는 순간이
길이 탄생하는 비극인지 모른다
인간은 길을 만든 게 아니라
둑을 쌓아 물을 막고
벽을 만들어 길이라 우겼다
고개를 내밀어보는 달맞이꽃과
팔다리가 자꾸 자라는
칡넝쿨을 잘라내고
성장이라 진보라 불렀다
우리는 그것들을 못 이기는 척 따라 하고
모르는 척 즐기다가
드디어 길에게 배신당했다
거짓말만 무성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흙더미와 바위들이
이제 그만 돌아가자 한다
함께 산사태가 되자 한다
제방을 넘어가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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