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 박준
눈을 감고 앓다보면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떨고 있는 듯 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저는 한 번 잃었던
길의 걸음을 기억해서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 새이령 같은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역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손을 빗처럼말아 머리를 빗고
좁은 길을 나서면
어지러운 저녁들이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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